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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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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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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이유; 충동적
태양인은 생각보다 말이 앞서고, 말보다는 행동이 앞선다. 그러다보니 말은 많은데 분위 기 파악 못하는 말, 영양가 없는 말이 많고 행동도 언뜻 보면 우스꽝스런 행동이 많다. 그 렇다고 전혀 악의가 있는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저 사람이 솔 직하니까, 순진하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동정 섞인 말을 듣는다. 이들은 단점이 잘 드러나 지만 인간적인 정이 많고 솔직담백한 사람들이다. 행동이 때로 동키호테처럼 엉뚱하기 때 문에 친구들로부터 <사이코> 내지는 <또라이>란 소리를 듣기도 한다.
태양인의 엉뚱하고도 충동적인 행동은 '바람기운'에서 온 것이다. 바람은 '공기의 흐름' 이다. 공기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쪽으로 변화무쌍하게 이 동한다. 바람기운이 많은 태양인은 한곳에 머물기보다 여기저기 떠도는 방랑아 기질이 있 다. '그저 바람따라 구름따라 떠도는 나그네'라고나 할까! 우리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들 썩대는 친구를 가리켜 우스개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친구가 왜 가만히 못 있구 저러지?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나?" 이들은 바람기운을 타고나 행동에 거침이 없다. '이렇 게 말을 하면, 또 행동하면 상대방의 기분이 어떨까'하는 식의 생각이 별로 없고 그저 마 음이 동(動)하는대로 충동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려깊은 소음인이 나 태음인들이 볼 때는 사람이 좀 가볍고 정신연령도 낮아 보이는 것이다.
안드레가 자기의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그에게는 전혀 영적 지도자다운 자 질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거칠고 세상적이고 충동적인 갈릴리 '촌놈'에 불과했다. 그 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비젼에 찬 말씀을 하셨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실제로 모래알(시몬)처럼 미미한 그가 예수님을 따를 때 반석(게바)이 되 어 교회의 든든한 기초가 되었다. 그의 충동적이고도 우스꽝스런 행동을 살펴보자.
마태복음14장에는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이 나온다. 때도 새벽시간인지라, 다 른 제자들이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고 외쳤다. 이에 잠 에서 깨어난 베드로. 부시시한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는 자기도 한번 물위를 걸어보고픈 마 음이 동(動)한 것이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예수님의 승낙을 받은 베드로는 잠이 덜 깬 눈을 부벼대며 두 발을 호수 위로 얹는다. 한 발, 두 발! 두 발을 다 올려놓고 걷는데 가라앉지를 않는다. 날아갈 듯 신이 난 베드로의 심정을 우리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순간 잠이 깼는지, 출렁이는 물살을 보고 두려움이 생 겼는지 예수님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촛점을 잃고 헤롱헤롱한다. 믿음을 잃은 그의 몸은 가볍게 '잠수'하며 급기야는 허우적댄다. "사람살려!"
마태복음17장에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형되시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은 수제자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데리시고 변화산에 오르신다. 이때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그리고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희한한 장면 앞에 그저 입만 '헤' 벌리고 감탄사만 연발했다. 신비한 황홀경 속에서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그때에 베드로는 전혀 뚱딴지 같은 제안을 한 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이런 베드로의 말은 분위기와 산통을 깨버리는 엉뚱한 말임에 틀림없다.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 도 알지 못하더라!
마태복음26장에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후, 체포당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검과 몽치를 든 군인들이 무력으로 자기 스승을 잡아가는 것을 태양인 베드로는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와도 같이 칼을 뽑아 그들을 홀로 대항한다. "덤빌테면 덤벼라, 덤벼!" 그리고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한쪽 귀를 싹뚝 베 었다. 그가 정확히 조준을 하고 한쪽 귀만 베었는지, 아니면 눈을 감고 휘둘렀는데 어쩌다 가 귀가 짤렸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이런 행동 또한 사이코틱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이유; 대담성
태양인은 '자신의 행동이 남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하는 등의 자질구레한 면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일단 일을 저질러 놓거나 머리부터 들이밀고 본다. 이런 태양인의 좌충우 돌하는 행동은 소심한 소음인이나 태음인들이 볼 때는 대담하고 용기백배한 것처럼 보인 다. 태양인은 이런 속성 때문에 남들이 망설이며 주저할 때, 선뜻 앞장서서 일을 해내므로 '바람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어떤 일을 할 때 태양인이 앞에서 바람잡이가 되어주고, 태음인이 뒤에서 총대(?)를 매면 완벽한 궁합이 될 것이다.
그러나 태양인의 대담성과 좌충우돌하는 충동적 기질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라는 요소 가 짙게 깔려있다. 집을 지키는 개는 낯선 사람을 보면 으르렁대며 짖어댄다. 그런데 개가 짖는 순간 오히려 겁먹지 않고 같이 덤빈다면 개는 겁을 덜컹 집어먹고 뒤로 움찔한다. 개 가 짖는 것은 겉으로 볼 때 대담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두려움의 역설적 표현에 지나 지 않는다. 태양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무리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것도 실 상은 담대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표현인 것이다.
누가복음5장을 보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나아온 무리들을 향해 천국복 음을 전파하고 계셨다. 말씀이 얼마나 은혜로왔던지 몰려드는 무리들에 떠밀려 물에 빠질 지경이 되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를 빌려 갑판을 강단삼아 말씀을 전파하셨다. 그런데 베드로는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일에 여념이 없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 기를 잡으라" 밤새 수고를 했지만 한마리의 고기도 못잡은 베드로는 그물을 겨우 다 씻고 집에 가서 대포 한잔을 한 후 늘어지게 자고픈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피곤한 몸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 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린 순간, 새벽녘에는 상식적으로 물가의 얕은 곳에 몰려 있어야 할 고기들이 153마리나 잡혔 다. 베테랑 어부임을 자부하던 베드로에게도 가히 기록적인 숫자였다. 이때 만약 사업가적 기질이 농후한 태음인이었다면 예수님께 다음과 같은 그럴듯한 제안을 했을 것이다.
