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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묵상의 훈련

영성묵상훈련 터마스 머튼............... 조회 수 3094 추천 수 0 2008.08.25 23:3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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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1
                      묵상의 훈련

  진정한 묵상은 일종의 심리학적 요법이 아니라 신학적인 은총이다.
                                                 토마스 머톤(Thomas Merton)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대적은 다음 세 가지, 즉 시끄러움과 조급함과 혼잡함을 통하여 크게 역사 한다. 우리의 대적은 우리들을 "물량주의"에 빠지게 했을 때 만족한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급함은 마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마귀이다."
  우리가 우리 문화(우리의 종교 문화 포함)의 피상성을 탈피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재창조의 침묵 속, 묵상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묵상의 세계를 체험한 위대한 인물들은 그들의 저서를 통하여 우리를 성령과 만나는 이곳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그와 같은 말이 현대인들의 기에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묵상 기도 학교의 학생으로 등록하기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한다.

  성경의 증인들

  묵상은 성경 저자들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성경은 묵상이라는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두 가지의 히브리어를 쓰고 있는데 그 두 단어는 성경에서 약 58회 사용되었다. 이 두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 하나님께서 하신 행위를 되풀이하여 말함, 하나님의 법을 반추함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느 경우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의 결과인 변화된 행위를 강조한다. 묵상에 대한 성경 적 이해는 그 어느 것이든지 회개와 순종을 핵심적인 특징으로 한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외쳤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무강하나이다.....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19:97,101,102).기독교의 묵상과 동양 및 일반 세상의 묵상을 가장 잘 구분 짓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순종과 충성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묵상 방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창 24:63).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시 63:6). 시편은 사실상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묵상하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시 119:148). 시편의 첫 시는 모든 사람들을 격려하여"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복 있는 자"(시 1:2)가 되도록 격려하고 있다.
  늙은 제사장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알고 있었으므로 어린 소년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도록 도와주었다(삼상 3:1-18). 엘리야는 광야에서 수많은 밤을 지새며 "여호와의 세미한 음성" 분별하는 법을 배웠다(왕상 19:9-18).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를 보고"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하시는 음성을 들었다(사 6:1-8)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는"(렘 20:9) 경험을 하였다. 이 외에도 증인들은 허다하다.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귀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사역 가운데서도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는 습관이 있으셨다(마 14:13). 예수님은 단지 사람들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있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한적한 곳에 계실 때 무슨 일을 하셨을까? 그는 하나님 아버지를 찾으셨다. 그는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 대화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듣기와 순종하기

  기독교의 묵상을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능력이다. 아주 간단하다. 하지만 복잡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좀 복잡하게 이야기하겠다. 여기에는 숨은 비결도, 비밀스러운 주문도, 정신 운동도, 환각적인 초월 의식도 없다. 다만 위대하신 우주의 하나님, 만물의 창조주께서 우리와 교제를 원하신다는 사실이 있을 뿐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더불어 이야기했고, 하나님은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하셨다. 즉 교통한 것이다. 그러다가 타락이 왔다. 타락의 가장 큰 의미는 영원한 교제가 깨어졌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손을 내밀어 거역하는 자녀들을 찾으셨다. 가인, 아벨, 노아,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모세는 여러 번 흔들리고 주저앉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법을 배웠다. 실제로 성경은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출 33:11)고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는 친밀한 관계, 교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ㅇlfj한 친밀함을 갖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조금 배우고 나서는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것이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 이렇게 하여 그들은 위험부담 없이 종교적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모세를 선두로 하는 선지자와 사사 반열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은 현재감,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하신 다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발길이었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그 나라의 삶이 어떠한가를 본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속자와 왕으로 알게 하는 살아 있는 교제를 확립해 주셨는데, 그것은 모든 일에 그의 말씀을 듣고 항상 그를 순종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듣고 순종하는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본보이셨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리라"(요 5:19).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요 5:30).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실 때, 제자들은 아버지 안에 거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이며 자기 양은 그의 목소리를 안다고 하셨다(요 10:4). 예수님은 보혜사, 즉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진리의 성령께서 오실 것이라고 이야기하셨다(요 16:13).

