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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3:3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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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4.10.20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474 |
한 사람이 품은 비전의 힘
(마13:31-33)
< 작은 거인 요한 웨슬레 >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몸무게가 50Kg 밖에 안 되는
왜소한 체구를 가졌습니다. 그가 어떻게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사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의 가슴에 거룩한 작은 불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부친 가문은 5대가 목사였고 모친 가문도 5대가 목사였습니다. 자신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모교에서 교수로
지내기도 했습니다.
1732년 그는 신대륙 개척자들의 말발굽 아래 신음하던 인디언들을 위한 선교사로 자원해 조지아 주의 인디안
거주지를 찾았습니다. 당시 그에게는 불타는 사명감과 당당한 실력이 있었습니다. 또한 광대한 신대륙에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웅대한 비전과
샘솟는 열정과 헌신적인 수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교사역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최고의 실력자가 거룩한 꿈과 비전과 사명을 가지고도 실패한
것은 사람의 힘과 능력만 가지고는 일을 이룰 수 없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일이 이뤄진다는 뜻입니다.
1980년 대학 예비고사
전날, TV에서 이런 방송이 나왔습니다. “수험생들은 시험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드세요.” 그래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매일 새벽 한두 시쯤
잠자리에 들다가 9시쯤 잠자리에 드니 잠이 안 왔습니다. 몇 시간 몸을 뒤척여도 잠이 안 와서 짜증과 불안감은 커졌고 신경은 예민해 졌습니다.
시계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고 옆집의 라디오 음악소리도 크게 들려왔습니다.
새벽 두시에 어머님이 와서 같이 걱정해주었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계속 잠이 안 왔습니다. 온 몸이 쑤시고 머리와 허리는 아파왔습니다. 새벽 네 시 반에 집안 식구가 다
깨어났고 급기야 어머님은 옆집을 찾아가 라디오를 꺼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옆집에서는 라디오를 틀고 있지 않았습니다. 너무 신경이 예민해져서
환청현상까지 생겨 공연히 새벽에 옆집 사람들만 깨운 것입니다.
결국 그 라디오 소리를 피해 형님 두 분이 자던 방으로 옮겨 약간
뒤척이다가 새벽 5시 20분쯤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1시간도 자지 못하고 일어나 고사장으로 갔습니다. 머리는 띵했고 짜증이 섞인 마음으로 시험을
치면서 수학 시간에는 잠깐 졸기도 했습니다. 시험이 끝났을 때 다른 많은 수험생들은 해방감을 노래했지만 저는 정말
허탈했습니다.
사람의 성패는 순식간에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일 년을 준비해도 하룻밤의 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될 수
있습니다. 불면증이 한 번도 없었던 사람이 하필이면 그때 불면증에 시달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리 사람이 잘 준비해도 하나님이 그 길을
막으시면 그 준비는 허사가 됩니다. 하나님이 축복해주셔야 축복을 받고 길을 열어주셔야 길이 열립니다.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님의 은혜로 됩니다.
요한 웨슬레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자기 실력만 믿고 인디언 선교사역에 도전했다가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좌절한 상태에서 폐결핵까지 걸렸습니다. 결국 인생의 패잔병처럼 영국으로 귀향하는데 설상가상으로 귀향하던 배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배가 사람들의 괴성과 몸부림으로 아수라장이 될 때 그도 두려움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에 이끌려 선창으로 가니까 몇 명의 남녀 성도들이 손을 잡고 찬송하고 있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웨슬레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두렵지 않습니까?”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어떤 일을 만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선생님도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 말은 목사였던 그의 신앙양심을 무섭게 때렸습니다.
귀향 후 런던에서 투병하다가 그는 1738년
5월 24일 밤 9시 15분에 유명한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 회심’을 체험합니다. 그날 밤 요한 웨슬레는 우연히 모라비안
교도들의 작은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서 한 사람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란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그
말씀이 불방망이가 되어 그의 심령을 세차게 때리면서 그의 가슴에 불꽃 비전이 점화되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집에 난 불로 죽기
일보 직전에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타다 남은 불쏘시개’였는데 그때 그가 ‘타오르는 불방망이’가 되었습니다. 당시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자기 묘비에 쓸 기도문까지 미리 이렇게 남겼었습니다. “하나님! 이 무익한 종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타다 남은 웨슬레가 여기 누웠습니다.”