"예수님, 우리 함께 동업해서 갈릴리 수산업계를 평정해 보는게 어떨까요? 분배는 삼칠제로 하 고 예수님이 칠(7) 먹으세요" 그러나 태양인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에게서 뭔가 신령한 기운을 느끼고 덥썩 무릎을 꿇고 고백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 이다" 과연 대담하고 거침없는 태양인다운 행동이다. 만약 소음인이라면 남들이 보는 앞에 서 그런식으로 고백하지는 않는다. 조용히 찾아가 은밀히 신앙고백하고 자신이 추한 죄인 됨을 인정할 것이다.
태양인은 지하철 안에서 노방전도도 담대히 잘한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하며 남들이 듣거나 말거나 떠들어댄다. 이를 보면 소음인 크리스 찬은 속으로 불만이다. '꼭 복음을 저렇게 유치하게 전해야 되나? 좀 세련되고 고상하게 할 수도 있을텐데!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옛날 구닥다리 방법으로 하는지 모르겠어' 사실 소음인들에게는 태양인처럼 노방전도할 정도의 담대함이 부족한 것이다.
셋째 이유; 세상 야망
바람기운은 하늘에 충만된 에너지로서 땅전체를 내려다보며 현실을 관망하는 통찰력을 준다. 이들이 볼 때 현실에 코를 박고 바둥대며 살아가는 '속세인'들이란 하나같이 속이 빈 '속물'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세상은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차 있어 개혁이나 혁명이 필요한 곳이다. 이는 바람기운이 주는 청정함과 고결함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이들에 게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살고자'하는 일관된 양심이 있다. 그러나 세상이 어 디 그런가? 눈뜨고도 코베가는 세상인데! 그러다보니 태양인은 험악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 하고 박사학위를 가진 실업자, 똑똑한 폐인이 되기 쉽다. 그러면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울분을 참지 못한다.
현실에서는 비록 별볼일 없어도, 태양인들은 자신이 세상을 위해 뭔가를 해낼 특별한 존 재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넓게 내려다보는 관조력은 때로 모든 존재를 자신보다 한수 아래 로 보는 독선과 독불장군식 사고를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d-day)만을 기다리며 비 장의 칼날을 간다. 대다수의 태양인들은 시대와 사람을 만나지 못해 이름없이 사라지지만 간혹 나폴레옹, 히틀러, 알렉산더,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기도 한다.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면 태양인 특유의 바람잡이 기질은 청중을 순식간에 매혹시키는 흡인 력을 준다.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해 엄청난 부채, 치솟는 인플레이션, 극도의 사회적 불안감을 떠안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 '히틀러'라는 무명의 인물이 급부상한다. 오스트리아 하급 관리의 4번째 자식으로 태어난 '아돌프 히틀러'는 중고시절 별볼일 없는 학생이었다. 1907 년 <비엔나 예술학교>에 입학원서를 냈지만 거듭 패배의 쓴잔을 맛본 히틀러는 그림엽서 를 그리며 소일을 했다. 이때 역사, 군사, 예술 등 다방면의 책을 읽으며 꿈을 키웠다. 비엔 나에서 히틀러의 생활은 그를 무시하는 기존 사회체제에 대한 증오와 열등감, 왜곡된 자아 도취만을 안겨주었다. 이때 1차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따분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준 전쟁에 감사했고 자진입대하여 용감히 싸웠다.
그리고 독일 무공훈장인 <철십자 훈장>도 두번이나 받았다. 1919년 히틀러는 전후에 난립한 군소정당 중 하나인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하며 정치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는 뛰어난 웅변, 열정, 조직력을 바탕으로 당의 지도 자로 부각되었고, 후에 당의 명칭을 <국가 사회주의 노동당, nazi>으로 바꾼다. 나찌당은 70여개의 군소정당에 불과했지만 히틀러의 바람잡이 기질로 인해 의석수 12석에서 107석을 차지하는 다수당으로 부상한다. 그는 대중집회에서 연설로 청중을 휘어잡는 놀라운 흡인력 을 발휘했다. 꽉 쥔 두 주먹, 몸을 떨며 요란한 자세로 토해내는 열정적인 그의 연설은 확 신으로 가득찼다. 또한 금발에 푸른 눈을 소유한 아리안족이 영웅의 인종이라는 그의 연설 은 범게르만 민족의 연합을 이루어 다시금 2차대전을 발발하는 도화선이 된다. 세상을 향 한 명예욕, 대중을 휘어잡는 바람잡이 기질, 카리스마적인 지도력,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 한 인종적 우월감! 이는 태양인 기질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마태복음 16장에도 태양인 베드로의 세상 야망과 명예욕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예 수님은 1학기 제자교육을 마치시고 한적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올라가시며 불시에 시험문제를 내셨다. 기말시험 문제는 두 가지였는데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것이었다. 모두 '예수님이 누구신가?'하는 예수님의 인격 에 관한 질문이었다. 1번 문제를 마치고 가장 중요한 2번 문제를 내자, 베드로는 수제자답 게 즉각 부저를 울리며 정답을 맞추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 니이다" 흐뭇한 마음으로 예수님은 2학기 과정인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다. 곧 자 신이 그리스도로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기성 종교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고난을 당하고 십 자가에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 그리고 사흘만에 살아난다는 언뜻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예 언하신 것이다. 이를 들은 베드로의 반응! 그는 얼른 예수님의 팔을 붙들고 스승을 꾸짖는 다. "아따, 예수님! 아무리 날씨가 덥다고 그렇게 실언을 하시면 어떡하십니까? 죽기는 누 가 죽어유? 절대 안되유!"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말씀에 그토록 과민반응을 보이는 베드로 의 속셈이 무엇일까? 단순히 사랑하는 스승이 죽는다는 말에 마음이 아파서 나오는 애정의 표현일까? 물론 그런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쪽 구석에는 예수님을 통 해 이루고자 하는 '자기의 야망'을 부인하기 힘든 것이 진짜 이유였다.