  누가는 그가 기록한 두 번째 책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육안으로 볼 수 없음에도 예수님은 부활과 승천 후에도 "행하시며 가르치기를" 계속하셨다고 시사한다(행 1:1). 베드로와 스데반은 둘 다 예수님이 신명기 18;15에 있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예언의 성취라고 지적한다. 모세는 말하는 자이고 백성들은 그 말을 듣고 순종해야 할 사람들이었다(행 3:22,7:37).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부활하셔서 통치하시는 그리스도를 본다. 그분은 성령을 통해서 자기 자녀들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 빌립을 인도하여 새로이 미전도 지역에 가게 하시고(행 8장), 자신의 메시아 됨을 바울에게 보이시고(행 9장), 베드로에게 그의 유대 민족주의를 가르치시고(행10장), 교회를 인도하여 문화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신다(행 15장), 우리가 거듭거듭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기초로 사는 법을 배우는 모습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묵상에 대한 성경의 토대이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는 행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부활하셔서 지금 이 세상에서 일하고 계신다. 그분은 게으름을 피우거나 뒷짐지고 계시지 않았다. 그 분은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선지자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목자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모든 세대 모든 성도들이 이 사실을 경험하였다. 그 동안 충성된 신자들이 묵상에 대해 써 놓은 엄청난 양의 글들을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모른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주님과 항상 교제하는 즐거운 삶을 간증하는 것이 그들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이다. 카톨릭에서 개신교에 이르기까지, 동방정교에서 서양의 자유 교회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은 한결같이 "방해받지 않는 교제 가운데 그의 임재 안에서 살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한 신비주의자는 "기도는 지성을 가지고 마음으로 내려가 거기서 어디나 계시고 모든 것을 보시며 당신 안에 계시는 주님의 면전에 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영국의 성직자 제레미테일러는 "묵상은 만인의 의무이다"라고 선언했다. 현대에 와서 루터교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왜 묵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성경의 증거들과 경건의 대가의 증거들이 이처럼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기용 부인이 말한 바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깊으심"을 체험하라는 은혜로운 충고를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묵상의 목적
  묵상을 할 때 우리는 토마스 아켐피스가 "예수님과 친한 친구관계"라고 한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 속으로 들어가 그 자세를 편히 즐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흔히 편재라 함)는 신학적 교리에서 찬란한 현실로 변화된다. "그가 나와 함께 걸으시며 나와 함께 말씀하신다"는 말을 경건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 대한 솔직한 표현이 된다.
  내 말을 잘 이해하기 바란다. 어떤 감상적이고 즉흥적이며 입에 발린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감상적인 생각은 성경에 나타난 높이 들린 주님을 우리가 얼마나 모르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보여 줄 따름이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그가 왕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죽은 자처럼 엎드러졌다고 했는데 우리도 그래야 한다(계 1:17). 내가 말하는 것은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체험했던, 무척 다정하면서도 두려울 정도로 존경스러운 그런 체험과 더 가까운 것이다.
  묵상할 때에 우리는 정서적 영적 공간을 만들어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성소를 건축하실 수 있게 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계 3:20)라는 놀라운 말씀은 볼래 신자들을 위한 것이지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삶을 주님께 맡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먹고 함께 대화하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 알 필요가 있다. 주님은 우리 마음속 성소에서 영원한 성찬을 하기 원하신다. 묵상이 이 문을 열어준다. 그래서 우리가 특정 시간에 특정한 일을 묵상할지라도 그 목적은 이 생명력 넘치는 현실을 삶 전체에 실현하난 것이다. 움직이는 성소가 우리의 성품과 행위를 들어온다.  
  이런 유의 내적 교제는 우리의 속 사람을 변화시킨다. 마음속 성소의 영원한 불길이 타오르면 변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불이 부정한 모든 것을 소멸하기 때문이다. 항상 곁에 계시는 우리의 스승께서는 늘 우리를 인도하여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룸 14:17)을 누리게 하신다.
  그의 길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버려야 한다. "의무"가 아니라 "소원"으로 그래야 한다. 우리의 욕구와 열망이 갈수록 그의 길과 맞추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갈수록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성령의 북극을 가리키는 바늘같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흔히 있는 그릇된 생각들

