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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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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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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내적 단순성을 진정으로 가지고 있을 때, 겉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은 보다 더 솔직해지고 보다 더 자연스러워진다. 이 진실한 단순성이 우리들로 하여금 편견이 없도록 만들고 온유하도록 만들며, 또한 순결하고 쾌활하고 평온하도록 만든다. 이런 것들은 그 모두가 우리의 정결한 눈으로 가까이 에서 그리고 계속적으로 볼 때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이 단순성이 얼마나 귀중한가! 누가 이 단순성을 나에게 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단순성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겠다. 이 단순성은 복음의 진주이다.
프랑수아 페네롱(Francois Fenelon)
단순성은 자유이다. 이중성은 굴레이다. 단순성은 기쁨과 조화를 , 이중성은 불안과 공포를 가져다준다. 전도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니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전 7:29). 하나님께서 단순성을 통하여 주시는 자유를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금 옛 쉐이커(Shaker)의 찬미를 부른다.
단순하게 하는 선물,
자유하게 하는 선물,
그대가 있어야 할 곳으로 내려오는 선물,
우리가 올바른 자리에 있는 것을 볼 때,
그곳은 사랑과 기쁨의 계곡이다.
참 단순성을 가질 때,
엎드리고 구부리기를 부끄러워 않는다.
후퇴, 후퇴는 우리의 기쁨이 된다.
후퇴하고 후퇴하여 결국 완전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단순성 훈련은 내적인 것이지만 외적 생활로 나타난다. 단순성의 훈련은 내적인 것이지만 외적 생활로 나타난다. 단순성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은 모두 중요하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효과가 없는 내적 실재를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도한 단순성의 내적 실재 없이 단순성의 외적 생활 양식을 소유하려는 시도는 율법주의에 이르게 할뿐이다.
단순성은 내적 초점과의 일치에서 시작된다. 단순성은 토마스 켈리가 말한 대로 "거룩한 중심"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저서 마음의 순결은 한 가지에 뜻을 두는 데 있다(Purity of Heart Is Will One Thing)에서 그리스도인의 단순성의 핵심을 간파하였다.
내적 실재를 체험하면 외적으로 자유롭게 된다. 우리의 말은 진실하고 정직하게 되며 지위나 명예에 대한 욕심은 사라지게된다. 왜냐하면 이제는 명예나 지위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허식을 부리는 낭비를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원리를 따라 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재물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다.
리처드 버드가 황무한 북극 지방에서 여러 달 동안을 홀로 지낸 후 쓴 일기에 나타난 체험에 우리들도 동참할 수 있다. "나는 많은 물질이 없어도 인간은 깊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현대 문화에는 단순성의 내적 실재와 외적 생활 양식이 모두 부족하다. 우리는 현대 세계에 살아야 하기에, 현대 세계의 부서지고 파괴된 상태의 영향을 받고 있다. 또 경쟁이라는 미로에 빠져 있다. 현대인은 한 순간 건전한 이성에 기초를 두고 결단을 내렸다가 그 다음 순간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공포심에서 결정을 내린다. 현대인의 삶의 방향은 통일성이나 중심이 없다.
우리에게는 거룩한 중심이 없기 때문에 안전을 위한 우리의 욕구로 인하여 물질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 현대 사회의 풍요에 대한 욕심은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진실과의 연결을 완전히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필요로 하지도 않고 기쁨을 주지도 못하는 물질에 매달린다.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물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기 위해 그것을 산다." 계획에 의한 소모가 사라진 곳에는 심리학적 소모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옷이 낡을 때까지 오래 입는 것과 자동차를 오래도록 사용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대중 매체는 우리들로 하여금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은 진실에서 뒤떨어지는 것이라고 믿도록 만들어 놓았다. 병든 사회를 본받는 것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깰 때이다. 지금 우리의 문화가 얼마나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지를 알기 전에는 우리 속에 있는 물질 숭배의 정신을 해결할 수 없으며 또한 기독교의 단순성도 바랄 수 없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현상은 우리의 신화에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현대의 영웅은 가난한 소년에서 부자가 된 사람이지 부자 소년이 자원하여 가난하게 된 사람은 아니다. 탐욕을 우리는 대망이라고 일컫는다. 축재를 우리는 절약이라고 일컫는다. 지나친 욕심을 우리는 근면이라고 일컫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의 저항 문화도 개선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저항 문화는 소비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생활 양식을 피상적으로 변화시킨 데 불과하다. 저항 문화는 항상 명확한 중심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엽적인 것에 빠지기 마련이다.
기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항 문화의 많은 부분은 병든 옛 사회의 가장 나쁜 모습을 비춰 주는 거울이다. 마약 개방, 성 개방, 자유 낙태 등은 혁명이 아니다.....거짓으로 자유를 표방하는 홱, 가학성 피학성 음란중의 요소들, 불법 인쇄물의 선정적 광고 등은 dpt 질서의 도착의 한 부분이며, 사망의 표현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새로운 삶의 방법을 과감하게 가꾸어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물질을 벌 수 있느냐로 사람은 자격을 정의하는 현대의 비정상적인 현상에 반대해야 한다. 우리는 사망을 가져다주는 현재의 방식을 바꾸기 위하여 과감한 시도를 해야 한다. 단순성의 훈련은 하나의 잃어버린 꿈이 아니라 전 역사를 통하여 되풀이되는 비전이다. 그 단순성은 오늘날도 되찾을 수 있다. 또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
성경과 단순성
단순성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이 어떠한지를 보기 전에, 성경은 경제적인 문제에 대하여 애매하다는 견해부터 일소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재물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각 개인에게 달린 사항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흔히 있다. 재물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각자 해석상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실제적인 경제 문제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보면 그와 같은 견해는 전혀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일이나 재물을 축적하는 일을 명백히 반대하고 있다.
성경은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경제적 가치관에 대해 훈계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구약성경은 사유 재산의 절대권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반대하고 있다-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영구적으로 소유할 수 없고, 회년에 모든 땅을 본래의 소유주에게 되돌려 주도록 되어 있다(레 25:23).
사실상 희년의 목적은 재산을 정규적으로 재분배하는 데 있었다. 그것은 재산 그 자체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경제관은 현대의 거의 모든 신념과 관습에 충돌되는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회년의 규례를 충실히 지켰더라면 빈익빈 부익부라는 그 끊임없는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성경은 재물에 대한 우상 숭배적 집착에서 생기는 노예 정신을 계속적으로 단호하게 배격하고 있다.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시 62:10).
십계명의 열번째 계명은 탐심을 배격한 계명이다. 즉 "소유"를 탐하지 말라는 말이다. 탐심은 도적질과 억압으로 통한다. 잠언저자는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말을 하였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잠 11:28).
에수님께서는 그 당시 물질주의에 대하여 반기를 드셨다. 아람어에서 재물은 "맘몬"(mammon)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맘몬"을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으로 선고하셨다-"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예수님께서는 경제 문제에 대하여 분명하게 자주 말씀하셨다. 그분은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0, 24).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묘사하셨다. 물론 하나님께 있어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에수님께서는 그 어려움이 어떠하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고 계셨고 재물이 사람을 어떻게 붙잡는지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는 것을 아셨으므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명령하셨다(마 6:21,19).
