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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예수 그리스도의)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논문신학성경 최용우............... 조회 수 3429 추천 수 0 2008.03.13 22:5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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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헬)아나스타시스 엥게르시스.

이 낱말은 마태복음 27:53절에서 단 한번 사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 금요일에 사망하여 매장당한 후,일요일 아침 몸과 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나사로와 여타 인물들의 부활처럼 단순한 소생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되살아 난 것이므로 다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으로 영원한 영광으로 부활하셨다(롬6:910,히7:16, 벧전1:21,계1:18).

I.신약 케뤼그마에서의 부활의 위치.

케뤼그마(기쁜 소식에 대한 신약의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복음서의 절정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묘사이다(마28장,막16장,눅24장,요2021장).초대 교회의 첫 케뤼그마의 초점은 부활에 있었다(행2:24-323:14-16,26.4:10.5:30,7:55ff,10:39-43).부활은 바울서신에 있어서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고린도전서 15:17-19절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 신앙 전체와 기독교 신앙이 가져다 주는 구원은 우리 주의 부활과 더불어 일어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고 주장하였다(행17:31,롬8:11,고전6:14,갈1:1,엡1:20,골2:12).

신약의 어느 곳에서 보든지 부활은 예수의 생애와 세계 구원사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선포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독특한 인격과 사역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한 하나님이요 메시야였다(4:25,26).또한 그 업적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속죄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하나님과 죄로 가득찬 인류를 화해시켰다(마20:28,롬5:10,고후5:1819,골1:2122,딤전2:5-6).또한 부활하신 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에게 그의 죽음에서 기인한 속죄의 열매를 가져다 주었다. 의인(롬4:255:910),성화(롬8:12,고전1:30),영화(롬8:30,고후 3:184:17)등이 그것이다.

II.신앙에 의하여 받아 들여야 할 역사적 사실로서의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는 성경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바울이 체험한 계시(행9:1-6,고전15:3-8)와 목격자들의 체험이 기록되어 있는 복음서이다. 주님은 이러한 목격자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셨다"(행1:3).이러한 자료들에 의하면 부활은 초자연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영감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요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계시이므로(성경을 보라)부활은 신앙의 대상으로, 다시 말하면 신앙만의 대상으로 된다. 성경의 절대무오성을 부정하는 고대 및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적 연구 및 추론 도구인 고등비평방법을 하나님의 계시 영역에 적용함으로써 예수의 부활과 관련되어 일어난 사건을 명확하게 가려내려고 했었다. 그 결과 이들은 성경이 말하는 바 그대로의 부활을 부인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부인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문자 그대로 살과 뼈를 갖추고 있는 그 자신의 몸으로 실제로 빈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이들은 부인하였으며 지금도 부인하고 있다(눅24:39-40,요20:27).

이러한 비평가들에 의하면, 복음서 및 나머지 신약 문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입증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원시 전승을 후대에 윤색한 것"으로서 거부되어 마땅하다고 한다(R. Bultmann, Kerygma and Myth, H.W. Bastsch 편집,I,38).또한 몸의 부활이란 20세기의 "자연과학 특히 생물학의 발견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Paul van Bwren, The Secular Meaning of the Gospel, p.17) 사실 자연과학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하여 하등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있다. 물론 자유주의 신학도 복음서에 기록된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설명하여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초대 신자들이 그들의 주에 대하여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평가한 데서, 그리고 그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기를 간절히 소망한 데서 기인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정이 초대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믿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예수가 죽고 난 후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오직 "영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고 가정한다. 필자는 뒤에서 이 이론들에 관하여 논의해 보겠다.

