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세월(歲月)
강산이 네 번이나 변했건만
그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여전히 이어져
가요계의 거장(巨匠)으로 군림해온
조용필 씨가 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아 대규모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
‘살아있는 신화’,
‘진정한 민족가수’,
‘대중예술의 자존심(自尊心)’ 등
조용필 씨만큼 다양(多樣)한 호칭을 갖고 있는
가수도 드물지만 그의 모든 것은
최다(最多), 최고(最高), 최장(最長)이라는
진기록들로 수두룩하다.
그가 위대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理由)가 있겠지만,
가장 핵심은 대중성과 음악성을 동시에
갖추었다는 점이다.
아이들까지 불렀던 ‘고추잠자리’,
운동회 때마다 나왔던
국민(國民)운동가 ‘여행을 떠나요’,
그리고 최초로 교과서까지
수록되었던 ‘친구여’ 등
그의 노래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경로당까지
동시에 울려 퍼진
최초(最初)이며 마지막가수일지도 모르겠다.
중국 황제 평균 수명도 39세요,
로마제국 황제도 37세,
우리나라 임금은 평균 43세였다는데,
그는 어찌 노래인생만으로
40년을 이어올 수 있었는지 그의
음악 햇수 자체가 신화(神話)라 할 수 있다.
요즘엔 10년도 못 채우는 일들이 허다해서
무엇하나 지키지 못하고
금새 사라져 버리는 세대인지라
그의 40년 성상은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의 40년도 사연(事緣) 많은 시간이었다.
고3때 비틀즈에 빠져 가출하면서부터
순탄치 않은 인생이 시작되었다.
미군클럽에 활동하면서부터
그의 끼는 금세 드러나 앨범을 발표하면서
빛을 보기 시작했지만,
대마초 사건에 연류 되어 구속과 해금의
어두운 시기를 지나면서,
80년대 초부터 다시 최정상을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슨 사연이었는지
하객이 한명도 없는 채 결혼(結婚)했으나
3년 뒤에 이혼하고,
10년 뒤에 다시 재혼했으나,
9년 동안 행복하게 살다가 아내는 병으로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다.
화려한 과거에는
이렇듯 사연(事緣)도 많았지만,
음악가로선 그는 분명 성공한 사람임에도
지나간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계속 좋은 무대를 위해
음악의 여정을 펼칠 것이라고 했다.
조용필 씨에게 ‘40년’은 이렇게
그냥 지나온 세월(歲月)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만의 땀과 철학이 있었기에
오늘의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첫째로 열정(熱情)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키 166cm, 몸무게 56kg인 그는
누가 봐도 왜소한 사람이지만 무대만 서면
순식간에 거인(巨人)이 된다.
‘조용필’ 그의 이름 세 자를 들으면
가장 먼저 ‘열정(熱情)이라는
단어가 생각날 정도로,
‘음악’ 자체가 인생이었던 그에게
최근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로 선정된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노래를 잘한다는
의미(意味)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오직 연습(練習)에
연습만이 오늘의 그를 만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 특성 상
탁성(濁聲)을 내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것보다는 새로운 무대(舞臺) 앞에 서기 전,
홀로 고독하게 같은 노래를 수천 번
부르며 전혀 새로운 느낌을
갖고 대중 앞에 서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런 바탕 속에
심장을 두들기는 사운드와
밝은 무대매너 그리고 넘치는 열정(熱情)으로
심금을 울리는 애절한 그의 노래는
뮤지컬이나 오페라 같은
웅장함이 팬들로
하여금 갇혀있던 한(恨)을 풀게 하며
무언의 메시지를 통해 엄청난 에너지를 주었던 것이다.
에너지는 세상을 지배(支配)한다.
에너지는 볼 수 없지만,
어딜 가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좋은 에너지와 나쁜 에너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너지란 ‘열정’이다.
‘열정(熱情)’은 성공의 바로미터다.
사람은 에너지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지만,
열정이 넘치는 사람은 어딜 가서나
에너지를 주게 되어있다.
사람들은 그 에너지를 받으려
돈을 들고 찾아간다.
이번 무대도 특별석은 20만원에 가깝지만
사람들은 그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은
열정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엑기스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가끔 타인의
에너지도 필요하지만 근본적(根本的)으론
그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모든 열정은 시간이 지나면 식어지지만,
식어지지 않는 열정 두 가지 중에
하나가 도전(挑戰)이다.
그것은 사소한 일에도 집중하게 하며,
멀리 바라보고 뛰게 하는 열정의 샘과 같다.
다른 하나는 용서(容恕)다.
용서는 하찮은 문제들은 해결케 하는
인생의 마스터키와 같다.