베드로는 과거 갈릴리 어부로서 별볼일 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따르며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과 단순히 인간 이상의 놀라운 신성(神性)을 느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이 예수님만 따라다니면 장차 메시야 왕국이 도래할 때 국무총리는 따놓은 당상이겠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줄 한번 기가 막히게 잘 섰구만' 베드로는 썩은 종 교사회인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그것도 천대받는 갈릴리 땅에서 태어나 쌓인 울분이 많았 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 능력이 있어도 꿈을 이룰 수 없는 세상! 예수님을 통해 자기의 야망을 이룬다면 '누이좋고 매부좋고', '꿩먹고 알먹고'가 아닌가! 이런 생각에 가 득찬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말씀은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 과 함께 자신의 꿈도 물거품처럼 사라질테니 말이다.
넷째 이유; 허풍장이
태양인은 무의식 가운데 자신이 최고라는 헛된 자만심이 가득하다. 자신이 뭔가 된듯 거 드름을 피우고, 또 현재는 비록 별볼일이 없더라도 장차 장관자리 하나쯤 할 사람으로 여 긴다. 그러나 세상이 이런 안하무인, 독불장군식의 태양인을 받아줄 리 만무하다. 그러다 보니 태양인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늘 슬퍼하고 분노하는 '비분강개형'의 인간이 된다. "아니, 천하의 영웅을 몰라보고 이래도 되는거야?"
태양인의 말 속에는 은근히 자기과시와 뻥(?)이 많다. 그러다보니 친구들로부터 '허풍장 이', '빅 마우스(big mouth)'란 놀림을 받기도 한다. 이들이 자기가 하는 말을 실행에 옮 긴다면 그런 소리를 안 듣겠지만, 이들의 말이란 대체로 실현불가능하고 허무맹랑한 소리 요 상식밖의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태양인 자신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이들은 늘상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만심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현실 사이에서 심한 괴리감을 느끼며 힘들어 한다. 이들의 삶이란 양극단을 오가는 '자기모순과 번민'의 연속인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해도 확 달아올랐다가 쉽 게 식어버리는 '냄비신앙'의 소유자가 많다.
마태복음26장은 베드로의 허풍장이 기질을 잘 보여준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 을 마치신 예수님은 폭탄선언(?)을 하셨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자 제자들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한다. "주여, 내니이까" 그들은 갈수록 기세등등하게 나 오는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혹시라도 스승인 예수를 팔지나 않을까 불안했던 것이다. 그러 나 베드로는 어떤가?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나이다. 죽기까지 주를 따르겠 나이다. 통촉하소서" 그러나 베드로의 기질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그의 허풍에 넘어가지 않으신다.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결국 예수님의 예언은 그대 로 이루어진다. 숫자까지 정확히 맞추면서!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가볍게 부인 하더니, 세번째는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한다.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젠장!" 이에 닭도 참다못해 울어댄다. "꼬끼오! 꼬꼬꼬꼭" 닭이 울고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대성통곡한다. "아이고! 오오오오... 이잉! 우짜다가 이리 됐노?"
다섯째 이유; 약한 의지력
태양인이 허풍장이로 낙인 찍힐 수 밖에 없는 진짜 이유는 이들의 의지력이 약한 탓이 다. '작심삼일' 그 자체다. 뭔가 일을 시작은 잘 하는데 끝을 보는게 별로 없다. '용두사 미'로 끝나는 것이다. 노트를 사도 끝까지 쓰는 게 없고, 새롭게 호기심이 동하는 일이 있 으면 일만 벌려 놓은채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태양인은 환경에 민감하다. 누군가 멍석을 잘 깔아주면 원없이 실력발휘를 하지만 야유 를 퍼붓던가 하면 주눅이 들어 능력의 절반도 발휘를 못하는 수가 많다. 창피나 낭패를 당 하느니 그냥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평소에는 강해 보이지만 위기의 순간이 오 면 극도의 연약함, 우왕좌왕하는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이곳에서 선교훈련을 잘 받고 믿음 도 좋은 사람이 선교 일선에 나가서 힘든 현실 앞에 믿음이 넘어지고 고꾸라지는 경우도 태양인 체질에 많은 것이다.
의지가 약한 태양인은 눈물도 많다. 강한 듯 하지만 내면은 가장 여리고 약한 것이다. 마 음의 상처도 쉽게 받는다. 이들은 말씀을 들으면 회개도 잘 하고, 회개를 했다하면 '펑펑 흘리는 눈물'을 동반한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이 보면 '혼자 은혜를 다 받은 것' 같은데 그 의 삶을 유심히 살펴보면 별로 달라진 게 없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것이다. 이들은 회개를 하더라도 주로 동일한 죄를 짓고 회개한다. 유혹에 약하기 때문에 아무리 회개를 하더라도 죄를 지을 환경만 되면 쉽게 넘어지는 것이다. 청년의 정욕이랄지, 결혼한 사람 같으면 '바람기'가 많기 때문에 간통죄를 반복해서 범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아내에게 '손 이 발이 되도록' 빌 것이다. "여보, 제발 이번만 용서해 줘! 당신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 라도 할께, 응?" 그러나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아리따운 여비서와 단 둘이 있는 환경이 되 면 또다시 바람기가 발동한다. 그야말로 구제불능(?)인 것이다.
요한복음18장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환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베드로는 요한 과 함께 체포되신 예수님을 뒤쫓아 갔다. 다른 제자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하며 도망가기 에 바빴지만, 그래도 태양인 베드로는 '의리의 사나이'였던 것이다. 안나스의 집 뜰에서 종과 하속들과 함께 숯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 적들로 둘러싸인 소굴에서 추위를 피하는 베드로! 그렇지 않아도 환경에 약한 태양인 베드로는 이미 '와이셔츠의 첫단추를 잘못 끼 우고' 들어가는 것이다. 나중에 눈물을 펑펑 흘리며 회개하지만 동일한 환경에 처하게 되 면 또다시 반복해서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태양인은 마땅히 죄를 지 을 수 있는 환경부터 피해야 한다.