  기독교의 묵상 개념을 중요시하는 곳에는 반드시 그것을 동양종교의 묵상 개념과 같은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이 두 가지 개념이 세상을 나누어 놓는다. 동양의 묵상은 마음을 비우기 위한 노력이다. 반면에 기독교의 묵상은 마음을 채우기 위한 시도이다. 이 두 개념은 이처럼 전혀 다르다.
  동양의 묵상에서는 세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강조한다. 개성과 자아를 버리고 범아와의 일치를 강조한다. 이 세상의 수고와 고통에서 해방되어 비인격의 열반으로 들어가는 것을 동경한다. 개인의 정체성은 상실된다. 실제로 개성은 궁극적 환상으로 간주된다. 다만 비참한 존재의 바퀴로부터 도피가 있을 뿐이다. 매달리거나 말씀을 들을 하나님은 없다. 초연이 동양 종교의 궁극적 목표이다.
  기독교의 묵상은 초연의 개념보다 더 높은 것이다. 물론 초연도 필요하다. 20세기 베네딕트파 수도승 피터는 이것을 "사색의 안식"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초연함과 결부시켜서만 생각하면 위험하다. 악한 것을 비웠으나 선한 것을 채우지 않어 나중에 처음보다 더 나빠진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것을 보여준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눅 11:24-26).
  그렇다. 초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초연을 넘어 집착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주위의 혼란으로부터의 초연은 하나님께 더 잘 집착하기 위한 것이다. 기독교의 묵상은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나님께 드리는 데 필요한 내적 안전함으로 이끌어준다

  묵상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묵상이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는 생각이다. 묵상은 마음속을 탐구할 시간이 있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오해다. 이분야에 탁월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 가운데, 그들이 특별한 소수의 영적 거장들이 되기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박장 대소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활동-호흡과 같이 자연스럽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특별한 은사나 정신적인 능력이 없어도 된다고 말한다. 토마스 머톤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은 실로는 대단히 단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정교한 기술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세 번째 오해는 묵상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기며 20세기에는 전혀 맞지 안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책 카라마조프가의 형제(The Brothers Karamazov)에서 묘사한 금욕적인 신부 페라폰트 같은 사람이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는 엄격하고 독선적인 사람으로서 순전히 노력으로 그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구출하고 세상에 저주를 내리는 사람이다. 그와 같은 묵상은 아무리 해도 불건전한 현실 도피(타계 지향)로 이끌고 가서 우리들로 하여금 인생을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줄 수 있는 것이다.
  토마스 머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묵상이 생활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는 한, 아무런 핵심도 진실성도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퀘이커 교도들만큼 침묵 가운데 듣는 일을 강조한 단체는 없었다. 결과로 그들은 숫자에 비해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윌리엄 펜은 이렇게 말한다. "참된 경건은 사람을 세상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더 잘 살면서 세상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한다."
  묵상은 흔히 아주 실제적이며, 아주 세속적인 통찰력을 낳는다. 묵상을 통하여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얻는다. 또한 민감한 문제나 업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지침도 얻는다. 어떤 특별한 묵상이 황홀경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간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안내를 받는다는 것은 훨씬 더 보편적이다. 묵상은 보다 훌륭한 시각과 균형을 가지고 평범한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아마 모든 오해 가운데서도 가장 보편적인 오해는 묵상을 종교적 형태의 심리학적 조종으로 보는 견해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혈압을 내리거나 혹은 긴장을 해소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또한 그와 같은 견해는 우리들로 하여금 잠재 의식의 세계와 접촉하도록 함으로써 뜻 깊은 통찰을 제공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실제로 하나님과 만나 교제했다는 생각이 불합니하게 들린다. 당신이 만약 우리가 순전히 물질적인 우주 속에서 산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묵상을 지속적인 알파(alpha) 뇌파를 획득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만약에 무한하시며 인격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우주 속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다면, 또한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교제를 기뻐하신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묵상을 사랑의 하나님과 사랑받는 우리사이의 교통으로 볼 것이다.
  묵상에 대한 이 두 가지 개념은 서로 완전히 반대된다. 그 하나는 우리를 전적으로 인간적인 체험으로 제한하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 들어가게 한다. 그 하나는 잠재 의식을 개발하는 일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발견한 그분 안에 거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 가까이 계시는 분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분에 대하여" 말한다. 이 둘은 종교적인 것으로 들릴 수도 있고 또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는 궁극적으로 영적인 실재를 위한 자리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영의 세계를 믿을 수 있게 될까? 맹목적인 믿음에 의하여 믿을 수 있게 될까?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영적 세계의 내적 실재는 찾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얻을 수 있다.
  나는 종종 영적인 세계가 실제로 있는지를 십 분 동안도 찾아보지 않고 영적인 세계를 거리낌없이 비방하는 사람들을 본다.
  영적인 세계의 실재에 대해 실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다른 모든 과학적 노력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실험을 해야한다. 우리의 첫 번째 실험이 실패한다 해도 우리는 실망해서는 안되고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속단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절차를 재조사하고 다시 실험하며 이와 같은 일을 꾸준히 하기를 최소한도 모든 과학의 분야에서 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해야 한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그들 자신의 지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편견을 드러내는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갈망할 것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이 프레드릭 파버(Freederick W. Fa-ber)의 다음시를 긍정하는 때가 있다.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을 생각하니
  그 얼마나 기쁜가!
  그 생각을 하고
  그 이름을 호흡하고
  이 땅에서 그 일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그러나 묵상을 하는 사람들은 영적 해이와 냉담함과 바라는 마음의 부족이 빈번한 반응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 자신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말해주기를 바라는 경향을 끊임없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간접적인 메시지를 듣기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결정적인 실수 하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보다는 인간 왕을 달라고 고집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고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다. 종교의 역사는 왕, 중재자, 제사장을 취하려고 거의 필사적으로 애쓰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게 된다. 그와 같은 방법은 우리들로 하여금 변화의 필요를 회피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 있다는 것은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방법은 도덕적 변화의 필요 없이 종교적 체면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편리하다. 중재자의 종교에 의하여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현실은 오늘의 문화를 조금만 관찰해도 알 수 있다.
  묵상을 대단히 두렵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묵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시고 또한 우리들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준다.
  예수님과 신약의 저자들은 묵상이 종교 전문가들(제사장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제사장이 된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믿도록 만들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 같다. 워싱턴에 있는 구세주의 교회(the Church of the Saviour)의 교인들은 얼마동안 이 방면의 실험을 계속하였다. 결국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우리가 20세기 또는 21세기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나니아에게 명백하게 지시가 주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지시를 받을 수 있다는 암시를 가지고 있다.....'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며 또 순종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의 일에 개입하신다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며 또 순종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현재의 스승과 예언자로 아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소원을 받을 수 있을까? "이 소원은, 바꾸어 말하면 은혜의 선물이다. 묵상을 위한 소원과 은혜 받기를 기도하는 일없이 그냥 묵상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얼마 가지 않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묵상을 하려는 소원과 묵상을 시작하도록 하는 은혜는 보다 더 큰 은혜에 대한은연 중의 약속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 "은혜의 선물"을 구하고 받는 일을 우리들로 하여금 내적 여정을 지속적으로 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다. 이것은 앨버트 공의 말대로 "성도들의 묵상은 묵상되는 자, 즉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불붙는다."

