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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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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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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키딩, 엄무광 역, 서울 2002, 성바오로)
1. 인간조건
"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이 물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변함이 없다.
어떤 경우는 인생이 너무 비극적이어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결정할 자유마져 잃어버리는 수가 있다.
관상기도 중에 경험하는 은총의 힘은 우리가 모르고 있던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현존을 기억시켜 주도록 마련되어 있는 것들이다.
하나님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가장 위대한 현실은 하나님의 현존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내적 생명이 그것에 조율하는 정도만큼만 그 임재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귀를 기울여 듣는 그리스도인의 전통이 매우 중요하며,
그 들음은 성령의 임재 안에서 성경과 함께 앉아서 성령께서 우리의 듣는 능력을 더욱 깊게 만드시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외적으로 듣는 말씀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임재를 일깨우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아주 부드럽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 느낌이 점차로 강해지고 더욱 확산되면, 에덴 동산의 하나님과 아담하와의 친밀한 관계의 상태로 점차 되돌아가게 된다.
2. 관상과 하나님의 치료.
"너는 누구인가?"
이것이 영적 여정의 후반부에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모두 자그마한 정서적 욕구 중 특히 안전과 생존, 애정과 존중, 힘과 통제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욕구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유아들은 우울증과 무감각증에 빠지고 마침내는 심리적인 기아 상태로 죽어 가게 된다.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는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러한 생물적 욕구들이 상상적이거나 실제적이든 간에 충족되느냐 결핍되느냐에 따라 이후의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서적 욕구를 충족함으로써 행복을 찾기 위해 쏟는 에너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유아기에 거부되었다는 경험을 하게 되면 이 고통 스러운 감각은 무의식 속으로 억압되어서, 그것이 일상생활 중에 우리의 반응과 성인으로서 결정을 내리는 데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
일상적인 심리 수준에서 하는 생활의 체험은 외적인 사건들,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정서적 반응들이 우세한 생활체험이다. 어떤 것은 의식적이지만, 그러나 많은 경우는 무의식 안에 뿌리를 박는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질병이며 우리 모두 그 질병을 앓고 있다.
매일의 생활은 행복을 위한 우리의 정서적 프로그램을 좌절시키는 일들을 늘 만들고 있다. 그러면 무서움, 분노, 좌절감 같은 괴롭히는 정서들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난다.
우리의 상상력과 정서가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함게 돌아가도록 만들어진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우리가 어떤 정서로 인해 흥분을 하자 마자 상상력은 즉시 가동되어 미리(무의식 속에) 기록된 메모리 중에서 적합한 것을 골라서 불러 들인다.
이것이 정도는 다르나 우리에게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어떤 가치관은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사람으로 말미암아 도전을 받는다. 즉시 우리는 강한 내적 대화나 정서적 혼동의 와중에 들어간다. 우리가 만일 이 과정을 거꾸로 되돌리지 않으면 그 회전이 일어날 때마다, 이전에 가졌던 것과 같은 행복을 위한 정서적 프로그램과 이에 따라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좌절감이 다시 살아난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 안으로 오신 것이며, 회개하라는 훈계는 우리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 동기를 바꾸고, 다시말해 우리가 지금 행복을 찾고 있는 방향을 바꾸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치료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비교적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떠나보내는 데서 얻는 진정한 행복은 체험하지 못하며 산다.
하나님게서는 영적인 인식이 우리의 정상적인 인식이 되도록 마련하셨다.
일상생활에서의 우리의 인식은 마치 좋은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영화관 안에 있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리기도 한다.
이와 비슷하게 영적 수련이나 훈련을 통하여 행복을 위한 우리의 이기적인 프로그램을 허물어 버리지 않으면, 사건들과 사람들 혹은 계획과 기억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 조차 하지 못한다.
하나님 치료의 일차적인 장소인 관상기도를 할 수 있게 준비시켜 주는 향심기도를 침묵과 고독 속에서 하나님과 나 자신과 함께 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 수련을 통하여 오는 깊은 휴식과 침묵의 결과로 우리의 정서적 프로그램들이 절대적이라 생각했던 것이 상대화되기 시작한다. 그 프로그램들은 아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임재의 확신을 갖지 못할 때 형성된 것이다.
하나님 임재(현존)의 의식은 정녕 안정감을 준다. 더 이상 다른 것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온전하게 확인시켜 준다.
