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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복종의 훈련

수도관상피정 마틴 루터............... 조회 수 2984 추천 수 0 2008.08.28 22: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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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그리스도인은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가장 자유로운 주인인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 종이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모든 영적 훈련 가운데서 "복종의 훈련"만큼 오용되고 있는 훈련도 없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인간은 가장 좋은 교훈을 가장 나쁜 결과로 바꾸어 놓는 교묘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종교에 대한 그릇된 생각만큼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도 없다. 종교에 있어서 복종에 대한 그릇된 교훈만큼 인간을 파괴하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스러운 마음과 분별력을 가지고 복종의 훈련을 대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의 사역자가 아니라 생명의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훈련은 그것에 상응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내가 만약 웅변술을 공부하고 연마하였다면 필요한 경우에 감동적인 연설을 하는 데 자유롭게 될 것이다.
  데모스테네스(Demostenes)가 웅변가로서 말을 하는 네 자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가 그렇게도 철저하게 웅변 훈련을 하였기 때문이다. 훈련의 목적은 자유에 있다. 우리의 목표는 훈련 그 자체가 아니라 자유이다. 우리가 훈련을 목표로 삼는 그 순간 우리는 훈련을 율법으로 바꾸어 놓게 되며 그 훈련에 상응하는 자유를 잃게 된다.
  "훈련"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훈련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있도록 하는 수단이어야 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자유가 목표이고 훈련은 그 수단에 불과하다. 훈련이 해답이 아니다. 훈련은 다만 우리들로 하여금 해답에 이르도록 해줄 뿐이다.
  우리가 노예의 처지를 피하려면 훈련의 한계를 명백하게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이 한계성을 명백히 알아야 할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거듭거듭 강조해야 한다. 왜냐하면 "훈련" 그 자체를 목표로 삼으려는 유혹은 너무나도 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께 목표를 두고,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마음에 보다 더 가까이 이르도록 이끌어 주는 하나의 방법으로 "영적 훈련"을 보아야 한다.

  복종에 있어서의 자유

  모든 훈련이 그에 상응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앞에서 하였다. 그렇다면 복종의 훈련에 상응하는 자유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항상 일에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하다고 생각하는 무거운 짐을 버릴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오늘날 인간 사외의 가장 큰 속박 가운데 하나이다. 어떤 작은 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여러 주간을 혹은 여러 달을 혹은 여러 해를 속태우면서 보낸다. 그들은 사소한 일에 소란을 부리며 화를 내며 작은 일을 가지고 격분한다. 그들은 마치 그 작은 문제에 자신들의 생명이 달려 있기나 한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 문제 때문에 그들이 궤양에 걸리기도 한다.
  복종의 훈련을 통하여 우리는 그런 문제에서 떠날 수 있는 자유와 잊어버릴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삶의 대부분의 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이런 일 혹은 저런 일이 발생하였다고 하여 우리의 삶이 끝장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거의 모든 교회는 이러한 작은 문제들을 가지고 교인들이 서로 양보하는 자유가 없기 때문에 반목하고 분열한다. 우리는 흔히 그 문제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혹은 우리가 신성한 원칙을 위해 싸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경우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양보를 하면 그 일을 우리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그 단순한 이유 때문에 양보하는 아량을 흔히 베풀지 못한다. 오직 복종의 훈련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그와 같은 옹졸한 정신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다. 오직 복종의 정신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충분한 자유를 가질 수 잇게 하므로 진정한 쟁점과 완강한 가지 고집 사이의 구분을 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인생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게 중대한 쟁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런 인생의 대부분의 일들을 가볍게 생각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그런 대부분의 일들이 중대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나는 아무 걱정도 안한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때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내가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고요함의 훈련"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복종에 관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언어나 행동을 초월하는 포괄적인 은혜의 정신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 정신을 가질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복종에 관한 성경의 교훈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보는 자세에 일차적으로 초점을 두고 있다. 성경은 상하 관계를 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존속 관계의 내적 자세를 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그 당시의 사환들(종들)을 향하여 주인에게 복종하는 생활을 할 것을 요청한 것을 볼 수 있다(벧전 2:18). 우리가 순종하는 종의 정신의 삶 없이도 주인에게 복종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베드로의 그와 같은 권면이 왜 필요했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외면적으로는 사람들의 요청 사항을 이행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그들에게 반역하는 일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그 정신에 대한 사항이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나타나 있다. 구약성경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타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쟁점이 살인에 대한 내적 정신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정신에 말이다.
  종으로서 복종하는 일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쟁점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정신에 있다.
  진정한 종의 정신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꿈과 계획이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이 된다. 우리는 새롭고도 영광스러운 자유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자유에 말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무조건으로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에 대해 보상받기를 포기한다.
  이제는 우리가 반드시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보고 이제 기뻐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의 실패를 보고 진정으로 슬퍼할 수도 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우리 자신의 계획의 실패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들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보다 우리의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얻는 자유를 알고 있는가? 그 자유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원한에서 당신이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당신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경우에 당신이 느끼는 분노와 원한에서 말이다.
  이 말은 결국 당신이 다음과 같은 상거래의 법칙을 깨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나의 등을 긁어 주면 나도 당신의 등을 긁어 주겠다. 당신이 나의 코에 피가 나도록 하면 나도 당신의 코에 피가 나도록 하겠다."
  그러니까 그 자유는 예수님의 다음가 같은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그 자유는 우리가 보복의 권리를 포기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처음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 5:39).

