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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말2: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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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기도: 이 세상은 바람 부는 곳이요,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나는 세상인데 이러한 세상 가운데에 저희를 인간으로 만들어서 두신 것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선한 뜻이 있어서 그렇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바람과 사건의 물결의 파동이 일어날 때 더욱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붙잡고 움직이지 아니하는 요지부동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은 움직이지 아니하고 영원히 움직이지 아니하는 그 말씀, 저희들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곧장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리의 신앙 길로 달음질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사건의 바람이 불어올 적마나 그 사건의 바람을 잘 이용하고 활용을 하고 자기의 수입으로 삼을 수 있는 지혜롭고 명철한 당신의 귀한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매사에 명철한 지혜와 총명 주시옵고, 이룰구원을 잘 이루어가는 그 면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 아침에도 말씀으로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1, 2절: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제사장들에게 먼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너희 복을 저주하겠다, 이미 저주를 했다’ 그랬지요? ‘내 이름을 영화롭게 아니하면 이제 그렇게 한다’고 그랬지요?
제사장의 직책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중보적 직책이요,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표요, 신앙의 지도급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잘못되면 백성들이 잘못되고, 제사장들이 저주를 받으면 백성들도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저주를 받는 것은 제사장들에게, 지도자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제사장들이 저주를 받아서도 안 되겠고, 백성들도 저주를 받아도 안 될 일입니다. 서로가 덕이 되도록 해야 될 일이지요.
저주는 이미 내려졌다고 그랬지요? 만일 듣지 아니하면 이미 저주는 내려졌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마음을 두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서 복을 받는 것이 낫지요. 무슨 복이든!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 그랬단 말이요. ‘복을 받으려면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 참 아상하게 들립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냐? 찬양대를 조직해서 찬양대회를 열고, 사회적 국가적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냐, 아니면 동양 최고 세계 최고의 예배당을 짓고, 세계적인 종교행사를 치뤄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냐?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 먼저 ‘내 이름’이 무엇이냐? 물론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나 여기에서는 관계적인 면에서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고 했으니까 여기에는 인격적 관계적인 면으로 들어 있다 그 말이요.
예수님께서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같은 이치로 성도들이 가는 곳곳마다 예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드러나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렇게 가르치신 말씀이 있지요? 그렇게 하도록 하라고 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욕을 먹는 것은, 그 이유는 성도들이 인격적 고차원적으로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들어지지 못하면 욕을 먹인다 그 말이요. 이치는 그와 같다 그 말이요.
성도들의 인격의 성장성은 지도자들의 가르침에서 크게 좌우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예수님께서도 ‘선생 된 자들의 책임이 크다’ 하신 말씀이 있지요? 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그런 말씀도 있단 말이요. 인격적 성장적인 면에서 책임이 크다는 겁니다. 선생들의 책임이 크고, 제사장들의 책임이 크고, 지도자들의 책임 크다는 거지요.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종교적인 사역을 크게 하란 말이 아니고 사람을 바로 만들라는 말이라 그 말이요.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않고, 여호와의 명령을 마음에 두지 않고 성도를 하나님을 닮은 자로 만들어 놓지 아니하면 너희들이 복이라고 하는 것을 저주를 해 버리겠다’ 그랬단 말이요.
너희들이 복이라고 하는 것, 사람들이 복이라고 하는 것이 뭐가 있지요? 먹고 마시고 잘 사는 거. 그렇단 말이요. 건강한 거 일반사람들이 다 복이라고 한단 말이요. 그런데 사람이 바로 만들어지지 못했다면 너희들이 복이라고 하는 그것 전부 다 재앙으로 만들어 놓겠다, 저주로 만들어 놓겠다. 이미 저주를 했다 그 말이요. 듣지 못하고 마음에 귀담아 두지 못하면 이미 저주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귀로 알아듣는 지도자들이 몇이나 될까? 이거 참 궁금해집니다.