내적 자유는 우리의 집착과 혐오, 고집과 정서적 프로그램들을 떠나 보낼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영적수련을 통하여 영적 인식을 시작한다. 그러면 일상적인 생활은 시시한 영화 같아서 영화관람을 중단하고 일어나 나가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진정한 자유를 저해하는 내적인 폭군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란 어떤 사건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 관상으로 이끌어주는 향심기도나 다른 수련들은 우리를 내적 자유로 이끌어 준다.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열어 드리며 사고를 넘어선 고요한 장소 속에 휴식하도록 만들어 준다. 이러한 장소는 정서적으로 혼돈스러운 날에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다.
이러한 종류의 영적훈련은 거짓 자아의 독재에 대한 치료이다.
일단 정규적인 향심기도의 수련이 형성되면, 각 기도기간 중에 정상적으로 우리의 기능들이 비교적 잠잠하고 조용한 휴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사고들이 의식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지만 그것들을 무시하는 것을 배운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감각을 즐기기 시작한다. 우리의 사고와 정서적 체험 저편에는 우리 존재의 영적수준이라는 깊은 현실이 있다. 이것은 일상적인 심리적인 인식과는 다르며 진실을 아는 또 다른 길이다. 그 결과로, 매일매일의 생활의 평범한 관심들로 부터 우리의 마음이 고요와 휴식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체도 휴식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 휴식은 잠자는 것보다 더 깊은 휴식이다.
향심기도로 얻은 깊은 휴식으로 해서 아동 초기부터 부딪치기 어려웠던 정서적 충격을 억압해 온 방어기제가 풀어지기 시작한다.
향심기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지만 향심기도를 통하여 갖는 깊은 휴식으로 일생동안 가졌던 정서적 잡초들을 풀어 준다. 우리의 방어가 줄어들면 성경의 어두운 면들, 무의식 속의 역동들,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잘못된 프로그램에 부여했던 엄청난 정서들이 올라오며, 또한 우리가 자신의 특정한 문화적 조건화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가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우리의 생애의 전반부는 자신의 역할 -아버지, 어머니, 교수, 의사, 목사, 군인, 사업가, 예술가, 혹은 그 어던 역할을 배우는데 소비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역할을 더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우리가 그 역할을 온전히 충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향심기도 중에 얻는 휴식은 깊은 치유가 이루어지게 한다. 정말로 치유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어두운 면들이 온전히 의식 위로 올라오게 하고, 그것을 떠나보내면서 하나님께 드릴 것이 요구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치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것과 같다. 행복에 대한 우리 자신의 아이디어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한다.
우리의 해야 할 일은 그것들이 우리의 인식을 지나갈 때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며 그것들을 거져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거룩한 단어를 말하거나 아니면 거룩한 경험으로서의 호흡을 의식하면서 원래의 지향으로 되돌아가면 이 과정은 다시 시작된다.
우리는 휴식을 향하여 움직여 가는데 휴식이 깊어지면 무의식에 억압되었던 정서와 사고들이 풀려나온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떤 정신적 구역질 같은 것을 경험하고 나면, 아동 초기에 가졌던 소화 안된 심리적 뭉치들을 벗어 버린 데서 오는 자유의 감각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치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우리 자신과 모든 인간에게 진 빛을 갚기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자라온 문화와 교육 속에 편견과 선입견에 지나치게 동일시 하는 데서 생기는 갈등과 재난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내가 지우는 나의 고집과 요구들을 더나보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성장한 사람이 아닌 어린아이의 마음가짐을 반영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성인은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책임을 지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성인은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다.
영적인 여정은 전문적인 생애나 성공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은 점점 더 심각해지는 거짓 자아를 굴욕 시키는 일련의 작업이다. 이렇게 하는 일은 성령께서 내 안에 오시어 치유하도록 내 안에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든 길을 막던 것들이 점차로 비워진다. 이러면서 우리는 자신의 중심에 더욱더 가까이 가게된다.
때때로 하나님은 커텐 자락을 들치고 우리 인식 안으로 들어오시어 "내가 여기 있다. 너는 어디 있느냐? 나에게 와서 합석하자" 하고 말씀 하시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치유와 맺은 계약이란 성령께서 나 자신에 관한 진실을 보여주시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준비되었다고 하나님께서 결정을 내리시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수준의 자아지식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서 떠나버리셨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임재는 떠나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존재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채우고 계시기 때문이다.(토마스 아퀴나스의 말)
믿음은 하나님의 맛을 보지 못한 채 그저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신념만으로 남는다. 우리가 신뢰하는 분이 누구신지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영적 여정을 시작하고 나면 그 뒤에는 언제나 어둡고 혼동되고, 그리고 속박을 주는 전환기가 뒤 따른다. 그리고는 평화로우면서 새로운 내적 자유를 즐기고, 또 새로운 내적 통찰의 경이를 맛보는 기간이 온다. 이렇게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정서적 쓰레기의 맨 밑바닥에 가면 무엇이 생기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과 일치의 상태에 들어간다. 그기에는 다른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을 어떤 역할이나 인격과 동일시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 임재의 순수함을 들어낼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당신이 동일시하고 있는 어던 역할을 떨쳐 버리는 과정이 삶의 부분이다. 당신의 정서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몸은 당신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이러한 것들이 아니라면 당신은 누구인가? 이것이 영적 여정의 후반부의 질문이다.
