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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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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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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필로 쓰는 최완택목사의 민들레교회 이야기 제 627호 중에서 北山편지
사랑하는 민들레 자매․형제 여러분.
주님의 은총 가운데 안녕하시지요?
우리는 시방 여름의 마지막 절기이며 또 여름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서(小暑 7월7일)․대서(大暑 7월23일)절기에 들고 있습니다. 장마도 시작되었고, 날씨도 꽤 무더워졌지요?
우리는 시방 여름의 마지막 절기인 소서․대서와 함께 2007년 후반기를 새롭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후반기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아래에 옮겨 쓰는 주님의 말씀을 2007년 후반기의 말씀으로 새롭게 드립니다.(2004년 후반기에도 이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공동번역 마태오복음서 5장 43-48절)”
지난 주일에 에덴기도원에서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기도원에서 떠온 물통을 들고 우리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는데 웬 어린 청년이 담배를 입에 무고 불을 붙이려다가 나하고 마주치니까 겸연쩍은 얼굴로 얼른 담배를 입에서 빼들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저 녀석이 도대체 몇 호집 자식인가 생각해 봤으나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여섯 가구가 사는 우리 아파트 줄에서는 방금 본 그런 풍경을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녀석의 모양이 못내 괘씸하였습니다. 한마디 할까 했으나 이미 엇갈렸기에 불쾌한 심사를 누르면서 3층 우리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잠시 후에밖에 두고 온 물통들을 가지러 내려갔더니 그 청년이 서둘러 담배를 피우고 돌아서다가 나를 보더니, “제가 그 물통을 들어다 드리겠습니다.” 하는 게 아닙니까? 그 순간 나는 느닷없이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답한다는 게 고작, “물통들이 무겁다네”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의 대답이, “무거우니까 제가 갖다드려야죠.” 하더니 양손에 물통을 하나씩 들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3층에 있는 우리 집 주방에까지 갖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고맙다’고 다정하게 인사를 하긴 했지만 그 청년을 괘씸하게 본 내 심사가 그만 들켜버린 것 같아서 미안하기 짝이 없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순간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여러분.
이제 2007년 후반기를 삼복(三伏) 더위와 함께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의 마음’(빌립보서 2장 5-11절을 새롭게 볼 것)을 새롭게 품고 이미 이룬 것을 바탕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힘쓰십시다.
예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다….”라고 하셨을 때, 구약성서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시대의 사제들과 랍비들의 가르침 가운데 그런 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곧잘 그렇습니다. 사제들이 교리에 얽매이고 교파의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기가 쉽습니다.
인간 세계에 처음부터 원수가 있었던 게 아닙니다. 서로 조금씩 다른 것들이 자구 거리가 멀어지게 되니까 차츰차츰 싫어하게 되고 미워하게 되고 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한다면 큰 사랑으로 품을 수 있고 마침내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우리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는데 웬 어린 청년이 담배를 입에 물고 나오는 꼴을 보고 이내 언짢은 말을 내뱉었다면 그 다음에 그 청년이 내 무거운 물통을 들어다 주는 갸륵한 행동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아아, 서로 조금 다른 것이 졸지에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 아파트 현관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는 청년을 나하고 다르다고 해서 싫어하고 괘씸하게 여기고 마침내 원수로 대하려고 했습니다. 다만 말은 안했는데, 그 청년은 오히려 내 무거운 짐을 들어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핀 숯을 내 머리에 놓았습니다’(잠언 25장 22절). 그런데 그 청년은 처음부터 나를 원수로 본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저 옛날부터 ‘유다인 선민의식’은 다른 민족을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보았고, 그래서 싫어했고 배척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선민의식’은 어떻습니까? 저와 다른 사람들을 싫어하고 배척하는 정도가 ‘유다인 선민의식’보다 더 지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장 45절)
나는 이 말씀 가운데서 ‘무심(無心)한 하느님’을 만납니다.
‘무심(無心)’은 ‘감정이나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무심은 사람이나 생물에게는 가능하지 않고 세포로 이루어지지 않는 돌, 물, 흙 따위의 무생물(無生物)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생명이 없는 물건이기에 돌, 물, 흙이 무심하다라는 건 말도 안되고 의미도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무심(無心)하십니다. 실제로는 대단하게 유심(有心․唯心)하시지만 대자대비하시기 때문에 오직 무심(無心)으로서만 현현하십니다.
아아, 나는 ‘무심한 하느님’이 참 고맙고 좋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선한 사람에게만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만 비를 주신다면 우리가 이 땅에 시방 살아있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우리는 늘 물처럼 흐르고 싶고, 흙처럼 너그러워지고 싶고, 바위처럼 무심(無心)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신 생명(生命)을 지니고 늘 살아 움직이는 존재여서 항상 물처럼 흐를 수만도 없고 언제나 흙처럼 너그럽기만 할 수도 없고 항상 바위처럼 무심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갈등 구조 속에서 언제나 하느님을 우러르며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아버지의 무심(無心)가운데 유심(有心)하심을 배우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길을 가는 도상(途上)의 존재입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무심하심을 배우고 익히고 맛들어 알지어다.”
