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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이단] 구원파를 왜 이단이라 하는가

목회독서교육 옥한흠............... 조회 수 5985 추천 수 0 2007.09.28 21:20:37
.........
출처 :  
구원파를 왜 이단이라 하는가

이 글은 「목회와 신학」91년 3월호 특집(이단시비에 휘말린 교회들과의 이론다툼 Ⅱ)란에 실렸던 구원파(기독교
복음침례회)에 대한 글(권신찬/천청웅 씀)을 읽고, 침례신학대학 정동섭 교수가 보내온 글이다. 실제로
구원파 교회에서 8년간 핵심적으로 일해왔던 그는 신학적인 성찰을 통하여 “구원파는 의지적인 회개와
믿음이 빠진 깨달음에 의한 구원을 전하며,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 즉 기도와 예배를 부인하고 자기를
교회(기독교 복음침례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착각과 독선에 빠져있는 무서운 이단(herasy)" 이라고
밝힌다. 앞으로도 「목회와 신학」에서는 신학적 토론과 접근을 위한, 독자들의 자유로운 기고를 기대한다.

Ⅰ. 머리말
필자는 기독교 한국침례회 소속 늘사랑 침례교회에 출석하며, 그리스도를 섬기는 침례신학대학의 기독교
교육학과 교수로서, (주)세모 사장이며 구원파 교주인 유병언씨와 그의 일파 여섯 명으로부터 1990년 11월
명예훼손 혐의로 대전 서부경찰서에 고소당한 바 있다. 이단 구원파에서 계획한 수순에 따라, 필자는 두
번째 조사차 경찰에 출두하였다가 서부 경찰서에 수감되었고 그날 밤 자정에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그후
진잠 교도소에서 15일간 감방 생활을 하다가 기독교 한국 침례회 총회와 침신 교수님들로 구성된 대책위원회의
활동, 침신대학 공동체의 두 차례에 걸친 평화적 시위, 그리고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에 속한 여러 교회의
진정과 기도, 기독교방송과 극동방송, 국민일보 등의 보도에 힘입어 필자는 구속 적부심을 통과, 12월
7일 불구속 석방되었다.
필자가 고소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세상에서 자기의 위치를 굳게 할 속셈으로”“멋대로 지어낸 내용을
가지고” 침신대학원 논문을 쓰고 각종 집회와 서적을 통하여 구원파를 이단으로 “매도”했는지 유씨의
억지주장대로 “고소인 유병언 목사(사장)의 (주)세모에서 생산되는 영양식품(스쿠알렌)과 한강 유람선,
인천 제주간을 운행하는 쾌속정 등 각종 사업이 번창하자 고소인의 사업상 손실을 가할 목적으로”개인의
명예를 훼손한 것인지, 아니면 그릇된 이단 교회의 영향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이혼하는 등 한국과 미국의
교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 혼란과 가정 파탄을 막고 나아가 정통 교회를 이단 구원파로부터 보호한다는
공공 유익을 목적으로 신학대학 교수의 신분으로 이단 교주의 부도덕성을 노출시킨 것인지는 재판 과정을
통해 백일하에 드러나리라 기대한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대로, 거짓 선지자의 본색은 그의 열매를 통해 드러나게 마련이다.(마
7:16, 18) “나쁜 열매”는 이단학의 권위자 월터 마틴(Walter Martin)의 말대로 교리적―신학적 윤리―도덕적
영역에 꼭같이 나타난다. 기독교 복음침례회는 그 가르침과 행습의 열매로 볼 때 역사적인 정통 기독교(Orthodox
Christianity)과 거리가 먼 사이비(가짜)기독교 집단이다.
잠언 23장 6절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했다. 사상이 잘못되면 그
사람의 행위가 잘못되게 마련이다. 오대양 사건에 관련된 피해자들을 비롯해 이 집단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재산을 바치고 이혼한 피해자들은 한두 명이 아니다. 이 기회에 구원파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오늘까지
발전해 왔는지를 약술해 소개하고 구원파의 두 지도자 권신찬 씨와 유병언 씨의 저서를 근거로 그들의
핵심적 가르침이 어떤 것인가를 한국교회 앞에 밝히고자 한다.

Ⅱ. 구원파의 약사
월터 마틴(Walter Martin)이 정의한 대로 이단(cult: 異端)은 “어떤 특정인의 그릇된 성서 해석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다. 구원파는 1961년 4월 미국인 독립선교사 딕 욕(Dick York)의 영향으로 “복음을
깨달은” 유병언 씨와 1961년 11월 네델란드 선교사 길기수(Case Glass)의 영향으로 “죄사함을 깨달은”권신찬
씨에 의해 대구에서 시작되었다(권씨과 유씨는 장인 사위의 관계이다). 따라서 구원파는 한국에서 생겨난
자생적 이단은 아니다. 이들 선교사들을 통해 구원을 “깨달은” 두 지도자는 1963년경부터 선교사들과
관계를 끊고 독자노선을 추구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성경을 왜곡함으로 이들의 교리는 변질되어 갔다.
한편 항간에 큰 물의를 일으키며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을 설교하고 있는 박옥수 목사는 체계적 신학
배경이 없는 딕 욕, 길기수, 데릭 얼(Derek Earl) 등 독립선교사들이 1961년 대구에서 운영했던 “성경학교”에서
유씨와 함께 공부하다가 1960년대 초반에 그와 결별하고 '대구 중앙교회'를 독립 목회하던 사람이다. 그는
1982년경부터 전국 주요 도시에서 대한 예수교 침례회의 간판을 걸고 활동하고 있으며 딕 욕(Dick York)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장인―사위 관계를 맺은 권씨와 유씨는 대구, 안양, 서울, 인천 등지로
활동무대를 넓혀 가다가 1966년 2월 권씨는 극동방송의 전신인 국제복음주의 방송(HLKX)에 방송목사로
부임, '은혜의 아침' 프로를 통해 “회개와 믿음(trust)"이 빠진 “깨달음과 시인”에 의한 “구원의 복음”을
전파했다. 따라서 “청취자들 중에 수천명의 사상전환자들이 생겨났다”( '우리의 걸어온 길' p. 1). 청취자들을
중심으로 1969년부터 1982년까지 구원파는 '평신도 복음 선교회' 라는 간판아래 활동하였다.
1970년대 초 석유파동으로 극동방송 운영이 어려워지자 구원파 측은 한국어 방송을 전담하는 조건으로
1972년 당시 방송을 운영하던 TEAM(국제 복음주의 동맹)선교회 측과 방송운영에 참여할 것을 계약했다.
권씨가 이미 방송 목사로, (이번엔 필자를 고소하는 데 동참한) 이용화 씨가 방송부장으로 있는 서울 극동방송에
유병언 씨는 부국장으로 입사하고 1968년 대학 3학년 재학중 유씨에게 포섭되어 충성을 다하던 필자는
1972년 PD겸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3대째 장로교인으로 8년간 목회를 하면서도 양심에 평안이 없이 갈등하다가
“복음을 깨달았다”는 권씨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해 연일 “기존 교회의 새벽기도, 예배의식, 주일성수,
십일조 ,장로 집사제도는 율법적”이라 비난하면서 “율법과 죄책감과 종교에서 해방받을 것”을 설교했다.

1974년 2월 기장, 예장, 성결교, 하나님의 성회, 구세군, 복음교회 등은 공동으로 “권신찬 목사의 행위가
시정되지 않을 경우 극동방송 청취를 거부하는 운동을 벌이겠다는 질의서”를 극동방송국장에게 발송한다(「기독공보」,
1974. 3. 30). 이에 당황한 TEAM 선교부 측은 여러 차례 숙의 끝에 극동방송 탈취 음모를 꾸미던 구원파측
직원 11명을 1974년 7월 30일자로 해고했다.
구원파의 운동방향을 총지휘하던 한국 평신도 복음선교회의 교주 유씨는 모임의 구심점을 상실했다고
판단, 교인이 운영하던 부실 기계자수, 회사 삼우 트레이딩을 인수, 교인들의 헌금으로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막대한 헌금을 사업에 투자하는 것을 반대했던 지도자 이창범 목사(인천)가 1978년에 500여
교인과 집단 이탈했고, 1983년에는 구원파 자체 내에서 안수를 받은 이복칠(이요한)목사가 역시 권신찬,
유병언 계의 사업운영을 비판하다 집단폭행을 당하고 전국 5천여 교인과 함께 이탈했다(이 사건으로 구원파
교인 5명이 대전에서 구속되었다).
1980년 정부의 무인가 신학교 정비에 대한 정책이 공표됨과 아울러 구원파 측은 1981년 1월 '기독교 복음
침례회' 창립총회는 서울 용산구 삼각지 서울 교회당에서 가졌다며 일간신문을 통해 교단 창립공고를 발표하였다.
이에 자극된 이복칠 씨는 서울 방배동에 본부를 두고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교단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박옥수 씨도 '대한 예수교 침례회 중앙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대전시 변동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교세를
넓혀 나가고 있다. 변동 주유소 옆에 위치한 '한밭중앙교회'가 바로 이들의 본부 교회로 알려져 있다.

