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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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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치관은?
어떤 사람은 사람을 비유를 들때 음식으로 합니다. 음식은 짜고, 맵고, 달고, 쓰고, 시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도 여러가지의 맛을지니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을 향기로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은은한 향기, 감미로운 향기,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향기도 있는가 하면 마음을 흥분하게 하는 향기도 있습니다. 향기의 종류도 천차만별인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사람의 인격을 중량에 두기도 합니다. 무게가 나가는사람 혹은 가벼운사람 그것은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입증해 주기도 합니다. 모든 만물도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가치가 존재하듯이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말씀 안에 기초를 세운 인격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나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이며 물질이나 명예가 주어졌을 때 어떻게 활용하며 살아야 할까를 정립한 것이 그 사람의 가치관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가치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시는 가치는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말씀을 모를 때는 자기식 가치관으로 밀어 붙이고 살았지만 주님을 알아가면서 부터는 진리에 근거한 가치관이 확립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갈등과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주님을 모를 때 갖고 살던 가치관은 사단이 주는 정보에 근거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치관은 진리의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천국의 세계를 기초로한 사실에 입각한 말씀의 가치를 부여해 주는 것입니다.
사단은 일시적이고 거짓된 것에 근거를 두고 사람들을 미혹하기 때문에 결국은 깨닫고 돌아설 때는 헛된 삶을 살았다고 후회하게 합니다. 속고 살았다는 실상이 드러나므로 참된 회개와 분노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감미로운 향기를 풍기며 아름다운 꽃을 피어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해도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는 곧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호화롭고 사치하게 사는 인생이였다 할지라도 늙고 병들면 장미가 그 향기를 잃어 가듯이 우리 인생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세계에 눈을 뜨고 사는 사람은 그 삶의 가치가 확실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가치를 갖게 해 주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우리의 삶을 교육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병원 침대에 눕고서야 가치를 알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삶의 가치관을 바로 정한다고 합니다.
또한 사업에 실패한 후 물질적인 고통으로 말미암아 삶의 가치를 바로 정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지식으로 모든것이 가능할 때는 세상 가치관에 의해 살다가도 자녀들의 빚나간 행동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부모의 가치관은 물론 가정 문화의 가치관 까지도 바로 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히 한국의 문화권속에 태어나 부모로부터 받은 정보에 의해 형성된 가치관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기식 가치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단에 의한 표면적 가치관, 진리의 의한 내면적 가치관 꽃을 꽃으로 보는 가치가 있고 꽃을 보면서 그 꽃을 피우게 하신 창조주를 생각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손에 잡히는 것이 있을 때 성공했다는 가치 평가가 있고 그것을 뛰어넘는 가치 평가가 있습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위축 받는가 하면 그 삶을 통해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게 되어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가치를 갖게 되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환경적인 조건으로 배우지 못하였고 처음부터 즉 태어나면서 부터 가난과 궁핍으로 시작된 삶이었기에 그것이 부끄러워 자기 스스로 자기를 끝없는 공간 속에 가두어 버리는 어리석은 자도 있습니다. 그는 그 굴레속에 자신을 지체케 하면 본인은 물론 그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도 고통을 안겨 주게 됩니다.
자기의 잘못된 가치관 속으로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자기를 정당화 하려는 것은 대단한 또다른 문제를 야기 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여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좀 불편할 뿐이라는 생각으로 받아드리게 되면 좀더 당당하고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솔로몬은 인생의 낙을 누리는데 가치를 두었고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데 가치를 두고 살았습니다. 솔로몬은 육체의 욕구를 충족시켜 행복을 더 얻으려 했지만 바울 사도는 영적인 욕구를 충족 시키므로 만족하려 했습니다.
결국 솔로몬은 실패자의 탄식으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하였고. 바울 사도께서는 내가 나의 믿음을 지키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으니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노라고 승리의 개가를 불렀습니다. 두 분의 가치관의 차이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눈으로 본 아간은 여러 가지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그토록 체험 하고도 그의 가치관은 지극히 세상적이였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여리고성을 점령하면서 전쟁 중에 금, 은, 보물과 고급 외투를 훔쳐 자신의 장막에 감추었으므로 아이성 전쟁에서 실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원히 보장되는 세계를 바라보지 못했기에 그만 아간은 그로 인하여 40년 광야 생활을 접고 가나안을 바라보며 그 가족들 모두 그 삶을 마감하게 되었습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된 사울을 봅니다. 별로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지만 그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치관은 하나님 말씀보다 세상 사람들의 평가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기에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곁길로 빗나간 것을 보게 됩니다. 가치관은 참 중요합니다.