영적 여정은 하나의 나선형 계단과 같다. 그것은 내려가면서 또한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가 거짓자아의 굴욕을 받아 들이면서 겸손으로 향해가는 모든 움직임은 또한 내적 자유와 내적 부활로 향하여 한단계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새 자유는 통제하는데 있는 자유가 아니라우리가 가진 행복의 아이디어에 꼭 필요하다고 믿었던 것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 자유이다.
하나님의 치유는 오직 하나님 만이 생각하실 수 있고. 하나님 만이 사람들에게 그것을 하라고 설득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기회는 주어진다. 그리고 이 초대에 어떤 순위를 두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다.
자신의 역할을 궁극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은 자아를 어떤 기준의 점에 고정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독특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는 자유를 말한다. 그런데 영적 여정에서 바닥은 정상이기도 하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된다는 것과 같다.
무아에 이르면 참 자아에 이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 모든 것이 되는 길이다.
어떤 의미로는 그것이 하나님이 되는 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게 다섯째 복음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행복을 위한 정서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그리고 가장 영적인 역할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역할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의 거짓 자아를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면 당신은 자신의 자아가 비워지면서 하나님으로 채워진 공간 안에 있는 것이다.
영적 나선형 계단 대신 할 최소한 다른 하나의 길이 있다. 그것은 엄청난 비극과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통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가장 혹독한 고뇌와 아픔을 통해서 똑같은 곳으로 인도하신다.
만일 우리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아직 체험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할 일이 아직 더 남아 있다. 왜냐하면 무조건적인 사랑이 바로 "우리가 진정 누구인가?" 이기 때문이다.
GOD Bless you
1. 인간조건
"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이 물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변함이 없다.
어떤 경우는 인생이 너무 비극적이어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결정할 자유마져 잃어버리는 수가 있다.
관상기도 중에 경험하는 은총의 힘은 우리가 모르고 있던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현존을 기억시켜 주도록 마련되어 있는 것들이다.
하나님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가장 위대한 현실은 하나님의 현존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내적 생명이 그것에 조율하는 정도만큼만 그 임재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귀를 기울여 듣는 그리스도인의 전통이 매우 중요하며,
그 들음은 성령의 임재 안에서 성경과 함께 앉아서 성령께서 우리의 듣는 능력을 더욱 깊게 만드시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외적으로 듣는 말씀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임재를 일깨우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아주 부드럽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 느낌이 점차로 강해지고 더욱 확산되면, 에덴 동산의 하나님과 아담하와의 친밀한 관계의 상태로 점차 되돌아가게 된다.
2. 관상과 하나님의 치료.
"너는 누구인가?"
이것이 영적 여정의 후반부에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모두 자그마한 정서적 욕구 중 특히 안전과 생존, 애정과 존중, 힘과 통제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욕구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유아들은 우울증과 무감각증에 빠지고 마침내는 심리적인 기아 상태로 죽어 가게 된다.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는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러한 생물적 욕구들이 상상적이거나 실제적이든 간에 충족되느냐 결핍되느냐에 따라 이후의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서적 욕구를 충족함으로써 행복을 찾기 위해 쏟는 에너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유아기에 거부되었다는 경험을 하게 되면 이 고통 스러운 감각은 무의식 속으로 억압되어서, 그것이 일상생활 중에 우리의 반응과 성인으로서 결정을 내리는 데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
일상적인 심리 수준에서 하는 생활의 체험은 외적인 사건들,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정서적 반응들이 우세한 생활체험이다. 어떤 것은 의식적이지만, 그러나 많은 경우는 무의식 안에 뿌리를 박는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질병이며 우리 모두 그 질병을 앓고 있다.
매일의 생활은 행복을 위한 우리의 정서적 프로그램을 좌절시키는 일들을 늘 만들고 있다. 그러면 무서움, 분노, 좌절감 같은 괴롭히는 정서들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난다.
