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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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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고전 010102>
묵상
"묵상" 이란 또 다른 말이다. 사람들은 종종 기도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묵상을 요가나 동양의 명상, 또는 초월적 명상 같은 것과 혼동하면 안 된다. 기독교의 묵상은 그런 훈련들처럼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부분 즉 마음, 감정, 상상력, 창조성, 그리고 무엇보다 의지를 활발하게 하는 것이다
안토니 블룸(Anthony Bloom) 대주교가 말하는 것처럼 "묵상이란 하나님의 보호 아래 갖는 일종의 솔직한 생각이다. " 묵상은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시편 기자가 묵상한 내용을 실천에 옮긴 기록을 보면 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시 63:6)
여기서 사용된 '묵상'이란 단어에는 '중얼거림' 또는 '지속적으로 속삭임' 이라는 뜻이 있다. 같은 단어를 계속 반복한다는 뜻이다 시편 119편에서 시편 기자는 묵상을 언급할 때 각각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시 119:15).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시 119:23).
"또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시 119 :48) .
그가 이 구절들에서 사용한 단어에는 '즐겁게하다', '생각하다', '반추하다', '숙고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의 묵상은 비움이 아니라 채움이다. 이는 하나님을 경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청, 즉 반추와 생각의 목적은 여러 가지 다른 것들 가운데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구약의 말씀으로 사탄의 은밀한 유혹을 분별하신 것과 같다.
우리는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상처받는 곳인 우리의 마음뿐 아니라 감정, 그리고 선택하고 결정을 내리는 곳인 우리의 의지에도 스며들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살아 계신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묵상한다. 묵상을 통해서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 즉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열망이 그분을 대면하고, 경외심을 나타내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묵상을 배워야 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지와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묵상하는 법
우리는 'meditation' 이 중얼거림, 속삭임, 반성, 기억, 즐겁게 함, 숙고와 같이 여러 단어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임을 알았다. 예수님은 분명 이런 숨은 의미들을 마음에 담고 말씀을 묵상하셨을 것이다. 그분은 구약의 말씀을 아주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를 삶의 여러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연결지으실 수 있었다.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사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 하시려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세 번이나 시도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번 모두 성경 말씀을 인용하심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리라"(눅 4:5-8).
여기서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3절 말씀을 깊이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탄의 미묘한 흥정에 직면하셨을 때 이 말씀이 저절로 마음에 떠올라 자신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게 하신다. 말씀을 묵상하면 말씀은 우리 인격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묵상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편 기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는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 46:10)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는 압박의 요소들을 고요함 가운데서 떨쳐 낼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다. 밭을 잘 일구는 것이 농사를 잘 짓는 것과 직결되는 것처럼 고요함이 성경 읽기와 직결된다. 열매를 맺는 데 필수적인 요건이다.
우리가 이전에 연구했던 성경 본문이나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과 관련된 구절들을 읽을 때, 마음이 고요해진다면 한 절, 한 구절, 한 문장 혹은 한글자가 우리에게 그려 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면 굳이 더 읽을 필요가 없다. 그때는 깊이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 말씀을 보배같이 가슴에 담아 두고두고 되새겨 이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진리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흘러가도록 하면 된다
우리의 모든 정신과 감각이 묵상을 돕는다. 마음은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상황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도록 돕는다. 기억은 우리가 과거에 배우고 경험한 하나님의 신실함과 속성을 떠올리게 해 준다. 상상력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예언자들은 상상력으로 하나님이 위탁하신 통찰력을 묘사했고, 예수님도 상상력으로 그의 나라를 말씀하곤 하셨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실한 목자와 중동 지방의 어느 가정 주부, 그리고 사랑 많은 아버지로 비유하셨다) 감정도 우리가 읽고 있는 본문에 담긴 하나님의 속성들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관상 : 애정 어린 집중기도
'묵상'과 '관상'은 종종 상호 교환할 수 있는 말로 쓰인다. 이해할 만하다. 비슷한 점들 때문에 이 두 기도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묵상과 같이 관상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안으로 밀어 넣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태도나 인식,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과 상관이 있다. 관상도 묵상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 것과 관계 있다. 그리고 관상도 우리의 심령을 비추는 하나님과 그분의 권능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열 수 있도록 고요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묵상과 관상은 서로 다른 점이 있기에 구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기도를 혼동하면 안 된다. 토마스 머턴(Thomas Melton)은 이에 대해 한마디로 말했다. "관상은 사랑의 완성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정의하는 것처럼 관상은 애정 어린 관심이 깃든 기도, 애정 어린 집중 기도, 집중의 기술,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세계에 대한 애정 어린 집중을 말한다.
