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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修道院, monastery] <엠파스 백과사전>

수도관상피정 엠파스............... 조회 수 3324 추천 수 0 2008.09.15 18:2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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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도원 [修道院, monastery] 엠파스 백과사전에서 추출한 수도원 자료

개요
그리스도교의 수사·수녀가 일정한 계율 아래 금욕적인 공동생활을 하면서 수행을 쌓는 장소.

본문
그리스도교의 수사·수녀가 일정한 계율 아래 금욕적인 공동생활을 하면서 수행을 쌓는 장소. 수도생활은 가톨릭교회나 동방정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며,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수도자의 생활방식은 각 수도회에 따라 다양하지만, 청빈(淸貧;사유재산의 포기)·정결(貞潔;독신생활)·복종(服從;수도회의 상급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의 3가지 원칙적인 덕목은 공통된다. 고대에는 혼자서 은자의 생활을 보내는 은수사(隱修士)도 많았고 동방정교회에는 지금도 그러한 전통이 남아 있으나, 오늘날 대부분의 수도자는 수도원에서 공동거주의 형태를 취하며 남녀가 따로 거주하는데 기도와 노동이 그들의 생활원리이다. 계율이 엄격한 수도원에서는 매일 일과가 세밀하게 정해져 있으며, 여자수도원에서는 외부와의 교류를 엄격하게 제한하여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곳도 많다. 그러나 1962∼65년의 제 2 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수도원의 생활규칙도 시대에 적응하기 위하여 다소 변경·완화되고 있다.

기원
1947년 사해(死海)의 북서 연안에 있는 동굴에서 많은 문서가 발견되어(死海文書), 이문서의 소유자인 쿰란교단에 유대교의 수도제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것과 종래부터 알려져 있던 이집트 테라페우타이의 집단, 팔레스타인의 에세네파(派), 예루살렘의 사도집단(使徒集團) 등과의 관계가 문제로 남아 있다. 통상적으로는 3세기 후반에 중부 이집트의 테베에서 은자 바울과 안토니우스에 의하여 창설되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오스가 쓴 《안토니우스의 생애(356년 이후)》가 일찍부터 서유럽에 전해져 수도원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고행은 중세 말∼근세 초의 화가들에게 화제(畵題)를 제공해 왔다. 그는 수도승(monk)의 어원 <혼자 사는 사람> 그대로 사막이나 산 속에서 혼자 수행하였다. 이 은수사적 수도제(修道制)는 그의 제자 힐라리온에 의해 팔레스타인에, 마카리오스에 의해 나일강 델타지대에 전해졌는데, 이 형식은 명상적인 동방교회의 수도사에게 특별히 선호되어 뿌리 깊게 이어져 왔다. 안토니우스와 거의 같은 시대에 똑같이 이집트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파코미우스는 단독생활에 따르는 일상적인 불편과 정신적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을 세웠다. 높은 벽을 두른 부지 안에 몇 개의 건물이 있고, 각 건물에 20∼40명의 수도사가 한 사람의 지도자와 함께 기거한다. 식사와 기도는 공동으로 하고 복장도 동일하다. 공동생활 때문에 청빈·복종의 덕목이 중시되었으며, 노동의 의무는 특히 강조되었다. 이것은 많은 수도사들이 자활하기 위해서이며, 그들은 농경 외에 나일강에서 나는 골풀로 광주리를 엮고, 종려나무로 세공물을 만들어서 팔기도 했다. 노동을 경시한 고대에서 노동존중의 윤리를 후대에 남긴 것은 콥트인 수도사들이 기여한 바가 크다. 파코미우스가 콥트어로 쓴 수도규정은 일찍부터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번역되어 널리 유포되었으며, 공동생활양식의 수도원은 그의 제자 에우게니우스에 의하여 멀리 메소포타미아에까지 전해졌다.