만일 "역사적"이라는 말이 현대의 역사 연구 방법에 따라 성령의 신뢰성에 대한 신앙을 배제하는 것이라면, 현 단계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비록 역사적 사실임에는 틀림없으나, 역사적 사실임에는 틀림없으나, 역사적 검증에 의하여 확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비록 현대 역사가들이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죽은 다음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검증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이것은 단순히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의 소생을 뜻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가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야요 잃어버린 세계의 구주로 부활한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의 부활을 통하여 그가 십자가상에서 이룩한 화해는 성경에 기록된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모두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앙이 "일어난 사건"에 대한 연구를 지배하는 곳에서 비로소 복음서는 예수가 문자 그대로 그 자신의 육적인 몸으로(비록 영광된 몸이긴 하지만) 무덤으로부터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풍부한 "증거"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이러한 신앙이 결여되어 있는 곳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으로 검증"하려고 해도 이는 반드시 실패하고야 만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적인 탐구와 추론에 의하여 그의 비밀을 발견하게 하시지 않았다. 인간은 오로지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진리를 계시하는 분에 대하여 믿음으로써 비로소 그의 비밀을 알 수 있다(마11:2516:17,고전 1:20-25).

III. 그리스도의 부활과 역사.

비록 우리가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를 초월하며,그 때문에 "더 이상 우리들의 역사의 일부가 아닌 새 역사의 시작"으로 일컬어져 마땅하다는 사실을 배제하지는 않는다(K. Runia, The Resurrection and History, The Reformed Theological Review, 1966년 5-8월호).여기서 말하는 새 역사란 몸과 영이 불멸적이고 영광스럽게 된 인간의 생활사로 이해될 수 있겠다. 이러한 새 역사는 신자에 대한 하나님 경륜의 마지막 차원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새 역사는 예수가 하늘나라로부터 재림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때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 역사는 신자에 대한 하나님 경륜의 마지막 차원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새 역사는 예수가 하늘 나라로부터 재림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때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영광된 몸으로 변모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히 거주하게 될 장소이다(계 21:1-4).그렇게 되면 죄와 형벌과 죽음으로 가득 찬 현 역사의 강물은 불멸의 영광 속에서 인류가 존속할 새 역사의 바다로 흘러들어 갈 것이다. 이러한 새 역사는 종말이 없으며 죄와 불행과 죽음이 없는 역사이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그는 모든 신자의 "선구자"로서 저 새로운 역사에 앞장을 선 것이다. 이 순간으로부터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과 가호를 받았으며 그에 의하여 완전히 지배되었다(마28:1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이러한 역사를 초월하였다. 그 때문에 예수는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항상 제자들과 함께 있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이 40일 동안 예수가 지상에 머무른 유일한 이유는 그의 부활의 실재에 관하여 그의 제자들과 그 제자들을 통하여 신자 모두에게 확실한 증거를 주기 위함이었다(행1:3).

이러한 몇 가지 이유가 없었더라면 그는 더 이상 현재의 역사에 속하지 않는 자로서 그리고 새롭고 영원한 종말의 역사를 이룩한 자로서 부활한 즉시 하늘로 승천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막달라 마리아가 "주여 이제 우리는 당신을 다시 가시도록 하지 않겠나이다"라는 의미로 예수를 붙들었을 때, 그녀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하였다. 예수는 그녀에게 "나를 만지지(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 가지 못하였느니라"(요20:17) 고 대답하였는데, 이것은 예수가 부활시에 이미 인류의 역사와 불멸과 영광의 새로운 영원한 역사 사이의 분기선을 넘어섰음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예수가 믿지 않는 유대인에게 나타나지 않고 그의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신 까닭이기도 하다. 그 당시의 불신자들과 만세에 걸친 불신자들은 이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여 신앙을 가져야 했다(요20:17).

IV. 예수는 일으킴을 받았는가 아니면 스스로 일어나셨는가?

헬라어로 된 신약에서 예수의 부활을 뜻하는 데 보통 사용된 낱말은 명사 아나스타시스이다. 그러나 엥게르시스라는 명사도 단 한번 사용된 적이 있다. 이 두 명사는 모두 "일어남","일으켜짐"을 동시에 뜻하기 때문에, 이들의 용법은 예수가 일으킴을 받았는가 아니면 죽은 자 가운데서 능동적으로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와 상관된 동사 아니스테미에 있어서는 사정이 다르다. 이 동사는 자동사('일어나다'란 뜻)와 타동사('일으키다"란 뜻)로 쓰였는데, 바울서신의 경우가 대체로 그러하듯이 이 동사가 타동사로 쓰여지면 (롬4:24, 6:4, 8:11,고전15:15, 갈1:1) 부활은 명백히 아버지의 일로 된다. 그러나 이 동사는 복음서에서 여러 차례 자동사로 쓰였으며 바울서신에서도 이따끔씩 그렇게 사용되었다(막 8:31, 9:9,10,31,10:31,34,눅18:3324:746,요20:9,행17:3,살전4:14).

