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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5:1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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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14.8.31 주일설교 |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죄인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
용서와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볼 때 대단한 관용과 은혜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타인이나 이웃을 바라볼 때는 무서운 비평과 율법의 판단으로 정죄를 합니다. 옛말에 “오십보 백보”라는 말이 있듯이 인생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다 죄인입니다.
신학자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는데 한 종류는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고 사는 사람이고, 다른 한 종류는 자기가 죄인인 줄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죄의 경중을 논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1. 세상에 마음이 팔린 둘째 아들
오늘 성경에는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조르는 아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두 아들 중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아버지 나의 분깃을 나에게 나누어 주십시오”라고 아버지께 강요합니다. 결국 아버지가 견딜 수가 없어 재산을 나누어줍니다.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니 세상의 마귀가 그 마음을 점령해서 끌어당겼습니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바라보면 끌려갑니다.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에덴동산은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와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바라보라고 속삭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바라보니 선악과에 끌려가서 결국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실 때도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게 하시며 “네 자손이 저와 같이 많을 줄 알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밤마다 나가서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고 결국 그대로 됩니다. 바라봄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자손들은 아버지의 재산이 마땅히 자기들에게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재산이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오늘 성경에도 둘째 아들이 이렇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눅 15:11∼12)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모아 가지고서 먼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아버지의 잔소리가 싫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먼 나라로 떠나가 그 재산을 가지고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면서 꿈이 없는 방탕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꿈이 없으면 망하게 됩니다. 목표가 있고 꿈이 있으면 그것을 향해서 걸어가는데 목표도 꿈도 없으면 방탕하여 타락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방종과 방탕의 결과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눅 15:13∼14) 방종과 타락한 생활이 있으면 반드시 기근이 다가오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다고 한들 절약할 줄 모르고 허랑방탕하게 되면 결국 인생에 기근이 다가오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불쌍한 우리 민족에게 예수의 복음을 주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에 내려가지 않으며, 남에게 나누어 줄지라도 꾸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허랑방탕하게 살면 반드시 궁핍한 시간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청년에게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과 돈이 있을 동안에는 여기저기 친구로 삼겠다고 오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얼마가지 못해 재산을 다 소진해 버리자 찾아와 주는 사람도 반겨주는 사람도 없게 되었습니다. 남은 재산이 하나도 없게 되고 배고픈 신세가 되자 결국 돼지를 치는 신세로 전락했고,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하나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처참한 인생이 되고만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먹고 마시고 살 수만 있으면 괜찮은데, 먹고 마시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어려워지면 짐승과 같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와같은 극단적인 궁핍과 멸시와 천대는 마음에 깨달음을 얻게 합니다. 극한 고난을 만날 때 깨달음이 오고, 깨달음이 오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그제서야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찾아가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잔잔한 갈릴리 호수를 지날 때는 예수님을 찾지 않던 제자들이 비바람이 치고, 배가 뒤집힐 상황이 되자 예수님을 찾았던 것처럼 삶이 평안하면 교회 출석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을 찾는 것도 등한이 하던 사람들이 인생에 어려움이 다가오자 곧장 주님을 찾고, 부르짖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이 다가왔습니까? 하나님을 먼저 찾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탕자의 회개
이 탕자는 그 마음이 깨어졌습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이 많은데 품꾼들도 아버지가 음식을 충분히 주어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면서 농장에서 일을 하는데 나는 여기서 그 부자의 아들임에도 굶어죽는다. 이럴 것이 아니라 회개를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시고, 풍성하게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모든 것을 주기 원하십니다. 이 젊은이는 부자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7∼19) 청년은 마음속에 리허설을 합니다. 이제는 자기가 잘나지도 못했고, 실패하고 패배한 인생, 보잘 것 없는 인생이니 아들로 인정하지 않아도 좋으니 품꾼이라도 만들어 주어서 밥 먹고 살게 해달라고, 그 마음을 표시하기로 작정하고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탕자와 같은 우리들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은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이심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4. 아버지의 사랑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기 바랍니다. 