3절: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종자는 곡식의 씨요, 견책은 잘못을 나무라고 훈계한다는 말인데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라는 말은 너희들이 받은 씨앗, 너희들이 뿌린 씨앗, 그 잘못된 신앙책임을 사건적으로 묻겠다는 말이요.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그랬는데 제물로 희생이 되는 짐승의 똥을 얼굴에 칠을 해 버린다고 하는 것은 첫째로 제물의 짐승보다 더 못하다는 뜻이 아닌가? 두 번째는 의식만 행하고 마음중심은 딴 데 있고 거룩한 척 하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 가증스럽다고 하는 뜻이 아닌가 그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인격적으로 사람 앞에도 얼마나 수치스럽고 창피스럽고 부끄럽고 낯 뜨거운 일이겠느냐 그 말입니다. 똥을 사람의 얼굴에 칠을 해 놓으면 얼마나 수치와 부끄러움이 되겠느냐 그 말이요.
이 말씀은 ‘거룩하다고 하는 너희들,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너희들,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하는 너희들, 이방인들 앞에, 우상종교를 믿는 차원 낮은 민족들 앞에 너희들 얼굴에 똥칠이 되듯이 너희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을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참 부끄러운 일이지요?
4, 5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 하였으며.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이라’ 그랬단 말이요.
레위지파를 왜 제사장으로 세웠느냐 하면 생명과 평강을 주기 위해서 세웠다 그 말이요. 이는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세상의 자연생명, 자연평강 그게 아니고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세상 것, 임시의 것, 물질의 것, 없어질 것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장을 세워서 희생의 짐승을 잡아서 제사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희생의 제사 속에는 인간의 죄 사함이 들어 있고, 하나님의 생명과 평강이 내려지는 것이 들어 있는 겁니다.
제사장은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의 제사 후에 하나님의 생명과 평강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평강을 줄 의무가 있고, 책임이 있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는 안 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주시려고 하는 것인데 제사장이 안 받고, 백성들이 안 받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평강은 곧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삶이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이러한 영원한 축복을 안 받고 있으니까 그런 불행이 없다 그 말이요.
제사장의 직책은 참으로 책임이 무겁고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직책입니다. 이런 제사장들을 먼저 책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평강을 주시기 위한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두고 제사장을 세워놓으신 겁니다. 이런 영원한 축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란 말이요. 이것을 우습게 여기면 인간 자기에게는 앙화가 된다 그 말이요. 저주가 된다 그 말입니다.
6절: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직분을 무겁게 여기는 자는, 두렵게 여기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진정 하나님을 경외 했습니다.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고: 제사장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기준이 나옵니다. 진리의 법이라 그 말이요.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하나님의 기준, 척도, 하나님의 진리이치, 영원한 사상, 영원한 계명, 영원한 하나님의 소원 목적이 안 나오면, 즉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전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 되겠느냐 그 말이요. 하나님의 생명과 평강이 안 된다 그 말이요.
인간기준, 인간척도, 세상척도, 세상기준, 인간의 소원 목적, 인간의 사상 정신을 전하고, 그것을 받는 백성들은 방향과 목적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돌아가겠느냐 그 말이요. 완전히 세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세상적인 면으로 신앙이 굳어져 버리는 겁니다. 오늘날 이런 지도자들과 교회들을 너무 쉽게, 흔히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내로라’ 하며 떠들어도 전부는 세상인 것이고, 세상으로 돌아간 것들을 많이 볼 수가 있어요.
이방종교들은 숲속 곳곳에 사원을 짓는 운동이고, 사람 끌어 모으는 운동이고, 물질부흥 종교운동을 하지만 기독교는 먼저 건물 짓는 운동이 돼서는 안 돼요. 먼저 사람을 바로 세우는 운동이 기독교 운동이요. 즉 복음운동이라 그 말이요. 이 순서가 바꾸어지면 교회는 완전히 세상판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죄에서 구원했습니다. 건물부터 먼저 지은 게 아니라 그 말이요. 건물이 있어도 그 속에서 구원운동을 하지 않으니까 완전히 이방군대들을 불러모아가지고 성전을 때려 부숴버렸습니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그 말이요.
교회는 복음운동, 사람을 바로 만들어 놓는 운동,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는 운동입니다. 이것이 구원운동입니다.
