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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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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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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과 능력과 지혜 안에 거하라. 서로서로 하나님과의 연합 안에 거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평화와 지혜가 당신의 마음을 가득 채워,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 이외에는 그 무엇도 당신을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조지 폭스(George Fox)
오늘날 하늘과 땅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그리고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은,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학수 고대하고 있다. 모든 피조물이 간절한 기대 가운데 훈련되고, 자유롭게 모인, 순교자 정신의 사람들, 즉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기를 지켜보고 있다. 과거에는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였다. 지금도 그와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
금세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대부분의 가르침은 집단적인 측면에 있어서 뚜렷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이성과 환경을 통하여, 성령의 지시를 통하여 어떻게 인도하시는지에 대하여 탁월한 가르침을 받고 있다. 또한 예외적인 인도하심-천사, 환상, 꿈, 표적 등-에 대한 가르침도 탁월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백성, 즉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에 대하여는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깊은 침묵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나는 본서 제3부 "단체 훈련"에 "인도하심을 받는 훈련"을 포함시키기로 결심하고, 그 단체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을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단체도 역시 그렇게 하신다. 그리고 단체를 통하여 개인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개인적인 인도하심에 몰두하는 것은 아마도 서양 개인주의의 영향인 것 같다. 하나님의 백성은 늘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속박으로부터 한 백성으로 인도해 내셨다. 모든 사람들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보았다. 그들은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가게 된 각 개인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권 통치 아래 있는 한 백성이었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임재가 그들을 직접 덮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백성은 얼마 가지 않아서 하나님의 그와 같은 임재가 너무나도 두렵고 너무나 빛나는 것을 느끼고 다음과 같이 간청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
그래서 모세가 그들의 중보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가진 예언자들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성령의 단체적인 인도하심에서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으나. 그래도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함께 있다는 의식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원하여 예언자까지도 배척하는 날이 왔다. 그때로부터 예언자는 국외자가 되어 광야에서 외치는 고독한 소리가 되었다. 때로는 예언자의 소리를 따르는 일이 있었으나, 때로는 예언자가 죽음을 당했다. 여하간 예언자는 항상 겉돌았다.
하나님은 인내하시는 가운데 한 백성을 예비하셨고, 때가 차매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 날이 밝았다. 성령의 직접적인 신권 통치 아래 사는 한 백성이 다시 모였다.
예수님은 조용히 인내하시는 가운데 아버지의 음성에 응답하는 삶이 어떠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고, 그들도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특히 함께 하는 경우에 가장 명확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확신과 권위 둘 다를 주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진지하게 모였을 대, 예수님의 뜻을 분간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 확신이 그 말씀에 있었다. 감독하시는 성령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연합할 때, 아버지의 심정과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하여 각기 다른 신자들을 억제와 균형으로 활용하신다. 참목자의 음성을 들었다고 확신할 때, 그들은 권위를 가지고 기도하고 행동할 수 있다. 아버지의 뜻에 신자들의 연합을 더하면 권위가 나온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국외자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통치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인 백성이 되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행 4:32-33). 그들은 강렬한 증인 군단이 되어서 어디서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 뜻에 순종하도록 전도하였다.
이와 같은 강렬한 친교의 가장 두르러진 특색은, 집단적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의식에 있었다. 이 사실은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지고 로마 제국 곳곳을 여행하도록 따로 세우심을 받은 일에서 실증되었다(행 13:1-3).
그들이 그 사명을 받은 것은 많은 사람드이 오랜 시간 함께 모여 있었을 대였다. 거기에는 "기도의 훈련"과 "금식의 훈련"과 "예배의 훈련"이 포함되어 있었다. 준비된 백성이 되었을 때 그들은 단체적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 13:2).
오늘날 우리가 선교사를 모집하는 방법에 있어서 이 단체적 인도하심의 실례를 진지하게 주목함으로써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금식과 기도와 예배로 마침내 주님의 뜻을 분간하게 함으로써 큰 도움을 입을 수 있다.
집단적인 인도하심으로 초대 교회는 그들의 가장 위태로운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였다(행 15장). 즉 자기 나름대로 활동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으로 가서 할례의 필요성을 전파하기 시작한 일이 있었다. 그 문제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그 문제가 교회를 유대인의 문화에 속박하는 일에 해당된다는 것을 직시하였다.
사도들과 지명된 장로들이 주님의 능력 안에서 함께 모였다. 그것은 지위를 위해 술책을 쓰기 위함도 또는 서로 대립하기 위함도 아니며, 오직 성령의 뜻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집중적인 토의가 있었다. 그때 개인적인 인도하심이 단체적인 인도하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실례가 나타났다.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와 함께 가졌던 체험을 말하였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하나님의 성령이 놀라운 일을 하셨다. 베드로가 말을 마치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조용해졌다(행 15:12).
