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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과 그 때

마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634 추천 수 0 2015.01.03 17: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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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3:24-3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789534 

jys.jpg 정용섭 목사

“그 날과 그 때”

막13:24-37, 대림절 첫째 주일, 2014년 11월30일

 

24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27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는 대략 1억5천만 킬로미터입니다. 일초에 30만 킬로미터인 빛의 속도로 9분가량 걸리는 거리입니다. 이 거리가 지구의 모든 생명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입니다. 지구보다 태양에 조금 더 가까이 있는 금성이나 조금 멀리 떨어진 화성에는 생명이 출현할 수 없습니다. 더 가까운 수성이나 더 먼 목성은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더 먼 거리의 천왕성이나 해왕성에는 태양빛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아주 적당한 거리에 놓여 있어서 태양 빛과 열을 적당하게 받아 우주에서 거의 유일하게 생명의 보고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주과학자들은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미 찾았다는 보도도 여러 번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행성에 도달하는 것 자체가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하고, 그런 행성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도 낮고, 더구나 인간처럼 지성적인 동물이 존재할 가능성은 더더욱 낮습니다.

 

이렇게 우리와 지구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그 태양이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대략 45억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걱정할 일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이유로 태양 에너지가 지금에 비해 50% 줄어든다면 말이 달라집니다. 지구 성층권에 두꺼운 가스가 차서 태양빛이 차단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지구는 온통 얼음으로 뒤덮이고, 인간을 비롯한 대다수의 생명체가 죽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모든 문명은 파멸되겠지요. 그런 순간이 천천히 올까요, 갑자기 올까요? 그 순간을 감당해야 할 우리 후손들은 어떤 심정일까요?

 

대파국

이런 우주의 대(大)파국을 2천 년 전에 이미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의 생각을 가리켜 묵시사상이라고 합니다. 그런 유대인들의 묵시사상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 흔적의 한 대목이 막 13장입니다. 막 13:24, 25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유대인들의 묵시사상은 기원전 587년에 발생했던 바벨론 포로 이후부터 크게 관심을 끌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바벨론 포로 사건은 이전에 생각했던 모든 체계와 가치들이 허물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 창조의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키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유대인들의 모든 전통이 허물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었고, 성전이 무너졌고, 왕족과 지식인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제국에게 속수무책으로, 무기력하게 당했습니다. 어떻게 항거할 능력도 없었고, 방법도 없었습니다. 완전한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악에 저항할 수도 없고, 악을 무너뜨릴 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길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주의 대(大)파국입니다. 모든 기존 질서의 해체입니다.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해가 어두워지면 이 세상에, 즉 인간사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보십시오. 바벨론 제국의 왕은 더 이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제국을 확장하기 위해서 작은 나라를 침략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벌이 더 이상 돈벌이에 나서지 않을 겁니다. 기성세대는 학생들을 입시지옥에 몰아넣지 않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과도하게 애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해가 어두워지면 세상의 모든 권력은 초라해집니다. 유대의 묵시사상가들은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인류 역사에 개입하실 것이라고 믿었고, 그런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 순간이 올 것이라고 유대민중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 때가 언제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주의 대파국이 일 년 안에, 또는 삼십년 안에 온다면 지금의 삶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다 때려치워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기다리면서 기존 질서를 모두 부정하고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쿰란 공동체입니다. 이들은 철저한 묵시사상에 근거해서 문명과 담을 쌓고 사해 근처에서 집단생활을 하면서 우주의 대파국과 더불어 오리라고 생각한 인자(人子)를 기다렸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묵시사상에 영향을 받았지만 쿰란 교도들과 달리 세상 문명을 등지지는 않았습니다. 쿰란교도들을 묵시사상의 극단주의자들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인들은 묵시사상의 온건주의자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현재의 삶을 떠나지 않으면서 우주의 대파국으로 묘사된 세상의 마지막을 기다렸습니다. 이런 미묘한 입장이 막 13:32절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여기서 ‘그 날과 그 때’는 세상 마지막을 가리킵니다. 그 때가 되면 세상 권력은 해체되고, 인자가 와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초기 기독교는 묵시사상이 말하는 인자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다. 인자에게 주어질 초월적인 권능이 예수님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인자처럼 예수님도 구름 타고 권능과 영광으로 오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곧 기독교의 재림 사상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리는 절기가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대림절입니다. 대림절 신앙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기존의 모든 질서가, 그것이 우주이든지 세상 문명과 정치이든지를 막론하고, 완전히 해체되고 새로운 하나님의 질서가 세워진다는 생각이자 믿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날과 그 때’가 비밀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밀이라는 말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유대교 안에도 있었고, 기독교 안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날과 그 때를 확실하게 말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전쟁이 마지막에 대한 징조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 전쟁은 그렇게 볼만합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되었다가 다시 재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파괴되었고, 제사장들도 모두 옷을 벗었습니다. 죽은 사람, 다친 사람도 많았고, 가족이 해체되고, 많은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세상 마지막의 징조와 같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유대전쟁에 큰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을 세상 종말의 징조로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안다고 말했습니다.