죄에서 구원된 자를 진리이치로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켜지게 하고, 생명적인 것에 삼켜지게 하고, 사망적인 것에서 생명으로 살려내는 이 운동이 교회운동이요, 구원운동이요, 복음운동이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인간의 성격 성질, 좋은 목적과 취미 모든 면에서 사망권 아래에 있는 것을 생명권으로 올려놓는, 이전 등록시켜 놓는 이 일 전부는 죽을 것이 없게 영생으로 옮겨놓는, 진리이치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인격으로 닮게 하는 이런 것이 다 영운동이요, 생명운동이요, 평강의 운동이요, 살리는 운동입니다.
오늘날 교회 복음운동을 가만히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복음운동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본질에서 거리가 너무나도 멉니다. 건물도 많고 교인도 많은데 가만히 보면 교회가 완전히 세상놀음 판으로 돌아간 것을 흔히 볼 수가 있어요.
6절: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은 세상적인 기준 척도는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기준척도는 없어요. 전부는 하나님의 기준 척도요, 하나님의 의사요, 하나님의 소원 목적이요, 전부는 신령한 것이요, 하늘나라 천국복음이었습니다. 세상과 세상 것은 아니었어요. 질적으로 근본적으로 천국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보면 세상과 세상 것, 세상 계명적인 것, 세상천국을 공공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신령한 하늘나라의 그 천국이 아니고 썩어지고 변동되고 불타질 천국을 가르치고 있다 그 말이요.
성경에 그 어떤 말씀을 주셨어도 그 말씀의 의사적 깊은 뜻은 하나님 당신처럼 온전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일을 크게 해서 축복 받으라, 상급을 받으라’ 한 그 목적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본질적인 복음이 아닌 이것을 둘러엎어 치는 사단 마귀의 복음은 아무리 예수님 이름을 가지고 해도 그것은 비본질적이요 비진리적 이질적인 복인인줄 알아야 합니다.
그 화평과 정직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화평과 하나님의 의사적 단일성을 가지셨습니다. 의사적 단일이 아니면 화평이 안 되는 겁니다.
정직한 중에서: 정직은 일반사람이 말하는 일반적 자기 양심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생명의 도의 말씀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즉 사람의 어떤 감정이나 다른 사람의 어떤 형편과 다른 사람의 사정에 의해서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기준에 의해서 되어지는 정직이라 그 말이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그런 일을 하셨다 그 말이요.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장사꾼들을 예수님이 회초리를 만들어 내어 쫓는 것은 그 때 그 당시 그들이 볼 때는 예수님 자기의 어떤 개인감정으로 보여졌다 그 말이요. 그러나 우리가 자세히 보면 이것은 개인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라 그 말이요. 예수님께서 하신 그 일이 하나님의 법이라 그 말이요. 채찍을 만들어 가지고 성전 안에서 장사꾼들을 내어 쫓는 것은 개인감정에 의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의해 그렇게 한 거다 그 말이요.
첫째는 하나님 성전 안은 장사하여 유익을 남기는 곳이 아닙니다. 물질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닙니다. 성전 안은 하나님 말씀이 나오는 곳이고, 인간이 죄 사함을 받는 곳이고, 사람을 살리는 말씀을 받고 나오는 곳입니다.
두 번째는 성도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전으로서 성도의 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성도의 몸 안에 신령한 것이 들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세 번째는 교회는 하나님의 신령한 성품으로 바꾸어지고 자라는 곳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이 운동을 안 한다면 주님이 채찍을 만들어서 둘러엎어 버리고 장사꾼들을 몰아내듯이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재앙을 일으켜 가지고 물질 이해타산 적으로 예수 믿는 그런 자들, 물질 이해타산 적으로 나가는 지도자들, 종교지도자들과 교회들을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회초리, 철장을 가지고 질그릇을 부수듯이 부술 것이라 그 말이요. 이것이 개인감정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이라 그 말이요. 하나님 당신 개인감정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까지라도 인간 자기를 잘 되게 해 주기 위해서 하는 거라 그 말이요. 이게 하나님의 법이라 그 말이요.
진리이치는 누구는 잘났다고 봐주고 누구는 못났다고 안 봐주고, 돈 있다고 봐주고, 돈 없다고 안 봐주고 세상법관 모양으로 그런 것은 아니라 그 말이요.