중세
이집트 수도원이 외부로 널리 퍼져 나간 것은 많은 수도사가 이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400년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로스와 오리게네스를 지지하는 4명의 수도사 사이에 벌어진 <오리게네스논쟁>과 관련하여 알렉산드리아 주변에 있던 수도사들이 대량으로 이집트에서 추방당했고, 407∼408년에는 나일강의 델타지대가 마치카에지방 만족(蠻族)의 침입을 받아 수도사 수천명의 취락인 스케티스가 괴멸될 정도의 타격을 받았던 사실도 수도원제의 외부확산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수도원의 동·서로의 확대는 5세기에 접어들기 전에 이미 상당히 진척되어 있었다. 힐라리온과 칼리톤이 팔레스타인에 다우라라고 하는 산거형(散居型)수도원을 개설한 것은 4세기 전기였고, 시리아의 안티오크·베로이아·칼키스의 황야에 많은 은자가 있다는 것을 S.E. 히에로니무스가 보고한 것은 374년의 일이다. 안티오크 가까이에서 시메온이 10m 이상이나 되는 기둥 위에서 30년간이나 수행하여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은 것은 5세기에 들어선 뒤의 일이지만 이것은 이집트에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카파도키아지방에 수도원이 퍼진 것도 4세기의 일로, 특히 카이사레아 주교 바실레이오스의 역할이 컸으며, 그가 저술한 《성 바실레이오스 회칙(會則)》은 가톨릭교회가 인정하는 4대수도회칙 가운데 첫번째로 꼽힌다. 수도원을 서방에 퍼지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사람은 루피누스·히에로니무스·카시아누스 등이다. 루피누스가 예루살렘에서 12년간의 수도생활 뒤에 수도사와 함께 396년 무렵 로마로 돌아갔다. 불가타성서의 번역자 히에로니무스는 374∼379년에 《테베의 바울전》을, 390∼391년에 《마르쿠스전》 《힐라리온전》을 저술했으며, 404년에는 《파코미우스수도회칙》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이집트 수도원의 제도를 서방에 전하였다. 카시아누스는 390년 스케티스에서 7년간 수행 뒤 오리게네스논쟁에 휘말려서 콘스탄티노플·로마로 여행했으며, 406년 마르세유에 2개의 남·녀 수도원을 세운 뒤 이 곳에서 30년에 걸쳐서 수도생활을 지도했다. 이집트를 본 뜬 그의 《공동거주수도정칙》은 남프랑스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반달족 지배하의 아프리카에서도 널리 읽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탈리아에서 견문하고 히포에 세운 수도원은 430년 그가 죽은 뒤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칙》은 12세기 이후 서유럽의 성당참사회의 준칙으로 보급되었다. 그러나 서방에서 수도원 확대의 주된 출발점이 된 것은 남프랑스의 레랑스섬, 루아르강을 바라보는 투르의 마르무티에 및 성 패트릭에 의해 그리스도교화한 아일랜드이다. 로마의 호놀라투스에 의하여 5세기 초에 세워진 레랑스섬의 산거수도원(散居修道院)은 과거에 로마의 몰락귀족이었던 수도사가 중심이 되어 론강 일대의 교회·수도원이 발전하는 데 근거지가 되었고, 투르의 마르티누스는 신흥 메로빙거왕조 프랑크왕국의 수호성인으로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많은 신설수도원에서 받들어지게 되었다. 아일랜드는 동방에서 전해온 고대의 문화유산을 소중하게 보존하고 <지혜의 유방(乳房, uber sophiae)>이라고 하며 호학자(好學者)들을 모았으며, 수도사들은 칼리아에 뤽쇠이를 비롯한 50개 이상의 수도원을 건설하여 많은 공적을 남겼다. 