내 삶의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영력들이 그 가치관으로부터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그의 표면적 삶은 그의 내면적 가치를 말해 줍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일보다는 육적인 가치를 따라 평가받기 원했던 사울 왕이였기에 그는 스스로 영광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전쟁 후 승리의 기념으로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웠고 자신이 갖고 있는 왕권으로 하나님의 종 사무엘의 자리를 월권했으며 끝까지 자신의 체면에만 몰입한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세속적인 가치관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많은 문제들이 대두되는 것은 아직도 세속적 가치관에 매여 서로를 판단하고 공격하므로 무엇인가 쟁탈하려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중궁궐 왕의 자리를 버리고 미디안 광야를 택한 모세도 영적 가치관을 갖고 있었기에 그 길을 택한 것이고 그러므로 그는 6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다시 광야 생활 사십년의 길을 걸을 수가 있었습니다.
신약성경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가치관이 영적이었기에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원수를 향해 기도해 줄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육적 가치관과 영적 가치관은 상반된 관계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일을 쉽게 하게 된다면 육적 가치관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를 억울하게 하는 자를 향하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 난다면 그는 영적 가치관에 있는 것입니다. 영적 가치관이 있는 사람은 공격하는 것보다는 억울 하지만 받아 드리고 맞아 주는 삶을 삽니다. 영원한 세계를 믿고 있기에 현세의 것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세속적 가치관에 매인 사람은 건드리면 바로 반응합니다. 감정으로 누구에게든지 지고는 못삽니다.
언제나 누르고 지배해야 합니다. 그는 누군가를 누르고 미워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알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실수와 허물을 약점으로 잡고 흔들어 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을 즐깁니다. 세속적 가치관의 극치를 달리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교회를 다녀도 인격 성장이 안되는 것은 말씀을 기초로한 인격적 가치관 정립이 안됐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평가하는 인격이 아니고 남이 나를 평가해 주는데 그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가운데 이루어지는 모든 삶은 곁길로 투자 되거나 소모될 뿐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가치관 정립을 바로 하여 복된 삶을 살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비유를 들때 음식으로 합니다. 음식은 짜고, 맵고, 달고, 쓰고, 시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도 여러가지의 맛을지니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을 향기로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은은한 향기, 감미로운 향기,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향기도 있는가 하면 마음을 흥분하게 하는 향기도 있습니다. 향기의 종류도 천차만별인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사람의 인격을 중량에 두기도 합니다. 무게가 나가는사람 혹은 가벼운사람 그것은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입증해 주기도 합니다. 모든 만물도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가치가 존재하듯이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말씀 안에 기초를 세운 인격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나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이며 물질이나 명예가 주어졌을 때 어떻게 활용하며 살아야 할까를 정립한 것이 그 사람의 가치관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가치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시는 가치는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말씀을 모를 때는 자기식 가치관으로 밀어 붙이고 살았지만 주님을 알아가면서 부터는 진리에 근거한 가치관이 확립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갈등과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주님을 모를 때 갖고 살던 가치관은 사단이 주는 정보에 근거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치관은 진리의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천국의 세계를 기초로한 사실에 입각한 말씀의 가치를 부여해 주는 것입니다.
사단은 일시적이고 거짓된 것에 근거를 두고 사람들을 미혹하기 때문에 결국은 깨닫고 돌아설 때는 헛된 삶을 살았다고 후회하게 합니다. 속고 살았다는 실상이 드러나므로 참된 회개와 분노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감미로운 향기를 풍기며 아름다운 꽃을 피어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해도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는 곧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호화롭고 사치하게 사는 인생이였다 할지라도 늙고 병들면 장미가 그 향기를 잃어 가듯이 우리 인생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세계에 눈을 뜨고 사는 사람은 그 삶의 가치가 확실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가치를 갖게 해 주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우리의 삶을 교육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병원 침대에 눕고서야 가치를 알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삶의 가치관을 바로 정한다고 합니다.