그리고 35세를 일기로 죽음을 기다리던 그가 목사였지만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었던 것에 대해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웨슬레는 회심하면서 병 고침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88세까지 말을 타고 지구를 10바퀴 이상 돈 거리인 25만 마일의 전도여행을 하면서 일생
42400번의 설교를 했고 200권이 넘는 책을 썼습니다. 웨슬레의 가슴에 타올랐던 작은 불꽃이 세계적인 큰불을 일으킨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작은 불꽃이 큰불을 일으킨 역사였습니다.
< 작은 것도 소중합니다 >
본문에 나오는 ‘겨자씨 한 알과
누룩’의 비유는 작은 비전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비유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큰 것’과 ‘높은 것’과 ‘많은 것’을 우상처럼 섬기지만
기독교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고 오늘보다 내일을 중시하기에 ‘작은 것’과 ‘낮은 것’과 ‘적은 것’도 아낍니다.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이 이뤄지고 ‘낮은 것’의 의미를 알 때 ‘높은 것’의 소중함도 체감되고 ‘적은 것’이 모여야 ‘많은 것’이 형성됩니다.
작은
씨라도 그 안에 생명이 있고 적합한 자기 밭에 심겨지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겨자씨 한 알을 통해 큰 겨자나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겉모습만 보지 말고 내면과 가능성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소외 받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작은 불꽃과 같았지만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큰 구원의 불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숫자적으로는 크고 성공적인 목회를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남긴 12명의 제자는 대부분 갈릴리 지방의
어촌에 살던 학력 없고 볼품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은 예수님을 배반했고 나머지 11명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다
도망갔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역사상 예수님만큼 많은 제자를 가진 분도 없습니다. 작은 불꽃이 큰불을 일으킨 것입니다. 꿈과 비전이 꼭 자기
당대에 성취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멀리 볼 줄 아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실 때 큰 믿음만 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과 같은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 성장과
성숙을 꿈꾸십시오 >
그처럼 작은 것도 소중하지만 그 말은 작은 것에 안주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 밭에 갖다
심은 작은 겨자씨가 자라면 풀보다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나뭇가지에 깃들인다고 했습니다(32절). 그 말은 천국 겨자씨는 많은 영혼의
안식처가 되도록 자라야 하고 큰 것도 나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작은 것을 아끼는 것’과 ‘작은 것에 안주하는 것’은 다릅니다. 큰 것에
대한 우상화도 경계해야 하지만 작은 것에 대한 합리화도 경계해야 합니다. 즉 외형주의에 빠져 살아도 안 되지만 자기안일에 빠져 살아도 안
됩니다.
본문 32절에서 작은 겨자씨가 큰 겨자나무가 되는 것은 ‘외적인 성장’을 뜻하고 본문 33절에서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넣어 전부를 부풀게 한 것은 ‘내적인 성숙’을 뜻합니다. 성장과 성숙을 전혀 추구하지도 않고 자기만족에 빠져 사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성장과 성숙은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성도도 최선을 다해 성장과 성숙을 추구해야
합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이 큰 교회로 몰려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를 잘 섬기는 축복은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덜
인정받고, 덜 재미있고, 덜 보답 받으면서 교회를 잘 섬기기 때문입니다. 큰 불길에서 뜨겁게 타오르기는 쉽지만 작은 불길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은 교회 다니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작은 것이 좋다면서 거기서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교회는 지상에 있는 천국 모형입니다. 교회는 생명체로서 성장과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외형적인 크기가
커지는 것만을 성장으로 여기는 외형주의는 버려야 합니다. 생명체는 성장해야 하지만 또한 생명체이기에 어느 시점이 되면 외적인 성장이 멈추기도
하고 죽기도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커지는 생명체는 없습니다. 때가 되어 죽고 그 생명체가 낳은 작은 씨앗으로 다음 세대의 생명체가 잘
자라는 것도 결국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성장에는 단기적인 성장과 외적인 성장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장기적인 성장과 내적인
성장입니다. 외형주의를 조심해야 합니다. 찰스 피니는 “종교의 부흥은 타락을 전제로 한다.”고 했습니다. 외형주의를 경계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장기적이고 내면적인 성장과 선한 영향력의 성장이 참된 성장이란 개본 개념 하에서 성장과 성숙을 추구해야 합니다.
결국 ‘겨자씨 한
알과 누룩’의 원리는 작은 것을 소중이 여기면서 동시에 큰 것을 추구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현재 모습이 부족해도 실망하지 말고
자신의 현실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찬란한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믿음이란 작은
시냇물을 보고 큰 바다가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초라한 도구를 가지고 일하셨습니다. 자신의 일과 현실이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거든 자신이 자신의 일과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면 됩니다.