이러한 경우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능동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사실 이 동사의 자동사적 용법은 예수가 그 자신의 힘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났음을 충분히 입증하지는 못한다. 이 동사의 자동사적 의미는 그 자신의 힘으로 일어났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죽은 자의 부활을 뜻하는 데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살전 4: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그의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말한 요한복음 10:1718절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볼 때,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아니스테미의 자동사적 용법이 빈번하게 사용된 것은 의미심장하게도 예수가 그 자신의 힘으로 일어났음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다.

예수가 아버지에 의하여 "일으킴을 받았다는 것"과 그 자신의 힘으로 "일어섰다는 것"을 서로 대조시킬 필요는 없다. 인간의 죄와 그에 대한 저주를 등에 진 여호와의 순종하는 종으로서 예수는 아버지가 그를 일으켜 주실 것을 기다려 예수의 아버지가 그를 일으켜 주실 것을 기다려 예수의 구속 사업이 완성되었음을 입증하였고(요19:30), 다른 한편에 있어서는 성육신한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자의적으로 버린 생명을 다시 취할 권세를 가졌으므로 죽음을 능동적으로 제거하여 영생과 불멸성을 다시 드러내셨던 것이다(딤후1:10). 그리하여 그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1:4).(부활의 함축의미에 대한 보다 세부적인 논의에 관해서는 이 항목 제 VIII장을 보라).

V.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빈 무덤

복음서에 보면, 일요일 아침 무덤이 빈 채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무덤에는 천사들이 앉아 있었으며 이들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서 그의 몸이 거기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한다(마28:6,막16:5,눅24:1-523).한편 요한복음 20:1-8절에 보면, 어떻게 "그 다른 제자"(이는 요한 자신임에 틀림없다)가 예수가 부활하셨음을 믿었는가 묘사되어 있다. 그 제자는 무덤에 들어서자 마자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놓여 예수의 몸을 쌌던 베옷이 주의 깊게 개켜져 옆에 놓여 있는 것을 목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제자에게 있어서는 예수의 시체가 무덤 밖으로 옮겨져 모종의 장소에 매장되었을 것이라는 마리아 이론을 배제시켰다. 만약 사정이 그러했다면 시체를 옮긴 사람들이 상복을 벗겨 그토록 질서 있게 놓아 두었을 리가 없을 것임을 요한은 분명히 깨달았던 것 같다. 이러한 빛 안에서 보면 빈 무덤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자료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 사실 고대 및 현대의 불신앙 때문에 학자들은 이 빈무덤의 증거를 설명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이러한 경향은 부활 직후에 시작되었다. 무덤지기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보고하였을 때, 이들은 병사들을 매수하여 그들이 잠들고 있을 때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 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마28:11-15). 이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은 아래의 사실을 보더라도 분명하다.

(1) 병사들이 잠들고 있는 동안 과연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 가는 일을 보지 못했을까!

(2) 병사들이 잠들고 있는 동안 많은 제자들이 무덤에 접근하여 굳게 닫힌 돌을 들어낸 후 시체를 바깥으로 가지고 나왔는데도 병사들 중 한 사람도 깨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빈 무덤에 대한 여타의 "설명들"도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조리가 서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일부의 학자들은 어두움에 길을 잘못 든 여인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 갔고 거기서 한 젊은이가 길을 잘못 찾아 왔다고 그 여인들에게 말한 것으로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들은 "그가 살아나셨다"는 청년의 말을 부정해야 할 것이다. 텍스트상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이 말은 원 텍스트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배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이러한 이론을 거부할 수 있다.