절대자에게 이웃에게 아니 자신에게
용서받은 자는 날마다 새 힘을 얻게 된다.
둘째는 그의 40년은 자존심(自尊心)에 있었다.
미당 서정주 선생은 평소 조용필 씨에게
‘당대 최고의 명창(名唱)’이라는
호칭을 아끼지 않으셨다.
세상에 노래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큰 찬사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에겐 그 호칭(呼稱)에 합당한
실력과 자존심이 있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최고(最高)’라는 말에 조금도 이의를 달 수
없는 것은 천재적인 음악성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모차르트처럼 어떤 노래든
한 번 들으면 악보를 그리고,
어떤 악보를 한 번만 보면 노래가 나온다.
이러한 천재(天才)성 때문이었는지,
웬만해서는 양에 차질 않아
‘네가 음악을 뭘 알아!’ 라는 불호령만
떨어지기에 가까이하는 사람도 없었지만은,
그럼에도 혼쭐난 후배들이 다시
그를 찾아가는 것은 그의 카리스마야
어쩔 수 없다하지만 그와 함께 작업하면
자신들의 음악도 완벽(完璧)해 진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실력과 함께
최고(最高)가 되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이
무언인가를 알았던 모양이다.
90년 대 초 팬들과 약속(約束) 때문에
30회 출연에 25억짜리
밤무대도 거절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의 자존심(自尊心)은 편안하고
안락한 삶 대신에,
언제나 최고의 삶을 선택했던 그는
죽을 때가 되면 산 정상(頂上)에 올라가
굶어 죽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자존심이
자신의 삶을 대변해 주고 있었기에
이번 40주년 공연 타이틀로 삼았던 것이다.
자존심은 이렇게
영혼에서 타오르는 불꽃으로
삶을 당당(堂堂)하게 만들어주고,
자신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류가 되고 있다.
하지만 엉뚱하게 자존심이라는 불꽃이
속에서 타질 않고 겉에서 타면
자존심 덫에 걸려 사람과 관계(關係)를 잃게 된다.
진정한 자존심(自尊心)은 조용필 씨처럼
실력에 기초한 자신감이기에
상처는커녕 오히려
예를 다하여 상대를 배려할 줄 안다.
그것은 결코 눈앞에서
자기(自己)방어적인 자존심이 아닌
미래의 구체적인 목표에서
자존심을 찾기에,
최고가 되는 그 날까지 자아를 내려놓고
한 알의 밀알처럼 말없이 홀로
실력을 쌓는 것이
진정(眞情)한
자존심을 세우는 길이다.
세 번째는 오늘의 40년은 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팬은 끊임없이 스스로 자기 증식한다.
새벽 2시까지 집 지키는 강아지처럼
그의 곁을 지키는 팬들이 있다.
때론 알콜에 녹초가 된 그에게
‘오빠, 왜 이렇게 술 많이 드셨어요.
건강 하세요!’
진정으로 염려해 주는 팬도 있지만,
때론 진드기처럼 호텔 욕실까지 몰려오는
극성팬들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팬들에게
항상 감사(感謝)한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은
그들이 멀어지면
자신도 사라져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2003년 잠실 주경기장 공연 때
폭우 속에서도 2만여 팬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그의 음악에 열광하며
함께했던 일이다.
조용필 씨는 당시의 DVD를 볼 때마다
눈물을 글썽인다.
눈물 나도록 고마운 팬들이
가족처럼 40년을 동거동락 했기에,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가 먼저 하늘나라에
갔음에도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조용필 씨는 방
다섯 개짜리 큰 빌라에 살지만,
그 방들은 사람대신에
운동(運動)기구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유일한 도락은
술과 담배인데 담배는 몇 년 전에 끊고
이젠 술로 위안을 삼지만,
허무(虛無)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와 함께 울어줄 사람,
나와 함께 기뻐해 줄 사람이 있다면
그는 행복(幸福)한 사람이다.
나와 함께 인생을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공(成功)한 인생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차라리 내 자신이 함께 울어주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인생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이웃도 외로워하지 않고
내 자신도
행복한 인생(人生)으로 살 수 있게 된다.
주여,
그에겐
오직 음악(音樂)이
인생의 모든 것이었던 것처럼,
저에겐
무엇이 제 인생이 되고 있는지,
자문(自問)해 볼 때,
‘당신’이라고
확실(確實)히 말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왕궁에서 40년보다
광야에서 40년이
더 큰 공부였던 모세처럼,
남은 제 삶을 통해
자존심을 찾고
영원한 팬이 되게 하소서.
2008년 4월 20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사진작가ꁾ 투가리님 lovenphoto님 크로스맵사이트 피러한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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