현재 구원파의 교세는 국내에 130여개 지역교회, 미국, 캐나다, 독일의 주요 도시, 남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등에 50여개 지역교회가 퍼져 있는데 미국 LA를 중심한 남가주 지역에서는 10년째 권씨의 설교가
TV를 통해 매주일 아침 방송되고 있다. 한편 미국의 주요 도시와 캐나다의 토론토 등 8개 대도시에도 매주
30분씩 TV설교가 방송되어 꾸준히 교세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구원파에서는 침례교 세계대회가 서울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리기 직전인 90년 8월 5∼12일에 서울 올림픽 공원에서 22회 하기 수양회를 가졌는데 2만여
명이 참석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필자는 1968년부터 1977년까지 구원파 교주 유씨의 통역과 홍보를 담당하면서 8년간 이 집단의 변화과정을
낱낱이 지켜본 장본인이다(필자가 구원파 측으로부터 살해위협을 받고 이탈하게 된 배경은 '현대종교'
1990년 5월호에 상술되어 있다). 필자는 그 집단에서 유씨와 관련해 경험한 것만을 하나님 앞에서 말하였다.
그런데 유씨는 필자가 “종교와 하등 관계가 없고 그 사업이 구원파와 전혀 관계가 없는데 구원파 종교에서
운영하는 양 허위사실을 말하여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고소장에서 억지를 쓰고 있다.
권씨와 유씨의 기만적인 설교에 현혹되어 수천만원을 바치고 알거지가 된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권씨와
유씨의 설교에 현혹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구원받은 교인들은 한데 모여 생활해야 한다.” “떨어져
있으면 휴거하지 못한다. ”“우리 생전에 이 세상은 끝나게 된다. ”“예루살렘 성전이 다 완성되고 있다.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면 인(문신)을 새겨야 필요한 생활용품을 구하게 되는 그날이 온다. 이 인을 받게
되면 휴거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게 땅을 산다. 공장을 짓는다. 삼우 회사를
도와야 한다. ”그들은 이같은 내용을 반복 설교해 남의 돈까지 차용해 바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다. 1984년 6월에 권씨의 둘째 아들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송재화 여인도 채권자들로부터
고소당해 최근에 검사 앞에서 유병언 사장이 교주임을 시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죄사함을 받으므로 양심이
해방되면 마음대로 거짓말을 해도 되는지 모든 것은 공판정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유씨는 고등학교 졸업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림, 조각, 설계 등은 물론 다양한 호신술을 겸비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권씨나 유씨는 본래 나쁜 뜻으로 구원파를 만들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의
의도 가운데는 선량한 뜻이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서서히 사단의 압력을 받아
오도된 성경해석으로 부패할대로 부패해 썩은 냄새를 발하고 있다.
이런 이단은 우리나라에서만 출몰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영국, 아프리카 등 다른 곳에서도 거짓 선지자는
계속 일어났다가 사라져 간다.
로이드 죤스 목사는 이단의 생성과정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과거의 이단들은 매우 선량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을 통하여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계 역사는 이 모든 이단들이 얼마나 교활하며, 성경의 전체적인 메시지의 상관관계와 믿음 사이의
평형을 유지하지 못한 나머지, 마귀의 압력을 받아 한가지 특정한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계속
궁지에 몰리게 되면 결국에 가서 진리와 모순되는 얘기를 하는 입장에까지 도달하여 하나의 이단으로
전락하여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Ⅲ. 구원파 비판에 임하는 입장
1991년 「목회와 신학」 3월호에 실린 권신찬 씨의 글을 읽고 같은 지면에 총신대 천정웅 교수께서 권씨가
초기에 받았던 비판 떄문에 그 입장을 수정했는지, 이단성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제한된 시각을 개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분이 구원파 자체내에서만 읽히는 저들의 설교집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권씨와 유씨가 이단이 아니고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면 필자는 공연히 그들을 오판했던 것이고 헛되이 고난을
받은 셈이 된다. 필자는 그들이 발간한 대내 교육용 책자와 전도용 설교집, 그리고 정기 간행물을 근거로
구원파의 교리가 왜 “다른 복음”에 해당되는지를 규명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구원파' 라는
종교집단을 비판했던 다른 이단 비평가들과는 입장을 달리한다. 이단 비평가들 가운데는 이단에 빠져본
경험이 없이 객관적 입장에서 신학적으로 이단을 비판한 분들이 많다.
구원파는 1973년과 1984년에 걸쳐 이미 정통교단으로부터 이단집단으로 규정된 바 있다. 여러 교단에
속한 신학자들이 이들을 이단이라 정죄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와 성서적 근거가 있다. 그런데 이 이단 전문가들의
비판이 피상적이고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경험하지 않은 내용을 이단들이 내놓은
서적들을 근거로 해서 분별하기 때문일 것이다.1
본인은 1968년부터 1977년까지 8년간을 구원파 소속 교인으로 충성했던 사람이다. 1960년대 초, 이 모임이
형성된 후 이 집단에 빠졌다가 실망하거나 이런 저런 피해를 보고 그 모임을 떠난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본인도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구원파의 두 지도자 유병언 씨와 권신찬 씨의 측근에서 통역 및
수행원 역할을 했었다. 1976년 영국 대사관 직원으로 영국을 여행하던 중 경험했던 내용을 근거로 구원파
지도층에 기도생활의 필요성과 초교파적 교제의 필요성에 대해 제언한 것이 화근이 되어(이는 그들의 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나는 결국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 구원파를 이탈하게 되었다.
구원파의 속박에서 벗어난 나는 3년간의 방황 끝에 서울 사랑의 교회 수련회에서 구원파에서 말하는 구원이
아닌 참 구원을 받았다(본인의 구원 간증은 「현대종교」1990년 5월호에 상세하게 소개된 바 있다). 예수님과의
아름다운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크리스챤이 된 나는 2년간 사랑의 교회 집사로 정상적인 신앙생활의 기쁨을
누리던 중 대전 침례신학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기독교교육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이때 발표한 졸업논문이
“구원파(기독교 복음 침례회)와 남침례회의 비교연구”였다.
본인이 구원파의 영향권을 떠나 하나의 자유인으로 정통 기독교 안에서 초교파적인 교제를 나누어 온지
벌써 14년째로 접어든다. 해가 갈수록 진리의 빛은 더욱 밝아지고 그만큼 구원파 교리의 거짓됨은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두움은 빛 앞에서 그 정체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이제 1991년의 시점에서 구원파(기독교 복음침례회)의 교리를 비판해 볼 것이다.

Ⅳ. 구원파의 교리비판
구원파는 다른 이단과 마찬가지로 대외선전용 신조와 대내 교육용 교리를 함께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이 제시한 12신조(성경, 삼위 하나님, 죄, 구원, 교회, 재림, 천년왕국, 지옥, 천국 등 주제에 대한
신조)의 내용은 복음주의적 기존 교단의 신앙내용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새길」 1990년
11, 12월 p. 32).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집단 지도자(권신찬 씨와 유병언 씨)가 성경이 아닌 본인의 경험에 근거해 가르치는
해괴한 주장과 가르침이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서 너무나 이탈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권씨는 자파
교인들에게 “우리의 이 신앙생활은 일반 교회생활과는 아주 틀리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교량」,
1989년 3월 p. 15).
그러면 우리나라 최대의 교단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1984년 9월 이미 이단으로 규정한 바 있고
1990년 11월 구원파 실세 (주)세모 사장 유씨에 의해 고소당해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바 있는 본인이 1984년
석사 논문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바 있는 세칭 “구원파” (복음침례회)가 왜 이단인지를 항목별로 제시해
보기로 한다.
권신찬 씨는 정통교단의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썼던 「세칭 구원파란」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누구든지 우리가 주장하는 진리가 성경에 위배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우리를 비판해도 상관없다”고
호언한 적이 있다.(p. 15)
필자는 어느 특정인을 공격할 의도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이 집단의 가르침이 많은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적 해악을 끼치는 “다른 복음”곧 거짓된 가르침에 해당된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교리)을
성경에 비추어 비판하자는 의도에서 구원파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것임을 거듭 밝힌다.

1. 성서관
최삼경 목사가 그의 최근 논증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단 논쟁은 성서해석학적 논쟁이다. 그들도 신구약
성경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 말하며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모든
정통 기독교단에서 준수하고 있는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에 대해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체계적 신학교육을
무시한 채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이단사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우화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일삼고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권씨는 기도와 예배를 부인하기 위해 말라기 3장 16절을 문맥과 관계없이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일을 위해 서로 상의하고 의논하는 성도의 교제는 참으로 중요한 기도가 되는 것이다” (권신찬,
「한국일보」, 1989. 3. 22, 전면광고)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새벽기도, 합심기도, 금식기도
등 개인적인 기도는 필요없고 구원파 교인들끼리 사업과 교회일을 논의하는 교제가 기도를 대신한다는
억지해석이다.
한편 유병언 씨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간다”는 그의 선입관을 강조하기 위해
요한복음 14장 6절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에 “나”는 “교회”즉 구원파
교회를 나타낸다고 영해하는 것을 서슴지 않고 있다(「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제4권).
그들은 성서본문의 의미를 끌어내어 석의(exegesis)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본문에 집어넣어
해석하는 데 익숙해 있어 이들의 설교는 우화적인 해석과 억지해석(eisegesis, 벧후3:16)으로 가득차 있다.