에수님께서는 보물 있는 곳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든지 혹은 두지 말아야 한다든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는 명확한 사실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한 부자 청년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원한다면 그의 소유물을 떠나겠다는 내적 자세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의 소유를 나눠주라고 권고하셨다(마 19:16-22). 예수님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그리고 하나님을 찾아 나아온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셨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눅 12:33). 예수님은 축적하는 데 전념하는 한 부자 농부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 부자농부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다(눅 12:16-21).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우리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은 하늘 나라를 얻기 위하여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기꺼이 팔아야 한다(마 13:45-46).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재물에 대한 근심에서 떠난 기쁨의 삶에 초청하였다.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눅 6:30).
예수님은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 그 어떤 사항보다도 경제 문제를 많이 말씀하셨다. 비교적 단순한 사회에서 우리 주님이 재물에 대한 영적 위험을 그렇게 강조하셨다면, 오늘날 풍요로운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경제적인 문제를 얼마나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겠는가.
신약의 서신서들 속에도 역시 같은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감독은 ".....돈을 사랑치 아니하여"(딘전 3:3)야 하고, 집사는 "더러운 이를 탐하지"(딤전 3:8) 않아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릐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야고보는 소유하려는 정욕으로 살인하고 싸우는 것을 지적하였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 도다"(약 4:2).
바울은 탐심을 우상 숭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누구든지 탐심의 죄를 범하는 자에게는 엄격한 징계를 하라고 고린도 교회에 명령하였다(엡 5:5;고전 5:11). 바울은 탐심을 음행과 도둑질과 나란히 열거하고, 그 가운데서 생활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선언하였다. 또 그는 부요한 자들에게,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나눠주라고 권면하였다(딤전 6:17-19).
이 모든 말을 하였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가 충분한 물질적 준비를 하는 것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서둘러 말해야 되겠다. 준비를 근거로 생활하려고 할 때 불행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준비가 부족할 때도 불행이 있다. 인위적인 가난은 악이며 배격되어야 한다. 성경은 금욕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성경은 일관되게 그리고 힘있게 창조된 것을 좋다고 하며 그것을 즐기라고 선언하고 있다.
금욕주의는 정신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를 갈라놓고 정신적 세계는 선한 것이고 물질적 세계는 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물질적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으로 구원을 찾고자 한다.
금욕주의와 단순성은 서로 배치된다. 실제 행위에 있어서 그 둘은 얼핏 보기에 서로 유사한 것같이 보일 때가 이따금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 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흐리게 해서는 안된다.
금욕주의는 소유를 포기한다. 그러나 단순성은 소유물을 올바른 시각에서 본다. 금욕주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여지가 없지만 단순성은 하나님의 손에 의한 그 은혜로운 공급을 기뻐할 수 있다. 금욕주의는 비천에 처할 때에만 만족을 얻을 수 있으나 단순성은 비천에 처할 때나 풍부에 처할 때나 만족할 줄 안다(빌 4:12).
단순성은 우리의 삶을 충분히 바로잡으므로 우리들은 소유물에 의하여 파멸 당하는 일없이 소유물을 진실로 즐길 수 있게 된다. 단순성이 없으면 우리는 이 악한 시대의 "맘몬" 정신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기독교 정신에 배치되는 금욕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둘은 모두 우상 숭배로 통한다. 그 둘은 모두 영적으로 죽음을 자져다 준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풍부한 물질적 공급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타나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신 8:7-9). 또한 성경에는 올바른 시각이 유지되지 않을 때, 재물의 위험에 대한 경고가 많이 나타나 있다.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신 8:17).
"단순성의 훈련"은 우리들에게 올바른 시각을 제공해 준다. 단순성은 우리들을 자유케 하므로 하나님의 예비하신 공급을 받되 우리 자신의 축적을 위한 선물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선물로서 받게 한다. 성경이 물질주의자와 금욕주의자를 둘 다 동등하게 배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할 때, 우리는 단순성을 이해하는 데 주의를 돌릴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설 자리
아르키메데스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나에게 설자리를 달라. 그리하면 내가 이 땅을 움직이겠다." 모든 훈련에 있어서 이러한 초점이 중요하지만 특히 "단순성의 훈련"에 있어서 그러하다. 모든 훈련 가운데서 단순성의 훈련이 가장 눈에 띄는 것이므로 변질되기도 가장 쉽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단순성에 대한 예수님의 많은 말씀을 무시하고,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다하. 즉 이 단순성의 훈련은 오늘날 융요한 생활에 대한 우리의 관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성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오늘날 풍요한 생활에 대한 우리의 관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성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율볍주의의 심한 유혹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경제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 철저하게 실현하려는 시도를 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실현을 가지고 예수님의 교훈의 실현으로 오인하기가 대단히 쉽다.
우리는 이런 의복을 착용하고 또한 저런 집을 구입하고 그리고 우리 자신의 선택을 단순한 생활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위험을 볼 때, 단순성을 위한 아르키메데스적 초점을 발견하고 규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에수님의 말씀 속에서 그러한 초점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 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 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 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 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 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 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 게 더하시리라(마 6:25-33).
단순성의 훈련의 중심점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데 있다. 그렇게 하면 그밖에 필요한 모든 것이 올바른 순서에 오게 된다. 이 점에 대한 예수님의 통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먼저 할 일을 먼저 하는데 달려 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나라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 단순한 생활 양식에 대한 욕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순성은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일보다 앞설 때 우상 숭배가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데 있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 하여 적절한 직업을 구해야 할까?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 면 나는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해야 한다고 선포해야 할까?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 있어서 내가 해야 할 일 은 아무것도 없다. 분명히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일도 하지 말고 고요히 있기를 배 워야 한다. 그 고요함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의 시초이다.
그 나라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내적 진실을 낳는다. 그 내적 진실이 없으면 우리는 율법주의에 떨어진다. 그 나라에 초점을 맞추는 일 이외의 그 무엇도 중심이 될 수 없다. 치열한 경쟁심에서 벗어나야 되겠다는 욕구나 세상의 재물을 재분배하는 일이나 생태계에 대한 관심이 중심이 될 수 없다.
단순성의 훈련에 있어서 중심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다.
그밖에 다른 모든 것들도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노력의 초점이 되는 순간 그것들은 우상이 된다. 그것들에 초점을 두는 일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의 어떤 특정 활동이 기독교의 단순성이라고 선언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진실로 첫째 자리에 있을 때, 생태계에 대한 관심이나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일이나 재물의 공정한 분배나 그밖에도 다른 많은 일들이 올바른 배려를 받게 된다. 그 나라를 먼저 구하지 않는 사람은 그밖에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상숭배밖에 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그 중요한 말씀에서 명백히 해 두신 바와 같이, 근심으로부터의 자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했다는 내적 증거가운데 하나이다. 단순성의 내적 실재는 소유물에 대한 근심을 떠난 기쁨의 생활과 연결된다.