우리의 상상력과 정서가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함게 돌아가도록 만들어진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우리가 어떤 정서로 인해 흥분을 하자 마자 상상력은 즉시 가동되어 미리(무의식 속에) 기록된 메모리 중에서 적합한 것을 골라서 불러 들인다.
이것이 정도는 다르나 우리에게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어떤 가치관은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사람으로 말미암아 도전을 받는다. 즉시 우리는 강한 내적 대화나 정서적 혼동의 와중에 들어간다. 우리가 만일 이 과정을 거꾸로 되돌리지 않으면 그 회전이 일어날 때마다, 이전에 가졌던 것과 같은 행복을 위한 정서적 프로그램과 이에 따라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좌절감이 다시 살아난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 안으로 오신 것이며, 회개하라는 훈계는 우리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 동기를 바꾸고, 다시말해 우리가 지금 행복을 찾고 있는 방향을 바꾸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치료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비교적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떠나보내는 데서 얻는 진정한 행복은 체험하지 못하며 산다.
하나님게서는 영적인 인식이 우리의 정상적인 인식이 되도록 마련하셨다.
일상생활에서의 우리의 인식은 마치 좋은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영화관 안에 있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리기도 한다.
이와 비슷하게 영적 수련이나 훈련을 통하여 행복을 위한 우리의 이기적인 프로그램을 허물어 버리지 않으면, 사건들과 사람들 혹은 계획과 기억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 조차 하지 못한다.
하나님 치료의 일차적인 장소인 관상기도를 할 수 있게 준비시켜 주는 향심기도를 침묵과 고독 속에서 하나님과 나 자신과 함께 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 수련을 통하여 오는 깊은 휴식과 침묵의 결과로 우리의 정서적 프로그램들이 절대적이라 생각했던 것이 상대화되기 시작한다. 그 프로그램들은 아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임재의 확신을 갖지 못할 때 형성된 것이다.
하나님 임재(현존)의 의식은 정녕 안정감을 준다. 더 이상 다른 것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온전하게 확인시켜 준다.
내적 자유는 우리의 집착과 혐오, 고집과 정서적 프로그램들을 떠나 보낼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영적수련을 통하여 영적 인식을 시작한다. 그러면 일상적인 생활은 시시한 영화 같아서 영화관람을 중단하고 일어나 나가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진정한 자유를 저해하는 내적인 폭군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란 어떤 사건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 관상으로 이끌어주는 향심기도나 다른 수련들은 우리를 내적 자유로 이끌어 준다.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열어 드리며 사고를 넘어선 고요한 장소 속에 휴식하도록 만들어 준다. 이러한 장소는 정서적으로 혼돈스러운 날에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다.
이러한 종류의 영적훈련은 거짓 자아의 독재에 대한 치료이다.
일단 정규적인 향심기도의 수련이 형성되면, 각 기도기간 중에 정상적으로 우리의 기능들이 비교적 잠잠하고 조용한 휴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사고들이 의식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지만 그것들을 무시하는 것을 배운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감각을 즐기기 시작한다. 우리의 사고와 정서적 체험 저편에는 우리 존재의 영적수준이라는 깊은 현실이 있다. 이것은 일상적인 심리적인 인식과는 다르며 진실을 아는 또 다른 길이다. 그 결과로, 매일매일의 생활의 평범한 관심들로 부터 우리의 마음이 고요와 휴식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체도 휴식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 휴식은 잠자는 것보다 더 깊은 휴식이다.
향심기도로 얻은 깊은 휴식으로 해서 아동 초기부터 부딪치기 어려웠던 정서적 충격을 억압해 온 방어기제가 풀어지기 시작한다.
향심기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지만 향심기도를 통하여 갖는 깊은 휴식으로 일생동안 가졌던 정서적 잡초들을 풀어 준다. 우리의 방어가 줄어들면 성경의 어두운 면들, 무의식 속의 역동들,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잘못된 프로그램에 부여했던 엄청난 정서들이 올라오며, 또한 우리가 자신의 특정한 문화적 조건화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가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우리의 생애의 전반부는 자신의 역할 -아버지, 어머니, 교수, 의사, 목사, 군인, 사업가, 예술가, 혹은 그 어던 역할을 배우는데 소비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역할을 더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우리가 그 역할을 온전히 충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향심기도 중에 얻는 휴식은 깊은 치유가 이루어지게 한다. 정말로 치유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어두운 면들이 온전히 의식 위로 올라오게 하고, 그것을 떠나보내면서 하나님께 드릴 것이 요구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치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것과 같다. 행복에 대한 우리 자신의 아이디어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한다.