호학자들 중에서 카시오도루스는 동고트왕국의 고관이 된 로마인이지만 고트전쟁 중에 정계를 은퇴하고 540년 무렵 남이탈리아의 비바리움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정비된 도서관은 그 뒤 유럽의 수도원도서관의 표본이 되었다. 끝으로 중세 전기 수도원 확대에 힘쓴 사람은 앵글로색슨인 수도사들이다. 7∼8세기에 걸친 빌리브로드·보니파티우스의 업적이 그것이다. 특히 이 두 사람은 모두 수도사였으나 수도원의 건설이나 수도사의 교육보다도 이교도에 대한 전도나 교회조직 정비에 노력했으며, 두 사람 모두 로마교황으로부터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런 뜻에서 빌리브로드를 <프리슬란트의 사도>, 보니파티우스를 <독일인의 사도>라 할 수 있다. 밀리브로드가 8세기 초에 세운 에히테르나하수도원, 특히 보니파티우스가 774년에 세운 후르다수도원은 독일의 몬테카시노라고 하는데, 모두 수도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유럽에 수도원이 확대되어 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누르시아의 베네딕트가 몬테카시노에서 집필한 《성 베네딕트회칙》이다. 이것온 <유럽수도제의 마그나카르타>라고 할 정도인데, 그 뒤 유럽 대부분의 관상수도원(觀想修道院)에서 준봉(遵奉)되었기 때문이다. 이 회칙은 전해 오는 많은 수도규정을 참조하고 있으나, 동방의 수도제처럼 엄격한 고행을 요구하지 않고 중용의 정신으로 일관하였다. 노동을 중시하여 수도원의 경제적 자립을 확보하고, 때마침 형성되고 있던 농업사회에 수도원을 적응시키는 등유럽 독자의 수도정신이 발휘되어 있어 수도원은 이 회칙에 의해서 비로소 유럽적 형태를 확립했다. 수도원은 카롤링거왕조가 무너지고 신성로마제국이 성립될 때까지의 사이에 노르만인·마자르인·이슬람교도의 공격을 받아 곳곳에서 파괴되었으나, 10세기 초 클뤼니수도원의 출현으로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였다. 수도규율이 회복되고 전례가 정비되었으며, 수도정신은 고양되었다. 신도와 수도원의 정신적 유대가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11세기에 들어서자 로마교황의 직접보호 아래 주교권을 배제하고 수도원의 인사·행정·운영을 포함한 <클뤼니의 자유>가 확립되었다. 12세기에 융성기를 맞이했을 때, 소속된 수도원은 약 1500개를 헤아려 그 영향은 유럽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빈자(貧者)>를 주장하며 1098년 건설된 시트수도원은 클뤼니에 비해 철저한 금욕주의였으나 조직면에서는 클뤄니의 중앙집권과는 대조적으로 민주적이었다. 이 경제활동이 매우 활발하고 광범위하였는데, 12세기까지 산하에 530개의 수도원을 거느릴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2세기 후반부터 이단이 격렬하게 일어나자 수도사는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를 가지고 이에 대응하였다. 이들 수도회는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인데, 모두 여자의 제 2 수도회, 일반 남녀신자의 제 3 수도회를 가지고 널리 복음전도를 했다는 점에 공통된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뒤 수도사는 대부분 수도원에 일소정주(一所定住)의 서원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수도원 본래의 기능과 성격이 변해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근대