요한복음21장에도 베드로의 여린 마음, 인간미가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자 제자들은 저마다 옛생활로 돌아갔다. 베드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물 고기 잡으러 가노라" 결국 디베랴 바닷가에 다시 모인 역전의 용사들(?)! 베드로, 도마, 야고보, 요한, 나다나엘... 그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먹고살기 위해 물고기를 잡아 야 했다. 그래도 옛날 솜씨가 녹슬지 않았는지 그물 던지는 폼이 멀리서 봐도 아직은 베테 랑 어부들이다. 그런데 웬걸? 물고기들은 뺀질거리며 한마리도 잡혀주지 않는 것이다. 고 기들도 옛날 고기들과 달리 말 안 듣는 '신세대(?)' 물고기인가 보다.
결국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마리도 못잡고 낙심하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얘들아, 너 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은 무심결에 "없나이다"하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도록 코치해 주셨고, 그대로 순종했을 때 그물을 못 올릴 정도로 많은 고 기를 잡았다. 이때 센스가 빠른 요한이 제일 먼저 눈치를 챘다. "예수님이다!" 이말을 들 은 베드로의 행동 또한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그는 벗고 있던 겉옷을 두른채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예수님!" 그는 비록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사 랑하고 경외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물 속에 뛰어들려면 입고 있던 겉옷도 벗어야 할 판인 데, 무의식 중에도 벗고 있던 겉옷을 두른 채 바다로 뛰어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디베랴 바닷가 해변에 이미 조찬을 마련해 놓고 계셨 다. 생선을 노릿노릿 구워놓고, 떡을 가져다가 친히 먹여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잡혀가 시자 도망가기에 급급했던 제자들은 차마 목이 매어 삼킬 수가 없었다. 참으로 눈물나는 비치파티(beach-party)의 한 장면이다. 조반을 마치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우물쭈물 하며 대답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전 같으면 큰소리치며 대답했을텐데 차마 자신있게 대답은 못한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니까! 죽기까 지 따르겠다고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저주까지 하며 주를 세번이나 부인한 기억이 생생한 마당에야 어찌 뻔뻔하게 큰소리를 치겠는가! 결국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하고 직설적으로 표현을 못하고 우회적으로 돌려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인 베드로의 여린 마음, 인간미, 솔직성, 다정다감 함이 잘 나타난 부분이라 하겠다.
예수님은 동일한 질문을 세번 반복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 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도 동일한 대답을 세번 한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이 똑같이 '사랑한다'로 되어 있는데 원어 성경을 인용하면 베드로의 인간미를 더욱 물씬 느 낄 수 있다. 첫번 질문에 베드로는 "내가 주님께 아직도 호감을 갖고 있는 줄 주께서 아신 다"고 대답한다. 그는 우회적인 표현만으로도 뻔뻔하게 느꼈던지,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 로 못쓰고 있다. 그저 '호감을 갖는다'는 약한 말로 대답한 것이다. 둘째 질문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좋아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좋아한다'는 말은 '호감을 갖 는다'는 말보다는 의미가 강하지만 아직까지는 '사랑한다'는 뉘앙스보다는 약한 감이 있 다. 셋째 질문에 가서야 베드로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 께서 아시나이다" 번역이 잘 되었다면 은혜가 배가(倍加)되었을 부분이다. 실로 베드로는 허풍장이요 비현실적 몽상가요 실수 투성이의 인간이었지만, 다정다감하고 솔직하며 그리 밉지 않은 개구장이요 사랑받는 인물인 것이다.
태양인들은 이렇듯 다양한 면모를 지닌 기질의 소유자이다. 동키호테식 충동성에다 대쪽 같은 성품, 약간은 허파에 바람이 든 허장성세와 의외로 연약한 마음 등 복합적인 성품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러나 태양인의 이런 전형적인 특징들이 현실에서 그대로 표출되기란 쉽지 않다. 특히 보수적이고 예의를 중시하는 태음인들이 주도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 하다. 서구 선진국은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태양인 기운이 우세한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 유 교적이고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태음인 기운이 득세하고 있는 형 국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태양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소시민적인 현실안주 형 인간으로 길들여지고 만다. 그래서 어찌보면 소음인 같고 또 어찌보면 소양인 같은 기 질을 보이는 것이다. 여기에는 태양인이 숫적으로 희귀하다는 오해 아닌 오해도 한몫을 한 듯하다. 체질진단을 하면서 일단 태양인은 제외시켜 놓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소심 해 보이면 소음인으로, 성격이 튀면 소양인으로 쉽게 단정해 버린다. 태양기운이 무시되는 데서 빚어진 결과이다.
태양인이 본래 타고난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려면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꿈과 비젼을 간 직해야 한다. 꿈과 비젼은 태양인의 장점을 가장 잘 나타내는 특성이다. 그 꿈이 실현될 세상을 만나든지, 실현시켜 줄 사람을 만나든지 한다면 반드시 그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몇몇 태양인들을 기억한다. 나폴레옹, 알렉산더, 히틀러, 윤동 주, 이상, 뉴턴, 아인슈타인, 박정희 등등... 그러나 이들 몇몇의 소수만이 태양인일 수는 없다. 중세 카톨릭의 보수적 사회에서 남다른 용기로 진리를 설파한 갈릴레이, 코페르니쿠 스도 있었지만 숨죽이며 조용히 살다간 이름 모를 대다수의 태양인들도 있는 것이다.