구원파 지도자들의 엉뚱한 성경해석 사례를 더 확인하기 원하는 분은 필자의 논문 “구원파와 남침례회의
비교연구”(침례신학대학 대학원, 1984)를 직접 참고하기 바란다.
구원파에서는 신구약 성경을 주로 예언서로 취급하고 있다. 구약의 예언이 주로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어(요5:39)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예수 재림에 대한 예언들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은 정통교회에서도
모두 공감하는 진리이다. 그러나 권씨와 유씨는 설교의 내용 대부분을 구원과 교회 종말에 할애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다(whole, complete counsel of God, 행20:2)”전하지 않을 뿐더러 그 내용이 거짓되기
때문에 이단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한부 말세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여러 출판사를 통해 「임박한 대환란」, 「세계독재자와
666」 「카운트다운 예수재림과 휴거」, 「한계에 도달한 인류역사」, 「인류파멸의 징조와 중동사태」,
「위험한 지구」등의 책을 출간할 뿐 아니라 말세의 징조를 수록한 스크랩 북을 만들어 전도용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에게 사실상 성경에 버금가는 권위를 지니고 있다.
자신들만 복음의 진리를 간직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이들은 교인들에게 자파지도자들의 설교집과
종말을 주제로 다룬 책만을 읽게 할 뿐 정통교단에서 나온 신앙서적은 읽지 못하게 한다. 이는 그들이
부르짓는 복음이 보편타당성이 있는 진리가 아닌 “다른 복음”즉 거짓된 복음임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2. 하나님관(삼위일체론)
권씨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면 이단이라면서, 그들의 신조에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심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들이 정통교회의 입장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구원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도와 예배를 부인하거나 이를 '교제'로 대치시키고
있다는 점이다.(기도관에서 언급하겠지만) 권씨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만이 기도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말하면서(「세칭 구원파란?」, p. 104) 설교를 마칠 때 하는 형식적인
기도에서도 권씨나 유씨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 적이 없다고 언제나 “주님”께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써 삼위를 구분하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모든 정통 교단의 크리스챤들은 기도할 때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엡2:18)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언급되는 적이 없다. 유씨는 교회를
“성령의 몸”이라 칭하기도 하고 요한복음 14장 6절이나 15장 5절을 강해할 때 예수님을 성령이나 교회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을 구분하는 것은 구원파 지도자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다음으로 구원파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이다. 구원파 지도자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영으로 거론하며 세계역사를 주관하는 이신론적 존재로 부각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인격적인 영(personal spirit)'이시다. 구원파의 신관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성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권씨는 “지성이나 감정이나 의지로써 영이신
하나님과 접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양심의 해방」, p. 9)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로서 의지적인 회개와(지정의를 포함한) 전인격적인 믿음(신뢰)을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구원파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 하나님의 임재성을 말하지 않고 있다. 구원파는 초월적
힘으로써 예언을 성취하시는 이신론적 하나님을 부각시키나 성도들의 기도를 듣고 역동적으로 성도의 생활에
개입하시는 인격성을 부인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의 설교를 듣거나 읽어보면 예수님의 신성은 강조되고
있으나 인성은 거의 무시되고 있다.
성령은 전세계적으로 두루 운행하시며 진리의 영으로 죄를 깨닫게도 하시고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사역을
하시지만 구원파의 성령님은 한국에 머무르고 있으며 구원파 내에서만 집중적으로 역사하고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모든 이단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탈선하고 있다. 구원파는 하나님의 인격성(personality)대신 영성(spirituality)만을
부각시키고 예수님의 인성보다 신성이나 초월성만을 강조하고 성령의 보편적인 역사를 부인하고 제한하는
것이 특징이다. 비인격적인 힘(impersonal force)이 되시는 하나님을 신봉할 때 그러한 편협된 신을 믿는
이들의 행동과 생활은 비인격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구원파 지도층은 그들을 비판하거나 집단을 이탈하는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그들을 세상법정에 고발하여 구속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3. 구원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기독교 복음 침례회'는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깨달음에 의한 구원”“율법과
종교에서의 해방(자유)”을 강조하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은 그들에게 구원파, 깨달음파, 중생파, 구원깡패
등의 별명을 붙여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눅19:10).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이단이라면 기독교의
모든 정통도 이단이라 규정해야 마땅할 것이다. 구원파를 이단이라 단언하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구원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인 것이다. 교회사나 성서신학의 기준을 모르는 평신도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들의 가르침에 현혹(미혹)되어 넘어가는 이유는 그들이 성서적 용어를 정통 기독교와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단은 구원, 종교, 기도, 예배 등의 단어를 기존 교회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면 구원파에서 말하는 구원이 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닌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구원의 조건
첫째로, 구원파의 구원에는 의지적인 회개와 결단이 빠져있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빠져있다. 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파의 두 지도자
권씨와 그의 사위 유씨는 몇 대째 장로교인으로 율법에 얽매인 종교생활을 하다가 1961년 11월 18일과
1962년 4월 7일에 각각 “복음을 깨달았다”고 한다(「양심의 행방」, 「영혼을 묶는 사슬」참조). 문제는
이들의 구원(중생체험)이 성경에 근거를 두었다기보다 두 지도자의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성경말씀에서 자신들의 죄가 용서된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들의 주장은 성서적
규범과 교회사에 나타난 선배 성도들의 회심경험에서 이탈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구원파 소속 교인들은 전도 대상자에게 “구원 받으셨습니까? ”라는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미 그들과 접촉해 본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그들은 기존 교인들을 만나면 먼저 ①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② 당신은 완전히 중생했습니까? ③ 당신은 지금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등의 질문을 던져 구원의 확신에
대해 혼란을 일으킨다. 제 2단계로 기존 교회의 약점을 들추어(예를 들어 교인들이 육신적으로 힘겹게
생각할 수 있는 새벽기도, 십일조, 성전건축, 목회자 우대 등의 부당성을 지적함) 기성교회를 부정하게
한 다음, 제 3단계로 그리스도 재림의 임박성을 강조하여 공포심과 죄의식을 불러일으킨 다음 그들의 구원
공식을 따라 해방감을 안겨 준다. 양심의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 율법의 억압에서의 해방, 종교에서의
해방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두 지도자가 율법적인 종교생활에도 불구하고 확신과 안식이 없는 교회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경험에 근거하여 기존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행하고 있는 예배행위, 십일조, 헌금, 장로 집사제도, 주일성수,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 등을 모두 종교라고 규정하며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받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기존 교회에 대한 반작용으로 타당성이 없는 개인적인 종교관을 만들어 낸 것이다.
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한다고 했고 바울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받았다”(엡1:7)고 했다. 따라서
구원파에서 말하는 구원은 극히 성서적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구원의 첫 단계인 중생의 체험을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20:21)"을 통하여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개인적인 대면이요, 만남이며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함으로 즉 그를 구주와 주님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를 맺음으로 크리스챤(예수님의 제자)이 되는 것이다(M. T. Rankin).
성서적인 믿음, 즉 구원받게 하는 회심은 지, 정, 의를 포함한 전인격적인 존재인 인간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이다.
구원파의 구원에 가장 두드러지게 빠져있는 것은 의지적인 회개와 의지적인 위탁(commitment)으로서의
믿음(trust)이다. 구원받는 믿음에는 진리에 대한 인식과 지식적인 동의와 의지적인 위임(위탁)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구원파의 구원관에는 의지적인 위임(내맡김)으로서의 믿음과 의지적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repentance)가 빠져 있다. 회개와 믿음(행21:20)은 초대교회 사도들로부터 교회사 전체를 통해 모든
성도들이 구원의 두 가지 기본 조건으로 제시해 왔다. 그러므로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구원받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구주 예수님을 만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이
없이 크리스챤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워치만 니(Watchman Nee)의 삼분설에 영향을 받은 권씨는 사람의 인격을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해 설명하면서
“영이 하나님을 접하는 것은 양심으로만 알 수 있다”(양심의 해방)고 강변한다. 계속해서 그는 “영을
자기의 인격적인 활동과 혼돈하며 인격의 일부인 이지(理知)나 감정이나 의지로서 영이신 하나님과 접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p. 9)고 주장한다.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지적인 회개(돌이킴)와 결단이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영접하는
것은 의지의 작용이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망하리라”(눅13:3)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행17:30)고
설교했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고후7:10)를 말씀하셨다. 베드로도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으라”(행2:38)고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회개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구원파에서는 회개가 빠진 피동적인 깨달음에 의한 구원을 전하고 있다.
구원파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자범죄로 인한 죄책감보다 아담의 죄로 인한 원죄를 더 강조한다.
따라서 회개가 필요없다고 말하며 회개를 언급할 때도 “회개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인도되는 것”이라며
“죄사함이 회개에 앞선다”고 특이하고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다.(「임박한 대환란」, p. 145)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회개에는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의식이 앞선다. 그리고 의지의 작용에 의한 죄로부터의 방향전환을 동반한다. ” 회개는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돌이키는 의지적인 결단이다. 구원파의 구원에 빠져 있는 것은 바로 이 회개이다.
회개는 천국의 열쇠이며 죄사함은 천국에 이르는 관문이다.(빌리 그래함, 「불타는 세계」 p. 21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죽으셨다”(벧전3:18).
중요한 것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를 덧입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하나님과 나의 전체적인 관계이다. 내가 죄를 회개하고(막1:15)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요1:12)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어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다.