아들이 마음에 작정하고, 준비한 회개를 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달려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순간 벌써 우리를 받아주시고, 품에 안아주십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데, 죄를 짓고 있는데,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미리 십자가에서 몸 찢기고, 피 흘려 우리 죄를 다 속량하시고 우리를 오라고 환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언제나 한발자국 앞서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은 응답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오늘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왔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미 응답을 준비하고 계심을 의심치 말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나오면 우리의 과거를 묻지도, 정죄하지도 않으시고, 벌을 내리시지도 않으십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도 사랑으로 위로하시고 회복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정죄하고 심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살리러 오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회개를 하기도 전에 끌어안고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혀라. 가락지를 끼워라. 신발을 신겨라. 제일 살찐 소를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좋지 않으냐’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보시면서 이렇게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먹을 양식조차 없는 극심한 궁핍에 처하자, 아버지의 집을 떠올려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오늘날 우리 인생을 살면서 삶의 폭풍우가 불어옵니다. 그러나 피할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폭풍우를 피할 수 있는 곳이고, 폭우를 가리우는 곳이고 마른 땅에 시냇물이 되고 곤비한 땅에 바위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이 많아도 마음에 만족함이 없습니다. 권력이 많아도 마음에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면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확실히 알게 됩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처소가 확실하기 때문에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달려 나와 품에 안아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값 주고 산 가장 비싼 옷을 입혀 주고, 성령의 가락지를 끼워주고,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축복의 신발을 신겨주고, 마음에 살찐 송아지를 먹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가 주신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일생에 지은 죄가 다 청산되었습니다. 모든 허물이 십자가에서 다 청산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질병과 고통, 저주와 가난이 청산되고, 부활, 영생, 천국을 다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마음속에 감동을 느끼고, 그것을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5. 형과 율법
그런데 오늘 이 이야기에 밭에서 일하다 들어온 형의 반응은 냉담합니다. 허랑방탕한 동생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불만을 토로합니다. 자신은 서운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웃을 바라볼 때 정죄하고 심판하지 절대 용서와 사랑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해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의 죄를 들춰내어서 수치럽게 만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모든 죄를 덮고, 용서하고, 정죄하지 아니하고, 품에 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쉽게 이웃을 정죄하고, 벗기고, 심판하기를 원합니다. 탕자가 돌아오매 정죄하지도, 심판하지도 않고,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서 영접하고 사랑을 해주니 율법주의자인 그 형은 견딜 수가 없어서 그 집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 아버지가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1∼32)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는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에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남의 잘못을 비판하면 반드시 그 사람도 나를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정죄하면 그 사람도 돌이켜 나를 정죄하고, 내가 이웃을 발가벗기면 이웃이 나를 발가벗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우리가 이웃을 정죄하고,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법이 아니고 사랑입니다. 사랑할수록 더 변화되는 것입니다.
6. 사랑과 은혜로 대하라
우리는 사랑과 은혜로 이웃을 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경 곳곳은 그 사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 103편 8∼13절에 “야훼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야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지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또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말씀처럼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러 와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는 말씀처럼 아무 대가없이 주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기독교 작가 C.S. 루이스는 “세상의 수많은 종교들 중 기독교만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 그 은혜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탕자의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주님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고 구원케 하시고자 오셨다는 것을 당시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들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에게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의롭다고 하지 말고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고 주님께 오면 주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보고 도망치면 의사가 아니듯, 또 구원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 곁에 있어야 구원할 수 있듯이 우리 주님은 ‘나는 구원자이기 때문에 죄인 가운데 내가 있어야 되므로 언제나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같이 있는다’고 말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이면 예수님이 우리와 더 가까운데 계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이중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타인에게는 비평과 정죄를 하고, 자기에게는 용서와 사랑을 갖고 사는 이런 위선자도 되지 말아야 합니다. 갈보리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신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이고 용서를 받고 사랑을 받고 주님을 섬기며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탕자와 같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소망이 없는 인생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다시금 아들의 자리를 회복케 하여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며, 세상을 향해 율법의 잣대를 기울이는 인생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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