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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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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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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산(北山)편지
기도 연대(連帶)
사랑하는 민들레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은총 가운데 나날이 행복하게 사시지요?
우리는 시방 여름의 마지막 절기이며 또 절정인 소서・대서(大暑 7월 23일) 절기를 살고 있습니다.
지난 호에 ‘무심(無心)한 하느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다가 제 원대로 안되면 곧 잘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그럽니다. 세상에, 그런 몹쓸 말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느님 우리 아버지는 본디 유심(有心・唯心)하십니다. 다만 대자대비하시기 때문에 오직 무심(無心)으로서만 현현하십니다. 이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기도뿐입니다.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僞善者)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다.(마태복음 6장 5-6절)
우리 주님이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기도는 나(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선자(僞善者, hypocrite)라는 말은 ‘배우’라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배우가 하는 일이 뭡니까?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로 분장하여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배우의 자기 인생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등장 인물의 역할을 주면서 연기하는 것입니다.
위선자가 뭡니까? 겉으로만 착한 척, 옳은 척, 너그러운 척하는 악한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기도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면서 자기 인생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꾸미면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무심(無心)하실 수 밖에 없겠습니다.
기도할 때에 ‘시방 있는 그대로’ 드러내십시오.
기도할 때에 ‘하느님 앞에’ 서십시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 갔습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그는 종교전문가 그룹인 바리사이파 사람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세리였는데 그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직 한마디 말로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복음 18장 9-14절에서)
바리사이파 사람의 종교와 신앙은 사람 앞에서는 종교와 신앙입니다.
세리의 종교와 신앙은 하느님 앞에 서는 종교와 신앙입니다.
선택은 오로지 그대 자신의 몫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골방’이 무엇입니까?
골방이란 ‘안방이나 건너방 따위의 큰 방의 뒤쪽에 딸린 작은 방’을 말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대갓집의 바깥양반이나 안방마님의 방에는 자기만이 비밀하게(?) 일을 보던가 또는 자기의 소중한 비밀을 간직하는 딸린 작은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골방에는 배우자도 종도 출입할 수가 없고 오직 자기 자신만의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골방의 의미와 용도가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자기만의 불가침의 영역입니다. 나 아닌 그 어떤 다른 사람도 들어올 수 없고 오로지 나만의 공간과 시간이 됩니다. ‘골방의 기도’는 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극비밀리에 행해져야 하는 기도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시방 그대는 골방을 가졌습니까?
진정한 골방은 공간개념이 아니라 의식과 시간 문제입니다. 내가 기도시간을 정해 놓으면 그 시간이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집에 있든지, 버스나 전철 안에 있든지, 직장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고 있든지 시간의 골방을 정해 놓으면 그 시간이 골방이 됩니다.
나 자신을 위한 기도는 철저하게 골방의 기도여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한 기도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우리는 홀로 있지 않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나 자신을 위한 기도는 이 세상에서 나 혼자 있지 않기 위하여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웃을 위한 기도는 그 이웃이 이 세상에서 혼자 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깨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이십여년 전에 내가 몹시 외로울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갈 바를 몰라 쩔쩔 매다가 내 심정을 정리해 본 말입니다.
이십여년 전에 기독교방송의 고희범 기자(연전에 한겨레신문 사장을 역임하고, 시방은 무슨 에너지 단체의 장으로 있다고 함)가 나보고 하는 말이, 기독교방송에서 ‘전국의 청취자들과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있는데 기도제목을 드릴 터이니 최목사께서 원고지 두장씩 엿새치의 기도문을 써서 녹음을 해 주셔야겠다는 주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그런 부탁을 해 왔기에 내가 어떻게 그런 걸 쓰느냐고 거절했던 적이 있어 미안한 김에 승낙을 했더니 일주일치 6개의 기도제목을 주는데, 제목을 살펴보니 평소에 별로 기도하지 않은 내용들이었습니다. 기억나는 것이 ‘국회를 위한 기도’, ‘여당을 위한 기도’, ‘야당을 위한 기도’, ‘언론기관과 언론인을 위한 기도’ 같은 것들입니다.