구원파에서는 일반 정통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예수께 나오라(마11:28),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행2:38:
16:31), 예수를 영접하라(요1:12)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을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다 이루어 놓은 구원을 수동적으로 깨달으라고 몰아칠 뿐이다.
구원파에서는 하나님이 영이 되시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를 듣다가 깨달아지면 인간의 영, 즉 양심에 해방과
자유가 온다고 가르친다. 즉 그들은 두 지도자의 회심경험을 따라 꼭 같은 깨달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구원받은
것으로 인정한다.
하나님은 영이실 뿐만 아니라 인격을 지닌 영(Personal Spirit)이시다. 성령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통해 역사하신다. (멀린스, 「조직신학 원론」, p.446) 우리는 권씨의 주장과는 반대로 지성 (intellect)과
감정(emotion)과 의지(volition)를 포함하는 회개와 믿음(신뢰)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다(빌리
그래함, 「하나님과의 평화」, p. 163)
복음을 깨닫고 시인하고 믿음으로(롬10:9, 10) 구원을 받는다고 하여 깨달음과 믿음을 하나의 조건으로
부각시키는 구원파는 18세기에 나타났던 믿음주의(Sandemanianism)가 부활한 것으로 이는 거짓된 평안과
안식을 심어주기가 쉽다(로이드 죤스, 「로마서8:5∼17 강해」 p. 207).

2) 구원의 확신, 날짜
둘째로, 구원파에서는 신자는 반드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며 거듭난 날짜와 시간, 장소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원파의 두 지도자 권씨와 유씨가 했던 회심의 경험이 참 구원에 이르게 하는 중생의 경험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분명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권씨는 “당신이 거듭난 그 날짜를 잊어버린다 해도
그날은 꼭 있어야 할 것이다”(「종교에서 해방」, p. 75)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럴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역사를 크게 제한하는 편협된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거듭난 크리스챤이 아니라는 증거는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마틴 로이드 죤스가
말한 대로 “당신은 확신이 없어도 크리스챤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스챤으로서 당신은 확신을 갖고
확신을 누려야 한다”(「롬7:1∼8:4강해」, p. 296).
구원파는 전도 대상자가 기존 교회 교인인 경우 그의 구원을 의심하게 한 다음 과거의 교회생활이 헛된
종교생활이었음을 인정하게 한다. 그 다음 여러 성구를 통해 강한 죄의식을 느끼게 해준다. 그 다음 영원한
속죄(죄사함)에 관계되는 성경구절을 읽게 해 죄사함을 깨닫게 함으로 확신을 안겨준다는 것은 앞에서
거론한 그대로이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불신자에게 접근할 때에는 방법을 달리한다. 개인전도나
5∼7일 동안 계속되는 “성경강연회”를 통해 이스라엘을 둘러 싼 중동정세와 환경오염(공해), 인구폭발,
기아 등 긴박한 시사문제를 거론하여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져 가는 시사현실을 직시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만든다.
“성경은 사실이다”라는 강연제목은 그들이 즐겨 쓰는 문구이다. 그들은 세계종말을 시사하는 신문 잡지
기사를 수록한 각종 “스크랩 북”을 동원하여 대환란과 예수재림의 임박함을 강조해 전도대상자에게 공포의식과
위기의식을 느끼게 유도한다.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죄책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구원 구절”을 통해 “복음을 깨닫고”양심의 평안과 자유함을 경험하게 한다. 그런데 이들의 전도대상자
가운데는 강한 죄책감과 위기의식이 느껴지지 않아 여러해 고민하는 이도 있고 임박한 대환란에 대한 거듭된
설교를 듣고도 확신이 서지 않아 “구원 노이로제”에 걸린 채 공포와 불안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정통교회에서도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 앞에 성령의 책망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깨닫는 심각성의 정도가 다양함을 인정한다. 어린이와 어른의
감동이 다르고 기질에 따라 죄책감을 경험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그런데 구원파에서는 죄책감의 정도가
심각해야만 소위 복음을 풀어 그들의 구원공식에 따라 구원의 확신을 심어준다. 성령은 또한 구원파 교회에서만
집중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꼭 같은 구원간증을 해도 그들의 교제권 안에서 깨달아야만 “구원받은 형제,
자매”로 인정을 받는다.
이 문제에 대해 미국 풀러(Fuller)신학교의 종교심리학 교수 사무엘 써더드(Samuel Southard)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여러가지 다른 방법으로 불렀음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가
섬길 주님은 오직 한 분이나 우리는 다양한 회심의 경험을 통하여 그에게 나오게 된다”(「회심과 크리스챤의
인격」, p. 11).
요한이나 빌립, 안드레, 루디아같은 이는 조용히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았던 예로 생각할 수
있고 바울이나 삭개오, 빌립보 간수같은 이는 문자 그대로 극적인 회심을 한 예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3) 한번 회개로 족한가
셋째로, 구원파의 구원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영원한 속죄를 받았으니 다시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그들의 주장과 관계된다. 권씨의 주장을 들어보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
라(히 9:12)는 말씀처럼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도 단번에 영원히 사해진 것
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단번에 영원히 용서된 것을 믿어 구원에 이른다... 그러면 구원받은 후의
죄는 어떻게 되는가? 요한1서 1장 9절의 말씀대로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지은 죄는 사람
앞에, 하나님께 지은 죄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백해야 한다. 그러나 구원 이후의 죄가 영혼의
구원 이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권신찬, “성경대로 믿는 신앙 ” 「목회와 신학」, 1991년 3월
호).
구원받은 신자는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깨끗하게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
을 통해서 생활이나 행동에 잘못된 것을 깨닫고 버려 나가게 되는 것이다(권신찬, 「종교에서 해방」

p. 112).