작고 초라한 모습에 만족하지 말고 성장과 성숙을 꿈꾸십시오. 믿음과
비전이 커지고 인격이 성숙해지는 성장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가정성장과 사업성장과 교회성장을 추구하십시오. 어떤 사람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작은 것이 사명에 대한 무관심과 불성실의 결과라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모습은
겨자씨처럼 작아도 큰 겨자나무의 비전을 품고 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비전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
어떤 사람은 실패와 비판이 두려워서 비전을 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의 부담을 지기 싫어서 비전을 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투자비용이 아깝고 심지어는 본전까지 잃어버릴까 무서워서 비전을 품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전이 없으면 비상도 없고 비범함도 없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이 불확실하다고 비전을 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항상 보장된 길로만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전 없이 평범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이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뜻을 멋지게 이루려고 해야 합니다.
되는대로 살지 말고 무엇인가 되도록 사십시오.
공동체에서 어떤 일과 부서를 맡았다면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되는대로 하지 말고 무엇인가 되도록 하십시오. 사업도 되는 대로 하지
말고 되도록 하십시오. 그것을 위해 전략, 전술, 땀, 수고, 성실함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한 비전의 점검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거룩한 비전을 점검하며 자기성찰에 관심을 기울이면 성공 가능성은 그만큼 커집니다.
한 유명한 야구선수가 젊었을 때 3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첫째, 하루에 천 번의 스윙을 한다. 둘째, 몸을 해치는 술 담배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셋째, 나를 돌아보기 위해 매일
일기를 쓴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지키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는다.” 그렇게 실천해서 최고의 야구스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성도에게도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다짐들이 필요합니다. “나는 하루의 첫 시간을 말씀과 기도로 시작한다. 기도생활은
감사를 앞세워 하고 교회봉사는 말없이 충성스럽게 한다. 매일 월새기(월간 새벽기도)를 꾸준히 본다.” 그런 종류의 선한 다짐들을 통해 힘써
자기성장을 추구하면 기도 응답과 비전 성장의 가능성도 커지고 하늘 상급도 커질 것입니다.
물론 성장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곳곳에
난관이 있고 자기 뜻과 노력대로 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일이 안 된다고 해서 비전 자체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비전은 수정될 수는
있어도 포기되면 안 됩니다. 성도에게 ‘일이 안 되는 것’은 ‘일이 견고하게 되기 위한 진통’입니다. 목회하면서 가끔 아픔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나중에 보면 그때가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한 진통의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되게 하려고 중간에 안 되는 환경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비전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다듬는 일은 있어도 비전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 큰 비전을 이루는 길
>
작은 겨자씨가 큰 겨자나무가 되고 거룩한 누룩이 전체를 부풀게 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인내해야
합니다. 거룩한 비전은 처음에는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되기에 꿈과 비전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비전이든 시작은 미약한 법입니다. 그래서 초창기 개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성공이 금방 주어지지 않아도 거룩한 비전을 향해 꾸준히 전진하십시오. 너무 빨리 뛰어가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멀리 가지 못합니다. 인생은 뛰듯이 살지 말고 걷듯이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더 멀리 갑니다. 우리가 뿌린 씨가 후대에 자녀를 통해 열매
맺을 때도 많습니다. 다윗이 그토록 성전건축을 사모했지만 정작 그 일은 솔로몬이 이뤄냈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승리할 때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극한 인내의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윌리엄 캐리(Carey) 선교사가 인도에서 첫 신자를 얻어 세례를
주기까지 칠년 걸렸습니다. 애도니람 저드슨(Judson) 선교사가 버마에서 첫 제자를 얻기까지 칠년이 걸렸습니다. 로버트
모리슨(Morrison) 선교사가 중국에서 첫 신자를 얻는데 칠년이 걸렸습니다. 로버트 모팻(Moffat) 선교사가 아프리카의 보츠와나에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남을 볼 때까지 칠년 걸렸습니다. 칠년의 기다림은 큰 고통의 기간이었지만 그들은 인내함으로 결국 인물 선교사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꿈과 비전의 열매가 당장 없어도 인내하며 전진하십시오. 어떤 것도 인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많은 재능도 인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재능이 많은 사람이 성공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교육도 인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교육받은 직무태만자로
넘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인내의 기간과 아픔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교회생활을 할 때 시련이 있어도 꾸준히 자기 자기를 지키고 봉사하면
작은 성공들을 체험할 수 있고 그 작은 성공이 축복의 근원이 되는 위대한 성공임을 조만간 깨달을 날이 올 것입니다.