세상에는 평형에 치우치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지요? 우리가 뉴스로 많이 봅니다. 그것은 잘못된 법관들입니다. 법이 소용없는 거지요. 개인감정에 치우치기 때문에!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그랬단 말이요. 동행성에는 의사적 단일성이라야 동행이 됩니다. 지혜지식적 기준, 도덕성의 기준, 능력성의 기준이 틀리면 의사적 단일이 안 되니 안 되면 같이 동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본질적인 운동은 사람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사람이 그 하나님의 뜻, 그 의사단일에 맞춰야 바른 신앙관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사성을 찾지 않고 인간 자기의 뜻, 의사대로 이루어 달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어그러지고 패역한 짓이지요.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할 수가 없다 그 말이요. 또 주님과 동행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의사성, 소원 목적성이 다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죄악에서 떠나게 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행동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옵니다. 행동 이전에 마음이 문제라 그 말이요. 마음을 바로 잡는 이것이 문제지요.
‘죄다, 악이다, 죄악이다’ 하는 것은 법도 어기고, 사람에게도 악을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도 죄이고, 사람 앞에도 죄이고, 천륜도 거스르고, 인륜도 다 거스린 겁니다.
보통 보면 ‘죄다, 악이다, 죄악이다’ 하는 것을 인간기준에서만 찾는데 그렇게 하면 인간에게 다 의롭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인 이것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은 인간에게는 영원히 멸망을 가져올 수 있는 겁니다. 그런고로 ‘죄다, 악이다, 죄악이다’ 하는 것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찾아야 옳게 바로 찾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찾는 것은 근본적으로 찾게 되는 겁니다. 인간 앞에 찾는 것은 근본적으로 못 찾아져요. 행동적으로만 찾으니까!
죄악을 근본에서 찾게 되면 인간의 소원 목적성의 그 방향성은 전부는 세상성으로, 아래로, 땅으로 향해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인간은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죄로 여기지 못하고 있더라 그 말이요. 죄라고 여기지 못하고 도리어 당연시 여기고 마땅히 여기고 있더라 그 말이요. 그것도 행동적으로 나쁘게 나타났을 때에야 사람들은 죄악시 여기고 있더라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근본적인 영적 사상적인 면에서의 죄악성은 찾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소원 목적성이 세상으로, 땅에게, 땅의 것으로 가는 이건 아래로 향해져 있는 것이고, 곧 하나님의 진리말씀에 배치가 되기 때문에 진리에 대해서 진리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진리와 충돌을 일으키고 마찰을 일으키고 진리와 하나님에게 대적을 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반드시 그렇게 돼 있다 그 말이요.
소원 목적적인 것이 세상과 땅으로 되어 있으면 이건 아래로 돼 있다 그 말이요. 천국은 위로 돼 있는 건데 아래로 돼 있기 때문에 진리와 항상 마찰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돼 나온다 그 말이요.
여기에는 비진리적인 신앙노선까지도 다 포함됩니다. 비진리적인 신앙노선은 세상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죄악에서 떠나게 한다는 것이란 세상성, 임시성, 땅의 것만, 아래 것만 소원 목적하고 살던 사람을 영원성 신령성 천국을 소원 목적하여 살게 하고, 비진리적 신앙노선으로 살던 자를 하나님의 본질적인 진리의 신앙노선으로 돌아오게 하는 이것을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한다 그 말이요. 진리신앙 노선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이것이 죄악에서 떠나게 하는 거다 그 말이요.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거다 그 말이요.
단순히 행동을 한두 가지 고치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온전이 아니라 그 말이요. 일반세상의 노선과, 일반세상 혹은 이방의 종교지식의 신앙노선에서는 사람이 죄악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캄캄하게 만들어지게 하고 굳어지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르치는 중요성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비뚤어진 지식이 박혀 놓으면, 특히 기독교 안에서 비진리적인 지식이 자기의 신앙기준적 지식으로 되어 놓으면 회개는 불가능하게 됩니다.
오늘날 회개가 불가능한 교회가 많습니다. 우리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런 개념을 잘 알고 가르쳐야 되겠지요?