13세기 탁발수도회가 출현한 이후, 수도생활은 수도원이라는 금역 내에서 그치지 않고 세속사회 내에서 하는 포교나 자선사업 등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에 입각한 프로테스탄트의 여러 교회는 수도원이라고 하는 특수한 생활형태나 수도자라고 하는 신분 자체를 부정하였으며, 프로테스탄트가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수도원의 폐지와 재산의 몰수 등도 행해졌다. 이리하여 중세에서 근세로 그리스도교사회 전체가 크게 전환되어가는 가운데 수도원에 대한 관념과 견해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미 종교개혁과 함께 또는 대응해서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여러 가지 개혁운동이 일어났고, 기성수도회 내부에서도 많은 운동이 발생하였다. 그 무렵 수도회개혁운동이 목표로 삼았던 방향의 하나는 완화되고 타락되어 가는 수도생활의 규율을 예전의 회칙을 충실히 엄수함으로써 단속하고 기도와 노동이라는 수도생활 본래의 이상으로 되돌아가는 데 있었다. 이런 방향의 운동으로는 프란체스코회에서 분리한 카프친회, 카르멜회에서 갈라져나간 맨발카르멜회의 설립, 시트회 안에서의 피양파운동 등이 있으며, 도미니크회·플레몽트레회 등에서도 똑같은 개혁이 시도되었다. 또 하나의 방향은 종교개혁세력에 대한 실지회복, 그리고 대항해 시대가 되어서 급속히 시야에 들어온 비그리스도교 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진출과 포교였다. 16∼17세기에 동양과 아프리카 및 신대륙 각지에 가서 선교하여 유럽의 그리스도교를 전세계에 퍼뜨린 사람은 도미니크회·아우구스티누스회 등 탁발수도회 회원들과 1540년 I.O. 로올라에 의하여 새로 설립된 예수회 회원들이었다. 예수회의 특색은 군대적 조직과 그에 바탕을 둔 고도의 기동성과 활동성이었으며, 그때까지 수도생활의 이상이었던 일소정주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큰 영광>을 지상에 실현하기 위하여 전세계에 파견되어 모든 분야에서 실천적 활동을 하려는 것이었다. 같은 무렵, 일반민중의 교화전도를 목적으로 한 바나바회, 환자간호를 목적으로 한 카밀로회, 하나님의 성 요한병원수사회 등도 창설되어 교육·자선사업 등 사회적 활동이 수도생활의 중심목적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 뒤 각시대·지역마다 사회상황에 적합한 활동적 수도회가 속속 설립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예수회를 모방한 것이었다. 특히 17세기 프랑스의 빈센티우스 아 파울로 등의 활동은 금역 내에만 머무르지 않는 활동적 여자수도회를 탄생시켰으며, 그 뒤 1000개가 넘는 여자수도회가 설립되었다. 이리하여 근대의 수도원활동은 1773∼1814년 동안의 계몽주의시대에 예수회의 일시해산 및 프랑스혁명 동안에 수도생활의 금지 등 퇴조는 있었으나, 중세의 관상적 생활에서 활동적 생활로 그 비중을 이행시키며 발전해 왔다.

오늘날의 현황
20세기에 들어서자 유럽사회 전체에 세속화·교회이탈이 발생하였고, 그에 따라 특히 규율이 엄격한 관상수도회 등에서는 수도자 수가 상당히 감소하였다. 오늘날에는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떨어진 산중의 대수도원이 아니라, 대도시 속에서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도 적지 않다. 1981년의 자료에 의하면 로마 가톨릭교회가 공인하는 남자수도회의 수는 총 225개(그 가운데 嚴律修道會가 83개), 수도원수(모든 형태의 것을 포함) 3만 1139개(엄률수도회 1만 2112개), 수도사 23만 8798명(엄률수도회 10만 5255명)으로서 수도사 수도 연간 1% 정도의 감소율을 보이고 있다. 여자수도회는 크고 작은 것을 합해서 1217개가 있으며, 수녀의 수는 73만 7729명이다.