밖으로 떠들건 안으로 샄이건 태양인은 타고난 기질 때문에 부패한 세상을 향한 비판세력이 되 기를 자처한다. <이놈의 썩어빠진 세상!>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까지 썩었다니!> 하 면서 말이다. 반면에 많은 태양인 여성들은 깍쟁이, 불여우, 얌체, 새침떼기 이미지를 풍 기며 뭇남성들의 애간장을 녹인다. <남편 사랑은요? 여자하기 나름이라니깐요?>라는 말을 유행시킨 최진실 양처럼... 이들은 모두 우리 가까이에 있는 평범한 태양인, 아직 타고난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한 불쌍한(?) 태양인들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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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인은 생각보다 말이 앞서고, 말보다는 행동이 앞선다. 그러다보니 말은 많은데 분위 기 파악 못하는 말, 영양가 없는 말이 많고 행동도 언뜻 보면 우스꽝스런 행동이 많다. 그 렇다고 전혀 악의가 있는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저 사람이 솔 직하니까, 순진하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동정 섞인 말을 듣는다. 이들은 단점이 잘 드러나 지만 인간적인 정이 많고 솔직담백한 사람들이다. 행동이 때로 동키호테처럼 엉뚱하기 때 문에 친구들로부터 <사이코> 내지는 <또라이>란 소리를 듣기도 한다.
태양인의 엉뚱하고도 충동적인 행동은 '바람기운'에서 온 것이다. 바람은 '공기의 흐름' 이다. 공기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쪽으로 변화무쌍하게 이 동한다. 바람기운이 많은 태양인은 한곳에 머물기보다 여기저기 떠도는 방랑아 기질이 있 다. '그저 바람따라 구름따라 떠도는 나그네'라고나 할까! 우리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들 썩대는 친구를 가리켜 우스개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친구가 왜 가만히 못 있구 저러지?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나?" 이들은 바람기운을 타고나 행동에 거침이 없다. '이렇 게 말을 하면, 또 행동하면 상대방의 기분이 어떨까'하는 식의 생각이 별로 없고 그저 마 음이 동(動)하는대로 충동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려깊은 소음인이 나 태음인들이 볼 때는 사람이 좀 가볍고 정신연령도 낮아 보이는 것이다.
안드레가 자기의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그에게는 전혀 영적 지도자다운 자 질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거칠고 세상적이고 충동적인 갈릴리 '촌놈'에 불과했다. 그 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비젼에 찬 말씀을 하셨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실제로 모래알(시몬)처럼 미미한 그가 예수님을 따를 때 반석(게바)이 되 어 교회의 든든한 기초가 되었다. 그의 충동적이고도 우스꽝스런 행동을 살펴보자.
마태복음14장에는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이 나온다. 때도 새벽시간인지라, 다 른 제자들이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고 외쳤다. 이에 잠 에서 깨어난 베드로. 부시시한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는 자기도 한번 물위를 걸어보고픈 마 음이 동(動)한 것이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예수님의 승낙을 받은 베드로는 잠이 덜 깬 눈을 부벼대며 두 발을 호수 위로 얹는다. 한 발, 두 발! 두 발을 다 올려놓고 걷는데 가라앉지를 않는다. 날아갈 듯 신이 난 베드로의 심정을 우리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순간 잠이 깼는지, 출렁이는 물살을 보고 두려움이 생 겼는지 예수님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촛점을 잃고 헤롱헤롱한다. 믿음을 잃은 그의 몸은 가볍게 '잠수'하며 급기야는 허우적댄다. "사람살려!"
마태복음17장에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형되시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은 수제자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데리시고 변화산에 오르신다. 이때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그리고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희한한 장면 앞에 그저 입만 '헤' 벌리고 감탄사만 연발했다. 신비한 황홀경 속에서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그때에 베드로는 전혀 뚱딴지 같은 제안을 한 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이런 베드로의 말은 분위기와 산통을 깨버리는 엉뚱한 말임에 틀림없다.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 도 알지 못하더라!
마태복음26장에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후, 체포당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검과 몽치를 든 군인들이 무력으로 자기 스승을 잡아가는 것을 태양인 베드로는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와도 같이 칼을 뽑아 그들을 홀로 대항한다. "덤빌테면 덤벼라, 덤벼!" 그리고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한쪽 귀를 싹뚝 베 었다. 그가 정확히 조준을 하고 한쪽 귀만 베었는지, 아니면 눈을 감고 휘둘렀는데 어쩌다 가 귀가 짤렸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이런 행동 또한 사이코틱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이유; 대담성
태양인은 '자신의 행동이 남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하는 등의 자질구레한 면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일단 일을 저질러 놓거나 머리부터 들이밀고 본다. 이런 태양인의 좌충우 돌하는 행동은 소심한 소음인이나 태음인들이 볼 때는 대담하고 용기백배한 것처럼 보인 다. 태양인은 이런 속성 때문에 남들이 망설이며 주저할 때, 선뜻 앞장서서 일을 해내므로 '바람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어떤 일을 할 때 태양인이 앞에서 바람잡이가 되어주고, 태음인이 뒤에서 총대(?)를 매면 완벽한 궁합이 될 것이다.
그러나 태양인의 대담성과 좌충우돌하는 충동적 기질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라는 요소 가 짙게 깔려있다. 집을 지키는 개는 낯선 사람을 보면 으르렁대며 짖어댄다. 그런데 개가 짖는 순간 오히려 겁먹지 않고 같이 덤빈다면 개는 겁을 덜컹 집어먹고 뒤로 움찔한다. 개 가 짖는 것은 겉으로 볼 때 대담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두려움의 역설적 표현에 지나 지 않는다. 태양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무리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것도 실 상은 담대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표현인 것이다.
누가복음5장을 보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나아온 무리들을 향해 천국복 음을 전파하고 계셨다. 말씀이 얼마나 은혜로왔던지 몰려드는 무리들에 떠밀려 물에 빠질 지경이 되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를 빌려 갑판을 강단삼아 말씀을 전파하셨다. 그런데 베드로는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일에 여념이 없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 기를 잡으라" 밤새 수고를 했지만 한마리의 고기도 못잡은 베드로는 그물을 겨우 다 씻고 집에 가서 대포 한잔을 한 후 늘어지게 자고픈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피곤한 몸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 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린 순간, 새벽녘에는 상식적으로 물가의 얕은 곳에 몰려 있어야 할 고기들이 153마리나 잡혔 다. 베테랑 어부임을 자부하던 베드로에게도 가히 기록적인 숫자였다. 이때 만약 사업가적 기질이 농후한 태음인이었다면 예수님께 다음과 같은 그럴듯한 제안을 했을 것이다.