구원파에서는 종교라는 말과 율법, 의인, 죄인, 기도, 예배 교회 등의 낱말에 대해 기존 교회와 이해를
달리 한다.
권씨는 「종교에서의 해방」(일류사, 1977)이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율법관 및 종교관을 밝히고 있는데
종교와 복음을 임의적으로 구분을 하면서 그는 “종교는 사망이다. 다른 종교는 물론 기독교도 종교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의 율법은 종교를 가리키는 것이다. 기성교회는 종교이다”라고 말하면서 율법과
종교로부터 해방받을 것을 호소하고 있다. 기성 교회를 종교라 규정하고 자신들을 복음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종교와 복음을 구별하여 말한 적이 없다. 사도행전 17장과 25장에 나오는 “종교”는 권씨의
주장처럼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종교(religion)는 라틴어의 religio에서 유래한 것으로 “창조주와
인간을 한데 묶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 권씨의 주장대로 “구속하고 속박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 않다.
종교와 복음을 나누어 놓고 심지어 기독교도 종교라 하여 자신은 기독교 밖에 있는 것처럼 위장할 것이
아니라 참 종교와 거짓 종교, 하등 종교와 고등 종교로 구분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겠는가?
구원파에서는 또 죄인과 의인의 개념을 정통교회와 달리하고 있다. 그들은 구원받은 후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전도대상자에게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물어서 죄인이라고 하면 천국은 의인만 가는 곳이요
지옥은 죄인이 가는 곳이니 “당신은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속죄 은혜를 받을 때 의롭다 함을 얻는다(롬3:22∼26).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전6:11). 하나님의 자녀는 신분적으로, 위치상으로 의인임에 틀림없다. 예수의 공로 때문에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 여전히 죄를 짓는다.
사실 참된 의미의 의인이 아니면 죄인이란 고백이 불가능한 것이며 또한 참된 의미의 죄인이란 고백이
없이 참된 의미의 의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음을 강조하던 바울은 성숙한 크리스챤으로서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다(딤전 1:15). 13절에서는 자신을 훼방자요 행악자였음을
과거시제로 밝히고 나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할 때는 현재 시제를 쓰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문풍지 창에 난 구멍을 통해 햇살이 비칠 때 방 속의 먼지가 드러나듯이 예수를 믿은 후에(참빛을 모신
후) 성령의 빛에 인간의 본래적인 죄가 더욱 드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몸부림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이는 누구나 내면적으로 점증하는 죄의식을 갖게 마련이다”(로이드 죤스,
「로마서 8장 강해」, p. 187).
권씨가 영향을 받았다고 시인하며 존경하는 워치만 니(Watchman Nee)는 “신자가 신령하게 되면 될수록
그의 양심은 더욱 더 예리한 경계 태세를 취한다. 세상에 어떠한 크리스챤도 더 이상 죄를 고백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신령한 사람은 없다”(「영에 속한 사람」, 2권 p. 180)고 말한 바 있다.
권씨가 구원받은 후의 죄는 자백해야 한다는 말은 성서적으로 옳은 말이나 문제는 그들이 개인기도 생활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구체적인 죄)를 자백(고백)하는 적이 없다는 데 있다. 자백은
하나님께 대한 은밀한 자백 사적인 자백(요일 1:9), 상호자백(행5:16) 그리고 공개적 자백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정통교단에서는 경우에 따라 합당한 자백을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구원파 교인들은
마음 속에 자동적인 자백(고백)이 이루어지는지 모르나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 죄를 고백하는 적이 없으며
피차간에 자백하는 것에 대해서도 거론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주장하는 말과 실제
행위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이단의 공통적인 특징인 것이다.(마7:20)
권씨는 “겉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는 자백이 있어야 하다”고 말하면서도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그 죄에
대해서도 예수님이 대변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정죄가 없는 것은 확실하다”( 세칭 구원파란?,
p. 92 )고 말해 사실상 개인적 자백이 필요 없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그는 구원파 대내 교육용 설교집에서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매달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든지 않든지 그것은 우리의 관심거리도
아니며 문제도 되지 않는다”(「서로 사랑하라」, p. 92)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4) 율법과 은헤
넷째, 구원관과 관련하여 구원파가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것은 율법에 대한 이해이다.
권씨는 말한다: “성경은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롬3:20) 율법이 없이는
죄를 깨닫을 수 없고 죄를 깨닫지 못하면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율법으로 인하여 자신이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성경대로 믿는 신앙」)
최근 권씨는 구원파의 가르침의 타당성을 변호하기 위해 쓴 글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전히 성취시켜 끝내신 것이다. 만일 율법이 끝나지 않았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받고 그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수가 없다”고 그럴 듯한 변증을 하고 있다. 성경은 크게 율법과 은혜가 나누어 진다고 말하면서
권씨는 “누구나 거듭난 이후에 육신의 생활이 주님의 십자가에 한번 처리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피흘려 주신 것과 죄를 짓는 육신을 멸하기 위해 십자가에 우리를 함께 죽이신 것이다”(「성경대로 믿는
신앙」)고 주장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인됨을 깨닫고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말은 맞는 말이고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이다. 권씨의 문제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 양심의 해방, 즉 은혜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율법무용론을
주장하는 데 있다. 성경을 잘못 이해하면 믿음과 행위 사이에 갈등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행위중심의
율법주의 신앙생활을 하면 교만과 절망의 양극을 오가는 추와 같은 크리스챤이 된다. 반면에 단번에 일시적인
성화, 위치적인 성화 즉 거룩함과 의로움이 자신에게 전가되었으니 성화를 위한 회개(자백)가 필요없다고
은혜와 믿음만을 강조하면 도덕폐기론에 빠질 위험이 있고 윤리적 생활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단회적 회개로 족하다 하며 구원파에서는 성화를 위한 자백기도마저 부정한다. 얼마나
편리한 종교인가. 그러나 이 얼마나 무서운 멸망케 할 이단(destructive heresy, 벧후2:1)인가!
권씨는 로마서 7장의 남편과 아내로 비유된 율법과 성도의 관계를 논하면서 “이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으니” 구원받은 성도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제 무서운 폭군인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게 되었다는 무서운 자기 복음을 권씨는 만들어 낸 것이다.(「종교에서의 해방」,
p. 43) 우리는 은혜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과의 관계는 끝장났다는 것이다.
성경은 율법이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선언한다.(롬7:12) 사람이 율법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안다고 바울은 말했다.(딤전 1:8) 바울은 신자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한 후에 율법의 적극적인
위치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과 관계가 없는데도 왜 죄를 짓는 자기자신에 대하여 그토록 괴로워했는가(롬7:24).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이 필요없게 되었다면 구원받은 후의 죄는 무엇으로 죄인줄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알 필요도
없는가, 율법에 비추어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고 하는 말인가?
율법 폐기론자들(antinominianism)인 구원파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사도요한은 계명(율법)들을 지킬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
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2∼3)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형벌에서 구원한 것이지 율법의 교훈과 윤리적 규범에서 마저 해방시킨
것이 아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구원파는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1972∼3년
극동방송 한국어 방송을 담당하다. 전국교회의 빗발치는 항의에 의해 그들의 이단성을 만천하에 드러내자
그들은 1974년 불법적으로 방송국을 탈취하려다. 전원 해고당했고 그들을 비판하던 탁명환 국제종교문제
연구소 소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는가 하면 1981년 1월에는 이복칠 씨를 비롯한 일부 교인들이 헌금을
사업에 유용하는 권신찬 씨와 유병언 씨를 비난했을 때 이복칠 씨를 감금 폭행해 5명이 구속되기도 했었다.
최근에는 1968년부터 1977년까지 권씨와 유씨의 측근에서 홍보와 통역을 담당하다. 교리적 갈등으로 이탈해
정상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구원파를 비판해온 본인을 명예훼손으로 몰아 구속시키기까지 했었다. 독자
제위께서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필자는 1990년 11월 23일부터 12월 7일까지 2주일 동안 구속됐었다.
바울은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고 고린도 교회를
힐책했다.(고전6:6) 그들이 정통교단에 소속된 지도자들을 수시로 고소하여 법정 투쟁을 벌이는 것은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 즉 이방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 뒷바침하기라도 하려는 듯, 권씨는 「인류역사와 하나님의 교회」라는 그의 저서에서 “크리스챤은
세상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 윤리와 도덕의 기준에서 살아야 한다”(p. 162)고 그의 도덕폐기론적이고 율볍폐기론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로마서 7장을 강해하면서 로이드 죤스 목사는 “구원의 최상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의 성화 곧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것, 그리고 그가 이곳에 계실 때 하신 모든 것, 그의
죽으심과 장사됨, 부활, 승천, 성령을 보내심은 단 하나의 목표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엡1:4)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라고
했다.(p. 88) 구원파의 교리는 성서에서 말하는 은혜의 복음을 간교하게 혼돈시키는 기독교 이단에 해당하는
것이 분명하다. 로이드 죤스 목사의 말씀을 들어보자.

크리스챤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처럼 크게 오해되고 있는 말씀도 드물다. 이 말씀을 크리스
챤은 더 이상 율법과 상관이 없다거나 율법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읽을 필요도, 더 이
상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법과 그 도덕적 요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도덕률 폐기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
려 함이로라... 누구든지 이 계명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 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마5:17∼19)고 말씀하셨다.
크리스챤은 결코 율법에 작별 인사를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더 이상 구원의 수단으로 율법아래 있
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존귀히 여겨야 할 것이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를 행해야 한다.(로마서 7장 강해 p. 27)

권씨는 “구원받은 신자”는 매일매일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끗해지고 거룩해 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씨는 성도의 교제 자체가 정상적인 예배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알파에서 오메가까지」제5권
p. 290) 즉 금식이나 기도, 절제, 희생, 봉사 같은 것은 필요 없고, 오직 말씀과 교제를 통해 깨끗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이색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정통교회에서는 초대교회의 전통을 따라 말씀과 교제 이외에도 침묵(묵상), 금식, 기도, 희생,
봉사, 찬양, 예배, 근검 절약 등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생활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Dallas
Willard, The Spirit of Discipline. Harper & Row, 1989).
후에 더욱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구원파는 이 모든 것을 부인한다. 예수님은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5∼20)고 말씀하셨다. 거짓된 교리 다른 교훈은 거짓된 행위와 그릇된 생활을
낳는다. 구원파가 정통인지 이단인지는 그들의 가르침과 생활의 열매에 꼭같이 나타나고 있다.

5) 개인과 교회(성화가 빠진 구원)
우리는 크리스챤의 생활이 중생(칭의)으로 시작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는 구원, 즉 성화과정을
거쳐 예수님 재림시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영화의 삼단계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의
삼단계가 다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성장과 성숙, 즉 점진적 성화과정이다.(롬8:29;
히12:28; 벧후3:18; 빌2:12).
권씨도 “구원받은 신자는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깨끗하게 될 수 없다”라고
생활이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구원파 지도자는 신앙생활의 책임을 교회에 전가시킴으로서
사실상 개인적 성화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있다. 이들의 이단성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개인은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권씨 주장)
“개인은 죄사함받은 경험이 있을 뿐 성령이 계신 곳은 교회이다. ”(유씨 주장)
“하나님의 계획과 선택, 예정은 전적으로 (구원파)교회를 목표로 한 것이지 개인의 구원문제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권씨 주장)