관상이란사랑 안에서 성장함에 대한 것이다. 만약 관상사역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랑은 우리를 비롯한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을 향한 고갈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다‥‥관상이란 당신 존재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짐 보스트의 책, Coming to God에서 인용
관상은 묵상보다 더 멀리 그리고 더 깊게 들어가는 것이다.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하고 생각하지만, 관상하는 사람은 모든 기도의 중심이시며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님께 침묵으로 집중한다. 사실 관상은 한 단계 더 들어간다. 관상은 단어나 상징이나 개념을 넘어 그것들이 말하는 실체에 다가가는 것이다.
관상하는 법
현대의 많은 사상들과 반대로, 관상은 우리의 마음을 비우는 것이나 달콤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관상의 주된 목적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만약 이를 경험하고 싶다면 관상 기도를 위해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따로 떼어놓아야 한다. 존 던(John Donne)의 비유를 빌리면, "문 앞에서 악기를 조율함으로' 그런 기도가 시작된다. 즉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방을 청소한다든지,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운전하면서 관상기도를 할 수 있다. 관상기도는 행동이라기보다 마음과 정신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기도의 자리로 들어갈 때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긴장을 푸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긴장을 푸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긴장하는 이유들을 알아내는 것이다. 해야 할 일에 대한 부담이나 배우자 또는 직장 동료와 다툰 일과 같은 걱정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마음의 짐들을 하나님께 넘기기 전에는 관상 기도를 할 수 없다. 이것들을 하나님께 넘길 때 우리는 혼돈이 없는 시간의 팽창 속에서 우리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끼게된다. 하나님은 이런 시간 속에서 우리를 새롭게 만나주신다. 아마도 이것이 베드로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벧전 5:7)는 말씀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눈이 녹아 지붕에서 흘러내리듯 긴장이 우리에게서 흘러 나가도록 하고 우리 마음의 짐을 주께 드린 후에는 다음 기도의 단계로 들어간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에 우리 자신을 맞추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고요함 가운데 그분의 임재를 느끼며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연다 종종 기도는 침묵으로 바뀌고 그를 향한 깊은 열망으로 채워진다. 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곳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 오기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찾고 계셨음을 깨닫게 된다.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의 갈망에 응답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따뜻함에 잠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심을 느낀다. 그분은 당신의 영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새롭게 하신다. 우리는 삶에 대해 새로운 관점, 즉 그분의 관점을 갖게 된다. 우리는 그분의 가슴에 가까이 다가가 세상에 대한 그분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상처받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안타까움을 우리가 깨달을 때, 관상을 통한 중보기도가 우리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허기트가 말하는 묵상과 관상은 어떤 것인가? 기도에 대한이 두 가지 접근법은 어떻게 다른가?
영성 훈련 1
글 쓰기는 영적 훈련을 위한 좋은 방법이다. 주제나 본문을 한가지 선택한 후 묵상 기도 시간을 가지라. 그런 다음 묵상한 내용을 써 보라.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의 내적 상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말씀묵상 1
시편 119:12-16.23-24.33-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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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허기트(Joyce Hugget, 1937-)
조이스 허기트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가이자 연설가. 그리고 방송인이다. 그녀는 몇 년 동안 키프러스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다가 이제는 영국에 살고 있다. 그녀의 영적 저서들은 Learning the Language of Prayer(기도의 언어 배우기) 외에도 The Joy of Listening to God(하나님을 들음의 기쁨). Listening to Others(타인을 경청하기) 등이 있다.
그녀는 여러 해 동안 농아들의 교사로 봉사했는데 어릴 때부터 이런 봉사로 부름을 받았다 그녀는 이웃집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 아이들이 심각한 청각 상실 때문에 자유롭게 의사 소통할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인생 경험을 통해 허기트는 의사 소통과언어의 결정적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키프러스로 가서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조이스는 언어와 의사 소통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었다.
자신의 책에서 허기트는 듣기. 배우기. 그리고 언어에 관한 주제들을 지속적으로 기도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에 적용한다. 기도에 관한 그녀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과감하게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우리가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가장 간단한 방법들을 가지고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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