  시금석

  여러분들이 알아차렸겠지만 지금까지 복종 문제를 순서를 바꾸어 이야기했다. 나는 종종 정의보다 우리에게 주는 유익을 먼저 생각한다. 그렇게 한 데에는 하나의 목적이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복종 정신의 한쪽 측면만을 보는 경향이 있다. 즉 그 한쪽 측면만의 결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종의 훈련"전체를 배격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전자의 경우를 따를 때 우리는 자기 증오에 이르게 되고 후자의 경우를 따를 때 우리는 교만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딜레마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제3의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복종의 성경적 이해를 위해 시금석이 되는 말씀은 마가복음 8:34에 나타나 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거의 본능적으로 우리는 이 말씀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자기 부인"이라는 말보다는 자기 성취 또는 자기 실현이라는 말을 훨씬 더 즐겨하는 경향이 있다(사실 자기 부인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은 자기 성취와 자기 실현을 진정으로 가져다주는 유일한 길이 된다). 우리는 자기 부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온갖 비굴함과 자기 증오를 마음속에 그리게 된다. 우리는 자기 부인에 대하여 우리의 개성을 배격하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각종 형태의 금욕주의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상상한다.

  그와는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기 증오가 없는 자기 부인을 요청하셨다. 자기 부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길이다. 우리의 행복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데 달려 있지 않다.
  자기 부인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체성이 없이는 상호간의 복종도 불가능해진다. 예수님께서 골고다를 향하셨을 때 그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셨던가?
  "나를 따르라"(요 21:19)는 예수님의 명령에 베드로가 응답하던 때 베드로는 그의 정체성을 상실하였던가?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에게 자신을 맡기던 때 그 자신이 정체성을 상실하였던가?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고난을)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6). 물론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았다.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자기 부인을 하는 행위를 통하여 정체를 발견하였다.

  자기 부인은 자기 멸시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자기 멸시는 우리가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비록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그 가치를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기 부인은 우리가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고 그 가치를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자기 멸시는 창조의 선함을 부정하고 자기 부인은 창조의 선함을 확증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된다는 것을 시사하셨다(마 22;39). 자기 사랑과 자기 부인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셨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우리는 자기 부인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우위에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은 우리들로 하여금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한다. 우리가 자기부인을 떠날 때 우리는 일이 우리의 욕심대로 되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이 우리의 욕심대로 되지 않으면 자기 연민에 빠진다.
  겉으로는 우리가 복종하지만 괴로운 마음으로 하게 된다. 자기 연민을 하고 괴로워하는 그 마음은 복종의 훈련이 약해졌다는 표시이다. 자기 부인이 복종의 훈련의 기초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 부인은 우리를 자기 연민에서 구출해 준다.
  현대인들은 자기 부인이라는 말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신앙적 인물들의 말을 알아듣기가 심히 어렵다. 우리는 토마스 아켐피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알아듣기다 어렵다.
  "우리 자신의 의견은 갖지 않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좋게 그리고 높게 생각하는 것이 훌륭한 지혜이며 온전함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애를 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자기 성취의 길을 자기 부인을 통하는 데 있다는 예수님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구원을 얻는다(막 8:35). 조지 마티슨(George Matheson)은 자기 부인을 통한 성취라는 이 놀라운 역설을 찬송가로 만들었다.