성경은 신앙생활에서 시작과 성장과정과 완성단계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구원파는 중생(시작)과 영화(완성)를
소속 교인들에게 확신시키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간다(working out)" (빌2:12)는 의미에서의
성장과정은 “성도의 교제, 즉 구원파 교회”에서 하는 것이지 개개인 크리스챤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권씨는 “(구원파)교회가 크리스챤의 사생활의 구심점”이라고 주장한다.
후에 교회관에서 더욱 명쾌하게 드러나겠지만 구원파에는 지도자와 그를 중심으로 이뤄져 가는 교회가
중요할 뿐 소속교인 개개인은 거룩한 삶을 추구할 책임이 없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이단성은 그들의 독특한
구원관 뿐만 아니라 오도된 교회관에서 비롯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하나님의 성회, 구세군 등 교회의 역사성을 인정하는 정통교단에서는
성도 각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골1:28)고 했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성도 개개인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자기의 은사를 따라 지혜롭게 생각하고 봉사하라고 권면했다(롬12:3∼8).
참 기독교 신앙은 개성을 북돋워준다. 이단은 각자의 개성을 약화시키고 개성보다 집단을 강조한다. 구원파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개인은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성도가 예수 안에 거하는 것, 성령 충만을
받는 것, 성도의 교제, 성령의 기름부으심, 새 계명이 이루어지는 것, 성장하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등 신앙생활 일체가 성도의 교제, 즉 (구원파)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필자도 그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가정을 뒤로하고 그들의 교회를 “삶의 구심점”으로 삼고 온갖
정열을 쏟은 적이 있었다. 72년부터 77년까지 서울에서의 나의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은 “교회생활”을
위해 존재했었다.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세뇌되는 가운데 그렇게 사는 것이 성서적인 생활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성경은 가정과 직장과 교회 내에서의 개인의 생활이 모두 중요하다고 가르친다(엡4∼6장). 유씨는 고린도서,
에베소서, 로마서 등에 나오는 “너희”는 모두 개인이 아닌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며 따라서
성령충만을 받을 책임을 개인이 아닌 “몸”(구원파교회)에 전가시킨다. 그러나 성경의 전체적인 강조점은
그룹이나 집단이 아닌 개인의 책임에 주어지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교회생활 분야의 고전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지체(Body Life)」의 저자 레이 스테드만(Ray
Stedman) 목사는 교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크리스챤 각자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므로 크리스챤은 자기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품성을 드러내야 한다. 교회를 향한 이러한 부르심을 성취할 책임은 모든 참된 크리스챤 각자에게 주어져
있다. 크리스챤 각자가 부르심을 받았고 성령님이 그 안에 내주하고 계시며 이 세상 속에서 그 부르심(소명)을
성취하도록 기대되고 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전체를 통하여 들려주고 있는 아주 분명한 음성이다.
교회의 증거의 표현은 때에 따라 집단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나 그렇게 할 책임은 언제나 개인에게 있는
것이다.

4. 기도관 및 예배관
우리 기독교는 기도로 출발해서 기도로 진행되고 기도로 막을 내리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사랑하는
두 인격, 즉 창조주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오가는 대화이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이 이를 보여준다. 예수님은
침례(세례)받으실 때 기도하시니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렸다고(눅3)했으며, 40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하심으로
공생애의 첫출발을 하셨고 최후 십자가에서 기도하심으로 막을 내리셨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기 전에 몸소 기도하심으로 모범을 보이셨다(눅6:12; 마14:23; 막1:35).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우리 신앙생활에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요소로 간주되고 있다. 믿음과 기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원파 지도자들은 기도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원파는 하나님관,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 등 모든 분야에서 성경과 정통적인
기독교의 범주를 이탈하고 있다. 그러나 구원파의 이단성(heretical nature)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그들의 기도관과 예배관이라 할 것이다.

1) 기도관
우선 권씨와 유씨의 기도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자 성경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권씨는 “거듭나기 전에 하는 기도는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금식기도, 통성기도 등 어떤
기도든지 간에 인간의 종교적 본능의 발산에 불과한 것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한 걸음 나아가 그는 “새벽기도는 옛날부터 한국사람들이 젖어있던 미신적인 종교성의 발로라 아니할
수 없다”고 강변한다.
권씨의 편견에 의하면 “기독교 역사상 신령한 생활을 한 분 중에 새벽기도를 해서 그렇게 된 분들의
예가 다른 나라에는 없다. 인간의 선행도 신비적인 욕심도 전부가 하나님 앞에서는 가증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다. ”
유씨는 “기도란 마음에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이라 정의하며 “진정한 기도란 성도의 교제로부터 시작된다”고
가르친다. “기도를 해라해서는 안된다. 새벽기도는 필요없고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것도 필요없다. ”
다시 말해 그들은 형식적인 기도를 일체 배격한다. 권씨는 또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 일을 맡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말해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냈다. 그들의 주장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크리스챤이라면 쉽게 분별할 수 있는 독선과 궤변을
내포하고 있다.
기도에 대한 구원파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죄 문제를 해결한 거듭난 자만이 기도할 수 있으며 기도는
형식과 관계없이 마음속으로 하는 것이며 기도는 개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대표해서 일을 맡은
자들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육신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필요없고 성도의 교제가 기도를 대신한다는
논리이다.
기도에 대한 구원파 측의 주장은 한국의 기존교회교파들의 기복적이고 율법적인 기도 성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구원파의 가르침은 엄청난 무지를 드러내고 있으며
너무나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구원파에서는 구약의 사무엘과 모세의 예를 들어 일을 맡은 자만 기도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권신찬의
왜곡된 교회관에서 나온 발상이다. 반면에 정통교회에서는 신구약 여러 인물과 예수님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라 크리스챤 각자가 무시로 성령안에서 깨어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구원파의 권신찬은 기도의
모든 형식이 이교도의 제사의식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서서 또는
엎드리어 기도한 것이 모두 다 이교적인 행습이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정통교단에서는 구약의
성도들과 예수님, 바울, 그리고 신약교회의 모범을 따라 여러 모양과 형태로 기도에 힘쓸 것을 가르치고
있다. 미 남침례회 소속의 빌리 그래함 목사는 크리스챤이 영적인 건강을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을 열거하는
가운데 두번째로 기도의 비밀을 배우라고 권면하고 있다.

교회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업적을 남기고 간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
었다... 너무나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기도하지 않는 크리스챤은 무능력한
크리스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셨다. 그는 때때로 산 위에 홀로 오르셔서
하 나님 아버지와 영교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주님께서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하겠
는가?(「하나님과의 평화」, p. 231)

구원파는 말라기서 3장 16절을 근거로 참다운 기도는 양심의 내적인 기도이며 “신도들의 교제가 바로
기도”라는 정의를 유도해 내고 있다. 소속 교인들끼리 모여 “모임의 일, 즉 사업을 논의하는 것”이
교제이며 기도라는 논리이다. 그들의 지도자가 그렇게 깨달았으면 이것이 곧 진리가 된다. 그러나 이는
교회사상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궤변이며 억측이다. 신자들간의 교제(사귐)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전혀 다른 차원의 활동인 것이다.
이들은 형식적으로 교회집회 때 기도할 경우가 있는데 지도자들은 언제나 “주님”께 기도한다. 성자와
성령을 거론할 때가 있지만 이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인하면
이단”이라 자인하면서도 예수님을 교회와 동일시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기도대상에서 배제함으로 또 성자와
성령을 혼용함으로(유씨는 교회를 성령의 몸이라 부른 적이 있다)사실상 삼위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다.


2) 예배관
예배는 인간의 최상의 목표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죄는 예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롬4:28) 우리의 죄문제는 해결되고 처리되었다. 이제
우리는 인간에게 알려진 축복 중 최대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예배를 대신하거나 대체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늘과 땅에서 누리는 최상의 특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하여(시99:5; 96:8,9)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해주신 모든 일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한다.(계5:11∼14).
그러나 구원파 교인들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심으로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지
않고 예수님이 이루어 놓은 영원한 구속을 깨달음으로 이른바 교회생활을 시작하기 때문에 일반 정통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신앙생활의 출발점이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모임에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의 존전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앙모하고 경외심과 사랑을 표현한다는 의미의 예배가 빠져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구원을 노래하고 간증하고 지도자의 설교를 들으며 전도하고
교제하기 위해 모일 뿐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지는 않는다.
구원파 지도자들의 예배에 대한 가르침을 직접 들어보자. 그들의 저술에 나타나 있는 예배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형식을 갖춘 예배는 필요없다. “예배는 형식을 갖춘 의식이 아니라 영의
동작이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데 있어서 어떤 형식을 갖추느냐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
다. ”
예배는 성도간의 교제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관념도, 습관도, 의식도 아니다. 신령과 진정
으로 드리는 예배는 성도의 생활, 성도들의 정상적인 교통이다.”인간이 만든 예배당의 단상이나 가
정제단 같은 것은 필요없다. “제단은 인간이 만들 수 없고 인간 자체의 활동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
다. 영원히 변챦는 완전한 제단과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 어느 장소에서나 집에
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심령은 바로 제단이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제물이다. ”

크리스챤은 자주 모여 교제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구원파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그분은 인격을 지니신 영적
존재자(Personal Spirit)로서 지적, 감정적, 자기 결정적, 도덕적 존재자(멀린스, 조직신학원론 p. 268)이시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 사람은 누구나 구주와 주님이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예배)하기 마련이다.
예배로 이어지지 않는 구원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 아니다.
구원파는 기존교회를 부정하면서도 한국교회가 초교파적으로 편찬한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모일 때마다 찬송가를 여러 곡 부르고 보통 비디오로 녹화된 권씨의 설교를 듣는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그들이 부르는 찬송이 그들의 교리의 강조점을 따라 성경, 구원, 확신, 교제, 교회, 재림에 관계되는 찬송만을
골라 부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찬양과 경배, 기도, 헌신, 축도에 관한 찬송을 부르지 않는다. 구원파의
왜곡된 기도 및 예배관을 이해한다면 이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구원파 교회는 구원과 죄사함을 노래할 뿐 구원해 주신 주님을 찬양하지 않는다. 성경은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항상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것(히13:15)을 권면하고
있다. 로이드 죤스(Lloyd Jones) 목사님은 이단의 특징을 말씀하시는 중에 “이단은 믿음과 구원을 노래하나
참 믿음은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간파한 적이 있다. 구원파는 구원을 찬송하나 하나님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5. 교회관
교회에 대한 가르침은 구원파의 이단성을 보여주는 여러 교리 가운데 핵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권씨와 유씨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며 구원받은 성도들의 교제의 집합체라고 말한다(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주장이다). “이제는 구원받은 신자안에 성령이 계셔서 교회(건물이 아닌) 곧 하나님의 집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교회시대에는 하나님이 교회안에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안에 사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다. ”
이러한 사상 때문에 그들은 개인은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이루어지는 것, 성장하는 것 등 신앙생활 일체가 (구원파)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이들의 이단성은 권씨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기독교 역사가 내려오면서 많은 기독교 학자와 신앙인들이 지은 책을 읽어보았다. 그 책을 읽어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성경 안에서 발견해내고 깨달아지는 근본적인 교회의 모습 참교회의 모습을 아직
아무도 정립해 놓은 글이 없다. 교회의 영광스런 모습에 대해 논한 것이 없다... 교회의 참 뜻은 성경
속에 특히 비밀히 감추어져 있는 진리로서 기독교 2천년 역사상 이 진리가 나타난 것은 극히 드문

일로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지내온 것이다.