탐심을 가진 사람이나 인색한 사람은 그 자유를 알지 못한다. 그 자유는 소유물의 풍족함이나 혹은 소유물의 부족함과 관계가 없는 내적 신뢰의 정신이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살아간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이 단순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런데 흔히 보면 돈을 가장 적게 가진 사람이 돈을 가장 많이 사랑한다. 어떤 사람은 단순성의 외적 생활 양식을 나타내면서 속에는 근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재물이 근심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은 또한 아니다. "부는 근심을 쫓고 안전을 가져다 줄 것처럼 양의 옷을 입고 와서는 근심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부가 사람에게서 근심을 쫓고 안전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마치 양을 늑대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늑대를 양에게 들여보내는 것과 같다."
근심으로부터의 자유는 다음 세 가지의 내적 자세로 특징 지어진다. 첫째,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을 선물로 받았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둘째, 우리의 소유물은 하나님께서 돌보셔야 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셋째, 우리의 소유물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해야 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세 가지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근심으로부터 자유롭게된다. 이것이 단순성의 내적 실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에 우리의 소유물을 우리 자신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의 소유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면 근심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단순한 삶을 살기 위하여 그들이 어떠한 외적 모습을 보인다 하더라도 단순성에 대해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소유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자세가 단순성의 첫번째 내적 자세이다. 우리가 일을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을 소유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은혜로 살아가고 있으며 일용할 양식까지도 은헤로 받는다.
우리는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단순한 요소들까지도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 물과 공기와 태양이 그런 것이다. 우리의 소유물은 우리의 노동의 결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돌보심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소유물을 우리 개인의 노력으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유혹을 받는다면, 가뭄이나 혹은 어떤 재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모든 것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은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소유를 돌보는 일이 우리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단순성의 두번째 내적 자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유를 보호하실 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문의 자물쇠가 집을 전적으로 보호하는 것은 아니다. 예방책을 간구한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그러나 그 예방책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재산을 보호해 준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예방책이 도둑을 전적으로 방지하는 보증은 되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우리의 소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명예나 혹은 우리의 직장 같은 사항들도 포함된다. 단순성은 그 모든 사항들에 대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유를 의미한다.
우리의 재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하는 것이 단순성의 세번째 내적 자세이다. 우리의 재물이 공동체를 유용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둑질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
이 말이 난처하게 들리는 것은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우리는 내일에 대한 걱정을 하기 때문에 재물을 나누어주지 않고 재물에 매달린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내일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하신 창조주로 알고 있다면,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알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재물을 나누어 줄 수 있다. 이때에 우리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을 자발적으로 도와준다. 이리하여 우리는 어리석은 자리에 있지 않게 된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때,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자세가 우리 삶의 특성이 된다. 그 세 가지 자세가 합쳐져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그 세 가지 자세는 그리스도인의 단순성의 내적 실재를 이룬다. 우리가 이렇게 따라 살 때, 적절한 생활에 필요한 "이 모든 것"(마 6:33)이 우리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단순성의 외적 표출
단순성을 내적 실재로만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내적 실제는 외적 표출이 있기 전에는 진실한 것이 아니다. 단순성의 자유케 하는 영을 체험하면 우리의 생활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앞에서도 경고한 바와 같이, 특정 사항을 단순성에 적응하는 일에는 율법주의에 빠질 위험이 따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위험은 극복해야 할 위험이다. 왜냐하면 외적 특정 사항을 논의하기를 거부하는 일은, 단순성의 훈련을 이론적인 공론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성경의 저자들도 역시 그와 같은 위험을 계속적으로 감당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단순성의 외적 표출을 위한 주요 원리 10가지를 열거하고자 한다. 이 원리는 율법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단순성의 의미를 현대 생활에 구체화시키려는 하나의 시도로 생각해야 한다.
첫째로, 물품은 체면이 아니라 유용성을 보고 사도록 하라. 자동차를 살 때는 위광이 아니라 유용성을 보고 사도록 하라. 자전거를 타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집을 짓거나 혹은 매입할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줄까 하는 것을 생각하기보다 살기에 알맞은 점을 생각하라. 불필요하게 큰집을 갖지 않도록 하라.
의복을 생각해 보자. 옷을 더 구입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실제로 옷이 더 필요해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유행에 따르기 위해 구입한다. 유행을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실제로 필요한 옷만을 구입하고 충분히 오래 입도록 하라. 의복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고 하지 말고 생활로 영향을 주도록 하라. 가능하다면 옷을 만드는 기쁨을 터득하기 바란다. 장식적인 옷을 입기보다는 실용적인 옷을 입도록 하라.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의복에 관하여 나는 가장 질긴 것과 아주 수수한 것을 구입하며 가구를 구입하는 경우에는 꼭 필요하고 가격이 싼 것을 구입한다."
둘째로, 중독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배격하라. 쾌적한 환경과 같은 심리적 필요와 중독을 구별하기 바란다.
알콜, 커피, 차, 콜라 등 중독성이 잇고 영양가 없는 음료의 사용을 금하거나 혹은 줄이도록 하라. 만약 당신이 텔레비전에 중독 되었다면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없애도록 하라. 어떠한 매체이든 당신이 그것 없이는 지낼 수 없다고 느낀다면 그것을 제거해 버리기 바란다.
라디오, 스테레오, 잡지, 비디오, 신문, 책 등과 같은 것 말이다. 만약 돈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면, 얼마쯤은 버리고라도 내적 평안을 느끼도록 하라. 단순성은 자유이지 굴레가 아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그 무엇에도 사로잡히기를 거부하라.
중독은 본질적으로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중독에 빠졌다면 의지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그냥 벗어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이 부분의 삶을 개방하여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와 치유하시는 능력이 임하시게 할 수 있다. 당신은 또한 하나님의 개입에 조용히 의지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중독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아주 간단하다. 훈련되지 못한 강박 행동을 보면 된다. 한 친구는 어느 날 아침 신문을 가지러 나갔다가 신문이 없었던 때의 경험을 내게 이야기했다. 그는 당황했다. 신문을 읽지 않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웃집 마당에 신문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꺼내 올 궁리를 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중독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급히 집안으로 들어가 보급소에 전화를 걸어 신문 구독을 취소했다. 보급소 직원은 그의 말을 다 들은 후 이렇게 물었다. "왜 신문 구독을 취소하십니까?" 그 친구는 통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중독 되었기 때문이오." 그러자 보급소 직원도지지 않고 되받았다. "그러면 구독을 다 취소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일요판은 계속 받아 보시겠습니까?" "아니오. 다 취소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신문 구독을 취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친구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셋째로, 물질을 나누어주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라. 만약 당신이 어떤 소유물에 집착하게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면 그 소유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줄 것을 고려하라.
나는 어떤 사람을 위하여 크리스마스에 물품을 사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던 상당히 소중한 물품을 주기로 결심한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의 동기는 나 자산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그 물품 없이 지내는 단순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오는 자유가 어떠한지를 스스로 알기 원했었다. 그 선물은 자전거였다. 내가 선물을 전달하러 그의 집으로 갈 때 불렀던 다음 찬양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어라."
여섯 살 난 아들이 도시락이 없는 급우에 대한 말을 듣고 나에게 자기의 도시락을 그에게 주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할렐루야!