  상상을 성화 할 것
  우리는 상상을 통해 아주 쉽게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갈 수 있다. 이것에 대하여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가 알렉산더 화이트는 "그리스도인의 심상이라는 신성한 직분과 화려한 봉사"라고 말했다.
  추상적인 묵상만으로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좀더 깊이 오관을 의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렇게 단순하고, 상당히 초라한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 자신도 이 방법으로 가르치시며 늘 상상력에 호소하셨다. 많은 경건의 거장들도 마찬가지로 이 길을 권장한다.
  아빌라의 테레사도 "나의 명철로는 숙고할 수 없으므로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궁리하여 그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우리들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녀의 말에 동감할 것이다. 우리들 역시 지적인 접근을 했지만 너무 추상적이고, 너무 냉담했었음을 알고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상상은 우리의 생각을 고정시키고 주의를 집중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프랑수아 드 살르는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는 상상을 통해서 우리가 묵상하는 신비한 것 안에 우리의 생각을 고정시켜 이리 저리로 배회하지 않게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마치 새를 새장 안에 가두거나 매를 가죽끈으로 묶어 손안에 머물게 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이들은 상상은 신뢰할 수 없으며 약한 자에게 이용당할 우려가 있다는 생각에서 상상을 반대한다. 그런 우려는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 우리의 모든 능력과 마찬가지로 상상도 타락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성(타락한 상태의)을 취하여 거룩하게 하신 후 그의 선하신 뜻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상상도 사탄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우리의 모든 능력이 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상을 가진 피조물로 만드셨다. 그리고 피조물의 주이신 하나님은 상상을 구속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신다.