이들은 이와 같은 독선적인 편견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세계를 일주한 후 현재
한국에 머무르고 있다고 믿으며 그 성령은 오직 구원파 교회에만 집중적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아집에 빠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어느 한곳에만 국지적으로 역사하는 분이 아니고 전세계에 온누리에 두루
운행하시며 역사하시는 영이시다.
구원파 지도자들은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교회와 기존교파 교회를 전면 부정하며 자기네 집단만이 영광스런
교회이며 하나님이 인정하는 참교회라고 가르친다.
구원파에는 교회직이나 운영체제가 중앙집권적으로 되어 있으며 지도자의 언행을 규제할 가능성이 있는
장로나 집사직분을 세우지 않으며 오직 한두 명의 지도자 밑에 많은 평신도(형제, 자매)가 있을 뿐이다.
구원파의 역사적 배경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이 두명의 지도자란 권신찬 씨와 그의 사위 유병언 씨를 일컫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연령이 위인 권씨를 이 집단의 대표자로 인식하고 있지만 권씨 자신은 그의 사위
유씨를 한국의 유일한 영적 권위자로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권씨는 자신이 소속해
있다가 축출당한 바 있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은 사실상 목사가
아니라고 시인하면서도 자신을 복음 침례회 목사라고 소개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권씨는 구원파 내에서도
새로 목사안수를 받은 적이 없다).
일찍이 “아무도 이 집단을 이단이라 부르지 못한다”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1973년 당시 TEAM
선교부 소속 선교사였던) 니일 필립핀(Neil Filipin) 목사는 다음과 같이 구원파의 조직을 묘사하였다.


구원파의 조직은 한 사람(현재는 유병언 사장)이 머리 역할을 하고 다른 주요 멤버들이 통제위원회
로 봉사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몸의 머리가 되신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그는 서울에 있는“사
무국”을 통해 지시하고 인도하며 방향을 제시한다.

이들의 교회에 대한 견해는 교주의 새로운 깨달음에 따라 새로운 뜻을 지니게 되었다. 구원파는 극동방송에서
물러난 후, 1974년부터 대외 무역사업을 구심점으로 교회를 운영해 왔는데 월간 「현대종교」 (1983. 3)는
“유병언 사장이 주도하는 사업(삼우트레이딩)이 곧 교회이며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 그들의 가르침을
보도한 바 있다. 다음에 기사 일부를 참고로 인용한다.

유사장은 사업을 시작한 후 오늘까지 사업경영의 무리로 인하여 발생하는 적자요인과 무리한 사업확
장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자금을 교회의 현금에 의존해 왔다. 1975년경부터 지방교회의 십일
조는 서울로 끌어 올렸고 대전 무화동 꽃동네 모금운동, 병원짓기 모금운동, 수양관 건립모금운동
등 각종 돈 끌어 모으는 운동을 전개하여 왔다. 유사장이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 명목으로 엄청난
액수 의 돈을 성도들을 기만하여 끌어모아 거의 사업에 전용하였지만 그 내역을 밝힐 방도는 없는
것이다

권씨는 초창기로부터 사위 유씨를 몸의 “입”, 성령에 의해 특별히 세우심을 받은 “기름부음을 받는
자”로 추대하여 왔다. 권씨의 이러한 사상에 힘입어 일부 신도들은 1982년 하반기부터 유사장을 “예수”“메시아”“살아
있는 성령” 등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필자는 그를 우상시하며 추앙하고 따랐던 1977년까지 그를 “현대의
사도 바울”이라 믿고 외국인들에게 선전했었다. 예를 들어 필자는 1976년 유씨를 대동하고 유럽여행을
하는 동안 서독의 기독실업인회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있는 감람산교회에 그를 소개하면서 유씨를 20세기의
대표적 지도자로 부각시킨 적이 있다. 물론 이것은 영적으로 눈이
먼 상태에 있던 통역자(본인)가 내린 그릇된 판단이었다.
이들의 특정인 신격화 운동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각 개교회가 독립적으로 책임있게 주님을 예배하며
순종한다는 미 남침례회를 비롯한 주요 교단의 입장과 너무나 극적인 대조를 보이고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구원파의 교회에 대한 가르침이 교회의 성격, 구성, 활동, 의식, 목적 등 모든 면에서 신약성서의
가르침과 역사적인 교회의 규범을 완전히 이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6. 종말관
종말, 즉 마지막 일들에 대한 가르침은 사망, 사망 후의 중간상태, 그리스도의 재림, 천년왕국, 부활,
심판, 그리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종국적 상태 등으로 나누어서 고찰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관계된 가르침만을 중점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첫째, 구원파에서는 “이 세상 마지막 때에는 칠년 대환란이 있고 환란 전에 주님의 공중재림이 있으며
이때 자던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의 몸의 형체로 부활하고 그후 살아남은 크리스챤들도 변화함을
입어 함께 공중에서 주님의 영 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영혼을 묶는 사슬」, pp. 242∼243).
둘째, 구원파에서는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새로운 독립국가로 출범한 것, 67년 6일 전쟁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 세계정부의 실현가능성과 적그리스도 666의 출현징조 등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어 가는 것을
볼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1980년대 안에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유병언과 권신찬은 그들의 설교집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 및 회복 666, EEC(유럽 경제 공동체) 등을
수시로 언급하면서 구약의 에스겔, 예레미야, 아모스, 스가랴, 이사야, 다니엘, 신약의 공관복음 가운데
마지막 때에 관한 부분, 데살로니가 전후서, 요한계시록 등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권신찬은 그의 설교집에서 성령님이 구원파 형성초기에 유병언에 기름을 부어 사역자로 세우면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이 그들의 중심 메시지가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인류역사와 하나님의 교회
p. 310)

그러한 경험이 있은 후부터는 그 형제(유병헌을 말함)에게 그렇게 어렵던 성경이 풀리기 시작했고...
입을 열기만 하면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
스라엘 민족의 회복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러한 경험 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이 곧
성경을 성취시키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알려지기 시작함으로써 그것이 이 복음운동 (구원파)의 중
심메시지가 된 것이다.