또한 사업에 실패한 후 물질적인 고통으로 말미암아 삶의 가치를 바로 정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지식으로 모든것이 가능할 때는 세상 가치관에 의해 살다가도 자녀들의 빚나간 행동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부모의 가치관은 물론 가정 문화의 가치관 까지도 바로 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히 한국의 문화권속에 태어나 부모로부터 받은 정보에 의해 형성된 가치관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기식 가치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단에 의한 표면적 가치관, 진리의 의한 내면적 가치관 꽃을 꽃으로 보는 가치가 있고 꽃을 보면서 그 꽃을 피우게 하신 창조주를 생각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손에 잡히는 것이 있을 때 성공했다는 가치 평가가 있고 그것을 뛰어넘는 가치 평가가 있습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위축 받는가 하면 그 삶을 통해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게 되어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가치를 갖게 되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환경적인 조건으로 배우지 못하였고 처음부터 즉 태어나면서 부터 가난과 궁핍으로 시작된 삶이었기에 그것이 부끄러워 자기 스스로 자기를 끝없는 공간 속에 가두어 버리는 어리석은 자도 있습니다. 그는 그 굴레속에 자신을 지체케 하면 본인은 물론 그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도 고통을 안겨 주게 됩니다.
자기의 잘못된 가치관 속으로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자기를 정당화 하려는 것은 대단한 또다른 문제를 야기 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여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좀 불편할 뿐이라는 생각으로 받아드리게 되면 좀더 당당하고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솔로몬은 인생의 낙을 누리는데 가치를 두었고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데 가치를 두고 살았습니다. 솔로몬은 육체의 욕구를 충족시켜 행복을 더 얻으려 했지만 바울 사도는 영적인 욕구를 충족 시키므로 만족하려 했습니다.
결국 솔로몬은 실패자의 탄식으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하였고. 바울 사도께서는 내가 나의 믿음을 지키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으니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노라고 승리의 개가를 불렀습니다. 두 분의 가치관의 차이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눈으로 본 아간은 여러 가지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그토록 체험 하고도 그의 가치관은 지극히 세상적이였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여리고성을 점령하면서 전쟁 중에 금, 은, 보물과 고급 외투를 훔쳐 자신의 장막에 감추었으므로 아이성 전쟁에서 실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원히 보장되는 세계를 바라보지 못했기에 그만 아간은 그로 인하여 40년 광야 생활을 접고 가나안을 바라보며 그 가족들 모두 그 삶을 마감하게 되었습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된 사울을 봅니다. 별로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지만 그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치관은 하나님 말씀보다 세상 사람들의 평가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기에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곁길로 빗나간 것을 보게 됩니다. 가치관은 참 중요합니다.
내 삶의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영력들이 그 가치관으로부터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그의 표면적 삶은 그의 내면적 가치를 말해 줍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일보다는 육적인 가치를 따라 평가받기 원했던 사울 왕이였기에 그는 스스로 영광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전쟁 후 승리의 기념으로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웠고 자신이 갖고 있는 왕권으로 하나님의 종 사무엘의 자리를 월권했으며 끝까지 자신의 체면에만 몰입한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세속적인 가치관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많은 문제들이 대두되는 것은 아직도 세속적 가치관에 매여 서로를 판단하고 공격하므로 무엇인가 쟁탈하려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중궁궐 왕의 자리를 버리고 미디안 광야를 택한 모세도 영적 가치관을 갖고 있었기에 그 길을 택한 것이고 그러므로 그는 6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다시 광야 생활 사십년의 길을 걸을 수가 있었습니다.
신약성경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가치관이 영적이었기에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원수를 향해 기도해 줄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육적 가치관과 영적 가치관은 상반된 관계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일을 쉽게 하게 된다면 육적 가치관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를 억울하게 하는 자를 향하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 난다면 그는 영적 가치관에 있는 것입니다. 영적 가치관이 있는 사람은 공격하는 것보다는 억울 하지만 받아 드리고 맞아 주는 삶을 삽니다. 영원한 세계를 믿고 있기에 현세의 것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세속적 가치관에 매인 사람은 건드리면 바로 반응합니다. 감정으로 누구에게든지 지고는 못삽니다.
언제나 누르고 지배해야 합니다. 그는 누군가를 누르고 미워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알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실수와 허물을 약점으로 잡고 흔들어 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을 즐깁니다. 세속적 가치관의 극치를 달리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교회를 다녀도 인격 성장이 안되는 것은 말씀을 기초로한 인격적 가치관 정립이 안됐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평가하는 인격이 아니고 남이 나를 평가해 주는데 그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가운데 이루어지는 모든 삶은 곁길로 투자 되거나 소모될 뿐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가치관 정립을 바로 하여 복된 삶을 살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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