  상상에 대한 또 하나의 우려는 인간의 조작과 자기 기만에 대한 두려움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른바 "지나친 상상"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상상해 낼 수 있다. 성경도 악한 사람들이 "허망한 생각"을 한다고 경고하고 있지 않은가(룸 1:21)? 그러니 우려를 가질 만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헛된 노력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좇아 하나님의 생각을 하고, 그의 앞에서 즐거워하고, 그의 진리와 길을 원한다. 우리의 이런 삶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은 더욱 우리의 상상력을 그의 뜻을 위해 사용하신다. 실제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체험은 어떤 일이 가능하다는 영상을 받는 체험이다. 종종 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그림이 떠오른다. 그리하여 그 그림에 그들과 함께 동참하노라면 깊은 탄식이 나오거나 눈물이 흐르게 된다. 후에 그들이"어떻게 그걸 알았습니까?"라고 물으면 "글세. 몰랐어요. 다만 보았을 뿐 이예요"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상상을 성결케 하여 사용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기독교의 성육신 사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세상에 맞도록 적응시키시고 육화하셔서, 우리가 알고 이해하는 상상을 이용해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르치신다.

  묵상을 위한 준비

  묵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단순히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물상을 함으로써 묵상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적시에 이루어지는 단순한 암시는 막대한 차이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앞으로 제시하는 실제적 암시와 묵상 연습은 묵상을 실제로 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지 법칙으로 당신을 제한하려는 것은 아니다.

  "묵상을 위한 적절한 시간이 있는가?"
  내면적인 삶에서 일단 숙달된 경지에 도달하면 묵상을 실행하는 일은 거의 어떤 장소,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가능하게 된다. 17세기의 브라더 로렌스와 20세기의 토마스 켈리는 둘 다 이 사실에 대해 웅변적인 증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초보자에게 있어서 숙달된 사람에게 있어서나 다 같이 하루의 일정한 시간을 공식적인 묵상에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묵상을 위해 특별한 시간을 따로 정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한 후에는 특정 시간에 하는 어떤 종교적 행위가 묵상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그런 개념을 조심해야 한다. 묵상은 우리의 생활 전체와 연관된다.
  묵상은 하루 24시간의 일이다. 묵상 기도는 하나의 생활 방식이다.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권고하였다.
  셀레스의 피터는 유머가 섞인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악의 밤에 코를 골며 자는 사람은 묵상의 빛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상의 시간을 위한 준비를 하는 데 하루전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만약 끊임없이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활동에 몰입한다면 내적 침묵의 시간에 주의를 집중할 수가 없다. 외적인 일로 시달리며 분산되어 있는 마음은 묵상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마음이다.
  교부들은 종종 "거룩한 여가"(Otium Sanctum)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 말은 생활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와, 하루의 활동 중 평화로울 수 있는 능력, 쉬면서 미를 즐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자기 자신의 보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과로 사람을 억압하는 성향이 있는 우리는 "거룩한 여가"를 잘 가꾸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묵상하는 일에 성공을 거두기를 원한다면 하루하루의 생활 일정에 대한 단호한 결심을 가지고 "거룩한 여가"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묵상을 위한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
  이 사항에 대해서는 "홀로 있기 훈련"에서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겠다. 여기에서는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겠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조용한 장소를 찾기 바란다. 가까운 곳에 전화가 없어야 한다. 가능하면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장소라면 더울 좋다. 매일 다른 장소를 찾아다니기보다 일정한 장소를 정해 두는 것이 가장 좋다.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자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당신은 어디에서나, 어느 때에나 그리고 어떤 자세로도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 있어서는 외적 자세가 심히 중요하다. 몸과 마음과 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마음의 긴장은 몸짓으로 나타난다. 나는 예배 시간에 계속적으로 껌을 씹고 있는 사람들을 실제로 목격하였다. 그들은 비록 전혀 알고 있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긴장이 있다. 그렇듯 외적 자세가 내부의 상태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기도의 내적 태도를 향상시키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내적으로 산만함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의식적으로 편안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우리의 내적 불안을 잠잠케 하는 성향을 갖게 할 것이다.
  바른 자세를 규정하는 법은 없다. 성경은 바닥에 엎드린 자세에서부터 손과 머리를 하늘을 향해 들고 서있는 자세에 이르기까지 온갖 자세를 다 이야기하고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편안하고 주의를 산만케 하지 않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유쾌한 기질을 갖고 있던 14세기의 신비가 리처드 롤(Richard Rolle)은 앉은 자세로 묵상하기를 즐겨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걷거나 서 있거나 혹은 무릎을 꿇고 있기보다 앉은 자세가 더 오래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앉은 자세를 취할 때 나는 가장 편안하고, 그리고 나의 마음도 가장 힘이 있다." 나는 이 말에 동감한다. 그리고 나는 의자에 앉아서 등을 바르게 세우고 두 발은 바닥에 놓는 그 자세가 가장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그리는 자세는 방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또 다리를 포개는 자세는 혈액 순환을 억제한다. 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바닥을 펴 받는 자세를 취하기 바란다. 산만함을 없애기 위하여 그리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 주의를 집중하기 위하여 때로는 눈을 감는 것이 좋다.
  또 때로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한다는지 혹은 아름다운 나무나 어떤 식물을 내려다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 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고후 4:6)에 몸과 마음과 감정과 정신을 주의 집중하는 데 두어야 한다.