쌓아 두지 말기 바란다. 필요 없는 물품을 쌓아 두는 일은 생활을 복잡하게 만든다. 그렇게 쌓아 둔 물품은 정돈해야 하고 먼지를 털어야 하며 되풀이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들 가운데는 소유의 절반 정도가 없어도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
"단순하게 하라, 단순하게 하라"고 한소로(Thoreau)의 권면을 따르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넷째로, 현대 가전기구 업자들의 선전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라. 시간을 절약한다는 기기들은 거의 시간을 절약하지 못한다. "6개월 안에 제 값을 찾는다"는 말에 조심하기 바란다. 대부분의 전기 제품은 고장이 잘 나고 오래 가지 않아 못쓰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을 향상시키기보다는 복잡하게 만든다.
이런 점은 특히 어린이들 장난감에 있어서 큰 문제이다. 우리 어린이들은 기게 장치에 의하여 작동하는 인형을 가지고 놀아야 할 필요가 없다. 어린이들은 헝겊 조각으로 만든 인형을 가지고도 더 즐겁게 놀 수 있다.
도 헝겊 조각으로 만든 인형이 더 오래 간다. 흔히 어린이들은 최신 장난감보다 오래된 취사 도구 같은 것을 가지고 더 즐겁게 논다. 교육적이고 오래 견디는 장난감을 택하기 바란다. 어떤 것은 당신 자신이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대체로 가전 기구는 세계의 에너지 자원을 불필요하게 낭비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 인구의 6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데 세게 에너지의 33퍼센트 가량을 소비하고 있다 미국의 냉방 기구에 사용되는 에너지의 양이 중국 전체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과 같다. 환경에 대한 책임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오늘날 생산되는 가전 기구의 대다수를 피해야 한다.
광고하는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이것은 최신형이고 혹은 저것은 새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의 제품은 팔고 새 제품을 사야 한다고 말한다. 재봉틀의 경우는 바느질이 새롭고, 녹음기의 경우는 누름 단추가 새로우며, 백과 사전의 경우는 색인이 새롭다고 한다.
이러한 매체의 주장은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흔히"새로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불필요한 것을 구입하도록 유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냉장고가 자동 얼음 제조기와 아름다운 색깔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 아주 훌륭하게 봉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로, 물질을 소유하지 않고서도 그 물질을 즐기는 법을 배우라. 물질을 소유한다는 것이 우리의 문화에 있어서 하나의 강박 관념처럼 되었다. 우리는 소유하면 그것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지배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보다 더 큰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생각은 일종의 망상이다.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많은 것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소유하지 않고서도, 혹은 지배하지 않고서도 즐길 수가 있다. 해변의 한 부분을 매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그 해변을 즐기도록 하자. 공중 공원과 공중 도서관을 즐기도록 하자.
여섯째로, 창조물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느끼도록 하자. 땅을 가까이 하자. 가능한 한 많이 걷도록 하자. 새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다. 풀과 잎사귀의 구조를 보고 즐거워하자. 사방에 보이는 다양한 색깔에 경이감을 가지자. 단순성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라는 사실을 다시금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곱째로, "지금 구입하고 나중에 갚는다"는 전략에 대하여 건전한 의심을 가지고 보기 바란다. 그와 같은 전략은 우리를 함정에 빠지게 하고 속박하는 일이 있다.
구약과 신약은 다 함께 고리 대금을 책망하였다. 이식을 부과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비정하게 이용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정신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고리 대금을 예시 생활의 징표로 보시고 그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셨다.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어라"(눅 6:35-현대인의 성경).
성경의 이러한 말씀들은 모든 시대의 모든 문하에 의무가 되는 보편적인 법칙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런 말씀들이 현대 사회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다고 생각해도 안 된다. 성경의 그와 같은 권고의 배후에는 오랜 세월 동안 쌓여 온 지혜가 있다.(그 가운데 어떤 것은 비통한 체험이다). 단순성과 아울러 절약은 확실히 우리가 부채를 지기 전에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는 사항을 필요로 하고 있다.
여덟째로, 명백하고 정직한 말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에 순종하자.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 만약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 데 동의한다면 그대로 행하라. 아첨하는 말이나 반쪽의 진실을 피하기 바란다. 말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고 모호한 말이나 추상적인 공론을 배격하라. 그런 사람들의 목적은 무엇을 명백하게 알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흐리게 하여 이용하려는데 있다.
우리가 명백하고 정직한 말을 하기 어려운 이유는 거룩한 중심을 가지고 살지 않기 때문이며, 하늘의 명령에 응하는 일이 너무나도 드물기 때문이다.
우리의 "에"와 "아니오"를 결정하는 동기는 흔히 하늘의 명령에 순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염려에 있다. 그밖에도 세상에 속한 다른 동기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보다 더 매력적인 기회가 발생한다든지 혹은 보다 더 많은 찬사를 받을 만한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는 신속하게 우리의 결정을 뒤집어 버린다.
그러나 우리의 말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운데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는 "에"를 "아니오"로 뒤집는다든지 혹은 "아니오"를 "에"로 뒤집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때에는 우리의 말이 오직 한 근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의 단순성 속에서 생활하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당신이 만약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한다면 당신에게는 모호한 말이 없어진다.....그리고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단순해진다.....사탄의 모든 궤계와 유혹의 모든 수단으로도 불시에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단순성이다."
아홉째로, 다른 사람에게 억압을 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거부하라. 아마 18세기의 존 울만만큼 이 원리를 온전히 체험함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유명한 일기를 보면, 다른 사람을 억압하지 않는 생활을 하고자 하는 소원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나는 여기에서 전쟁을 자극하는 모든 일이나 전쟁과 연관된 모든 일에서 철저히 떠나 있는지 나 자신을 곰곰이 들여다 보게되었다. 나는 장래의 모든 일에 있어서 끊임없이 진리를 지키고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의 단순성 가운데서 생활하기 위하여 깊은 고민을 하였다.....사치와 탐욕 그리고 수많은 억압들과 이런 것들을 조장하는 죄악들이 나를 심히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이것이 20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직시해야 할 가장 어렵고도 민감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라틴 아메리카 농부들의 희생으로 커피를 마시고 바나나를 먹고 있지 않은가?
제한된 자원을 가진 세계 속에서 재물에 대한 우리의 욕심은 다른 사람들의 궁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이 지루한 일관 작업에 억지로 들어가 만든 상품을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사야 하는가?
우리가 회사에서나 혹은 공장에서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일은 없는가?
우리가 가정에서 자녀들이나 혹은 배우자를 억압하는 일은 없는가?
우리의 억압은 흔히 성차별 또는 인종 차별과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피부의 색깔이 여전히 그 사람의 사회적 입장에 영향을 끼친다. 또한 봉급에 있어서 남녀의 차별은 여전히 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드에게 존 울만과 같은 예언자들을 보내주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떠나도록 하여 억압의 멍에를 부서 버릴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열째로,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하라. 합법적인 것, 특히 좋은 것을 추구하느라고 초점을 잃기가 쉽다. 직장, 지위, 신문, 가족, 친구, 안정, 이모든 것들은 너무도 쉽게 우리의 관심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조지폭스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당신에게는 마을을 당신의 일에 쏟아서 그 일에 당신의 마음이 같혀 있도록
하는 위험과 유혹이 있다. 그렇게 될 때 당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오직 당신의 일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래서 당신
의 마음은 물질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집착하게 된다.....이때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이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당신을 가로막
고 바다와 육지를 통한 공급을 중단하신다면, 그리고 당신의 제물을 취해 가
신다면 그때 방해를 받고 있던 당신으 마음은 하나님의 능력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너무나도 불안하고 초조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이 우리의 첫째 우선 순위가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이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의미를 알도록 하시기 위하여 항상 우리에게 용기와 지혜와 능력을 주길 바라신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단순성의 삶이다. *
프랑수아 페네롱(Francois Fenelon)
단순성은 자유이다. 이중성은 굴레이다. 단순성은 기쁨과 조화를 , 이중성은 불안과 공포를 가져다준다. 전도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니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전 7:29). 하나님께서 단순성을 통하여 주시는 자유를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금 옛 쉐이커(Shaker)의 찬미를 부른다.