"예수님, 우리 함께 동업해서 갈릴리 수산업계를 평정해 보는게 어떨까요? 분배는 삼칠제로 하 고 예수님이 칠(7) 먹으세요" 그러나 태양인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에게서 뭔가 신령한 기운을 느끼고 덥썩 무릎을 꿇고 고백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 이다" 과연 대담하고 거침없는 태양인다운 행동이다. 만약 소음인이라면 남들이 보는 앞에 서 그런식으로 고백하지는 않는다. 조용히 찾아가 은밀히 신앙고백하고 자신이 추한 죄인 됨을 인정할 것이다.
태양인은 지하철 안에서 노방전도도 담대히 잘한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하며 남들이 듣거나 말거나 떠들어댄다. 이를 보면 소음인 크리스 찬은 속으로 불만이다. '꼭 복음을 저렇게 유치하게 전해야 되나? 좀 세련되고 고상하게 할 수도 있을텐데!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옛날 구닥다리 방법으로 하는지 모르겠어' 사실 소음인들에게는 태양인처럼 노방전도할 정도의 담대함이 부족한 것이다.
셋째 이유; 세상 야망
바람기운은 하늘에 충만된 에너지로서 땅전체를 내려다보며 현실을 관망하는 통찰력을 준다. 이들이 볼 때 현실에 코를 박고 바둥대며 살아가는 '속세인'들이란 하나같이 속이 빈 '속물'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세상은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차 있어 개혁이나 혁명이 필요한 곳이다. 이는 바람기운이 주는 청정함과 고결함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이들에 게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살고자'하는 일관된 양심이 있다. 그러나 세상이 어 디 그런가? 눈뜨고도 코베가는 세상인데! 그러다보니 태양인은 험악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 하고 박사학위를 가진 실업자, 똑똑한 폐인이 되기 쉽다. 그러면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울분을 참지 못한다.
현실에서는 비록 별볼일 없어도, 태양인들은 자신이 세상을 위해 뭔가를 해낼 특별한 존 재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넓게 내려다보는 관조력은 때로 모든 존재를 자신보다 한수 아래 로 보는 독선과 독불장군식 사고를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d-day)만을 기다리며 비 장의 칼날을 간다. 대다수의 태양인들은 시대와 사람을 만나지 못해 이름없이 사라지지만 간혹 나폴레옹, 히틀러, 알렉산더,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기도 한다.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면 태양인 특유의 바람잡이 기질은 청중을 순식간에 매혹시키는 흡인 력을 준다.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해 엄청난 부채, 치솟는 인플레이션, 극도의 사회적 불안감을 떠안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 '히틀러'라는 무명의 인물이 급부상한다. 오스트리아 하급 관리의 4번째 자식으로 태어난 '아돌프 히틀러'는 중고시절 별볼일 없는 학생이었다. 1907 년 <비엔나 예술학교>에 입학원서를 냈지만 거듭 패배의 쓴잔을 맛본 히틀러는 그림엽서 를 그리며 소일을 했다. 이때 역사, 군사, 예술 등 다방면의 책을 읽으며 꿈을 키웠다. 비엔 나에서 히틀러의 생활은 그를 무시하는 기존 사회체제에 대한 증오와 열등감, 왜곡된 자아 도취만을 안겨주었다. 이때 1차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따분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준 전쟁에 감사했고 자진입대하여 용감히 싸웠다.
그리고 독일 무공훈장인 <철십자 훈장>도 두번이나 받았다. 1919년 히틀러는 전후에 난립한 군소정당 중 하나인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하며 정치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는 뛰어난 웅변, 열정, 조직력을 바탕으로 당의 지도 자로 부각되었고, 후에 당의 명칭을 <국가 사회주의 노동당, nazi>으로 바꾼다. 나찌당은 70여개의 군소정당에 불과했지만 히틀러의 바람잡이 기질로 인해 의석수 12석에서 107석을 차지하는 다수당으로 부상한다. 그는 대중집회에서 연설로 청중을 휘어잡는 놀라운 흡인력 을 발휘했다. 꽉 쥔 두 주먹, 몸을 떨며 요란한 자세로 토해내는 열정적인 그의 연설은 확 신으로 가득찼다. 또한 금발에 푸른 눈을 소유한 아리안족이 영웅의 인종이라는 그의 연설 은 범게르만 민족의 연합을 이루어 다시금 2차대전을 발발하는 도화선이 된다. 세상을 향 한 명예욕, 대중을 휘어잡는 바람잡이 기질, 카리스마적인 지도력,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 한 인종적 우월감! 이는 태양인 기질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마태복음 16장에도 태양인 베드로의 세상 야망과 명예욕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예 수님은 1학기 제자교육을 마치시고 한적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올라가시며 불시에 시험문제를 내셨다. 기말시험 문제는 두 가지였는데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것이었다. 모두 '예수님이 누구신가?'하는 예수님의 인격 에 관한 질문이었다. 1번 문제를 마치고 가장 중요한 2번 문제를 내자, 베드로는 수제자답 게 즉각 부저를 울리며 정답을 맞추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 니이다" 흐뭇한 마음으로 예수님은 2학기 과정인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다. 곧 자 신이 그리스도로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기성 종교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고난을 당하고 십 자가에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 그리고 사흘만에 살아난다는 언뜻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예 언하신 것이다. 이를 들은 베드로의 반응! 그는 얼른 예수님의 팔을 붙들고 스승을 꾸짖는 다. "아따, 예수님! 아무리 날씨가 덥다고 그렇게 실언을 하시면 어떡하십니까? 죽기는 누 가 죽어유? 절대 안되유!"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말씀에 그토록 과민반응을 보이는 베드로 의 속셈이 무엇일까? 단순히 사랑하는 스승이 죽는다는 말에 마음이 아파서 나오는 애정의 표현일까? 물론 그런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쪽 구석에는 예수님을 통 해 이루고자 하는 '자기의 야망'을 부인하기 힘든 것이 진짜 이유였다.