  묵상의 방식들

  전 역사를 통해 기독교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 하늘과 땅의 창조주와 교제하는 법, 세상을 영원히 사랑하는 분을 체험하는 방법을 이야기해 왔다. 축적된 그들의 경험지식은 우리가 그들처럼 하나님과의 사귐, 하나님께 대한 충실을 추구할 때 큰 도움이 된다.
  경건의 시간을 위한 자료들 가운데 성경에 대한 묵상(medita-tio Scripturarum)은 가장 표준적인 것으로 다른 모든 묵상 방식들이 올바르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성경 공부는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반면, 성경 묵상은 본문을 내련화하고 개별화하는 데 중점을 둔다. 기록된 말씀이 당신에게 말하는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이 시간은 전문적인 연구나 분석, 또는 다른 사람과 나눌 자료를 얻는 시간이 아니다.
  교만해지려는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겸손한 마음으로 당신에게 전해지는 말씀을 받아 들이라. 종종 나는 이 특별한 시간에는 무릎꿇는 것이 아주 적절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분석하려 하지 않고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마리아처럼 마음에 두고 생각하라."
  본회퍼는 핑켄발데(Finkenwalde)에 신학교를 세웠을 때, 그곳 사람들은 반드시 한 시간 반씩 조용히 성경을 묵상하도록 했다.

  많은 본문을 피상적으로 읽고 넘어가려는 유혹을 이겨야 한다. 우리가 서두르는 것은 내적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므로 내적 상태가 변화되어야 한다. 본회퍼는 한 본문을 가지고 일주일 전체를 묵상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므로 한 사건이나 한 비유, 또는 몇 구절이나 한 단어를 택해서 그것을 파고들기 바란다. 우리의 오관을 이 일에 사용하라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격려를 기억하면서 이런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 바란다.
  바다의 냄새를 맡으라. 해변의 파도 소리를 들으라. 무리들을보라. 머리에 비치는 태양과 뱃속의 굶주림을 느끼라. 공기 속의 소금기를 맛보라. 그의 옷자락을 만지라. 이것에 대해 알렉산더 화이트는 이렇게 권고한다. "진실된 그리스도인의 상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시야에서 결코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당신은 신약을 편다.....그 순간 당신은 상상을 통하여 그 현장에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의 발아래 앉는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고 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을 묵상하려고 한다 하자. 우리가 할 일은 그 구절을 연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말씀을 하신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분이 자신의 평안을 우리에게 채워 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한다. 마음과 생각과 영이, 그분이 채워주시는 평안을 깨닫기 시작한다. 우리는 두려움에서 오는 모든 동작이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딤후 1:7)에 의해 잠잠해지고 정복되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평안을 깨뜨리지 않고 오히려 그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그의 평안 속에 갇히고, 흡수되고, 몰려들어간다.
  이런 체험에서 놀라운 것은 자기를 완전히 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하면 더 평안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안의 전수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평화로운 것처럼 행동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평안의 행위가 안에서 저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로 이 이야기에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하라. 또 그리스도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치료하시고, 용서하신다는 젓을 기억하라.
  알렉산더 화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거룩한 기름을 부음 받은 당신의 상상력을 가지고 신약을 다시 펼친다. 당신은 어떤 때는 세리가 되고, 어떤 때는 탕자가 되며.....어떤 때는 막달라 마리아가 되고, 어떤 때는 뜰에 있는 베드로가 된다.....그리하여 신약성경 전체가 모두 당신의 자서전이 된다."