(a) 마가복음 16:2절에 의하면, 여인들은 해 돋을 때에 예수의 시체가 들어 있던 곳으로 갔다고 한다(막15:47,눅23:55).
(b).만약 이 이론이 옳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두 번째 실수를 저지른 셈이 된다.
(c) 이 여인들 외에 베드로와 요한도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2)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하였다는 이른 바 "졸도 이론"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래와 같은 몇가지 이유 때문에 이 이론을 받아 들일 수가 없다.
(a) 예수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입증되고 확인된 것이다(막 15:4445).
(b) 그의 옆구리는 창으로 찔렸다. 비록 그가 죽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를 통하여 그는 사망하였을 것이다.
(c) 십자가에 달려 잔혹한 상처를 입은 사람이라면 "상복의 긴 동아줄을 풀어 낼"수 없었을 것이며(W.Barclay, Crucfied, p.145), 무덤의 입구를 가로 막은 무거운 돌을 제거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d) 비록 그가 육체적인 힘에 의하여 이 모든 일을 행하였다 할지라도 무덤지기가 그의 탈주를 방해하였을 것이다.

3)제자들이 이른바 부활에 대한 "증거"를 만들기 위하여 예수의 시체를 옮겨 이를 감추었거나 도둑들이 이를 훔쳐갔다는 설. 후자의 견해에 관한 한, 우리들은 도둑들이 값비싼 생각할 수는 있다(요19:3940).그러나 시체에서 옷을 먼저 벗긴 후 이 옷을 가지런히 개어 놓고 몰약과 옷을 무덤에 남겨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무덤지기가 이를 감시하여 방해하였을 것이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는 설에 관하여 생각해 보면, 이러한 견해는 이들이 가장 뻔뻔스러운 제자들임을 뜻하는 것이다. 유대인 학자까지도 "1천9백년간에 걸친 수많은 사람들의 신앙은 기만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견해가 불가능함을 천명한 바 있다(Joseph Klausner, Jesus of Nazareth, p. 35).

4) 유대 당국이나 로마 당국이 시체를 무덤으로부터 끌어낸 후 그들의 목적을 위하여 보관하였으리라는 견해. 그러나 이에 대한 주요 반론은 이 경우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선포하였을 때(행2:24.f), 당국으로서는 그들이 기만자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용이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당국은 그때 시체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5) 몇몇 비평가들에 의하면, 고린도전서 15:34절에서는 빈 무덤이 언급되지 않는다고 한다. 15:1-8절은 부활에 관한 초기 전승을 대변하므로, 이 구절들이 빈 무덤 설화가 부활 신앙을 보다 돈독하게 하기 위하여 초대 교회가 지어낸 것임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a) 이러한 견해는 초대 교회가 가공설화를 지어내어 이를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록으로 간주할 만큼 능숙하게 사람들을 기만하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b) 사실 고린도전서 15:34절에는 빈 무덤이 명확히 전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말에 "그가 장사지낸 바 되었다"는 말을 덧붙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구절은 예수의 시체가 무덤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을 특별히 언급하는 셈이다. 이러한 뒷 배경을 살펴볼 때,"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뜻으로 된다. 이것은 무덤을 특별히 강조해서 이야기하는 사도행전 13:2930절의 바울의 설교에 의하여 분명해진다.

6) 빈 무덤의 표징은 이와 관련된 설화의 상호 모순 때문에 거부되어야 한다는 견해 예컨대 마태와 마가는 한 명의 천사를 언급할 뿐인데 반하여 누가는 "두 사람"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는 모순을 이야기할 하등의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누가가 말한 것처럼 무덤에는 본래 두 명의 천사가 앉아 있었으나 여인들에게 이야기한 천사가 앞에 있어 그 여인들에게 잊어 버릴 수 없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것은 어째서 불가능한 견해일까?