    주님, 나를 사로잡아 주시옵소서,
    그때 내가 자유케 됩니다.
    나의 검을 넘겨 드리게 하옵소서,
    그때 나는 승리자가 됩니다.
    내가 나 자신의 힘으로 설 때,
    나는 인생의 위기에 처합니다.
    주님의 팔 안에 나를 가두어 주시옵소서,
    그때 나의 손이 튼튼해 집니다.

  이제는 자기 부인을 자유의 길로 볼 수 있을 줄로 안다. 여기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자기 부인이 본장에서 다루는 "복종의 훈련"의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혁명적인 종속 관계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회적 교훈 가운데 혁명적인 종속 관계는 "위대함"에 대한 현대인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지도력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데 있고 힘은 복종에 있다. 이 철저한 종의 도의 으뜸가는 상징은 십자가이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생명으로 삶을 사셨다.
  십자가의 길, 즉 고난받는 종의 길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종이 되는 그 종의 정신을 통하여 십자가의 생명의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종이셨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써 지위와 세력에 대한 당시 문화의 고정 관념을 배격하셨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마 23:8-10).
  예수님은 십자가의 생명의 삶을 사심으로써 그 당시의 관습을 타파하셨다. 그래서 여자들을 진지하게 대하셨고 어린이들을 기꺼이 만나셨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십자가의 생명의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천군 천사들을 불러 내려서 자신을 돕도록 할 수 있는 분이셨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고 갈보리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다. 예수님의 생애는 종으로 봉사하는 십자가의 생명이 삶이었고 그분의 죽음은 고난을 통해 승리한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이러한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의 혁명적인 특성은 아무리 역설하여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에수님의 생애와 교훈은 특권을 가진 지위와 신분에 대한 모든 주장을 배격하였고, 전적으로 새로운 지도력의 질서를 발생시켰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생명의 삶은 세력과 자기 이익에 기초를 둔 모든 사회 질서를 파헤쳤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십자가의 생명의 삶을 살라고 요청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십자가의 생명의 삶의 원리를 불멸의 원리로 만드셨을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추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십자가의 생명의 삶은 자원하여 종이 되는 삶이다.

  서신서에 있는 혁명적인 종속 관계

  예수님의 모범이, 그리고 모든 인간 관계에 있어서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는 요청이 종의 도에 관한 각 서신의 교훈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사도 바울은 종의 정신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하였고, 이 정신,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자기 부인을 교회에 철저히 가르쳐 주고자 하였다. "그는.....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빌 2:4-7).
  사도 베드로는 종의 정신에 관한 교훈을 하는 가운데 종의 정신의 근거로서 예수님의 모범을 제시하였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름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1-23).
  에베소서에 있는 "가정 계율"의 서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의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요청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생명의 삶에 근거를 두고 있다.
  복종의 훈련은 이 광범위한 전후 관계를 이해하자 못함으로 말미암아 크게 오용되고 있다. 종의 정신은 신약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윤리적 주제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부과된 의무이다. 남자든 여자든, 부모든 자녀든, 주인이든 하인이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말이다.
  우리가 어떤 특별한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섬기는 종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 부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마음의 자세이다. 모든 가정계율에 있어서 종의 정신이 그 기초가 되는 이유는 예수님의 모범에 있다.
  복종에 대한 이 유일한 원리를 1세기의 다른 문헌들과 비교해볼 때 서로 어긋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문헌들 속에는 어떤 사람의 신분 때문에 복종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 가운데서 이런 의미로 복종을 호소하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신약성경의 교훈은 혁명적인 것이다. 그들은 상위의 사람과 하위의 사람에 대한 각 시대의 관습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고 요청하였다.