우리 주님은 사람을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서 천국을 향해 갈 수 있도록 그 역사를 해 놓았습니다. 옳은 제사장은 이 역할을 하는 것이고, 신실한 주의 선지사도들과 종들은 다 이 역할을 하고 가는 겁니다. 교회 역할도 그래야 되겠지요?
그런데 교회가 들어가지고 사람을 더 죄악의 길에 빠지게 하고, 빠져서 나오지 못하도록 세상성으로 더욱 굳어지게 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7절: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라 그랬습니다. 중보자는 인간이 죄를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에게 전달시키는 중보자입니다. 그런고로 제사장이 갖는 지식은 일반세상 사람들이 갖는 지식, 일반적인 지식, 또는 일반 종교인들이 갖는 지식, 그런 하나의 종교적인 지식, 그런 개념의 지식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 앞의 제사장의 지식은 특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지식, 영적 신령한 지식, 영이 사는 지식, 사람을 신령한 성품으로 살릴 수 있는 지식, 사망에서 생명으로 전환을 시켜서 영생적으로 살릴 수 있는 지식, 진리이치의 지식이요, 생명적인 지식이요,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적인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겁니다.
지식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적인 영의 지식, 절대적인 기준적인 진리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이 하나님의 뜻이라든지, 하나님의 의사라든지, 하나님의 소원 목적이라든지를 신앙의 절대 정확한 기준을 찾는 사람들에게 말을 해서 하나님의 옳은 것을 가지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살 수 있게 하는 그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의 절대 정확한 진리지식을 갖지도 못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지를 못했다는 증거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옳은 뜻을 전달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이요. 그리고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옳은 것을 잘 판단해서 하나님께로 향해서 몸도 마음도 그렇게 바로 신앙하며 살 수 있겠느냐 그 말이요.
세상이 보낸 사자는 세상의 말을 합니다. 또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세상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요. 주 하나님께서 보낸 사자는 하나님의 참 백성인 영적 이스라엘 교회로 보내어지고, 또 교회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정평 정가하게 되고 심사를 해서 하나님 앞에 모두 인간 자기를 바로 세우는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교회는 하나님의 것을 구하고, 천국의 것, 신령한 것, 진리이치를 구하고, 깨닫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격적으로 사람이 바로 만들어지면서 가는 겁니다.
8절: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정도’란 인간이 지켜야 할 하나님께서 주신 절대 정확한 바른 도리, 진리이치, 생명이치입니다.
도의 말씀은 지식의 기준입니다. 또 인격의 기준이고, 정신의 기준이고, 사상의 기준이요, 행동의 기준이고, 생활의 기준이고, 성도들의 기준적인 말씀입니다. 이 기준적인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인간기준, 인간 편리주의로 하게 되면 정도에서 떠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전부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기준을 내어버리기 때문에, 이질적으로 다 나가게 되기 때문에 율법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평강을 주고자 함인데 하나님의 정도의 말씀에서 이탈이 되어 버리니까 율법대로 한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 앞에 진노의 형벌을 만드는 일을 한다는 것이지요. 기가 막힐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의 생명과 평강의 축복을 받아야 하는 건데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 그 말이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서 빗나가 버리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입지 못하게 되고, 진리이치의 깨달음도 없게 되는 겁니다.
9절: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도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항상 진리이치의 기준을 삼는 상태, 하나님의 기준을 찾는 상태, 하나님의 본질을 찾는 상태입니다. 그래야만이 사람에게 편벽되이 행치 않습니다.
인간의 어떤 사정이나 형편이나 인간의 외모 모양에 끌려서 판단이 되면 안 되지요. 하나님의 절대 정확한 진리이치의 척도대로 판단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아니면 옳은 진리지식을 갖는 사람이 안 되는고로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됩니다. 영적 신앙의 차원이 낮으면 인격적으로 멸시와 천대를 받게 돼요. 왜냐? 이방민족들보다도 더 깨닫지 못하는 상태로 떨어지게 된다 그 말이요.
사실 우리가 가만히 보면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도 일반적인 도덕적인 개념으로 해석을 해 나가고, 성도들은 그런 설교를 듣고 나가니 맨 달라고만 해 나가니, ‘주시옵소서’ 라고만 해 나가니 교회 다니는 교인들이 깨닫는 면에서 일반사람들보다도 아주 저차원이 돼 버립니다.
