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살전5:16-24 |
---|---|
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791583 |
정용섭 목사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5:16-24, 대림절 셋째 주일, 2014년 12월14일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대략 2천 년 전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을 오늘 제2독서로 읽었습니다.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2천 년이라는 세월을 뚫고 들어가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직접 우리 앞에 나타나서 설명해주면 좋겠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가 쓴 편지 텍스트만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자로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하듯이 여러분을 2천 년 전 데살로니가 교회로 안내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비롯해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는 사태 앞에서 신앙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아버지가 아주 먼 나라로 돈 벌러 갔다가 곧 돌아오신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아버지는 오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실제로는 죽었는데 어머니가 거짓말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에게 물어봤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아버지를 계속 기다려야 할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남편이 돌아온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언제인지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방황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어머니의 마음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쓴 겁니다. 그 마음이 본문 2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위 구절은 예배 마지막 순서로 목사가 축도를 하듯이 초기 기독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축원문에 속합니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삶을 지켜주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의례적인 인사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여기에 초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일어나는 때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일단 그 때까지 버텨내는 게 중요합니다. 버텨내는 것도 억지로 되지는 않습니다. 인생살이가 노력한다고 해서 늘 원만하게 해결되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릴 때까지만 잘 버텨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원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무슨 뜻일까요? 강림은 대림이나 재림과 똑같은 낱말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대림, 또는 강림 사상은 기독교 신앙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게 없다면 기독교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가장 분명하게 요약해주는 사도신경도 그걸 명시적으로 밝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매주일 예배 때마다 이런 구절을 통해서 신앙고백을 드리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막연하거나 애매한 것으로 여깁니다. 원칙적으로만 말하면 강림은 생명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그런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재림, 또는 강림을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것은 실존적인 해석입니다. 예수님이 신약성서가 묘사하듯이 먼 훗날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고,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이 땅에서 실현되는 것이 바로 그의 재림이라고 말입니다. 나름으로 의식이 있고 지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이 최소한 이렇게 살아가기만 하더라도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은 덜 받을 겁니다.
그러나 재림신앙은 지금 여기서의 삶에 충실한 것과 일치되는 건 아닙니다. 그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옳은 것도 아닙니다. 재림신앙은 두 가지 점에서 이런 실존적인 신앙을 극복합니다. 첫째, 기독교인들의 삶은 현재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에 의존적입니다. 종말론적입니다. 개인 인생을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과거에 의해서 현재와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겁니다. 부분적으로는 인생이 그런 것처럼 보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비효과’라는 말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결과들이 수없이 일어납니다. 좀더 크게 봐서 지구에 왜 생명이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우리는 모릅니다. 물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릅니다. 기독교 신앙은 과거에 의해서 현재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둘째, 기독교 신앙은 구원이 밖에서 온다고 봅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성실하게 살고, 과학을 발전시키고,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으로 구원을, 즉 생명 완성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지구의 생태가 가능한 근거는 지구 밖에 있는 태양입니다. 지구 내부에서 생명 완성은 불가능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생명의 완성이 밖에서 주어질 순간을 기다리면서 살았고, 지금도 그런 기다림으로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언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날 때까지입니다. 그 때가 바로 세상과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교회력이 대림절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다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순례자로서의 삶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합니다. 생명이 완성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아무 의미도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기독교인의 삶은 초림과 재림, 또는 창조와 그 완성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을 복음서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라는 비유로 설명합니다. 신랑이 와서 결혼식을 올리는 그 순간까지 신부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 준비가 곧 이 세상에서의 삶입니다. 준비를 한다는 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자칫 하면 준비하는 것 자체에 매몰될 수 있습니다. 또는 신랑이 온다는 사실에만 치우쳐서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긴장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전 5:12절 이하에서 설명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이 포함된 대목으로만 보면 살전 5:16-22절입니다. 일곱 항목이 나오는데, 이를 크게 분류하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6-18절에 나오는 기쁨과 기도와 감사입니다. 그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시장바닥과 같은 이 세상에서 이걸 그대로 지키면서 살기는 불가능합니다. 어떤 이들은 출가해서 수도자가 되기도 합니다. 수도원에서 생활한다고 해도 이 말씀대로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그게 분명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잠시 기뻐할 수는 있지만 ‘항상’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잠시 기도할 수는 있지만 ‘쉬지 말고’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좋은 일이 벌어졌을 때는 감사할 수 있지만 ‘범사’에 감사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기독교인들의 고민입니다. 