이것이야말로 마태와 누가가 저 대언자를 강조하면서도 그 뒤에 또 하나의 천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까닭이 아닐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빈 무덤 안과 그 주변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세부적으로 알려져 있다면(지금으로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이른바 빈 무덤 설화에는 모슨이 존재한다는 견해는 분명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빈 무덤에 대한 목격자가 아직도 살아 있을 때 예수의 부활에 관한 진리를 선포하면서 서로 서로에게 모순된 기사를 작성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만일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복음서 기자들이 각자의 문서에 관하여 서로 협의 하였으며, 마태와 누가가 마가복음서의 일부를 각자의 복음서에 안에 삽입하였다는 것이 옳다면, 이러한 모순점들은 견해의 차이일지언정 모순이 아닐 것이다. 빈 무덤 설화에 대한 논의를 끝내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래와 같은 것이다. 즉 빈 무덤에 관한 증거를 뒤집어 엎으려는 사람들이 다양하긴 하지만 설득력 없는 설명을 한다는 사실은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에서 실제로 그리고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성경의 진리를 강력히 옹호하는 것이다.

VI. 부활 이후의 현현

A.이에 관한 기록

예수는 부활한 후 40일 동안 그의 부활에 관한 "많은 증거"를 주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행1:3).예수는 여러 차례 성도 예루살렘이나 그 근처에 나타났으며 이것을 가리켜 소위 "예루살렘 현현"이라고 한다. 예수의 현현을 목격한 사람들은,
(1) 동산에 있었던 마리아(요20:11ff)
(2) 길 가에 서 있었던 여인들 (마28:910).
(3) 시몬 베드로 (눅24:34).
(4) 엠마오 도상에 있었던 제자들 (24:13.ff).
(5) 부활절 아침에 모여 있었던 사도들과 제자들의 무리(24:33,34, 요20:19ff).
(6) 일주일에 뒤에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도마.
(7) 올리브 산에서 예수가 승천하는 것을 보았던 제자들 (눅24:5051,행1:9)이다.
예수는 또한 갈릴리에서도 몇 차례 나타났으며,이를 가리켜 이른 바 "갈릴리 현현"이라고 한다. 예수의 갈릴리 현현을 목격한 자들은,
(1) 해변 가에 있었던 7제자들(요21:1ff).
(2) 산에 모여 있었던 예수의 제자들(마28:16) 이다.

그런데 이 현현은 바울이 기록한 바 있었던 5백여 형제들에게 현현한 사건과 동일한 것인 듯 하다. 이 예루살렘 및 갈릴리 현현 이외에도 부활하신 주님은 야고보 (15:7) 와 다메섹 도상의 바울에게 끝으로 나타나셨다(행9장). 바울은 이 현현을 여타의 현현들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하였다(고전 14:8).

B.도전받고 있는 현현 설화들

일부의 학자들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현현 설화의 신뢰성을 부인해 왔다.

(1) 고린도전서 15:1-8절의 초기 기록에서 바울은 오직 다섯 번의 현현에 대하여 언급할 뿐이다. 이들 중 한 가지도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비평가들이 내린 결론에 의하면, 후대에 교회는 변증적 목적을 위하여 몇 가지 특별한 설화를 "지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용납될 수 없다.

(a) 이러한 견해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초대 교회가 변증의 목적으로 "선의의 거짓말"을 지어냈다고 혐의를 두는 것이다.

(b) 이 두 가지 문서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일치점은 쉽게 설명될 수 있다. 확실히 바울은 "특별한 힘을 갖고 있었던 사건들을 교회 공동체 지도자나 다수 목격자에게 나타난 현현과 결합시켰을" 뿐이다(E.L. Allen,NTS.1957년 7월호,p.351). 복음서 기자들은 목격자들에게서 얻은 자료들을 덧붙임으로써 이러한 초기의 증거자료를 강화시켰으며,그 때문에 이러한 자료들은 초기 자료와 똑같은 진실성을 갖는다.