베드로는 과거 갈릴리 어부로서 별볼일 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따르며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과 단순히 인간 이상의 놀라운 신성(神性)을 느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이 예수님만 따라다니면 장차 메시야 왕국이 도래할 때 국무총리는 따놓은 당상이겠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줄 한번 기가 막히게 잘 섰구만' 베드로는 썩은 종 교사회인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그것도 천대받는 갈릴리 땅에서 태어나 쌓인 울분이 많았 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 능력이 있어도 꿈을 이룰 수 없는 세상! 예수님을 통해 자기의 야망을 이룬다면 '누이좋고 매부좋고', '꿩먹고 알먹고'가 아닌가! 이런 생각에 가 득찬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말씀은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 과 함께 자신의 꿈도 물거품처럼 사라질테니 말이다.
넷째 이유; 허풍장이
태양인은 무의식 가운데 자신이 최고라는 헛된 자만심이 가득하다. 자신이 뭔가 된듯 거 드름을 피우고, 또 현재는 비록 별볼일이 없더라도 장차 장관자리 하나쯤 할 사람으로 여 긴다. 그러나 세상이 이런 안하무인, 독불장군식의 태양인을 받아줄 리 만무하다. 그러다 보니 태양인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늘 슬퍼하고 분노하는 '비분강개형'의 인간이 된다. "아니, 천하의 영웅을 몰라보고 이래도 되는거야?"
태양인의 말 속에는 은근히 자기과시와 뻥(?)이 많다. 그러다보니 친구들로부터 '허풍장 이', '빅 마우스(big mouth)'란 놀림을 받기도 한다. 이들이 자기가 하는 말을 실행에 옮 긴다면 그런 소리를 안 듣겠지만, 이들의 말이란 대체로 실현불가능하고 허무맹랑한 소리 요 상식밖의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태양인 자신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이들은 늘상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만심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현실 사이에서 심한 괴리감을 느끼며 힘들어 한다. 이들의 삶이란 양극단을 오가는 '자기모순과 번민'의 연속인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해도 확 달아올랐다가 쉽 게 식어버리는 '냄비신앙'의 소유자가 많다.
마태복음26장은 베드로의 허풍장이 기질을 잘 보여준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 을 마치신 예수님은 폭탄선언(?)을 하셨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자 제자들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한다. "주여, 내니이까" 그들은 갈수록 기세등등하게 나 오는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혹시라도 스승인 예수를 팔지나 않을까 불안했던 것이다. 그러 나 베드로는 어떤가?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나이다. 죽기까지 주를 따르겠 나이다. 통촉하소서" 그러나 베드로의 기질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그의 허풍에 넘어가지 않으신다.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결국 예수님의 예언은 그대 로 이루어진다. 숫자까지 정확히 맞추면서!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가볍게 부인 하더니, 세번째는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한다.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젠장!" 이에 닭도 참다못해 울어댄다. "꼬끼오! 꼬꼬꼬꼭" 닭이 울고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대성통곡한다. "아이고! 오오오오... 이잉! 우짜다가 이리 됐노?"
다섯째 이유; 약한 의지력
태양인이 허풍장이로 낙인 찍힐 수 밖에 없는 진짜 이유는 이들의 의지력이 약한 탓이 다. '작심삼일' 그 자체다. 뭔가 일을 시작은 잘 하는데 끝을 보는게 별로 없다. '용두사 미'로 끝나는 것이다. 노트를 사도 끝까지 쓰는 게 없고, 새롭게 호기심이 동하는 일이 있 으면 일만 벌려 놓은채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태양인은 환경에 민감하다. 누군가 멍석을 잘 깔아주면 원없이 실력발휘를 하지만 야유 를 퍼붓던가 하면 주눅이 들어 능력의 절반도 발휘를 못하는 수가 많다. 창피나 낭패를 당 하느니 그냥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평소에는 강해 보이지만 위기의 순간이 오 면 극도의 연약함, 우왕좌왕하는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이곳에서 선교훈련을 잘 받고 믿음 도 좋은 사람이 선교 일선에 나가서 힘든 현실 앞에 믿음이 넘어지고 고꾸라지는 경우도 태양인 체질에 많은 것이다.
의지가 약한 태양인은 눈물도 많다. 강한 듯 하지만 내면은 가장 여리고 약한 것이다. 마 음의 상처도 쉽게 받는다. 이들은 말씀을 들으면 회개도 잘 하고, 회개를 했다하면 '펑펑 흘리는 눈물'을 동반한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이 보면 '혼자 은혜를 다 받은 것' 같은데 그 의 삶을 유심히 살펴보면 별로 달라진 게 없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것이다. 이들은 회개를 하더라도 주로 동일한 죄를 짓고 회개한다. 유혹에 약하기 때문에 아무리 회개를 하더라도 죄를 지을 환경만 되면 쉽게 넘어지는 것이다. 청년의 정욕이랄지, 결혼한 사람 같으면 '바람기'가 많기 때문에 간통죄를 반복해서 범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아내에게 '손 이 발이 되도록' 빌 것이다. "여보, 제발 이번만 용서해 줘! 당신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 라도 할께, 응?" 그러나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아리따운 여비서와 단 둘이 있는 환경이 되 면 또다시 바람기가 발동한다. 그야말로 구제불능(?)인 것이다.
요한복음18장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환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베드로는 요한 과 함께 체포되신 예수님을 뒤쫓아 갔다. 다른 제자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하며 도망가기 에 바빴지만, 그래도 태양인 베드로는 '의리의 사나이'였던 것이다. 안나스의 집 뜰에서 종과 하속들과 함께 숯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 적들로 둘러싸인 소굴에서 추위를 피하는 베드로! 그렇지 않아도 환경에 약한 태양인 베드로는 이미 '와이셔츠의 첫단추를 잘못 끼 우고' 들어가는 것이다. 나중에 눈물을 펑펑 흘리며 회개하지만 동일한 환경에 처하게 되 면 또다시 반복해서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태양인은 마땅히 죄를 지 을 수 있는 환경부터 피해야 한다.