실제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일상의 문제로 일희일비하고 있는데 성경은 전혀 다른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기쁘지 않지만 기쁜 척이라도 해야 합니다. 위선입니다. 위선이 습관적으로 일어나면 율법주의자가 되고, 율법주의는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바울은 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불가능한 충고를 한 것일까요? 그는 세상물정 모르고 하나님만 생각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울도 이런 충고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모르면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이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편지는 성경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사이비 이단 교주들처럼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닦달하려는 게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조건에 따라서가 아니라 ‘항상’ 기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주의 재림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늘 상대적입니다. 어떤 조건이 붙습니다. 행복한 조건에 휘둘립니다. 거기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교회 문제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면 기쁘지만 어려움이 많으면 기뻐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비롯해서 이 세상의 일로는 결코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절대 생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만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영적 동기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과감하게 항상 기뻐하라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충고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충고하는 다른 하나는 19-22절에 나옵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읽겠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첫 단락인 기쁨과 기도와 감사는 일반적인 충고인 반면에 두 번째 단락은 초기 기독교의 특별한 종교현상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그 현상은 열광주의, 또는 은사주의입니다. 당시 일부 기독교인들은 열광적인 성령운동에 심취했습니다. 방언, 신유, 예언 등등입니다. 이런 열광적 은사운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구체적인 현상으로 경험해보려는 시도입니다. 일단 겉으로 특별한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기에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현상을 가능한 배격하려고 했습니다. 고전 12-14장에서 그것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은사운동을 매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저 잘난 척하지 말고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강조했습니다. 위 본문에서 바울은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단 성령과 예언을 부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신비로운 현상들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 공동체는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판단은 지성적인 활동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무조건적인 열광이 아니라 지성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바르트 식으로 표현하면 복음주의 신학의 특성은 intelectus fidei, 즉 신앙의 지성입니다. 지성주의는 아니지만 지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강림을 통해 완성될 절대 생명의 때를 기다리는 공동체이지만 좋은 것이 무엇이고, 악한 것이 무엇인지는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과 악령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분별이 쉽지 않습니다. 좋은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하기가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에게 충돌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김 아무개의 말을 들어보면 그의 말이 옳은 것 같고, 이 아무개의 말을 들어보면 그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유별나게 싸움이 많습니다. 누가 옳은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울도 사실은 다른 이들과 싸울 때가 제법 있었습니다. 욕을 먹기도 하고, 거꾸로 상대를 모욕적인 언사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서로 주장이 다르고, 나름으로 일리가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좋은 것과 악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하거나, 또는 교회법으로 다루면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긴 하지만, 완전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이건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순례자처럼 살아야 할 우리들이 짊어져야 할 숙명입니다. 진리를 우리가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다는 근본적인 인식의 한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합니다. 죽을 때까지 그 불안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이런 사실을 바울도 알고 있었습니다. 본인 자신도 불안할 때가 많았고, 데살로니가 교우들도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진리를 손에 쥔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들도 그렇고, 교황도 그렇고, 내로라하는 신학자들도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바로 이 대목에서 저는 바울이 본문 23절을 왜 기록했는지를 더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유일한 답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거기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 앞 단락에서 인용했던 구절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 지켜달라는 기도이자 축원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셔야만 우리는 흠 없이 보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란다는 표현을 너무 상투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표현은 초기 기독교로부터 시작해서 오늘 교회에 이르기 까지 모든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관행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상투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란다는 것은 사람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공짜로 무언가를 얻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행을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좋은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할 수도 없고, 항상 기뻐할 수도 없고, 범사에 감사할 수도 없다는 엄중한 사실에 대한 인정이자 고백입니다. 또한 그렇게 살겠다는 결단이자, 그렇게 살고 싶다는 희망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 은혜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저는 이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순례자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실제 일상에서 시행착오를 겪는 건 당연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에서도 혼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실망할 때도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미워질 때도 있을 겁니다. 이런 문제를 하루아침에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주의 강림 때까지 그분의 고유한 능력으로 우리를 흠 없게 보존해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