단순하게 하는 선물,
자유하게 하는 선물,
그대가 있어야 할 곳으로 내려오는 선물,
우리가 올바른 자리에 있는 것을 볼 때,
그곳은 사랑과 기쁨의 계곡이다.
참 단순성을 가질 때,
엎드리고 구부리기를 부끄러워 않는다.
후퇴, 후퇴는 우리의 기쁨이 된다.
후퇴하고 후퇴하여 결국 완전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단순성 훈련은 내적인 것이지만 외적 생활로 나타난다. 단순성의 훈련은 내적인 것이지만 외적 생활로 나타난다. 단순성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은 모두 중요하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효과가 없는 내적 실재를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도한 단순성의 내적 실재 없이 단순성의 외적 생활 양식을 소유하려는 시도는 율법주의에 이르게 할뿐이다.
단순성은 내적 초점과의 일치에서 시작된다. 단순성은 토마스 켈리가 말한 대로 "거룩한 중심"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저서 마음의 순결은 한 가지에 뜻을 두는 데 있다(Purity of Heart Is Will One Thing)에서 그리스도인의 단순성의 핵심을 간파하였다.
내적 실재를 체험하면 외적으로 자유롭게 된다. 우리의 말은 진실하고 정직하게 되며 지위나 명예에 대한 욕심은 사라지게된다. 왜냐하면 이제는 명예나 지위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허식을 부리는 낭비를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원리를 따라 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재물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다.
리처드 버드가 황무한 북극 지방에서 여러 달 동안을 홀로 지낸 후 쓴 일기에 나타난 체험에 우리들도 동참할 수 있다. "나는 많은 물질이 없어도 인간은 깊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현대 문화에는 단순성의 내적 실재와 외적 생활 양식이 모두 부족하다. 우리는 현대 세계에 살아야 하기에, 현대 세계의 부서지고 파괴된 상태의 영향을 받고 있다. 또 경쟁이라는 미로에 빠져 있다. 현대인은 한 순간 건전한 이성에 기초를 두고 결단을 내렸다가 그 다음 순간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공포심에서 결정을 내린다. 현대인의 삶의 방향은 통일성이나 중심이 없다.
우리에게는 거룩한 중심이 없기 때문에 안전을 위한 우리의 욕구로 인하여 물질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 현대 사회의 풍요에 대한 욕심은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진실과의 연결을 완전히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필요로 하지도 않고 기쁨을 주지도 못하는 물질에 매달린다.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물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기 위해 그것을 산다." 계획에 의한 소모가 사라진 곳에는 심리학적 소모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옷이 낡을 때까지 오래 입는 것과 자동차를 오래도록 사용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대중 매체는 우리들로 하여금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은 진실에서 뒤떨어지는 것이라고 믿도록 만들어 놓았다. 병든 사회를 본받는 것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깰 때이다. 지금 우리의 문화가 얼마나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지를 알기 전에는 우리 속에 있는 물질 숭배의 정신을 해결할 수 없으며 또한 기독교의 단순성도 바랄 수 없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현상은 우리의 신화에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현대의 영웅은 가난한 소년에서 부자가 된 사람이지 부자 소년이 자원하여 가난하게 된 사람은 아니다. 탐욕을 우리는 대망이라고 일컫는다. 축재를 우리는 절약이라고 일컫는다. 지나친 욕심을 우리는 근면이라고 일컫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의 저항 문화도 개선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저항 문화는 소비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생활 양식을 피상적으로 변화시킨 데 불과하다. 저항 문화는 항상 명확한 중심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엽적인 것에 빠지기 마련이다.
기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항 문화의 많은 부분은 병든 옛 사회의 가장 나쁜 모습을 비춰 주는 거울이다. 마약 개방, 성 개방, 자유 낙태 등은 혁명이 아니다.....거짓으로 자유를 표방하는 홱, 가학성 피학성 음란중의 요소들, 불법 인쇄물의 선정적 광고 등은 dpt 질서의 도착의 한 부분이며, 사망의 표현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새로운 삶의 방법을 과감하게 가꾸어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물질을 벌 수 있느냐로 사람은 자격을 정의하는 현대의 비정상적인 현상에 반대해야 한다. 우리는 사망을 가져다주는 현재의 방식을 바꾸기 위하여 과감한 시도를 해야 한다. 단순성의 훈련은 하나의 잃어버린 꿈이 아니라 전 역사를 통하여 되풀이되는 비전이다. 그 단순성은 오늘날도 되찾을 수 있다. 또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
성경과 단순성
단순성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이 어떠한지를 보기 전에, 성경은 경제적인 문제에 대하여 애매하다는 견해부터 일소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재물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각 개인에게 달린 사항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흔히 있다. 재물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각자 해석상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실제적인 경제 문제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보면 그와 같은 견해는 전혀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일이나 재물을 축적하는 일을 명백히 반대하고 있다.
성경은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경제적 가치관에 대해 훈계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구약성경은 사유 재산의 절대권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반대하고 있다-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영구적으로 소유할 수 없고, 회년에 모든 땅을 본래의 소유주에게 되돌려 주도록 되어 있다(레 25:23).
사실상 희년의 목적은 재산을 정규적으로 재분배하는 데 있었다. 그것은 재산 그 자체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경제관은 현대의 거의 모든 신념과 관습에 충돌되는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회년의 규례를 충실히 지켰더라면 빈익빈 부익부라는 그 끊임없는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성경은 재물에 대한 우상 숭배적 집착에서 생기는 노예 정신을 계속적으로 단호하게 배격하고 있다.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시 62:10).
십계명의 열번째 계명은 탐심을 배격한 계명이다. 즉 "소유"를 탐하지 말라는 말이다. 탐심은 도적질과 억압으로 통한다. 잠언저자는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말을 하였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잠 11:28).
에수님께서는 그 당시 물질주의에 대하여 반기를 드셨다. 아람어에서 재물은 "맘몬"(mammon)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맘몬"을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으로 선고하셨다-"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예수님께서는 경제 문제에 대하여 분명하게 자주 말씀하셨다. 그분은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0, 24).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묘사하셨다. 물론 하나님께 있어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에수님께서는 그 어려움이 어떠하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고 계셨고 재물이 사람을 어떻게 붙잡는지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는 것을 아셨으므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명령하셨다(마 6:21,19).