7년 대환란이 있기 전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과거의 성도들을 제외하면 구원파 소속 교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지칭함)이 들림을 받게 된다는 주장은 구원파에서 일류사, 중동문화사, 우정출판사, 도서출판
선구자, 평신도 복음선교회, 신아문화사 등 여러 출판사의 이름으로 1977년부터 출발한 「임박한 대환란」(상하권),
「세계독재자와 666」, 「세계정부와 666」, 「카운트 다운 예수 재림과 휴거」, 「인류 파멸의 징조와
중동사태」, 「한계에 도달한 인류 역사」, 「이스라엘의 기적」등 책제목에서도 잘 반영되고 있다.
셋째, 구원파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상재림(스14:4∼5)으로 환란은 끝나게 되며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천년왕국이 건설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롬11:25)이지만 교회가 들림을 받으면 이스라엘 즉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적으로 예수를
믿게 되리라고 가르친다. (「서로 사랑하라」, p. 123)
넷째, 구원파 지도자들은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는 말씀을 자주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가르친다.
이제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었으며 땅끝까지 전파되었다... 기독교는 전세계 모든 민족들에게
고루 알려져 있다(「영혼을 묶는 사슬」, p. 200).
재림은 성경에서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핵심교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의
주제가 되고 있으며 신약에서만 300회 이상 언급되어 있다. 매 25절마다 한번씩 재림이 거론되고 있는
셈이다. 마태 24∼25장, 마가 13장, 누가 21장은 장 전체를 재림론에 할애하고 있고 데살로니가 전후서와
계시록은 재림을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다.
재림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의 열쇠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인식이 없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구원의 미래적인 측면이나 자연 및 동물세계의 회복에 대한 예언 등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또한 많은 편의 열쇠가 된다(시2, 22, 24, 45, 72, 89, 110장 등).
우리는 신약의 많은 귀절(마16:27; 요14:3; 살전4:13∼18; 약 5:8; 히10:37; 계1:7; 22:12, 20)로부터
재림을 대비하라는 경고를 받으며 소망 중에 위로를 받으며 사별 당해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도록 권고를
받으며 고난을 견디어 내라는 당부를 받으며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경건한 삶을 사는 신자들이 축복과 상을
받으리라는 확신도 받는다.
구원파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회복 및 시사적인 사태발전에 집중적인 관심을
쏟아 재림의 시기에 관한 하나님의 비밀을 캐는데 주력함으로 전도대상자와 소속교인들에게 절박한 위기의식과
공포감을 심어주고 있다. 구원파에서는 성경을 주로 예언서로 취급한다. 그래서 이들은 성경을 신문(新聞),
세상 신문을 구문(舊聞)이라 부르면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이후의 중동사태와 세계적인 위기에
대한 신문이나 잡지 기사를 스크랩 북으로 만들어 이를 전도용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임박한 대환란”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인들의 스크랩 북은 성경에 버금가는 권위를 지니는 것으로 구원파 소속 교인들이
제작한 스크랩 북에 수록된 사진과 기사를 보는 전도대상자가 강한 공포감을 느끼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게 되면 구원파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죄인됨을 가르치고 그들의 구원공식에 따라
“복음을 깨닫게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구원을 받았다고 인정되는 교인들은 마지막 때에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재림시 공중으로 휴거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구원파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 가르침이 소속교인들에게 선민의식과 집단우월감 및 안도감을 심어주는 심리적
진정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크리스챤이 그리스도의 초림 및 재림에 대한 신구약 예언과 그
성취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이 마치 깨달음과 종말에 대한 교과서나 되는
것처럼 예언에 심취하는 것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에 어긋나는 태도로서 크리스챤은 마땅히 “전체적인
하나님의 뜻”(the Whole Counsel of God)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로이드 죤스는 구원파와 같은 집단의 형태를 지적하면서 균형있는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관심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현재의 세계정세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차츰 이 관심에 마음을 빼앗겨 정복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예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지 않고 설교도 하지 않는다. 이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몰두 이상으로 영혼에 대해
위험한 것은 없다. 러시아, 이집트, 이스라엘 및 그 밖의 나라들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에스겔서 37,
38장이나 다니엘서 7∼12장 그 밖의 예언적 관점에서 여러 시기나 경우를 계산하는 데 모든 시간을
소비하며 전생애를 투입하는 일은 쉬울 것이다. 한편 영적 의미에서는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점점 무관심하고 등한히 될 수 있다. 물론 예언적 교훈은 성경의 중요한 일부이고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래 세계에서 일어날 사건들에 너무 관심을 가지는 나머지 우리가 지금
살아야 하는 생애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여러가지 점에서 우리들
의 일차적인 위험은 균형이나 조화의 감각을 상실하는 데 있는 것이다.

정통교단에서도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가르치나 재림연대와 날짜를 거론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림에 대한 소망은 정통 기독교 교인들에게 “개인적인 봉사, 헌금, 선교적 열심, 현명한 조언”등
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하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주의 재림의 약속
을 상기시키면서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3:11, 12)고 권면하고 있다. 구원파에서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신자 개인이 상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상을 받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교회(포도나무에 비유함)에
붙어있기만 하면 들림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한편 정통교회에서는 재림의 복된 소망이 개인의 거룩한 삶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적 봉사를 자극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정통교단 안에도 전기천년왕국론자들이 상당수 섞여있기는 하나 그들은 구원파와 같이 “임박한 대환
란”만을 설교 주제로 다루지는 않는다. 미 남침례회의 대표적인 신학자 멀린스(E. Y. Mullins)는 전기천년왕국론이

댓글 '4'

최용우

2007.10.01 23:09:30

미 남침례회의 대표적인 신학자 멀린스(E. Y. Mullins)는 전기천년왕국론이 전 신약성경을 통해 가장 상징적이고 시적인 문헌에 속하는 계시록의 한 부분에 주로 근거하고 있다는 점, 부활한 성도가 정상적인 인간의 방법으로 태어나서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천년동안 같이 살 수 있다는 주장이 모순을 내포한다는 점, 복음이 하나의 증거로 전파되어져야한다고 주장함으로 피상적인 활동에 그친다는 점, 재림시까지 세상이 악화되어갈 것이라는 신념을 동반함으로 비관주의를 지향하게 된다는 점, 따라서 인간 편에서의 최고의 노력을 유발시키지 못한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그는 구원파의 분리주의와 당을 짓는 태도 및 광신주의적 경향을 지적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기천년왕국론은 부당하게 하나의 진리만을 강조하는 나머지 불가피하게 기타의 다른 진리를 강조 하지 아니하며 따라서 크리스챤들 가운데서 분리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고 때로는 광신주의에 흐르는 경향이 있다.
천년왕국이라는 주제를 놓고 크리스챤들 간에 몇가지 상반된 입장과 주장이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미래의 환상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단 하나의 사건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기타 모든 것은 이 사건에 종속되고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들 속에서 생기는 일이 많이 있지만 하나의 위대한 일이 있다. 많은 방해와 고난도 있지만 영광스럽고 갑작스런 승리도 있다. 적어도 하나의 부활, 하나의 심판, 하나의 영원한 왕국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기 전에 이 세상에 완전히 경건한 일천년 동안의 기간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주장도 없다. 또 최후 심판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일천년 동안 이 지상에서 문자 그대로 다스릴 것이란 확실한 보증도 없다.

최용우

2007.10.01 23:11:03

Ⅴ. 맺음말
구원파의 이단성은 그들의 성서관, 하나님관, 인간, 구원, 기도와 예배, 교회 및 종말에 대한 가르침(교리)에서 고루 나타나고 있다.
구원파 지도자 권신찬씨와 유병언씨는 좋은 뜻으로 모임을 시작했는지 모르나 그들의 성서해석이 진리의 성령에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조직신학과 교회사를 무시하는 그들은 성경을 우화적으로, 임의대로 영해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영이심을 지나치게 강조하는데 비해 하나님의 인격성은 거의 언급치 않는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강조하나 그의 임재성은 무시하고 있다(그들의 하나님은 구원파 교회안에는 충만하게 거하시지만 개인에게 거하지 않으며 개인을 지키시거나 인도하는 분은 아니다). 따라서 구원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효능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은 강조하나 그의 인성은 격하되거나 소홀히 되고 있다.
구원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영원한 속죄를 깨달아 종교와 율법, 양심의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완전한 해방감을 누리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피동적 깨달음이 강조되고 있으나 그들은 정통교회처럼 구원을 “의지적인 회개와 인격적 신뢰(믿음)”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적인 순종의 필요성과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고 헌신하는 것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파의 구원은 양심으로 이미 이루어 놓은 속죄를 깨닫는 것이고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우리의 전인격(지,정, 의)이 포함된 회개와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며 대면이요 관계이다.
구원파는 자기네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에 교회(교제)의 교리를 통하여 성경을 해석한다. 그래서 성도들의 교제, 즉 사업을 논의하는 것이 기도이며 예배라고 가르침으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즉 기도와 예배를 부인하고 있다.
전천년왕국설을 신봉하는 그들은 칠년 대환란 전에 교회(구원파)가 휴거된다고 믿는다. 그들은 “우리 생전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 구원받은 교인들은 한데 모여 살아야 한다. 떨어져 있으면 휴거받지 못한다.
모임에 붙어 있는 자만 들림받는다”고 가르쳐 교인들을 집단생활로 유도하고 막대한 헌금을 저들이 운영하는 (주)세모 및 삼우트레이딩에 투자하게 한다. 전천년왕국설 환란전휴거설을 믿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라 그들의 말세론을 가르치는 동기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되어 있다는 데 문제성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3:11, 12). 우리가 경건함과 깨끗함으로 주님을 맞을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단들의 강조점은 엉뚱한 데 주어지고 있다. 666, 적그리스도의 인을 받지 않으려면 돈을 바쳐 교회가 자급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는 희한한 성경해석이다.

최용우

2007.10.01 23:12:00

사도 베드로는 교회역사에 거짓 선생들이 계속 나타나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일 것이라고 경고하였다(벧후2).
하롤드 피켓(Harold Fickett) 목사는 베드로 후서 2장에 근거해 “거짓 선생은 대상자에 접근하는 방법이 사특하고 간교하며 호색적인 성향을 나타내며 탐심으로 금품을 착취하며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미명하에 율법의 권위를 무시하며 당돌하고 고집이 세며 메시지가 일관성이 없고 내용이 잡히지 않으며 사기성(이중성)이 있고 진실성이 없다”고 간파하였다. 이중 어떤 특징이 구원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는지는 독자 제위께서 더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구원파의 가르침은 1) 지금은 복음시대이므로 율법이 필요없다 2) 육은 더럽고 영만이 선하다
3) 크리스챤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되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어떻게 살든 구원에는 영향이 없다고 가르치던 니골라당(계2:6, 15)과 흡사하다 하겠다.
구원파는 초대교회를 어지럽히던 율법(도덕률)폐기론과 영지주의 사상이 새로운 가면을 쓰고 현대판 이단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봄이 좋을 것이다.
옥한흠 | 1991. 6.

궁금이

2008.01.21 17:38:42

"이창범 목사(인천)가 1978년에 500여
교인과 집단 이탈했고.." 그다음엔 어떻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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