이렇게 되니, 이렇게 차원이 낮아지니 성도의 차원이 어떻게 되느냐 그 말이요. 완전히 불신세상에 밟혀버리고 마는 겁니다. 인격이 안 올라가니까 그렇다 그 말이요.
영적 신앙 면서 보는 저질적인 신앙상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가 이방인들과 똑같이 세상을 구걸하는 신앙상태가 돼 버리는 겁니다. 이 멸시와 천대성은 영원히 간다 그 말이요.
누구에게 무시를 당하는 그것만 보지 말고 신앙의 차원이 불신세상들과 똑같은 세상을 구걸하는 그 차원이 됐다면 이것은 저질적인 차원이라, 성도가 영원히 천덕꾸러기라! 이런 차원이 돼 버렸다 그 말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이 진리지식을 깨닫는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도 차원이 낮은 이 면을, 낮은 상태를 멸시와 천대성으로 전혀 느끼지를 못하고 있더라 그 말이요.
교회가 온통 세상사상으로 돌아가는 이것을 세상에게 정복을 당하고, 세상에게 노예가 되고, 세상에게 짓밟히고, 세상성에게 농락을 당하고, 세상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는 영적인 신앙생태를 전혀 느끼지를 못하고 있더라 그 말입니다. 이거 참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얼마나 낮으면 그 상태를 못 느끼고 있다 그 말이요.
10절: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궤사는 간사스러운 거짓말로, 또는 거짓행동으로 아주 교묘하게 속이는 겁니다. 겉으로는 잘 해 주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딴 목적이 있는 겁니다.
같은 민족, 같은 동족, 같은 혈족끼리, 이웃끼리, 가족끼리, 형제끼리, 부부끼리, 부모자식 간에 서로 속이고, 사기치고, 물질 욕심 때문에 결혼하고, 그리고 뒤로 가서는 딴 사람하고 딴 짓하고.
이런 일반적인 짓들은 누구든지 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사실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정신적 사상적 그 이치를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느냐 하는 그 이치를 사상적으로 알아야 되겠다 그 말이요.
인간의 소원 목적을 세상 쪽으로 돌려버리면 전부 다 간사한 사람들이 되어지고 마는 겁니다. 거짓말쟁이들이 다 돼 버린다 그 말이요. 사상적으로 정신적으로 세상 쪽으로 틀어놓으면 전부다 속이고 속여먹는 거짓된 세상이 되어버리고 만다고 하는 이 이치를 우리가 알아야 되겠다 그 말이요.
왜 그런가 하니 세상은 늘 움직이고 변동을 합니다.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쳐다보게 하면 사람이 움직이는 그것을 자꾸 쳐다보고 따라가게 되니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겁니다.
사단 마귀가 에덴동산에서 아담 하와에게 선악과를 보게 해서 따먹게 하니까 이제 막 결혼한 부부인데 서로 믿을 수 없는 부부가 돼 버렸습니다. 진실성이 없어져 버렸다 그 말이요. 그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믿음성이 없고 신실성이 없어. 어떤 말을 해도 믿을 수가 없어.
온 가정이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살면 가정식구들끼리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이치를 알아야 됩니다. 왜냐? 세상을 붙들었기 때문에! 세상은 전부 움직인다 그 말이요. 세상을 목적을 하고 붙들었다 그 말이요. 우리는 세상을 목적하고 붙드는 게 아니라 이용을 하기 위해서 붙든다 그 말이요. 그걸 알아야지요. 다릅니다. 세상이 움직이니 인격적으로 신실성이 없어지는 겁니다.
교회가 거짓 종들의 가르침을 따르면 그것은 세상적으로 나가는 방향이기 때문에 그 믿음성도 전부는 신실성이 없어요. 세상바람이 잔뜩 들어 있는 믿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믿을 수 없는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 말이요. 고로 거짓 종들이 많으면 교회는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돼 버립니다.
세상을 구하는 교회가 많다고 하는 것은 거짓 종들이 많다는 것과, 교회들이 거짓적인 믿음들을 가졌다는 증거이고, 세상을 구하는 자기는 거짓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것이고, 그 교회는 거짓 종을 모셨다는 증거입니다.