  또 하나의 묵상 방식은 "회상"이라고 하는 중세의 묵상법으로, 퀘이커들은 흔히 "전념"이라고 부른다. 이 시간에는 가만히 있으면서 재창조의 침묵으로 들어가 우리 생각의 단련들을 집중시킨다.
  다음은 당신이 "회상"을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간단한 연습이다. "손바닥 아래로, 손바닥 위로"라는 것인데, 우선 "손바닥 아래로"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당신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염려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존에 대한 나의 분노를 주께 드립니다. 오늘아침 예약된 치과 치료에 대한 두려움을 맡깁니다. 이 달 생활비 부족에 대한 고민을 넘겨 드립니다. 오늘 저녁 아기 볼 사람을 찾지 못한 좌절감을 맡깁니다." 당신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든, 신경이 쓰이는 것이든 무엇이든지 그냥 "손바닥 아래로"라고 말하라. 그것들을 손에서 떨어뜨려 버리는 것이다. 당신은 그 모든 것들이 손에서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 동안 맡기는 시간을 가진 다음에는 손바닥을 위로한다. 이것은 주께로부터 받기 원한다는 상징이다. 말없이 이렇게 기도할 수도 있다. "주님, 저는 존을 향한 주의 거룩한 사랑을, 치과 치료에 대한 주의 평안을, 주의 인내를, 주의 기쁨을 받고 싶습니다." 무엇이 필요하든지 "손바닥 위로"라고 하기 바란다. 버리는 시간을 가졌으므로 이제는 나머지 시간을 완전한 침묵 가운데 보낸다. 아무 것도 구하지 말라. 주님께서 당신과 교제하시고 당신을 사랑하시도록 하라. 어떤 암시나 지시가 온다면 좋다. 그러나 오지 않아도 좋다.

  세 번째 종류의 묵상 기도는 창조에 대한 묵상이다. 이것은 유치한 범사론이 결코 아니다. 대단한 단일신론으로서 우주의 창조자께서 그분의 창조물들을 통해서 그분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방법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가 만드신 일을 드러낸다(시 19:1). 에블린 언더힐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옛날 신비주의자들이 '피조계를 통한 하나님 발견'이라고 불렀던 첫번 형태의 묵상을 시작하라."
  이처럼 당신의 주의를 피조된 세계로 돌리라. 나무들을 보라. 정말로 보라. 꽃을 보되 그 아름다움과 대칭의 미가 당신의 마을과 생각 깊숙이 파고들게 하라. 새 소리에 귀 기울이라. 그것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다. 땅에 기는 작은 동물들을 주의해 보라. 이 단순한 방법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네 번째 묵상 방법은 세 번째 방식과는 정 반대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사건들을 묵상하면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다. 우리는 능력이 아니라 선지자적 관점을 얻기 위해서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의 내적 의미를 꿰뚫어 볼 의무가 있다.
  토마스 머튼은 그런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고난만 묵상하고 닥하우와 아우슈비츠의 수용소를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 시대의 기독교를 온전히 체험하지 못한 것이다."
  이 형태의 묵상은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정치꾼들에게 조종당하거나 광고가 우리를 먹이도록 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신문들은 일반적으로 너무 피상적이고 편향적이어서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시대의 사건들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이들의 추이에 대한 선지자적 통찰을 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이 어둡고 썩어 가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도록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묵상 초기에 얻는 것이 별로 없더라도 낙심해서는 안 된다. 영적 삶은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영혼의 에베레스트 산에 도전하기 전에 작은 산들을 오르는 경험을 하는 것이 지혜롭다.
  그러므로 인내하라. 더군다나 당신은 지금까지 전혀 배우지 않았던 분야를 공부하고 있다. 우리문화도 당신이 이런 기술을 배우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당신은 시대 조류를 거슬러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기 바란다. 당신이 하는 일은 엄청난 가치가 있다.
  묵상 영역에는, 살펴보면 유익한 부분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하지만 묵상은 단 한번의 행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또 의자를 만드는 것처럼 완성되는 일도 아니다. 묵상은 생활 방식이다. 당신은 내적 깊이를 더함에 따라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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