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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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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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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교수학(大敎授學)/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창지사
17세기의 뛰어난 교육사상가인 코메니우스(1592~1670)는 그의 책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대교수학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는 완전한 기술이며 기독교 국가들의 모든 공동체에 학교를 세워 바르고 즐겁고 철저한 방식으로 젊은이들에게 현세와 내세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탁월한 방법이다.
유네스코 제정 코메니우스 메달을 수상한(2001년) 이숙종(강남대 실천신학대학원장) 교수에 따르면 코메니우스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철저하게 배울 수 있는 새로운 교수법 개발에 몰두했다. 새로운 교수법의 원리를 정립하기 위해 우주 전체와 자연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과학적 분석에 힘을 기울였고 거기서 발견한 질서와 조화의 이치를 새로운 교수법에 적용했다. 그는 창세기 1장 26절과 27절에 근거해 인간을 지성적 도덕적 신앙적 존재로 해석하고 인간의 전인성은 곧 인간의 내면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지성과 덕성과 경건(거룩성)의 씨앗을 계발해야 한다는 통전적인 개념으로 규정했다.
본서의 역자 정일웅(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에 따르면 코메니우스는 이 책에서 새로운 인간 이해를
코메니우스는 이 책 제9장에서 부유하고 뛰어난 아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도시와 마을의 귀족이든 평민이든 남자든 여자든 모두 학교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청소년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 수업을 진행해야 하고,항상 천천히 진행하며,현재적 적용으로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코메니우스는 기독교가 싸움을 그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편적 교육과 기독교적 사랑만이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교육학 관점에서 볼 때 코메니우스는 이제 대가(大家)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가 제기한 교육의 근본적인 물음들이 계속 논의되고 있다. 1670년 11월15일 암스테르담에서 세상을 떠난 그는 암스테르담 근교 나르덴에 묻혔다.
항국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17세기의 뛰어난 교육사상가인 코메니우스(1592~1670)는 그의 책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대교수학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는 완전한 기술이며 기독교 국가들의 모든 공동체에 학교를 세워 바르고 즐겁고 철저한 방식으로 젊은이들에게 현세와 내세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탁월한 방법이다.
유네스코 제정 코메니우스 메달을 수상한(2001년) 이숙종(강남대 실천신학대학원장) 교수에 따르면 코메니우스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철저하게 배울 수 있는 새로운 교수법 개발에 몰두했다. 새로운 교수법의 원리를 정립하기 위해 우주 전체와 자연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과학적 분석에 힘을 기울였고 거기서 발견한 질서와 조화의 이치를 새로운 교수법에 적용했다. 그는 창세기 1장 26절과 27절에 근거해 인간을 지성적 도덕적 신앙적 존재로 해석하고 인간의 전인성은 곧 인간의 내면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지성과 덕성과 경건(거룩성)의 씨앗을 계발해야 한다는 통전적인 개념으로 규정했다.
본서의 역자 정일웅(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에 따르면 코메니우스는 이 책에서 새로운 인간 이해를
코메니우스는 이 책 제9장에서 부유하고 뛰어난 아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도시와 마을의 귀족이든 평민이든 남자든 여자든 모두 학교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청소년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 수업을 진행해야 하고,항상 천천히 진행하며,현재적 적용으로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코메니우스는 기독교가 싸움을 그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편적 교육과 기독교적 사랑만이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교육학 관점에서 볼 때 코메니우스는 이제 대가(大家)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가 제기한 교육의 근본적인 물음들이 계속 논의되고 있다. 1670년 11월15일 암스테르담에서 세상을 떠난 그는 암스테르담 근교 나르덴에 묻혔다.
항국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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