에수님께서는 보물 있는 곳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든지 혹은 두지 말아야 한다든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는 명확한 사실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한 부자 청년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원한다면 그의 소유물을 떠나겠다는 내적 자세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의 소유를 나눠주라고 권고하셨다(마 19:16-22). 예수님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그리고 하나님을 찾아 나아온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셨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눅 12:33). 예수님은 축적하는 데 전념하는 한 부자 농부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 부자농부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다(눅 12:16-21).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우리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은 하늘 나라를 얻기 위하여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기꺼이 팔아야 한다(마 13:45-46).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재물에 대한 근심에서 떠난 기쁨의 삶에 초청하였다.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눅 6:30).
예수님은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 그 어떤 사항보다도 경제 문제를 많이 말씀하셨다. 비교적 단순한 사회에서 우리 주님이 재물에 대한 영적 위험을 그렇게 강조하셨다면, 오늘날 풍요로운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경제적인 문제를 얼마나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겠는가.
신약의 서신서들 속에도 역시 같은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감독은 ".....돈을 사랑치 아니하여"(딘전 3:3)야 하고, 집사는 "더러운 이를 탐하지"(딤전 3:8) 않아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릐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야고보는 소유하려는 정욕으로 살인하고 싸우는 것을 지적하였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 도다"(약 4:2).
바울은 탐심을 우상 숭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누구든지 탐심의 죄를 범하는 자에게는 엄격한 징계를 하라고 고린도 교회에 명령하였다(엡 5:5;고전 5:11). 바울은 탐심을 음행과 도둑질과 나란히 열거하고, 그 가운데서 생활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선언하였다. 또 그는 부요한 자들에게,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나눠주라고 권면하였다(딤전 6:17-19).
이 모든 말을 하였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가 충분한 물질적 준비를 하는 것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서둘러 말해야 되겠다. 준비를 근거로 생활하려고 할 때 불행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준비가 부족할 때도 불행이 있다. 인위적인 가난은 악이며 배격되어야 한다. 성경은 금욕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성경은 일관되게 그리고 힘있게 창조된 것을 좋다고 하며 그것을 즐기라고 선언하고 있다.
금욕주의는 정신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를 갈라놓고 정신적 세계는 선한 것이고 물질적 세계는 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물질적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으로 구원을 찾고자 한다.
금욕주의와 단순성은 서로 배치된다. 실제 행위에 있어서 그 둘은 얼핏 보기에 서로 유사한 것같이 보일 때가 이따금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 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흐리게 해서는 안된다.
금욕주의는 소유를 포기한다. 그러나 단순성은 소유물을 올바른 시각에서 본다. 금욕주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여지가 없지만 단순성은 하나님의 손에 의한 그 은혜로운 공급을 기뻐할 수 있다. 금욕주의는 비천에 처할 때에만 만족을 얻을 수 있으나 단순성은 비천에 처할 때나 풍부에 처할 때나 만족할 줄 안다(빌 4:12).
단순성은 우리의 삶을 충분히 바로잡으므로 우리들은 소유물에 의하여 파멸 당하는 일없이 소유물을 진실로 즐길 수 있게 된다. 단순성이 없으면 우리는 이 악한 시대의 "맘몬" 정신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기독교 정신에 배치되는 금욕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둘은 모두 우상 숭배로 통한다. 그 둘은 모두 영적으로 죽음을 자져다 준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풍부한 물질적 공급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타나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신 8:7-9). 또한 성경에는 올바른 시각이 유지되지 않을 때, 재물의 위험에 대한 경고가 많이 나타나 있다.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신 8:17).
"단순성의 훈련"은 우리들에게 올바른 시각을 제공해 준다. 단순성은 우리들을 자유케 하므로 하나님의 예비하신 공급을 받되 우리 자신의 축적을 위한 선물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선물로서 받게 한다. 성경이 물질주의자와 금욕주의자를 둘 다 동등하게 배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할 때, 우리는 단순성을 이해하는 데 주의를 돌릴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설 자리
아르키메데스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나에게 설자리를 달라. 그리하면 내가 이 땅을 움직이겠다." 모든 훈련에 있어서 이러한 초점이 중요하지만 특히 "단순성의 훈련"에 있어서 그러하다. 모든 훈련 가운데서 단순성의 훈련이 가장 눈에 띄는 것이므로 변질되기도 가장 쉽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단순성에 대한 예수님의 많은 말씀을 무시하고,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다하. 즉 이 단순성의 훈련은 오늘날 융요한 생활에 대한 우리의 관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성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오늘날 풍요한 생활에 대한 우리의 관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성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율볍주의의 심한 유혹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경제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 철저하게 실현하려는 시도를 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실현을 가지고 예수님의 교훈의 실현으로 오인하기가 대단히 쉽다.
우리는 이런 의복을 착용하고 또한 저런 집을 구입하고 그리고 우리 자신의 선택을 단순한 생활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위험을 볼 때, 단순성을 위한 아르키메데스적 초점을 발견하고 규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에수님의 말씀 속에서 그러한 초점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 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 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 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 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 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 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 게 더하시리라(마 6:25-33).
단순성의 훈련의 중심점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데 있다. 그렇게 하면 그밖에 필요한 모든 것이 올바른 순서에 오게 된다. 이 점에 대한 예수님의 통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먼저 할 일을 먼저 하는데 달려 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나라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 단순한 생활 양식에 대한 욕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순성은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일보다 앞설 때 우상 숭배가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데 있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 하여 적절한 직업을 구해야 할까?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 면 나는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해야 한다고 선포해야 할까?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 있어서 내가 해야 할 일 은 아무것도 없다. 분명히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일도 하지 말고 고요히 있기를 배 워야 한다. 그 고요함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의 시초이다.
그 나라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내적 진실을 낳는다. 그 내적 진실이 없으면 우리는 율법주의에 떨어진다. 그 나라에 초점을 맞추는 일 이외의 그 무엇도 중심이 될 수 없다. 치열한 경쟁심에서 벗어나야 되겠다는 욕구나 세상의 재물을 재분배하는 일이나 생태계에 대한 관심이 중심이 될 수 없다.
단순성의 훈련에 있어서 중심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다.
그밖에 다른 모든 것들도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노력의 초점이 되는 순간 그것들은 우상이 된다. 그것들에 초점을 두는 일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의 어떤 특정 활동이 기독교의 단순성이라고 선언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진실로 첫째 자리에 있을 때, 생태계에 대한 관심이나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일이나 재물의 공정한 분배나 그밖에도 다른 많은 일들이 올바른 배려를 받게 된다. 그 나라를 먼저 구하지 않는 사람은 그밖에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상숭배밖에 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그 중요한 말씀에서 명백히 해 두신 바와 같이, 근심으로부터의 자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했다는 내적 증거가운데 하나이다. 단순성의 내적 실재는 소유물에 대한 근심을 떠난 기쁨의 생활과 연결된다.
탐심을 가진 사람이나 인색한 사람은 그 자유를 알지 못한다. 그 자유는 소유물의 풍족함이나 혹은 소유물의 부족함과 관계가 없는 내적 신뢰의 정신이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살아간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이 단순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런데 흔히 보면 돈을 가장 적게 가진 사람이 돈을 가장 많이 사랑한다. 어떤 사람은 단순성의 외적 생활 양식을 나타내면서 속에는 근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재물이 근심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은 또한 아니다. "부는 근심을 쫓고 안전을 가져다 줄 것처럼 양의 옷을 입고 와서는 근심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부가 사람에게서 근심을 쫓고 안전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마치 양을 늑대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늑대를 양에게 들여보내는 것과 같다."