(2) 비평가들은 마태의 갈릴리 현현 기록과 누가의 예루살렘 현현 전승 사이에는 서로 화해될 수 없는 갈등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지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서의 비교 연구에 의하면, 각각의 복음서 기자는 그가 고려하였던 특수한 목적에 맞추어 수집한 자료들을 취사 선택하였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주요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는 마태와 요한이 기록한 바와 같이 예수가 다른 곳에도 나타났음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3) 설화들이 서로 모순된다는 견해. 예컨대 마리아는 예수의 몸을 건드릴 수 없었는데 반해 (요20:17),도마는 예수님의 권유에 따라 그것을 만졌다는 것이다(요20:27). 그러나 여기서도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상황이 서로 다를 뿐이다. 이미 논의한 바와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예수를 따엥 모시고 싶어했으며, 예전과 같이 제자들과 계속 몸의 친교를 나누기를 원했다. 마리아는 예수를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를 붙잡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의심 많은 도마는 장차 복음이 전파되는 데 있어서 그의 증언이 큰 몫을 차지할 사도였다. 그는 예수의 부활의 실재를 완전히 납득할 수 있어야 하였다.

C. 여러 가지 이론.

몸의 부활을 거부하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교회의 부활 신앙을 창출한 "모종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까? 이 문제에 관하여 이들은 여러 가지 이론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1) 주관적 환상설 : 이 이론에 의하면, 제자들이 죽은 주를 너무나도 간절히 그리워한 결과 그를 보았고 그가 그들에게 이야기했다고 상상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펴는 학자들 중 일부는 환상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학자들은 환상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주관적인 것이며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흥분된 마음 속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데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받아 들일 수 없다.

(a) 이러한 종류의 환각은 "오랜 기간에 걸친 과장된 소망의 절정(climax)으로 일어나는 법이다"(John R. W .Stott, Basic Christianity, p. 55).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감시"하고 있었다기보다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 들었을 때, 그리고 심지어 부활하신 주님 자신을 보았을 때에도 이를 불신하거나 의심하였다(마28:17,막16:81114,눅24:1137,요20:2425).

(b) 객관적 환상설 : 이 이론에 의하면, "나사렛 예수의 연속체"인 예수의 불멸의 영 또는 영적인 그리스도는 아직도 영적으로 살아 계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부활 설화가 예수의 부활체라는 실재 및 예수의 부활체와 매장된 시체와의 동일성을 강조한다는 사실에 입각하고 있다. 예수 자신도 (눅24:3941,요20:171821L9).복음서들은 이 부분의 기록들을 초대 교회가 창조한 선의의 거짓말로 치부하게 하는 근거를 전혀 제공하고 않는다.

D.사건의 진상

그렇다면 예수의 현현이 사실이며, 예수가 "살과 뼈"를 지닌 부활한 육적인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전혀 의심될 수 없다(눅24:39).이러한 육적인 몸은 매장시의 그것과 꼭 같은 것이었다. 즉 창에 찔린 상처의 흔적도 여전히 볼 수 있었다(요20:25).

이와같은 현현에 기초하여 교회는 주님이 죽음을 완전히 정복하셨으며, 우리들의 몸에 대한 죽음의 파괴적인 영향도 제거하셨다는 절대적 확신을 갖게 되었다.

VII. 예수의 부활체

A.영화되었다는 견해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나 죽은 자 일반이 몸으로 실제 부활하였다는 사상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몸은 본래 악하며 영혼은 본질적으로 선하여 신적이므로 불멸적이라는 고대 헬라 사상의 지배를 받았으며, 또한 지금도 그러하다. 최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용어에 관한 한 이러한 헬라 사상을 거부한다. 이들도 몸의 부활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서 후자는 육적인 몸이 아니다. 이들은 현대적 세계관의 빛 안에서 볼 때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은 존재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죽은 자가 육적인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신화이다"(E. Brunner, Das Ewige Zukunft und Gegenwart, pp.26, 122).