우리의 해야 할 일은 그것들이 우리의 인식을 지나갈 때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며 그것들을 거져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거룩한 단어를 말하거나 아니면 거룩한 경험으로서의 호흡을 의식하면서 원래의 지향으로 되돌아가면 이 과정은 다시 시작된다.
우리는 휴식을 향하여 움직여 가는데 휴식이 깊어지면 무의식에 억압되었던 정서와 사고들이 풀려나온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떤 정신적 구역질 같은 것을 경험하고 나면, 아동 초기에 가졌던 소화 안된 심리적 뭉치들을 벗어 버린 데서 오는 자유의 감각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치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우리 자신과 모든 인간에게 진 빛을 갚기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자라온 문화와 교육 속에 편견과 선입견에 지나치게 동일시 하는 데서 생기는 갈등과 재난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내가 지우는 나의 고집과 요구들을 더나보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성장한 사람이 아닌 어린아이의 마음가짐을 반영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성인은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책임을 지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성인은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다.
영적인 여정은 전문적인 생애나 성공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은 점점 더 심각해지는 거짓 자아를 굴욕 시키는 일련의 작업이다. 이렇게 하는 일은 성령께서 내 안에 오시어 치유하도록 내 안에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든 길을 막던 것들이 점차로 비워진다. 이러면서 우리는 자신의 중심에 더욱더 가까이 가게된다.
때때로 하나님은 커텐 자락을 들치고 우리 인식 안으로 들어오시어 "내가 여기 있다. 너는 어디 있느냐? 나에게 와서 합석하자" 하고 말씀 하시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치유와 맺은 계약이란 성령께서 나 자신에 관한 진실을 보여주시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준비되었다고 하나님께서 결정을 내리시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수준의 자아지식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서 떠나버리셨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임재는 떠나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존재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채우고 계시기 때문이다.(토마스 아퀴나스의 말)
믿음은 하나님의 맛을 보지 못한 채 그저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신념만으로 남는다. 우리가 신뢰하는 분이 누구신지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영적 여정을 시작하고 나면 그 뒤에는 언제나 어둡고 혼동되고, 그리고 속박을 주는 전환기가 뒤 따른다. 그리고는 평화로우면서 새로운 내적 자유를 즐기고, 또 새로운 내적 통찰의 경이를 맛보는 기간이 온다. 이렇게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정서적 쓰레기의 맨 밑바닥에 가면 무엇이 생기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과 일치의 상태에 들어간다. 그기에는 다른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을 어떤 역할이나 인격과 동일시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 임재의 순수함을 들어낼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당신이 동일시하고 있는 어던 역할을 떨쳐 버리는 과정이 삶의 부분이다. 당신의 정서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몸은 당신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이러한 것들이 아니라면 당신은 누구인가? 이것이 영적 여정의 후반부의 질문이다.
영적 여정은 하나의 나선형 계단과 같다. 그것은 내려가면서 또한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가 거짓자아의 굴욕을 받아 들이면서 겸손으로 향해가는 모든 움직임은 또한 내적 자유와 내적 부활로 향하여 한단계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새 자유는 통제하는데 있는 자유가 아니라우리가 가진 행복의 아이디어에 꼭 필요하다고 믿었던 것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 자유이다.
하나님의 치유는 오직 하나님 만이 생각하실 수 있고. 하나님 만이 사람들에게 그것을 하라고 설득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기회는 주어진다. 그리고 이 초대에 어떤 순위를 두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다.
자신의 역할을 궁극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은 자아를 어떤 기준의 점에 고정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독특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는 자유를 말한다. 그런데 영적 여정에서 바닥은 정상이기도 하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된다는 것과 같다.
무아에 이르면 참 자아에 이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 모든 것이 되는 길이다.
어떤 의미로는 그것이 하나님이 되는 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게 다섯째 복음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행복을 위한 정서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그리고 가장 영적인 역할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역할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의 거짓 자아를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면 당신은 자신의 자아가 비워지면서 하나님으로 채워진 공간 안에 있는 것이다.
영적 나선형 계단 대신 할 최소한 다른 하나의 길이 있다. 그것은 엄청난 비극과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통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가장 혹독한 고뇌와 아픔을 통해서 똑같은 곳으로 인도하신다.
만일 우리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아직 체험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할 일이 아직 더 남아 있다. 왜냐하면 무조건적인 사랑이 바로 "우리가 진정 누구인가?" 이기 때문이다.
GOD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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