둘째, 자신에
대해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자신에 대해 실망합니까? 누구에게나 있는 열등감 때문입니다. 왜 열등감이 생깁니까? 자기 능력과 수준과 재능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목표만 크게 세울 때 열등감이 생깁니다. ‘자기실현을 위한 찬란한 비전’도 필요하지만 ‘자기현실에 대한 냉철한 지혜’도
필요합니다. 비전과 현실 간에 분별없는 괴리감은 열등감만 키울 수 있습니다. 또한 남들과의 무의미한 비교도 열등감을
부추깁니다.
열등감을 이기는 2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첫째, 무조건 큰 목표만 세우려고 하지 말고 자기에게 적합한 큰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자기에게 적합한 큰 목표를 세우란 말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분명한 사명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둘째,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해야 합니다. 자기보다 나은 타인을 ‘비교 대상’으로 삼기보다 ‘배울 대상’으로 삼고 자기보다 낫게 보여도
별로 배울 대상이 아닌 것 같으면 그를 ‘반면교사’로 삼을 때 불필요한 열등감은 사라질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등감은 있습니다.
결국 열등감이 문제가 아니라 열등감에 빠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생을 멋지게 산 사람들은 열등감이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열등감을 잘 극복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아마비로 열등감을 가졌던 루스벨트는 리더십을 길러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돌대가리란 소리를 들으며
열등감에 빠졌던 소크라테스는 그 열등감을 잘 극복해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열등감이 문제가 아니라 열등감 속에서 비참하게 사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자기의 현재 모습이 작게 보여도 결코 실망하지 마십시오. ‘겨자씨 한 알과 누룩의 원리’를 기억하며 자기 삶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십시오. 하나님은 초라한 도구를 가지고 위대한 일을 이루시기를 즐겨하시는 분입니다. 현실은 부족해 보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살겠다는 작은 불꽃만 가슴 속에 타오르게 하면 하나님이 그 불꽃을 사용해 큰 불길을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어느 날, 스코틀랜드의 한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적은 사람이 모인 한주간의 집회에서 마지막 날 복음 선교를
위한 헌신자 초청 시간에 오직 한 소년만이 그 초청에 응해 일어섰습니다. 인도하던 목사님은 크게 실망했지만 하나님은 놀라운 계획을 진행시키고
계셨습니다. 그때 그 소년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아프리카를 주세요.” 나중에 그 소년이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되었습니다. 소년이 가슴에 품은 불꽃이 흑암의 아프리카 대륙에 생명의 빛을 가져다준 큰 불길이 된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 믿고 인물이 되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인물 비전의 짐을 성도에게만 지우지 않고 저 자신도 롤 모델이 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인물 한 사람의 힘은 보통 힘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한 사람이라도 거룩한 비전을 품고 인물이 된다면 그를 통해 찬란한 비전
성취의 때가 성큼 다가올 것입니다.
이틀 전에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3호를 발행했습니다. 월새기 한 권에는 일반 책 250페이지
분량의 말씀이 실려 있습니다. 글의 퀄리티도 좋고 책의 외형적인 퀄리티도 좋습니다. 가격도 천원이니까 부담도 없습니다. 그것이 영어로 번역되어
영문판이 한 권당 1불에 공급되면 문서를 통한 세계선교가 멋지게 일어날 것입니다. 영문판 사역이 시작되면 1차적으로 중국의 홍콩, 미국의 LA,
유럽의 영국, 동남아시아의 필리핀의 4곳에 현지 사역자를 선임해 각각 1만부부터 현지발행을 시작해서 공급하고 점차 부수와 지역을 늘려갈
예정입니다.
이틀 전에 월새기 총 본부장이 물었습니다. “월새기 영문판 사역을 시작하려면 어느 정도 재정이 필요할까요?” 갑자기
질문을 받고 저도 깊은 생각 없이 갑자기 말했습니다. “대략 10억 원 정도 마련되면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요?” ‘비전의 시작’도 중요하지만
‘비전의 지속’을 통해 역사를 써나가는 것도 중요함을 알기에 그런 통 큰 액수가 저도 모르게 나온 것입니다. 결코 작지 않은 재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통 큰 인물을 붙여주시면 반발심을 부르는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고도 문서를 통해 세계선교 사역을 멋지게 이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물이 가슴에 품은 비전의 힘은 결코 작은 힘이 아닙니다. 그처럼 시간이 지나도 꺼지지 않을 작은 불꽃
비전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을 꼭 붙잡고 나가면 하나님은 그 작은 불꽃을 통해 큰 생명의 불길을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항상 거룩한 꿈과 비전을
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남은 인생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생으로 만들어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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