사랑하는 민들레 자매․형제 여러분.
주님의 은총 가운데 안녕하시지요?
우리는 시방 여름의 마지막 절기이며 또 여름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서(小暑 7월7일)․대서(大暑 7월23일)절기에 들고 있습니다. 장마도 시작되었고, 날씨도 꽤 무더워졌지요?
우리는 시방 여름의 마지막 절기인 소서․대서와 함께 2007년 후반기를 새롭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후반기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아래에 옮겨 쓰는 주님의 말씀을 2007년 후반기의 말씀으로 새롭게 드립니다.(2004년 후반기에도 이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공동번역 마태오복음서 5장 43-48절)”
지난 주일에 에덴기도원에서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기도원에서 떠온 물통을 들고 우리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는데 웬 어린 청년이 담배를 입에 무고 불을 붙이려다가 나하고 마주치니까 겸연쩍은 얼굴로 얼른 담배를 입에서 빼들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저 녀석이 도대체 몇 호집 자식인가 생각해 봤으나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여섯 가구가 사는 우리 아파트 줄에서는 방금 본 그런 풍경을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녀석의 모양이 못내 괘씸하였습니다. 한마디 할까 했으나 이미 엇갈렸기에 불쾌한 심사를 누르면서 3층 우리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잠시 후에밖에 두고 온 물통들을 가지러 내려갔더니 그 청년이 서둘러 담배를 피우고 돌아서다가 나를 보더니, “제가 그 물통을 들어다 드리겠습니다.” 하는 게 아닙니까? 그 순간 나는 느닷없이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답한다는 게 고작, “물통들이 무겁다네”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의 대답이, “무거우니까 제가 갖다드려야죠.” 하더니 양손에 물통을 하나씩 들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3층에 있는 우리 집 주방에까지 갖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고맙다’고 다정하게 인사를 하긴 했지만 그 청년을 괘씸하게 본 내 심사가 그만 들켜버린 것 같아서 미안하기 짝이 없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순간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여러분.
이제 2007년 후반기를 삼복(三伏) 더위와 함께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의 마음’(빌립보서 2장 5-11절을 새롭게 볼 것)을 새롭게 품고 이미 이룬 것을 바탕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힘쓰십시다.
예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다….”라고 하셨을 때, 구약성서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시대의 사제들과 랍비들의 가르침 가운데 그런 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곧잘 그렇습니다. 사제들이 교리에 얽매이고 교파의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기가 쉽습니다.
인간 세계에 처음부터 원수가 있었던 게 아닙니다. 서로 조금씩 다른 것들이 자구 거리가 멀어지게 되니까 차츰차츰 싫어하게 되고 미워하게 되고 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한다면 큰 사랑으로 품을 수 있고 마침내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우리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는데 웬 어린 청년이 담배를 입에 물고 나오는 꼴을 보고 이내 언짢은 말을 내뱉었다면 그 다음에 그 청년이 내 무거운 물통을 들어다 주는 갸륵한 행동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아아, 서로 조금 다른 것이 졸지에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 아파트 현관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는 청년을 나하고 다르다고 해서 싫어하고 괘씸하게 여기고 마침내 원수로 대하려고 했습니다. 다만 말은 안했는데, 그 청년은 오히려 내 무거운 짐을 들어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핀 숯을 내 머리에 놓았습니다’(잠언 25장 22절). 그런데 그 청년은 처음부터 나를 원수로 본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저 옛날부터 ‘유다인 선민의식’은 다른 민족을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보았고, 그래서 싫어했고 배척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선민의식’은 어떻습니까? 저와 다른 사람들을 싫어하고 배척하는 정도가 ‘유다인 선민의식’보다 더 지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장 45절)
나는 이 말씀 가운데서 ‘무심(無心)한 하느님’을 만납니다.
‘무심(無心)’은 ‘감정이나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무심은 사람이나 생물에게는 가능하지 않고 세포로 이루어지지 않는 돌, 물, 흙 따위의 무생물(無生物)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생명이 없는 물건이기에 돌, 물, 흙이 무심하다라는 건 말도 안되고 의미도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무심(無心)하십니다. 실제로는 대단하게 유심(有心․唯心)하시지만 대자대비하시기 때문에 오직 무심(無心)으로서만 현현하십니다.
아아, 나는 ‘무심한 하느님’이 참 고맙고 좋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선한 사람에게만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만 비를 주신다면 우리가 이 땅에 시방 살아있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우리는 늘 물처럼 흐르고 싶고, 흙처럼 너그러워지고 싶고, 바위처럼 무심(無心)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신 생명(生命)을 지니고 늘 살아 움직이는 존재여서 항상 물처럼 흐를 수만도 없고 언제나 흙처럼 너그럽기만 할 수도 없고 항상 바위처럼 무심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갈등 구조 속에서 언제나 하느님을 우러르며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아버지의 무심(無心)가운데 유심(有心)하심을 배우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길을 가는 도상(途上)의 존재입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무심하심을 배우고 익히고 맛들어 알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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