  서신들을 보면, 기존 문화를 이미 종속 관계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종속을 요구하고 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골 3:18-22). 이 교훈을 통하여 나타난 혁명적인 사실은, 1세기 문화에 있어서 전혀 선택의 여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아내들과 자녀들과 종들이 도덕적 자유 행위자로 언급되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그 당시의 문화에 있어서 법적 혹은 도덕적 신분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도덕적 책임을 부여하였다. 바울은 결정권 행사가 금지되어 있었던 사람들을 결정권 행사자로 만들었다.
  1세기의 문화적 환경에서 그들은 지위 면에서 볼 때 이미 종속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와 같은 명령을 한 유일한 이유는 복음의 메시지에 의하여 그들이 사회의 종속적 신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복음은 모든 이등 시민에게 도전하였고 그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이 자발적인 종속 관계를 촉구한 것은 그들의 신분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 그 자발적 종속 관계를 촉구한 것은 그들의 신분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 그 자발적 종속 관계가 "주 안에서 마땅한 것"(골 3:18)이라는 데 기초를 둔 것이다.
  그 당시 문화에서 종속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도덕적 교훈을 한 특징은 그 당시의 다른 문헌의 특징과는 근본적으로 대조가 되었다. 예를 들면, 스토아 학파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들의 높은 지위에서 훌륭한 임무를 수행할 것을 권면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먼저 그 당시의 문화가 도외시한 사람들에게 에수님의 십자가의 생명의 삶을 살 것을 요청하였다.

  그 다음으로 서신들은, 그 당시의 문화에 있어서 지배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돌리고 그들에게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생명의 삶을 살 것을 요청하였다. 그들을 향한 종속 관계의 명령은 상호적인 것이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마지니.....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골 3:19-4:1).
  지배적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한 이 명령의 말씀들이 강경한 어조로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당시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는 이 명령의 말씀이 그들에게 대단히 강경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1세기에 있어서 남편과 아비와 상전이 바울의 이 명령에 순종한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세기에 있어서 아내와 자녀와 종은 바울의 이 명령을 따르는 데 별로 변화를 시켜야 할 것이 없었다. 바울의 그 교훈이 일침을 가한 것은 지배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 쪽이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남편들과 아비들과 상전들을 향한 그 명령은 자기 부인의 또 다른 형태라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명령은 동일한 진리를 전달하는 또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 즉 우리가 일을 우리의 욕심대로만 해야겠다는 그런 생각에서 놓여 나와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어떤 남편이 그의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내의 요구를 참작하여 생활을 할 것이다. 남편은 아내에게 기꺼이 양보하며, 또 아내에게 기꺼이 봉사한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자신보다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자유를 가지게 된다. 또 아버지는 자녀들의 요구를 경청할 수 있고, 자신보다 자녀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게 된다(빌 2:3).
  예베소서에서 바울은 종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상전을 섬기는 생활을 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상전들에게는,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라"(엡 6:9)고 권고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1세기 사람들의 귀에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 당시 종들은 인간으로 생각된 것이 아니라 가재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거룩한 권위를 가지고 상전들에게 종들의 요구에 봉사하라고 권고하였다.
  혁명적인 종속 관계에 대한 가장 적절할 실례는 바울의 작은 서신 빌레몬서에 나타나 있다. 빌레몬에게서 도망쳤던 종 오네시모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오네시모는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증거로서 자원하여 빌레몬에게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이때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몬 16절) 맞이하라고 촉구하였다. 존 요더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한 그 지시는 강제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한 그리스도인 형제를 위한 적합한 지시였다.....오네시모가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는 지시인 것이다."
  오네시모는 다시 돌아감으로써 빌레몬과 종속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오네시모와 종속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둘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종속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피차 복종하는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엡 5:21).
  서신서 들은 계급적인 기존 사회 구조를 신성시하지 않았다. 서신서 들은 계급적인 기존 사회 구조를 신성시하지 않았다. 서신서 들은 모든 사람이 서로 종속 관계에 있다는 명령을 함으로써 계급 관념을 타파하였다. 서신서 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 질서의 시민으로 생활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새 질서의 근본적인 특징은 모든 사람이 서로 종속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복종의 한계