결국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문화적인 종교를 배격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영원한 복음을 고수하기로, 영광스럽고 하늘에서 주셨으며 통일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성령과 우리는.....가한 줄 알았노리"(행 15;28). 그들은 그 당시 가장 힘든 문제를 직시하고 위로부터 오는 음성을 분별하였다. 사도행전의 절정이 여기에 있다.
이것은 한 문제에 대한 승리 이상의 것이었으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의 승리였다. 한 백성으로서 그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살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전체주의와 무정부와 다수의 지배인 민주주의까지도 배격하였다. 그들은 감히 성령의 통치에 근거하여 살기로 했다. 그들은 과반수의 투표에 근거를 두지 않았으며, 타협에 근거를 두었다. 그런데 그것이 해결책이 되었다.
공동체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이 체험이 바울로 하여금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바울은 성령의 각 은사가 성령에 의하여 몸에 주어지고 그리하여 지체들의 상호 의존이 보장된다고 보았다.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장 성숙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가장 미약한 사람도 무엇인가 기여할 것이 있다. 홀로 하나님의 모든 지혜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슬픈 일이지만, 요한이 그 위대한 묵시적 환상을 받던 무렵에 신자들의 공동체가 식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콘스탄틴 사대에는 교회가 또 하나의 인간 왕응ㄹ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환상은 죽지 않았으며, 수세기를 통하여 성령의 통치 아래 함께 모인 단체들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하나님게 감사한다.
몇 가지 예
사도 시대의 사람들은 단 한번에 성령의 통치라는 높은 단계로 뛰어 오르지 않았다. 우리들도 그렇게 올라갈 수는 없다. 그들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전진하였다. 때로는 후퇴도 하였다. 그러나 오순절 날이 이르렀을 때는 준비된 백성이 되어 있었다.
성령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사는 백성이 된다는 말의 근본적인 의미를 이해한 후에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가장 파괴적인 행위는 "그거, 정말 놀랍다. 내일부터 당장 그렇게 살겠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열광은 그 사람 자신과 주볁 사람들의 생활을 비참하게 만들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세계를 점령하려고 흥분하여 돌진하기보다는 적절한 단계를 따라가야 한다.
우리들이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위로부터 오는 음성을 단체적으로 듣기 위해 힘쓴 사람들의 모범을 살펴보는 일이다.
그 가장 좋은 예 하나가 "아시시의 가난한 소자" 성 프란시스이다. 프란시스는 기도하는 일과 묵상하는 일에만 자신을 전적으로 바쳐야 할지(그 당시에는 그와 같은 일이 일반적이었다) 아니면 전도하는 일도 함께 해야 할지를 놓고 크게 고심하고 있었다. 프란시스는 조언을 듣기로 결심하였다. 그 자신 속에 있는 거룩한 겸손이 그로 하여금 자신이나 자신의 기로들 신뢰하지 않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는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을 찾았다.
그는 자기가 가장 신뢰하는 두 친구 시스터 클레어(Sister Clare)와 브라더 실베스터(Brother Silvester)에게 메시지를 보내 그들의 경건하고 순결한 한 사람과 함께 모여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들은 즉시 기도에 들어갔는데클레어와 실베스터는 똑같은 대답을 보내 왔다.
메시지 심부름꾼이 돌아왔을 때 프란시스는 먼저 그의 발을 씻겨 주고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그 다음에 심부름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음과 같이 물었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명령하셨는지요?"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여 주셨다고 대답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부르실 대 당신 자신만을 위해서 부르시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프란시스는 이 메시지를 거역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벌떡 일어서며 말하였다. "그러면 나갑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이리하여 그는 즉시 전도 사역을 시작하엿다. 프란시스가 받은 그 지시는 초기 프란시스 운동에 신비적 묵상과 전도 열정이 놀랍게 조화되도록 하였다.
이 경험에서 프란시스는 지혜로운 상담자들의 충고를 구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뜻을 보여 주는 하늘의 문을 여는 방법을 찾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단체적으로 인도하심을 받은 또 하나의 모범은 "명확성을 위한 모임"이라는 데서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모임은 어떤 개인의 의문에 대한 성령의 뜻을 찾기 위해 특별히 소집된다.