요한복음21장에도 베드로의 여린 마음, 인간미가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자 제자들은 저마다 옛생활로 돌아갔다. 베드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물 고기 잡으러 가노라" 결국 디베랴 바닷가에 다시 모인 역전의 용사들(?)! 베드로, 도마, 야고보, 요한, 나다나엘... 그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먹고살기 위해 물고기를 잡아 야 했다. 그래도 옛날 솜씨가 녹슬지 않았는지 그물 던지는 폼이 멀리서 봐도 아직은 베테 랑 어부들이다. 그런데 웬걸? 물고기들은 뺀질거리며 한마리도 잡혀주지 않는 것이다. 고 기들도 옛날 고기들과 달리 말 안 듣는 '신세대(?)' 물고기인가 보다.
결국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마리도 못잡고 낙심하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얘들아, 너 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은 무심결에 "없나이다"하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도록 코치해 주셨고, 그대로 순종했을 때 그물을 못 올릴 정도로 많은 고 기를 잡았다. 이때 센스가 빠른 요한이 제일 먼저 눈치를 챘다. "예수님이다!" 이말을 들 은 베드로의 행동 또한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그는 벗고 있던 겉옷을 두른채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예수님!" 그는 비록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사 랑하고 경외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물 속에 뛰어들려면 입고 있던 겉옷도 벗어야 할 판인 데, 무의식 중에도 벗고 있던 겉옷을 두른 채 바다로 뛰어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디베랴 바닷가 해변에 이미 조찬을 마련해 놓고 계셨 다. 생선을 노릿노릿 구워놓고, 떡을 가져다가 친히 먹여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잡혀가 시자 도망가기에 급급했던 제자들은 차마 목이 매어 삼킬 수가 없었다. 참으로 눈물나는 비치파티(beach-party)의 한 장면이다. 조반을 마치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우물쭈물 하며 대답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전 같으면 큰소리치며 대답했을텐데 차마 자신있게 대답은 못한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니까! 죽기까 지 따르겠다고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저주까지 하며 주를 세번이나 부인한 기억이 생생한 마당에야 어찌 뻔뻔하게 큰소리를 치겠는가! 결국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하고 직설적으로 표현을 못하고 우회적으로 돌려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인 베드로의 여린 마음, 인간미, 솔직성, 다정다감 함이 잘 나타난 부분이라 하겠다.
예수님은 동일한 질문을 세번 반복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 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도 동일한 대답을 세번 한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이 똑같이 '사랑한다'로 되어 있는데 원어 성경을 인용하면 베드로의 인간미를 더욱 물씬 느 낄 수 있다. 첫번 질문에 베드로는 "내가 주님께 아직도 호감을 갖고 있는 줄 주께서 아신 다"고 대답한다. 그는 우회적인 표현만으로도 뻔뻔하게 느꼈던지,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 로 못쓰고 있다. 그저 '호감을 갖는다'는 약한 말로 대답한 것이다. 둘째 질문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좋아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좋아한다'는 말은 '호감을 갖 는다'는 말보다는 의미가 강하지만 아직까지는 '사랑한다'는 뉘앙스보다는 약한 감이 있 다. 셋째 질문에 가서야 베드로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 께서 아시나이다" 번역이 잘 되었다면 은혜가 배가(倍加)되었을 부분이다. 실로 베드로는 허풍장이요 비현실적 몽상가요 실수 투성이의 인간이었지만, 다정다감하고 솔직하며 그리 밉지 않은 개구장이요 사랑받는 인물인 것이다.
태양인들은 이렇듯 다양한 면모를 지닌 기질의 소유자이다. 동키호테식 충동성에다 대쪽 같은 성품, 약간은 허파에 바람이 든 허장성세와 의외로 연약한 마음 등 복합적인 성품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러나 태양인의 이런 전형적인 특징들이 현실에서 그대로 표출되기란 쉽지 않다. 특히 보수적이고 예의를 중시하는 태음인들이 주도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 하다. 서구 선진국은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태양인 기운이 우세한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 유 교적이고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태음인 기운이 득세하고 있는 형 국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태양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소시민적인 현실안주 형 인간으로 길들여지고 만다. 그래서 어찌보면 소음인 같고 또 어찌보면 소양인 같은 기 질을 보이는 것이다. 여기에는 태양인이 숫적으로 희귀하다는 오해 아닌 오해도 한몫을 한 듯하다. 체질진단을 하면서 일단 태양인은 제외시켜 놓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소심 해 보이면 소음인으로, 성격이 튀면 소양인으로 쉽게 단정해 버린다. 태양기운이 무시되는 데서 빚어진 결과이다.
태양인이 본래 타고난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려면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꿈과 비젼을 간 직해야 한다. 꿈과 비젼은 태양인의 장점을 가장 잘 나타내는 특성이다. 그 꿈이 실현될 세상을 만나든지, 실현시켜 줄 사람을 만나든지 한다면 반드시 그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몇몇 태양인들을 기억한다. 나폴레옹, 알렉산더, 히틀러, 윤동 주, 이상, 뉴턴, 아인슈타인, 박정희 등등... 그러나 이들 몇몇의 소수만이 태양인일 수는 없다. 중세 카톨릭의 보수적 사회에서 남다른 용기로 진리를 설파한 갈릴레이, 코페르니쿠 스도 있었지만 숨죽이며 조용히 살다간 이름 모를 대다수의 태양인들도 있는 것이다.
밖으로 떠들건 안으로 샄이건 태양인은 타고난 기질 때문에 부패한 세상을 향한 비판세력이 되 기를 자처한다. <이놈의 썩어빠진 세상!>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까지 썩었다니!> 하 면서 말이다. 반면에 많은 태양인 여성들은 깍쟁이, 불여우, 얌체, 새침떼기 이미지를 풍 기며 뭇남성들의 애간장을 녹인다. <남편 사랑은요? 여자하기 나름이라니깐요?>라는 말을 유행시킨 최진실 양처럼... 이들은 모두 우리 가까이에 있는 평범한 태양인, 아직 타고난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한 불쌍한(?) 태양인들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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