수도원 건축
그리스도교 수도원의 정확한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그 제도의 확립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3세기의 이집트이다. 상(上)이집트 출신인 파코미우스는 테베의 타베니스에 수도원을 세워서 공동생활을 통한 수도원제도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그 수도원은 사방을 울타리로 두른 구내에 세워진 5∼6동의 건물로 되어 있으며 20∼40명의 수도사가 각 건물에 거주하였다. 구내에는 그 밖에 성당·식당·도서실 및 외래객의 숙박시설도 있었다. 5세기 이후 유럽 각지에 동방의 종교적 전통을 계승한 수도원제도가 발흥했지만 529년에 베네딕트가 남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에 개설한 수도원은 외계와의 접촉을 피하기 위하여 생활에 필요한 일체의 물건을 갖추도록 했다. 넓은 구내에는 성당을 중심으로 식당·도서실 등 동방의 수도원에서 볼 수 있는 시설 외에 농원이나 수확물의 처리에 필요한 부속건물까지 병설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배치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소실되었다. 또한 820년 무렵에 작성되어 전해지고 있는 스위스의 장크트 갈렌수도원에 소장되어 있는 설계도는 그 때의 수도원건축 일반의 입문서로서 만들어진 것이며, 당시 수도원의 실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세의 수도원 건축의 이상적 설계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성당과 인접해 있는 중정(中庭)을 둘러싼 회랑을 따라 배치된 수도사들의 거실은 수도원의 중핵을 이루는 전통적인 시설이며, 그 밖에 농노의 주거·가축외양간 및 식료품의 가공설비에서 건축용 석회로(石灰爐)까지 비치되어 있어서 완전한 자급자족이었음을 보여준다. 중세 말기가 되자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크회가 <탁발수도사>에 의한 새로운 시대를 열어 수도원의 역사에 한 시기를 구획하게 되었다. 따라서 청빈과 간소를 수도생활의 이상으로 하는 이들 수도사들이 종래의 것보다 소규모이며 검소한 수도원의 설계를 필요로 했다. 이에 반하여 이른바 교직수도회(특히 16세기에 창설된 예수회)의 수도원은 학교나 기숙사와 병합되어 있으며, 규모는 동시대의 궁정건축과 큰 차이가 없었다. 중정을 둘러싼 회랑을 중시하는 중세 이후의 수도원건축의 전통은 바로크시대에 폐지되었으며, 수도원 내에 호화로운 큰 방이 설치되었다.

한국의 수도원
한국 교회가 창립되던 때부터 믿음이 두터운 신자들 가운데서 수도생활에 관한 서적을 보거나 신부의 권유로 독신생활과 고행을 하면서 교회봉사에 전념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그때 유교사회에서 공공연히 동정을 지키기가 어려워서 동정부부의 길을 택했던 예들이다. 그러나 박해시대에는 조직적인 수도생활이 불가능했고, 한·불조약이 체결된 1년 뒤인 1888년에 최초의 정식수도회가 들어왔다. 이때 한국에 진출한 프랑스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는 그 설립목적에 따라 자선사업과 사회사업에 힘썼고, 1900년 이후에는 교육과 본당사목에도 종사하였다. 최초로 한국에 진출한 남자수도회는 <성 베네딕트회>였다. 독일에서 온 이 회의 회원들은 그 무렵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주교의 요청에 따라 서울에 수도원을 두고 교육사업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를 그만 둔 다음 함경남도 덕원(德源)으로 수도원을 옮겼다. 이밖에 8·15 전에 한국에 들어온 수도회는 1924년 메리놀교회와 함께 함경도에 온 메리놀수녀회, 25년 원산에 온 성 베네딕트수녀회, 37년 대전에 온 프란체스코회 및 39년 한국에 처음으로 세운 관상수도원인 카르멜여자수도회 등이다. 이 무렵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방인수도회(邦人修道會)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1932년에 평양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가 창설되었고, 35년부터는 포항 예수성심수녀회가 될 동정녀들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방인수녀회의 창립은 8·15 뒤에도 계속되었으며, 53년에는 방유룡(方有龍) 신부가 최초의 남자방인수도회인 한국순교복자회를 세웠다. 6·25 이후 한국교회의 발전이 세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자 살레시오회·예수회 등 많은 남·녀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하였으며, 83년 말 현재 한국교회에는 14개의 남자수도회(선교단체 제외)와 40개의 수녀회가 있다. 방인수도단체라고는 하지만 대체로 유럽의 수도생활을 모방하고 있어서 수도생활의 토착화가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또 성소는 많으며 남자수도생활은 부진한 편이지만, 수녀들은 매년 수백 명씩 늘어나고 있다. 한국방인사제 가운데 수도자는 64명에 불과하고 수사의 수도 이와 비슷하다. 한국 수도생활의 특성은 대부분의 수녀들이 일선 사목에서 활동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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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 사회역사경제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이승정 2008-08-09 5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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