근심으로부터의 자유는 다음 세 가지의 내적 자세로 특징 지어진다. 첫째,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을 선물로 받았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둘째, 우리의 소유물은 하나님께서 돌보셔야 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셋째, 우리의 소유물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해야 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세 가지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근심으로부터 자유롭게된다. 이것이 단순성의 내적 실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에 우리의 소유물을 우리 자신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의 소유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면 근심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단순한 삶을 살기 위하여 그들이 어떠한 외적 모습을 보인다 하더라도 단순성에 대해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소유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자세가 단순성의 첫번째 내적 자세이다. 우리가 일을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을 소유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은혜로 살아가고 있으며 일용할 양식까지도 은헤로 받는다.
우리는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단순한 요소들까지도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 물과 공기와 태양이 그런 것이다. 우리의 소유물은 우리의 노동의 결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돌보심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소유물을 우리 개인의 노력으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유혹을 받는다면, 가뭄이나 혹은 어떤 재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모든 것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은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소유를 돌보는 일이 우리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단순성의 두번째 내적 자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유를 보호하실 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문의 자물쇠가 집을 전적으로 보호하는 것은 아니다. 예방책을 간구한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그러나 그 예방책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재산을 보호해 준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예방책이 도둑을 전적으로 방지하는 보증은 되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우리의 소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명예나 혹은 우리의 직장 같은 사항들도 포함된다. 단순성은 그 모든 사항들에 대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유를 의미한다.
우리의 재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하는 것이 단순성의 세번째 내적 자세이다. 우리의 재물이 공동체를 유용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둑질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
이 말이 난처하게 들리는 것은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우리는 내일에 대한 걱정을 하기 때문에 재물을 나누어주지 않고 재물에 매달린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내일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하신 창조주로 알고 있다면,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알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재물을 나누어 줄 수 있다. 이때에 우리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을 자발적으로 도와준다. 이리하여 우리는 어리석은 자리에 있지 않게 된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때,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자세가 우리 삶의 특성이 된다. 그 세 가지 자세가 합쳐져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그 세 가지 자세는 그리스도인의 단순성의 내적 실재를 이룬다. 우리가 이렇게 따라 살 때, 적절한 생활에 필요한 "이 모든 것"(마 6:33)이 우리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단순성의 외적 표출
단순성을 내적 실재로만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내적 실제는 외적 표출이 있기 전에는 진실한 것이 아니다. 단순성의 자유케 하는 영을 체험하면 우리의 생활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앞에서도 경고한 바와 같이, 특정 사항을 단순성에 적응하는 일에는 율법주의에 빠질 위험이 따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위험은 극복해야 할 위험이다. 왜냐하면 외적 특정 사항을 논의하기를 거부하는 일은, 단순성의 훈련을 이론적인 공론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성경의 저자들도 역시 그와 같은 위험을 계속적으로 감당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단순성의 외적 표출을 위한 주요 원리 10가지를 열거하고자 한다. 이 원리는 율법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단순성의 의미를 현대 생활에 구체화시키려는 하나의 시도로 생각해야 한다.
첫째로, 물품은 체면이 아니라 유용성을 보고 사도록 하라. 자동차를 살 때는 위광이 아니라 유용성을 보고 사도록 하라. 자전거를 타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집을 짓거나 혹은 매입할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줄까 하는 것을 생각하기보다 살기에 알맞은 점을 생각하라. 불필요하게 큰집을 갖지 않도록 하라.
의복을 생각해 보자. 옷을 더 구입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실제로 옷이 더 필요해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유행에 따르기 위해 구입한다. 유행을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실제로 필요한 옷만을 구입하고 충분히 오래 입도록 하라. 의복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고 하지 말고 생활로 영향을 주도록 하라. 가능하다면 옷을 만드는 기쁨을 터득하기 바란다. 장식적인 옷을 입기보다는 실용적인 옷을 입도록 하라.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의복에 관하여 나는 가장 질긴 것과 아주 수수한 것을 구입하며 가구를 구입하는 경우에는 꼭 필요하고 가격이 싼 것을 구입한다."
둘째로, 중독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배격하라. 쾌적한 환경과 같은 심리적 필요와 중독을 구별하기 바란다.
알콜, 커피, 차, 콜라 등 중독성이 잇고 영양가 없는 음료의 사용을 금하거나 혹은 줄이도록 하라. 만약 당신이 텔레비전에 중독 되었다면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없애도록 하라. 어떠한 매체이든 당신이 그것 없이는 지낼 수 없다고 느낀다면 그것을 제거해 버리기 바란다.
라디오, 스테레오, 잡지, 비디오, 신문, 책 등과 같은 것 말이다. 만약 돈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면, 얼마쯤은 버리고라도 내적 평안을 느끼도록 하라. 단순성은 자유이지 굴레가 아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그 무엇에도 사로잡히기를 거부하라.
중독은 본질적으로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중독에 빠졌다면 의지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그냥 벗어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이 부분의 삶을 개방하여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와 치유하시는 능력이 임하시게 할 수 있다. 당신은 또한 하나님의 개입에 조용히 의지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중독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아주 간단하다. 훈련되지 못한 강박 행동을 보면 된다. 한 친구는 어느 날 아침 신문을 가지러 나갔다가 신문이 없었던 때의 경험을 내게 이야기했다. 그는 당황했다. 신문을 읽지 않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웃집 마당에 신문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꺼내 올 궁리를 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중독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급히 집안으로 들어가 보급소에 전화를 걸어 신문 구독을 취소했다. 보급소 직원은 그의 말을 다 들은 후 이렇게 물었다. "왜 신문 구독을 취소하십니까?" 그 친구는 통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중독 되었기 때문이오." 그러자 보급소 직원도지지 않고 되받았다. "그러면 구독을 다 취소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일요판은 계속 받아 보시겠습니까?" "아니오. 다 취소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신문 구독을 취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친구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셋째로, 물질을 나누어주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라. 만약 당신이 어떤 소유물에 집착하게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면 그 소유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줄 것을 고려하라.
나는 어떤 사람을 위하여 크리스마스에 물품을 사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던 상당히 소중한 물품을 주기로 결심한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의 동기는 나 자산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그 물품 없이 지내는 단순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오는 자유가 어떠한지를 스스로 알기 원했었다. 그 선물은 자전거였다. 내가 선물을 전달하러 그의 집으로 갈 때 불렀던 다음 찬양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어라."
여섯 살 난 아들이 도시락이 없는 급우에 대한 말을 듣고 나에게 자기의 도시락을 그에게 주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할렐루야!
쌓아 두지 말기 바란다. 필요 없는 물품을 쌓아 두는 일은 생활을 복잡하게 만든다. 그렇게 쌓아 둔 물품은 정돈해야 하고 먼지를 털어야 하며 되풀이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들 가운데는 소유의 절반 정도가 없어도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
"단순하게 하라, 단순하게 하라"고 한소로(Thoreau)의 권면을 따르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넷째로, 현대 가전기구 업자들의 선전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라. 시간을 절약한다는 기기들은 거의 시간을 절약하지 못한다. "6개월 안에 제 값을 찾는다"는 말에 조심하기 바란다. 대부분의 전기 제품은 고장이 잘 나고 오래 가지 않아 못쓰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을 향상시키기보다는 복잡하게 만든다.