이들에게 있어서 "몸"이란 "인격"과 "자아"를 뜻한다 (J.A.T. Robinson, The Body, 여러곳).이러한 "몸"은 죽은 다음에 빗물질적인 상태로 존재하며, 이러한 계속적 존재를 몸의 "부활"이라 한다. 그러나 사실상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이러한 견해와 헬라 사상 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거의 없다. "이 이론의 옹호자들은 예루살렘을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강조점이 아데네에 있지 않은가 의심하는 바이다"(E. Eillis, Paul and His Recent Interpreters, p. 48). 또한 이들 중 일부가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이란 교회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전혀 없다 (O. Cullmann, Proleptic Deliverance of the Body, pp. 168.172). 이들에게는 예수의 인격적 부활체는 완전히 빗물질적인 것이거나 유령과도 같은 "영체"로 간주되고 있다.

B. 실제의 육적인 몸.

예수의 부활체를 영화시키는 사상은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과 전혀 반대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얼굴과 목소리로 예수를 알아 보았다는 사실이다(마28:9,눅24:31,요20:16192021:12).더우기 이들 중 몇 사람은 그의 몸을 만졌으며, 또 그렇게 하도록 권유받았다(마28:19,눅24:39,요20:1727). 한편 예수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먹었으며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눅24:304243,요21:1213,행10:4041). 이 이외에도 예수는 강조하여 말씀하시기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였다(눅24:39).성경이 예수의 부활체가 육적인 실재를 갖고 있음을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C. 꼭같은 몸이긴 하지만 영화로와진 상태에 있는 몸.

예수의 부활체는 장사할 때와 꼭같은 몸이었다.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퓨히신 흔적이 역력한 손발과 옆구리를 보이셨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눅24:39,요20:20).도마는 예수의 부름을 받아 상처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를 직접 만져보기도 하였다. "이 상처들은 부활한 몸과 장사한 몸이 서로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절대무오한 증거였다" (Marcus L.Loane, It is the Lord,p.17). 이러한 사실은 모두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즉시 몸의 상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부활 설화 속에는 신비한 요소가 들어 있다. 예컨대 부활하신 주님이 놀라웁게도 벽으로 나타났다 사라질 수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 그는 엠마오 도상의 두 사람에게 나타났다가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셨다"(눅 24:31,영어 성경으로는 "사라졌다"). 이와 관련해서 이 구ㅜ절에 나오는 헬라어는 아판토스(aphantos)인데, 이는 "초자연적으로 사라짐"을 뜻한다(J.M.Creed, Comm.[누가복음 주석].예수가 친히 "그 가운데 서 계셨다"는 누가복음 24:36절도 예수가 기적처럼 홀연히 나타났음을 전제한다.

그 까닭에 제자들은 영을 보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37절).요한도 이 사건을 기록하였다. 즉 그는 문이 닫혀 있는 데도 불구하고 예수가 들어 와 그들 가운데 서 계셨다고 한다(20:19). 성경은 예수가 어떻게 닫힌 문이라는 장애물을 넘어 섰는지에 관하여 말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이에 대하여 독단적인 입장을 취할 수가 없다. 이 신비롭고 기적적인 사건의 특징으로부터 우리는 부활 이후에 주님의 인간성이 하나님의 편재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겠지만 (R.C.H. Lenski,요한복음 주석). 이러한 견해는 근거가 없는 것 같다.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긴 하지만 참 인간이며 여전히 인간이라는 성경의 끊임없는 가르침(딤전 2:5) 과 모순된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몸을 취하고 있었을 때에도, 예수는 신적 편재성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해석은 예수의 참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승천으로부터 그 실재성을 빼앗는 것으로 된다.