한번은 재능 있는 한 젊은 사람이 그의 장래에 대해 나에게 조언을 부탁하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목회를 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방면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적성 검사를 다 해보고 또 진로 지도 과정도 다 밟았으나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에게 있어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명확성을 위한 모임을 가지라고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를 잘 알고 영적으로 성숙하고, 또 그에게 정직하게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았다. 깜짝 놀랄 만한 환상이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날 밤 그들이 예배를 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들은 도움을 주는 좋은 공동체가 되었다. 얼마 동안의 기간이 지난 후에 그 젊은 사람의 은사와 소명은 확실해졌다. 그는 현재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
조지 폭스(George Fox)
오늘날 하늘과 땅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그리고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은,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학수 고대하고 있다. 모든 피조물이 간절한 기대 가운데 훈련되고, 자유롭게 모인, 순교자 정신의 사람들, 즉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기를 지켜보고 있다. 과거에는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였다. 지금도 그와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
금세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대부분의 가르침은 집단적인 측면에 있어서 뚜렷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이성과 환경을 통하여, 성령의 지시를 통하여 어떻게 인도하시는지에 대하여 탁월한 가르침을 받고 있다. 또한 예외적인 인도하심-천사, 환상, 꿈, 표적 등-에 대한 가르침도 탁월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백성, 즉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에 대하여는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깊은 침묵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나는 본서 제3부 "단체 훈련"에 "인도하심을 받는 훈련"을 포함시키기로 결심하고, 그 단체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을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단체도 역시 그렇게 하신다. 그리고 단체를 통하여 개인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개인적인 인도하심에 몰두하는 것은 아마도 서양 개인주의의 영향인 것 같다. 하나님의 백성은 늘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속박으로부터 한 백성으로 인도해 내셨다. 모든 사람들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보았다. 그들은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가게 된 각 개인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권 통치 아래 있는 한 백성이었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임재가 그들을 직접 덮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백성은 얼마 가지 않아서 하나님의 그와 같은 임재가 너무나도 두렵고 너무나 빛나는 것을 느끼고 다음과 같이 간청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
그래서 모세가 그들의 중보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가진 예언자들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성령의 단체적인 인도하심에서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으나. 그래도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함께 있다는 의식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원하여 예언자까지도 배척하는 날이 왔다. 그때로부터 예언자는 국외자가 되어 광야에서 외치는 고독한 소리가 되었다. 때로는 예언자의 소리를 따르는 일이 있었으나, 때로는 예언자가 죽음을 당했다. 여하간 예언자는 항상 겉돌았다.
하나님은 인내하시는 가운데 한 백성을 예비하셨고, 때가 차매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 날이 밝았다. 성령의 직접적인 신권 통치 아래 사는 한 백성이 다시 모였다.
예수님은 조용히 인내하시는 가운데 아버지의 음성에 응답하는 삶이 어떠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고, 그들도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특히 함께 하는 경우에 가장 명확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확신과 권위 둘 다를 주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진지하게 모였을 대, 예수님의 뜻을 분간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 확신이 그 말씀에 있었다. 감독하시는 성령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연합할 때, 아버지의 심정과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하여 각기 다른 신자들을 억제와 균형으로 활용하신다. 참목자의 음성을 들었다고 확신할 때, 그들은 권위를 가지고 기도하고 행동할 수 있다. 아버지의 뜻에 신자들의 연합을 더하면 권위가 나온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국외자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통치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인 백성이 되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행 4:32-33). 그들은 강렬한 증인 군단이 되어서 어디서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 뜻에 순종하도록 전도하였다.
이와 같은 강렬한 친교의 가장 두르러진 특색은, 집단적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의식에 있었다. 이 사실은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지고 로마 제국 곳곳을 여행하도록 따로 세우심을 받은 일에서 실증되었다(행 13:1-3).
그들이 그 사명을 받은 것은 많은 사람드이 오랜 시간 함께 모여 있었을 대였다. 거기에는 "기도의 훈련"과 "금식의 훈련"과 "예배의 훈련"이 포함되어 있었다. 준비된 백성이 되었을 때 그들은 단체적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 13:2).
오늘날 우리가 선교사를 모집하는 방법에 있어서 이 단체적 인도하심의 실례를 진지하게 주목함으로써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금식과 기도와 예배로 마침내 주님의 뜻을 분간하게 함으로써 큰 도움을 입을 수 있다.
집단적인 인도하심으로 초대 교회는 그들의 가장 위태로운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였다(행 15장). 즉 자기 나름대로 활동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으로 가서 할례의 필요성을 전파하기 시작한 일이 있었다. 그 문제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그 문제가 교회를 유대인의 문화에 속박하는 일에 해당된다는 것을 직시하였다.
사도들과 지명된 장로들이 주님의 능력 안에서 함께 모였다. 그것은 지위를 위해 술책을 쓰기 위함도 또는 서로 대립하기 위함도 아니며, 오직 성령의 뜻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집중적인 토의가 있었다. 그때 개인적인 인도하심이 단체적인 인도하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실례가 나타났다.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와 함께 가졌던 체험을 말하였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하나님의 성령이 놀라운 일을 하셨다. 베드로가 말을 마치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조용해졌다(행 15:12).