복종 훈련의 한계는 그 행위가 파괴적으로 되는 지점에 있다. 종의 행위가 파괴적인 지점에 이르게 되면, 그 행위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법을 부인하는 것이 되며, 성경의 순수한 복종정신을 위배하는 것이 된다(마 5-7장 참조. 특히 22:37-39참조).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국가에 복종할 것을 요청하였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방백에게 하라"(벧전 2:14-14). 그러나 그 당시의 정부가 초기 교회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을 중지하라고 명령하였을 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 베드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생명의 삶을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롬 13:1).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정하신 의를 당국이 이행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사실을 문책하고 잘못을 시정하라고 주장하였다(행 16:37).
  이들 사도들이 자기 부인과 복종의 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복종이 파괴적 결과를 낳는 지점에 이를 때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상 그들은 파괴적 명령을 거부하고 거기에 따르는 고난도 기꺼이 각오함으로써 혁명적인 복종 정신을 실증하였다.
  독일의 사상가 요하네스 하멜(Johannes Hamel)은, 복종에는 "어떤 특별한 사항에 있어서 고난을 각오한 거부와 항거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때에 따라서는 복종의 한계를 알기 쉽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불합리한 매질을 하도록 요청 받은 경우, 어린이가 불법적인 행동으로 어른을 돕도록 요청 받는 경우, 시민이 국가를 위하여 성경과 양심의 명령을 위배하도록 요청 받는 경우, 이런 등등의 경우에 제자는 거부해야 한다. 오만한 자세로가 아니라 온유한 자세로 말이다.
  그러나 복종의 한계를 알아보기가 극히 어려운 때도 자주 있다. 결혼 반려자가 상대 반려자의 직업 때문에 개인적인 성취감에 방해를 받고 속박감을 느끼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것은 정당한 자기 부인의 경우인가 아니면 한계를 넘은 파괴적인 경우인가? 교사가 학생을 부당하게 채점하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 학생은 순복해야 하는가 아니면 저항해야 하는가? 고용주가 정실 관계에 근거하여 고용인을 승진시키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족의 생활을 위하여 임금 인상이 요구되는 경우 그 고용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문제는 대단히 복잡하고 미묘하다. 왜냐하면 인간 관계가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간다나게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못 된다. 모든 상황을 총망라하여 간단하게 해답을 해주는 복종의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법칙을 아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결의론적 윤리는 항상 실패한다.
  복종의 한계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성령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는 말은 쟁점을 회피하는 말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인생의 모든 상황을 총망라하여 해답해 주는 책을 가지고 있다면 성령을 의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령은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정확하게 분별하시는 분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있어서 현재의 스승과 예언자가 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모든 상황에서 우리들이 할 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복종의 행위

  복종과 섬김은 동시에 작용한다. 그러므로 복종에서 나오는 많은 실제적인 부분은 다음 장의 "섬김의 훈련"에 나오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종의 일곱 가지 행위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복종의 첫째 행위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하루의 과업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앞에서 기다리되 찬송가 가사처럼 고요히 엎드린 가운데서 앙망해야 한다. 우리의 하루의 첫마디 말은 아켐피스의 다음과 같은 기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주님의 뜻을 따라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정신을 주님의 뜻을 위하여 바쳐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하루는 내적 굴복이 계속적으로 분출되는 복종의 행동으로 생활하는 하루가 되어야 한다. 아침의 첫마디의 말이 복종의 말이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밤의 마지막 말도 역시 복종의 말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긴 어둠을 통하여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우리에게서 일을 하시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정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복종의 둘째 행위는 성경에 대한 것이다. 살아 있는 하나님말씀(예수님)에 복종해야 한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성경)에도 역시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말씀을 듣기 위해 복종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복종해야 하며 또 그 다음에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영감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이 성경을 우리에게 해석하시고 적용하시기를 기대해야 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가지는 기록된 말씀이 하루 종일 우리와 함께 살아 있어야 한다.

  복종의 셋째 행위는 우리의 가족에 대한 것이다. 다음 말씀이 가족을 위한 좌우명이 되어야 한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분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빌 2:4). 가족은 너그럽게 그리고 은혜롭게 서로서로 배려해야 한다. 기본적인 복종의 행위는 가족이 서로서로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데 있다. 그와 함께 기꺼이 나누는 일이 이루어진다. 이 일 자체도 복종의 일이다.