교인들의 활동이 문제가 아니라 활동하는 그 정신, 운동이 세상운동을 하는 하나의 종교적인 사상입니다.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종교적인 사상입니다. 안 믿는 세계에서도 볼 수 있는 거라 그 말이요.
계시록에 보면 산을 타고 앉은 여자, 물을 타고 앉은 여자, 짐승을 타고 앉은 여자가 보이지요? 타고 앉았다고 하는 것은 간사스럽게도 교묘한 거짓으로 복음을 물질적 세상에 다 붙여서 방향을 그렇게 교회들을 속여가지고 교회들을 넘어뜨리고 있다고 하는 거지요. 물을 타고 앉은 여자 이게 다 교회요, 교회는 역시 교인들입니다.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평강으로 된 언약을 받을 줄 모르고 저희들이 다 둘러 엎어버렸다는 말입니다.
11절: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성전을 욕되게 해서 이방신의 딸과 결혼을 했다고 그랬지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성령님이 그 몸을 성전으로 해서 거룩한 성령님이 거하는 거룩한 전입니다. 왜 그런가 하니 죄 사함을 받았고,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은 하나님의 본질로 중생을 해서 거듭났고, 거듭난 중생된 영과 함께 성령이 내재해 계시는 우리의 몸은 거룩한 전입니다.
우리 몸이 더러워지는 것은 세상사상, 세상정신, 물질적 소원 목적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를 더럽힌다고 하는 것은 벌써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정신 사상이 문제가 되어 있는 겁니다. 교인들보다도 먼저 신앙의 지도자들 속의 그 정신 사상이 진리의 정신사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에서 이탈된 이질적인 정신 사상이라 그 말이요.
이방신의 딸과 결혼을 했다고 했지요? 이방신의 딸은 첫째는 이방우상 신을 전문적으로 섬기는 이방여자이거나, 두 번째는 이방우상 신을 전문적으로 섬기는 가정의 딸이거나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솔로몬 왕이 이방우상을 섬기는 이방여자를 수없이 많이 취하더니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나라가 두 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참 불행하지요?
그 후 북조 이스라엘 아합 왕이 이방우상을 섬기는 이세벨을 끌어들여서 결혼을 해 가지고 아내로 삼더니 회개를 하라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의 말도 듣지 않고 도리어 선지자를 잡아 죽이려고 하더니 시체들은 모두 들개 밭이 돼 버렸고, 왕손들도 죽고 대대로 망해버렸습니다.
노아홍수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타락해서 끌려들어 가더니 하나님의 심판의 홍수에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방우신 신을 섬기는 여자들은 우상 앞에서 제사나 행사를 행할 때에 혼란스런 옷으로 치장을 합니다. 또 춤으로 무용을 합니다. 몸매와 몸짓은 요염한 자태로 항상 음색을 띱니다. 이방정신 사상을 가지면 외모 모양에 노출하는 면으로 신경을 쓰게 돼 있고, 누림성에 매우 자유분방하게 돼 있는 것입니다.
돈과 재산에 사람의 가치를 두고 결혼을 해서 죽을 때까지 눈물과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방신의 딸과 결혼을 했다고 하는 이것을 신앙 사상적인 면에서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 소원 목적성이 완전히 물질적 세상의 누림성의 정신 사상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사실 또 이방우상의 물질적 정신 사상으로 나가게 되는 그 가정에는 진리이치의 교육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방우상의 정신 사상을 가지면 성령의 역사는 이미 그 사람에게서 떠나고, 그 가정에서 떠나고, 그 교회에서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남은 것은 심판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니 12절에 보면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 그랬단 말이요.
여기서 꾀는 자는 이방우상을 섬기는 선지자요, 지도자요, 응답하는 자는 그 지도자의 명령에 복종하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런고로 아무리 여호와의 이름으로 제사를 드린다고 해도 그 근본적인 정신 사상은 이방우상을 섬기는 정신 사상이니까 하나님의 축복의 대열에서 끊어버리신다고 하는 말씀이라 그 말입니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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