결국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문화적인 종교를 배격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영원한 복음을 고수하기로, 영광스럽고 하늘에서 주셨으며 통일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성령과 우리는.....가한 줄 알았노리"(행 15;28). 그들은 그 당시 가장 힘든 문제를 직시하고 위로부터 오는 음성을 분별하였다. 사도행전의 절정이 여기에 있다.
이것은 한 문제에 대한 승리 이상의 것이었으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의 승리였다. 한 백성으로서 그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살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전체주의와 무정부와 다수의 지배인 민주주의까지도 배격하였다. 그들은 감히 성령의 통치에 근거하여 살기로 했다. 그들은 과반수의 투표에 근거를 두지 않았으며, 타협에 근거를 두었다. 그런데 그것이 해결책이 되었다.
공동체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이 체험이 바울로 하여금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바울은 성령의 각 은사가 성령에 의하여 몸에 주어지고 그리하여 지체들의 상호 의존이 보장된다고 보았다.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장 성숙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가장 미약한 사람도 무엇인가 기여할 것이 있다. 홀로 하나님의 모든 지혜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슬픈 일이지만, 요한이 그 위대한 묵시적 환상을 받던 무렵에 신자들의 공동체가 식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콘스탄틴 사대에는 교회가 또 하나의 인간 왕응ㄹ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환상은 죽지 않았으며, 수세기를 통하여 성령의 통치 아래 함께 모인 단체들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하나님게 감사한다.
몇 가지 예
사도 시대의 사람들은 단 한번에 성령의 통치라는 높은 단계로 뛰어 오르지 않았다. 우리들도 그렇게 올라갈 수는 없다. 그들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전진하였다. 때로는 후퇴도 하였다. 그러나 오순절 날이 이르렀을 때는 준비된 백성이 되어 있었다.
성령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사는 백성이 된다는 말의 근본적인 의미를 이해한 후에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가장 파괴적인 행위는 "그거, 정말 놀랍다. 내일부터 당장 그렇게 살겠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열광은 그 사람 자신과 주볁 사람들의 생활을 비참하게 만들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세계를 점령하려고 흥분하여 돌진하기보다는 적절한 단계를 따라가야 한다.
우리들이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위로부터 오는 음성을 단체적으로 듣기 위해 힘쓴 사람들의 모범을 살펴보는 일이다.
그 가장 좋은 예 하나가 "아시시의 가난한 소자" 성 프란시스이다. 프란시스는 기도하는 일과 묵상하는 일에만 자신을 전적으로 바쳐야 할지(그 당시에는 그와 같은 일이 일반적이었다) 아니면 전도하는 일도 함께 해야 할지를 놓고 크게 고심하고 있었다. 프란시스는 조언을 듣기로 결심하였다. 그 자신 속에 있는 거룩한 겸손이 그로 하여금 자신이나 자신의 기로들 신뢰하지 않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는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을 찾았다.
그는 자기가 가장 신뢰하는 두 친구 시스터 클레어(Sister Clare)와 브라더 실베스터(Brother Silvester)에게 메시지를 보내 그들의 경건하고 순결한 한 사람과 함께 모여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들은 즉시 기도에 들어갔는데클레어와 실베스터는 똑같은 대답을 보내 왔다.
메시지 심부름꾼이 돌아왔을 때 프란시스는 먼저 그의 발을 씻겨 주고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그 다음에 심부름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음과 같이 물었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명령하셨는지요?"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여 주셨다고 대답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부르실 대 당신 자신만을 위해서 부르시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프란시스는 이 메시지를 거역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벌떡 일어서며 말하였다. "그러면 나갑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이리하여 그는 즉시 전도 사역을 시작하엿다. 프란시스가 받은 그 지시는 초기 프란시스 운동에 신비적 묵상과 전도 열정이 놀랍게 조화되도록 하였다.
이 경험에서 프란시스는 지혜로운 상담자들의 충고를 구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뜻을 보여 주는 하늘의 문을 여는 방법을 찾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단체적으로 인도하심을 받은 또 하나의 모범은 "명확성을 위한 모임"이라는 데서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모임은 어떤 개인의 의문에 대한 성령의 뜻을 찾기 위해 특별히 소집된다.
한번은 재능 있는 한 젊은 사람이 그의 장래에 대해 나에게 조언을 부탁하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목회를 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방면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적성 검사를 다 해보고 또 진로 지도 과정도 다 밟았으나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에게 있어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명확성을 위한 모임을 가지라고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를 잘 알고 영적으로 성숙하고, 또 그에게 정직하게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았다. 깜짝 놀랄 만한 환상이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날 밤 그들이 예배를 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들은 도움을 주는 좋은 공동체가 되었다. 얼마 동안의 기간이 지난 후에 그 젊은 사람의 은사와 소명은 확실해졌다. 그는 현재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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