또 하나의 신비스러운 요소는 사람들이 첫 눈에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태복음 28:17절에 보면 예수가 갈릴리에 나타나셨을 때에도 이를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들이 예수의 동일성을 의심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동산지기로 잘못 보았으며, 그의 목소리를 알아 챌 수 없었다(요24:15).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의 경우처럼 눅(24:16) 예수 자신이 이러한 변화를 일으켰다고 할 수 있겠지만, 부활이 예수의 몸에 일으킨 변화도 역시 중요한 것이다. 요한복음 21:12절에 보면, "(제자들 가운데) 당신이 누구냐(고) 감히 묻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들이 그가 주님이신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현현이 다소 이례적인 것이었으며 몇몇 제자들로 하여금 그의 동일성을 확신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겠다. 기적적으로 많은 고기를 잡아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알아내지 못했다면 그의 현현은 그들로 하여금 "당신이 누구냐?"고 묻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신비와 기적의 요소들은 기적적인 승천과 함께 예수의 몸은 비록 살과 뼈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제는 영광스러운 조건 속에 있으며 시공간의 법칙과 무관하게 행동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자신이 시공간 너머에 존재하였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견해는 또 다시 예수의 참 인간성을 제거하겠기 때문이다. 예수의 몸은 바울이 말한 바 있었던 것과 꼭같이 "신령한 몸"이었으며,이는 신자의 부활체 형태이기도 하다(고전 15:44,빌3:20).여기서 "신령한"이라는 낱말은 예수의 부활체를 영화하려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바와 같이 "비물질적"이라는 뜻을 갖고 있지 않다. 바울의 용어법에 있어서 "신령한"이라는 낱말은 '영의 지배를 받는'다시 말하면 '성령에 의하여 지배되는'이란 뜻이다.

신령한 몸은 성령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는 몸이며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는 몸이다. 이러한 몸이 주님의 부활체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즉 바울이 신령한 몸을 묘사하듯이 이러한 몸은 멸망하지 않으며 영광스러우며 권능으로 가득 차 있으며 썩지 않으며 죽지 않으며 승리하는 몸이다(고전 15:42-50). 살과 뼈로 이루어져 있는 영광스럽고 신비스러운 몸을 과학적인 견지에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말씀을 믿어야 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신령한 몸을 보라).

VIII. 예수의 부활이 갖고 있는 의미

인격과 사역은 대단히 독특하기 때문에 그의 부활도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가 영과 d속에서 부활한 것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권능을 가장 놀라웁게 나타내는 것이다. 신자는 이러한 권능이 그 안에서도 역사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고후 13:4,엡1:1920,벧전1:5-7). 예수는 부활을 통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1:4).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등한 자라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그를 사형에 처하였었다 (마26:63-65,막14:61-64,눅22:7071).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써,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할 방도가 없게끔 증거하셨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으로, 예언자로, 하늘의 보좌에 앉은 제사장으로 높혀지는 것의 시작이었다(행29:36,빌2:9-11). 또한 예수 자신이 선포했듯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다(마28:18).사도들은 부활하신 구주의 왕권을 증거하는 표징으로서 기적을 행하였다(행4:17).입으로 예수가 구주라고 고백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셨다고 믿는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써 하나님은 예수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세상의 심판자라고 선포하셨는데(행17:31), 이는 우리 주 자신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기도 하였다(요5:2227). 세상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영생에 대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갖는다(요3:16193536).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신자는 의인과 화해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을 얻게 된다. 이러한 근본적인 축복의 이유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에서 찾을 수 있다(롬5:1017-19). 그러나 부활이 없다면, 저 구속적 죽음은 구속의 능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 의미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될 것이다. 부활은 "다 이루었다"라는 예수의 외침에 대한 하나님의 "아멘"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신자가 하나님과 화해하였고 의롭게 인정되었음을 보증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사실은 그의 죽음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롬8:3233).

그리스도가 부활하였을 때, 그의 죽음과 부활로 대변하였던 신자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갈3:1). 그의 죽음은 신자들에게 부과되어 있었던 죄의 멍에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였을 때, 그는 죄의 멍에가 없는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는 자유와 영광 속에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롬6:9-11).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인하여 스스로를 죄로 인해 죽은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죄를 죽임으로써, 신자는 부활하신 주님과 친교를 나누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롬6:5612-14,골3:5).

예수께서 영광스럽고 영존하며 신령한 육의 몸으로 부활한 사실은 신자들에게 장차 그들도 꼭같은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롬6:5,고전15:47,빌3:21,요일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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