이런 점은 특히 어린이들 장난감에 있어서 큰 문제이다. 우리 어린이들은 기게 장치에 의하여 작동하는 인형을 가지고 놀아야 할 필요가 없다. 어린이들은 헝겊 조각으로 만든 인형을 가지고도 더 즐겁게 놀 수 있다.
도 헝겊 조각으로 만든 인형이 더 오래 간다. 흔히 어린이들은 최신 장난감보다 오래된 취사 도구 같은 것을 가지고 더 즐겁게 논다. 교육적이고 오래 견디는 장난감을 택하기 바란다. 어떤 것은 당신 자신이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대체로 가전 기구는 세계의 에너지 자원을 불필요하게 낭비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 인구의 6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데 세게 에너지의 33퍼센트 가량을 소비하고 있다 미국의 냉방 기구에 사용되는 에너지의 양이 중국 전체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과 같다. 환경에 대한 책임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오늘날 생산되는 가전 기구의 대다수를 피해야 한다.
광고하는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이것은 최신형이고 혹은 저것은 새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의 제품은 팔고 새 제품을 사야 한다고 말한다. 재봉틀의 경우는 바느질이 새롭고, 녹음기의 경우는 누름 단추가 새로우며, 백과 사전의 경우는 색인이 새롭다고 한다.
이러한 매체의 주장은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흔히"새로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불필요한 것을 구입하도록 유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냉장고가 자동 얼음 제조기와 아름다운 색깔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 아주 훌륭하게 봉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로, 물질을 소유하지 않고서도 그 물질을 즐기는 법을 배우라. 물질을 소유한다는 것이 우리의 문화에 있어서 하나의 강박 관념처럼 되었다. 우리는 소유하면 그것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지배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보다 더 큰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생각은 일종의 망상이다.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많은 것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소유하지 않고서도, 혹은 지배하지 않고서도 즐길 수가 있다. 해변의 한 부분을 매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그 해변을 즐기도록 하자. 공중 공원과 공중 도서관을 즐기도록 하자.
여섯째로, 창조물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느끼도록 하자. 땅을 가까이 하자. 가능한 한 많이 걷도록 하자. 새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다. 풀과 잎사귀의 구조를 보고 즐거워하자. 사방에 보이는 다양한 색깔에 경이감을 가지자. 단순성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라는 사실을 다시금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곱째로, "지금 구입하고 나중에 갚는다"는 전략에 대하여 건전한 의심을 가지고 보기 바란다. 그와 같은 전략은 우리를 함정에 빠지게 하고 속박하는 일이 있다.
구약과 신약은 다 함께 고리 대금을 책망하였다. 이식을 부과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비정하게 이용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정신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고리 대금을 예시 생활의 징표로 보시고 그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셨다.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어라"(눅 6:35-현대인의 성경).
성경의 이러한 말씀들은 모든 시대의 모든 문하에 의무가 되는 보편적인 법칙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런 말씀들이 현대 사회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다고 생각해도 안 된다. 성경의 그와 같은 권고의 배후에는 오랜 세월 동안 쌓여 온 지혜가 있다.(그 가운데 어떤 것은 비통한 체험이다). 단순성과 아울러 절약은 확실히 우리가 부채를 지기 전에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는 사항을 필요로 하고 있다.
여덟째로, 명백하고 정직한 말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에 순종하자.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 만약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 데 동의한다면 그대로 행하라. 아첨하는 말이나 반쪽의 진실을 피하기 바란다. 말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고 모호한 말이나 추상적인 공론을 배격하라. 그런 사람들의 목적은 무엇을 명백하게 알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흐리게 하여 이용하려는데 있다.
우리가 명백하고 정직한 말을 하기 어려운 이유는 거룩한 중심을 가지고 살지 않기 때문이며, 하늘의 명령에 응하는 일이 너무나도 드물기 때문이다.
우리의 "에"와 "아니오"를 결정하는 동기는 흔히 하늘의 명령에 순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염려에 있다. 그밖에도 세상에 속한 다른 동기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보다 더 매력적인 기회가 발생한다든지 혹은 보다 더 많은 찬사를 받을 만한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는 신속하게 우리의 결정을 뒤집어 버린다.
그러나 우리의 말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운데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는 "에"를 "아니오"로 뒤집는다든지 혹은 "아니오"를 "에"로 뒤집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때에는 우리의 말이 오직 한 근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의 단순성 속에서 생활하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당신이 만약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한다면 당신에게는 모호한 말이 없어진다.....그리고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단순해진다.....사탄의 모든 궤계와 유혹의 모든 수단으로도 불시에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단순성이다."
아홉째로, 다른 사람에게 억압을 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거부하라. 아마 18세기의 존 울만만큼 이 원리를 온전히 체험함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유명한 일기를 보면, 다른 사람을 억압하지 않는 생활을 하고자 하는 소원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나는 여기에서 전쟁을 자극하는 모든 일이나 전쟁과 연관된 모든 일에서 철저히 떠나 있는지 나 자신을 곰곰이 들여다 보게되었다. 나는 장래의 모든 일에 있어서 끊임없이 진리를 지키고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의 단순성 가운데서 생활하기 위하여 깊은 고민을 하였다.....사치와 탐욕 그리고 수많은 억압들과 이런 것들을 조장하는 죄악들이 나를 심히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이것이 20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직시해야 할 가장 어렵고도 민감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라틴 아메리카 농부들의 희생으로 커피를 마시고 바나나를 먹고 있지 않은가?
제한된 자원을 가진 세계 속에서 재물에 대한 우리의 욕심은 다른 사람들의 궁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이 지루한 일관 작업에 억지로 들어가 만든 상품을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사야 하는가?
우리가 회사에서나 혹은 공장에서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일은 없는가?
우리가 가정에서 자녀들이나 혹은 배우자를 억압하는 일은 없는가?
우리의 억압은 흔히 성차별 또는 인종 차별과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피부의 색깔이 여전히 그 사람의 사회적 입장에 영향을 끼친다. 또한 봉급에 있어서 남녀의 차별은 여전히 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드에게 존 울만과 같은 예언자들을 보내주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떠나도록 하여 억압의 멍에를 부서 버릴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열째로,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하라. 합법적인 것, 특히 좋은 것을 추구하느라고 초점을 잃기가 쉽다. 직장, 지위, 신문, 가족, 친구, 안정, 이모든 것들은 너무도 쉽게 우리의 관심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조지폭스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당신에게는 마을을 당신의 일에 쏟아서 그 일에 당신의 마음이 같혀 있도록
하는 위험과 유혹이 있다. 그렇게 될 때 당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오직 당신의 일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래서 당신
의 마음은 물질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집착하게 된다.....이때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이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당신을 가로막
고 바다와 육지를 통한 공급을 중단하신다면, 그리고 당신의 제물을 취해 가
신다면 그때 방해를 받고 있던 당신으 마음은 하나님의 능력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너무나도 불안하고 초조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이 우리의 첫째 우선 순위가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이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의미를 알도록 하시기 위하여 항상 우리에게 용기와 지혜와 능력을 주길 바라신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단순성의 삶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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