  복종의 넷째 행위는 우리의 이웃에 대한 것과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우리들의 선한 생활은 이웃사람들 앞에서 입증되어야 한다. 이웃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한다. 우리는 작은 친절이나 평범한 교제를 통하여 이웃을 도울 수 있다. 음식을 나누어준다든지, 잠시 방문을 한다든지, 도구를 나누어 사용한다든지, 이런 등등의 작은 친절을 통해서 말이다. 너무 사소한 것이라서 도움이 안 되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작은 일 하나하나도 복종을 생활화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복종의 다섯째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몸인 교회에 대한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있다든지 혹은 이루어야 할 과업이 있을 경우에, 우리는 그 일이나 과업이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생명의 삶으로 초청하시는 것인지를 자세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일은 할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그 일들이 단체 조직의 성격을 가진 일인 때도 있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종의 작은 섬김을 위한 기회가 된다. 때에 따라서는 일반적으로 교회를 섬기도록 요청을 받게 되는 일도 있다. 그때에는 만약 그 사역이 우리의 마음에 확증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확신과 공손한 태도를 가지고 그 요청에 순복할 수 있다.

  복종의 여섯째 행위는 상처를 받은 사람이나 혹은 멸시받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어느 사회에든지 과부들과 고아들이 있다. 즉 도움을 꼭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약 1:27). 우리의 첫째 책임은 이들과 함께 하는데 있다. 13세기에 아시시의 프란시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또한 20세기에 가가와(Kagawa)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짓밟히고 멸시를 받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동일시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한다.

  복종의 일곱째 행위는 세계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상호 의존하는 국제 공동체 안에 살고 있다. 우리는 고립하여 살아갈 수 없다. 환경에 대한 책임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세대에도 영향을 끼친다. 굶주리는 나라들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의 복종의 행위는 세계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일원을 살아가기를 결심하고 행하는 것이다. 갈수록 책임감을 잃어 가는 세계에 대하여 말이다.

  끝으로 해두고자 하는 말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복종과 권세와 관련된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거듭거듭 되풀이하여 보아 온 현상이다.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기 시작할 때, 예수님께서 권세에 대하여 새로운 개념을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개념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들은, 권세는 인가의 지위나 학위나 직함 또는 어떤 외적 상징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의 길은 전적으로 다르다. 즉 그 길은 영적인 권세의 길이다. 영적인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권세이며, 하나님이 지속시키시는 권세이다. 인간의 제도가 이 권세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영적인 권세를 가진 사람은 외적 권세의 지위를 가질 수도 있고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도 역시 우무 상관이 없다. 영적인 권세는 자비와 능력으로 그 특징이 드러난다.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은 영적 권세를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은 복종이라는 말이 영적인 권세 안에서 주어진 말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권세 있는 지위에 있기는 하지만 영적인 권세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어떤 지위가 그 권세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셨는데,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 복종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정한 모든 권세를 도외시하고 영적인 권세에만 복종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령의 길을 따라 행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제기되는 의문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당연한 것이고 적절한 해답이 마땅히 강구되어야 한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혁명적인 복종은 우리들로 하여금 인가의 권세가 파괴적인 지점에 이르기 전에는 그 인간의 권세에 복종하는 삶을 살도록 명령한다. 베드로와 바울은 이방 국가에 복종할 것을 요청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그 인간적 제도에서 오는 큰 유익을 베드로와 바울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간과하는 많은 지혜를 인간적인 권세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조 보았다.
  왜 영적 권세를 알지 못하면서 권세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종해야 하는가의 이유를 또 하나 들고자 한다. 우리는 일반적인 예의를 따라서 그렇게 복종해야 하며 또 심히 어려운 임무를 맡고 있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복종해야 한다. 나는 그런 어려운 임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심히 동정한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런 어려운 임무를 가지고 있던 때가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권세 있는 지위에 있기는 하지만 영적 권세를 행사랄 만큼 신앙의 뿌리가 깊지 않다는 것을 알 때는 심한 고충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감정이 점잖은 걸음을 걷도록 한다든지 우쭐대도록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또한 영리한 수단을 모색하여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고 복종하게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조소를 보내고 그의 권세를 무시하기는 쉬울지 모르나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왜냐하면 그런 모순 속에서 참고 살아야 하는 그 내적 고통과 어려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그런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들에게 새 능력과 새 권세가 채워지도록 말이다. 우리는 또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들을 도와줄 수 있다. 우리가 만약 그런 사람 앞에서 십자가의 생명의 삶을 산다면, 우리는 곧 그런 사람이 영적 능력을 증대해 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도 영적 능력이 증대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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