하여간 그때 궁여지책으로 주일예배 시간에 창세기 18장을 읽고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예고를 듣고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통사정하는 내용에 대하여 설명한 다음에 우리 교우들을 6개조로 나누어 각 조가 두 개씩 기도문을 공동연구하여 쓰게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한 개의 주제를 놓고 두 조가 쓴 두 개의 기도문을 한 개의 기도문으로 정리하는 것이 나의 작업으로 남게 되었는데, 쉽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일주일 동안 내내 진땀깨나 흘렸습니다. 그래서 그 주제를 놓고 새로운 마음으로 기도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화요성서시간에 산상수훈을 공부하는 가운데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새롭게 맞들이면서 이십여 년 전에 ‘정오의 기도’ 때문에 애먹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제게 갸륵한 생각을 하게 하셨습니다. 갸륵한 생각은 갸륵한 행동으로 옮겨질 때문이 유효합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여러분.
2007년 7월 30일부터 ‘민들레 교회 이야기’식구는 정오에 한 개의 기도제목으로 연대기도(連帶祈禱)를 합시다.
연대(連帶, solidarity)는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또는 한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민들레 꽃은 무수한 많은 통꽃이 모인 거대한 꽃입니다.
사람들이 한 개의 꽃잎에 불과하다고 보는 그것이 실은 하나의 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 개의 꽃으로 보는 민들레 꽃 하나의 꽃판 안에 100-200개의 통꽃이 모인 거대한 꽃입니다. 나중에는 씨에 솜털같은 날개를 달고 찾아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민들레 식구들인 같은 시간인 정오에 같은 제목으로 연대기도를 하게 되면 우리는 서로 바라보고 그리워하며 서로 위로하고 힘을 주기 위해 날아다니는 기도의 꽃 한송이입니다. 단순히 하나의 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통꽃이 모인 거대한 꽃 한송이입니다.
꼭 정오(正午)에 기도합시다. 연대기도는 정한 시간에 해야 힘이 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신새벽에도 꼭 기도해야 하겠지만 연대하는 기도는 정오가 좋습니다.
“위대한 대낮이라는 것은 인간이 그의 궤도(軌道)의 짐승과 초인의 한가운데 서서 밤으로의 그의 길을 자기의 최고의 희망으로 축복한 때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아침을 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프리드리히 닛체)
위대한 대낮이란 곧 정오를 말합니다. 대낮의 정점입니다. 인간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때입니다. 동시에 밤이라는 몰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밤이라는 몰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분깃점에 서서 연대(solodarity)기도를 한다? 이 얼마나 신명나는 일이고 힘이 솟는 일입니까? ‘민들레 기도 연대’에 꼭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연대(連帶)
사랑하는 민들레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은총 가운데 나날이 행복하게 사시지요?
우리는 시방 여름의 마지막 절기이며 또 절정인 소서・대서(大暑 7월 23일) 절기를 살고 있습니다.
지난 호에 ‘무심(無心)한 하느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다가 제 원대로 안되면 곧 잘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그럽니다. 세상에, 그런 몹쓸 말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느님 우리 아버지는 본디 유심(有心・唯心)하십니다. 다만 대자대비하시기 때문에 오직 무심(無心)으로서만 현현하십니다. 이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기도뿐입니다.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僞善者)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다.(마태복음 6장 5-6절)
우리 주님이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기도는 나(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선자(僞善者, hypocrite)라는 말은 ‘배우’라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배우가 하는 일이 뭡니까?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로 분장하여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배우의 자기 인생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등장 인물의 역할을 주면서 연기하는 것입니다.
위선자가 뭡니까? 겉으로만 착한 척, 옳은 척, 너그러운 척하는 악한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기도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면서 자기 인생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꾸미면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무심(無心)하실 수 밖에 없겠습니다.
기도할 때에 ‘시방 있는 그대로’ 드러내십시오.
기도할 때에 ‘하느님 앞에’ 서십시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 갔습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그는 종교전문가 그룹인 바리사이파 사람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세리였는데 그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직 한마디 말로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복음 18장 9-14절에서)
바리사이파 사람의 종교와 신앙은 사람 앞에서는 종교와 신앙입니다.
세리의 종교와 신앙은 하느님 앞에 서는 종교와 신앙입니다.
선택은 오로지 그대 자신의 몫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골방’이 무엇입니까?
골방이란 ‘안방이나 건너방 따위의 큰 방의 뒤쪽에 딸린 작은 방’을 말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대갓집의 바깥양반이나 안방마님의 방에는 자기만이 비밀하게(?) 일을 보던가 또는 자기의 소중한 비밀을 간직하는 딸린 작은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골방에는 배우자도 종도 출입할 수가 없고 오직 자기 자신만의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골방의 의미와 용도가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자기만의 불가침의 영역입니다. 나 아닌 그 어떤 다른 사람도 들어올 수 없고 오로지 나만의 공간과 시간이 됩니다. ‘골방의 기도’는 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극비밀리에 행해져야 하는 기도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시방 그대는 골방을 가졌습니까?
