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야 할 고향(故鄕)
우리 말 중에
‘어머니’와 ‘고향’만큼
정겹고 푸근한 말이 또 있을까 싶다.
어머니와 같은 고향을 찾는 한국인들의
열심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열정이 대단하다.
그 집착이 잘못되어 지연과 학연을
너무 따지는 것은 문제지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분명
아름다운 전통(傳統)이 아닐 수가 없다.
특별히 몸이 아프거나 명절 때가 되면
더 간절히 생각나는 곳이
고향이 아니던가.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어도
고향(故鄕)만 생각하면
힘이 나는 것은,
그 곳에는 따스한 눈빛으로
맞이하는 부모가 있고,
맑은 웃음소리가 넘쳐나는 가족이 있고
밝은 이야기들이 가득한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여전히
묵묵히 기다려 주는 고향에 우리는 애닮은
삶을 내려놓으며 잠시나마 마음의
평안을 얻곤 하기에,
고향으로 가는 길은 전쟁이지만
마음만은 새색시모양
언제나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아니 인간의 귀소본능은
나이가 들수록 더 해져 궁극적으론
그 곳에 묻히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긴다.
그러니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실향민(失鄕民)들의
안타까움은 우리가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고향은 이렇게 분명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지만,
이상하게도 고향에 갈 때마다 느껴지는
두 가지 생각은 우리를 또 다른
고민(苦悶)에 빠지게 한다.
먼저 고향 산천(山川)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는데,
순간 개울가에 비쳐진 자신의
얼굴 속에 선명하게 드러난 주름을 볼 때,
세월의 여상함과 더불어 탐욕스러운
자아의 변화 앞에
인생의 무력감(無力感)을 느끼게 한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간 또 다른 고민이란,
해마다 늙어가는 부모님을 뵙고
또 조상의 무덤을 찾아
성묘를 할 때 느끼는 감회는
인생의 허무와 무상(無常)함을 절감케 한다.
나이가 들면서 하나 깨달은 것은
이 세상 어떤 것도
든든한 것이 없다는 진리(眞理)다.
흔히 이것을 알아야 철이 든다고 말한다.
젊음과 건강,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랑,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믿을 것은 아무 것도 없기에,
어느 왕은 인생의 헛됨을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 일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고향을 통해 오히려
개인의 무력감과
인생의 무상함 들이 느껴질 때,
스스로 ‘진정한 내 고향(故鄕)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해 보곤 한다.
20세기 최고 지성인이라는
사르트르는 생전(生前)에 누구보다도
생의 자유와 행복을 갈파했던 사람이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는 죽을 때,
‘내가 돌아갈 고향이 어디 있는가?’를
부르짖으며 눈을 감지 못했다.
그는 마음의 고향은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었지만,
영혼의 고향에 대해선
전혀 대비(對備)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큰 병으로 신음하다가
죽음이 찾아왔을 때,
너무 두려워하자 죽음의 사자는
조금 더 기다려 주기로 하고 돌아갔으나,
어느 날 죽음은 다시 그를 찾아왔다.
‘아니 왜 또 기별(寄別) 없이 오셨습니까?’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내가 그 동안 너에게 여러 번 죽음의
사신을 보내지 않았던가.
실패(失敗)도 보내고 고통도 보냈고,
나중에는 수없는 노화현상까지
보내지 않았던가?
그게 다 사신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리하여 죽음을 따라가고야 말았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통과해야하는 관문(關門)이 바로 죽음이기에,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그 누구도 없다.
그 누구라도 신(神)이 부르면,
내 준비와 상관없이
예고(豫告) 없이 가야만 한다.
문제는 나를 부를 때 어떤 반응으로
죽음을 따라가느냐가 관건이다.
존 힌튼 박사가 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은 죽음 앞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고 했다.
나름대로 개인적인 의와 선(善)을 통해
순간적인 마음의 안정감을
얻어내곤 했지만,
정작 죽음 앞에선 모든 것이 무너지면서
한 순간에 추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신적인 고향을 통해
많은 위로(慰勞)와 힘을 얻는 것처럼,
내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고향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 내세(來世)의 고향을 준비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 속에 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왜 죽는가 하는 물음은
사람이 왜 사는가 하는 물음과 같으므로,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만 한다.
인생에서 생노병사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잘 산다는 것은
이러한 이 세상의 한계를 알고
지극히 한정적인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늘 영혼의 고향을 사모하며
나그네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나그네와 방랑자는 유사한 것 같지만
목적이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노숙자와 방랑자는 삶의 목적이나
방향이 없기에 누가 유혹하든
넘어가고 작은 난관 앞에서도
쉽게 포기해 버리지만,
나그네는 본향을 향한
분명한 목적지(目的地)가 있기에
어떠한 시험이나 유혹 앞에서도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정진해 나가는 차이다.
그래서 나그네는
많은 짐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된다.
많은 소유는 짐이 되어
발걸음도 무겁게 하지만 그것보다도
짐이 많으면 목적지에 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서 재물이나 명예
그리고 권력이 얼마나 큰 짐이었던가.
그 중에서도
소유(所有)가 가장 무거운 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에 도취되어
영혼의 고향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땅강아지처럼 땅 냄새 풍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그네는
반드시 이웃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그네는 유목민과 같이
불규칙적으로 이동하며 살아가기에
정착민보다 몇 배 더 위험과
유혹에 노출 되어 있기에,
서로 화합하며 하나가
되지 않고는 삶의 질을 떠나서
존재(存在)하기조차
힘든 것이 나그네의 삶이다.
하나 됨이란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고,
들어주며 격려(激勵)해주는
섬김의 모습이다.
주여,
육신(肉身)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靈魂)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이
명절 날 더 가슴깊이
새겨짐은,
고향의 어르신들이나
젊은 우리 모두도 믿든 안 믿든
결국 영혼의 고향을 가기 때문입니다.
그 고향에 가기 위해
나그네같이
적은 것으로 만족(滿足)하며,
부득이한 것만 가지고
본향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게 하소서.
2007년 9월 23일
추석 명절을 앞두고 강릉에서 피러한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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