 

깨어 있으라!

지금 마가복음 공동체는 영적인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에 따른 대파국의 때를 기다리면서도 여전히 세상에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다는 두 가지 사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쿰란 교도들처럼 아예 세상을 등지고 종말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면 편합니다. 거꾸로 그런 종말에 대한 기대 없이 철저하게 세상에만 속해서 살아가는 것도 속 편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삶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삶에 완전히 의지하지도 않고, 또한 세상을 완전히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칫 우왕좌왕 할 수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이들을 향해서 충고합니다. “깨어 있으라.” 이 강력한 충고가 33, 35, 37절,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게 바로 초기 기독교인들의 가장 핵심적인 삶의 태도였습니다.

 

34-36절에는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게 무엇인지, 또는 깨어 있어야 할 이유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외국 나들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인들에게 각각 일을 맡겼고,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집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35,36절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집 주인이 돌아 올 시간이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혹은 이른 아침일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주인이 갑자기 돌아 와서 너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큰일이다.

 

하인들이 주인의 명령대로 깨어 있었을까요? 서로 의견이 분분했을 겁니다. 크게 보면 두 가지 의견이 대립됩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이럴 때 편히 지내보자고 생각하는 하인들이 있었겠지요. 그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습니다. 평소에 하인들의 삶이라는 게 피곤의 연속입니다. 주인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주인이 없을 때만이라도 좀 편하게 지내면 좋습니다. 이와 달리 주인이 없으니 오히려 더 열심히 맡은 일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 하인들도 있었겠지요. 마가복음 기자는 당연히 후자의 태도가 기독교인의 바른 모습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없으실 때, 즉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때니까 더 정신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깨어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졸거나 잠에 취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존다는 것은 일종의 죽음과 비슷한 상태입니다. 숨과 뇌 활동은 하지만 다른 것은 일체 멈춥니다. 졸 때는 대화를 하지도 못합니다. 잠꼬대는 대화가 아닙니다. 무엇을 먹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 존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돈 잘 벌어서 잘 먹고 잘 살면 살아있는 거로 봅니다. 그렇게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을 겁니다. 그걸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거기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런 삶을 마치 졸면서 숨을 쉬고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한 거로 봅니다. 실제로 살아 있다는 것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깨어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그 날과 그 때’에 영혼의 촉수를 집중하는, 즉 그 사실에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비유를 다시 보십시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로 인해서 하인들과 문지기들은 더 긴장해야 합니다. 반대로 그 날과 그 때에 대한 긴장감이 떨어지면 그들은 곧 졸게 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예수님이 곧 재림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그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점점 영적 긴장감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깨어 있으라는 말을 반복해서 했습니다. 그 날과 그 때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좀더 진지하게 질문해봅시다. ‘그 날과 그 때’를 기억하면서 산다는 거기에 집중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그리고 그게 가능할까요? 그게 우리의 실제 삶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교회 문제와 연결해서 생각해도 비슷한 질문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일상적인 데에 머물러 있습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가능하면 수요 모임에도 참석하고, 주일학교나 성가대, 그리고 몇몇 교회 봉사를 합니다. 목사의 입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고, 교인들의 친교를 원활하게 하며, 교회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늘 고민합니다. 이런 일상의 과부하에 파묻혀 사는 우리에게 그 날과 그 때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생명 완성의 순간

‘그 날과 그 때’는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순간을 기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순간에 모든 삶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전제합니다. 1) 생명의 완성을 기다린다는 것은 지금 우리의 생명이 미완이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런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뼈저리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물론 후자에 속합니다. 2)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생명의 완성이 우리의 노력으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통찰에 근거합니다. 우리의 노력에는 지금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것들이 포함됩니다. 그런 모든 노력들이 성취된다고 해서 우리의 생명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모든 사람이 완전히 건강한 상태로 1천년을 산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무엇이 달라질까요? 삶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철학자들의 용어를 빌리면 ‘피투적 존재’, 기독교 용어로 말하면 피조물인 우리의 숙명이 근본적인 한계에 놓여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날과 그 때’가 오면 우리와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그것을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궁극적인 미래는 비밀이자 신비입니다. 그것은 곧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자유에 속합니다. 본문은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고 ...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자유를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이 행복한 조건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그 날과 그 때에 일어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런 소박한 꿈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하나님의 자유에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대림절 신앙의 본질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만 우리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날과 그 때’가 여전히 막연하고 모호하게 들리는 분들을 위해서 좀더 실질적인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우주의 대파국이 개인적으로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해체되는 사건입니다. 그 날과 그 때가 옵니다. 그리고 곧 옵니다. 아니 이미 우리 앞에 당도해있습니다. 우리가 졸고 있어서 그걸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2014-2015년 교회력의 시작인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기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대림절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토대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유한 방식으로 이 세상을 완성하실 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크고 결정적인 기다림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자로서 마가복음 기자와 동일한 심정으로 그가 본문 마지막 구절인 37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한 명령을 다시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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