진정한 골방은 공간개념이 아니라 의식과 시간 문제입니다. 내가 기도시간을 정해 놓으면 그 시간이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집에 있든지, 버스나 전철 안에 있든지, 직장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고 있든지 시간의 골방을 정해 놓으면 그 시간이 골방이 됩니다.
나 자신을 위한 기도는 철저하게 골방의 기도여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한 기도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우리는 홀로 있지 않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나 자신을 위한 기도는 이 세상에서 나 혼자 있지 않기 위하여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웃을 위한 기도는 그 이웃이 이 세상에서 혼자 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깨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이십여년 전에 내가 몹시 외로울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갈 바를 몰라 쩔쩔 매다가 내 심정을 정리해 본 말입니다.
이십여년 전에 기독교방송의 고희범 기자(연전에 한겨레신문 사장을 역임하고, 시방은 무슨 에너지 단체의 장으로 있다고 함)가 나보고 하는 말이, 기독교방송에서 ‘전국의 청취자들과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있는데 기도제목을 드릴 터이니 최목사께서 원고지 두장씩 엿새치의 기도문을 써서 녹음을 해 주셔야겠다는 주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그런 부탁을 해 왔기에 내가 어떻게 그런 걸 쓰느냐고 거절했던 적이 있어 미안한 김에 승낙을 했더니 일주일치 6개의 기도제목을 주는데, 제목을 살펴보니 평소에 별로 기도하지 않은 내용들이었습니다. 기억나는 것이 ‘국회를 위한 기도’, ‘여당을 위한 기도’, ‘야당을 위한 기도’, ‘언론기관과 언론인을 위한 기도’ 같은 것들입니다.
하여간 그때 궁여지책으로 주일예배 시간에 창세기 18장을 읽고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예고를 듣고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통사정하는 내용에 대하여 설명한 다음에 우리 교우들을 6개조로 나누어 각 조가 두 개씩 기도문을 공동연구하여 쓰게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한 개의 주제를 놓고 두 조가 쓴 두 개의 기도문을 한 개의 기도문으로 정리하는 것이 나의 작업으로 남게 되었는데, 쉽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일주일 동안 내내 진땀깨나 흘렸습니다. 그래서 그 주제를 놓고 새로운 마음으로 기도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화요성서시간에 산상수훈을 공부하는 가운데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새롭게 맞들이면서 이십여 년 전에 ‘정오의 기도’ 때문에 애먹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제게 갸륵한 생각을 하게 하셨습니다. 갸륵한 생각은 갸륵한 행동으로 옮겨질 때문이 유효합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여러분.
2007년 7월 30일부터 ‘민들레 교회 이야기’식구는 정오에 한 개의 기도제목으로 연대기도(連帶祈禱)를 합시다.
연대(連帶, solidarity)는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또는 한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민들레 꽃은 무수한 많은 통꽃이 모인 거대한 꽃입니다.
사람들이 한 개의 꽃잎에 불과하다고 보는 그것이 실은 하나의 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 개의 꽃으로 보는 민들레 꽃 하나의 꽃판 안에 100-200개의 통꽃이 모인 거대한 꽃입니다. 나중에는 씨에 솜털같은 날개를 달고 찾아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민들레 식구들인 같은 시간인 정오에 같은 제목으로 연대기도를 하게 되면 우리는 서로 바라보고 그리워하며 서로 위로하고 힘을 주기 위해 날아다니는 기도의 꽃 한송이입니다. 단순히 하나의 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통꽃이 모인 거대한 꽃 한송이입니다.
꼭 정오(正午)에 기도합시다. 연대기도는 정한 시간에 해야 힘이 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신새벽에도 꼭 기도해야 하겠지만 연대하는 기도는 정오가 좋습니다.
“위대한 대낮이라는 것은 인간이 그의 궤도(軌道)의 짐승과 초인의 한가운데 서서 밤으로의 그의 길을 자기의 최고의 희망으로 축복한 때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아침을 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프리드리히 닛체)
위대한 대낮이란 곧 정오를 말합니다. 대낮의 정점입니다. 인간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때입니다. 동시에 밤이라는 몰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밤이라는 몰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분깃점에 서서 연대(solodarity)기도를 한다? 이 얼마나 신명나는 일이고 힘이 솟는 일입니까? ‘민들레 기도 연대’에 꼭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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