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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기도, 묵상, 관상.

수도관상피정 토마스 머턴............... 조회 수 2535 추천 수 0 2008.10.16 18: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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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Robert 「Inchausti」, Seeds, 강창현 역, 「토마스 머턴의 씨앗」, (서울 : 생활성서사, 2005), pp, 112-134.

  만일 우리가 정말로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속도로 느리게 가야하고, 그럴 때면 우리는 듣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가 듣기 시작하는 순간, 사물들은 스스로 꼴을 갖추기 시작할 것이다. 선(禪) 수행자들은 바로 이런 일을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할 필요가 있는 것이면 어떤 일에든 많은 시간을 투여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투여해야만 한다. 참으로 중요한 문제는, 삶에서 어떻게 최상의 것을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온전히 내어놓기 위하여 어떻게 자신을 성찰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우리를 기도의 삶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우리는 정말로 기도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와 직면해야한다. 이에 앞서서 우리는 기도에 완전히 전념하겠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누군가가 우리를 멈추게 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 위험은 실제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의 위대한 점은 기도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간다는 것이다. 당신의 기도가 기도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을 잘라버려라. 예수께서 기도하도록 허락하라. 예수께서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당신 자신은 잊어버려라. 예수님의 기도 안으로 들어가라. 그분이 당신 안에서 기도하도록 허락하라.
  최선의 기도는 멈추는 것이다. 당신 안에서 기도가 기도를 하도록 허락하라, 당신이 그것을 알든지 모르든지, 이것은 당신의 참된 내적 정체성을 깊이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수준이 따로 없다. 어느 순간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인 근원적 일치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끝에는 찬미가 찬미한다. 감사가 감사를 드린다. 예수께서 기도하신다. 열림이 전부다. (CNP 56-57)

  모든 기도와 독서와 묵상과 수도 생활은 마음의 순결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 마음의 순결이란, 조건 없이 전적으로 겸손하게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상황을 그분의 뜻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온갖 망상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온갖 과분한 평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뜻은 명확한 진실 속에서 생활하라는 어려운 요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마음의 순결은 하나의 새로운 영적 정체성,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실재의 맥락 안에서 인식된   '자아'와 상호 관계를 갖는다. 마음의 순결은 '옛 인간' 의 고정 관념 및 밝은 환상과는 대립되는 새로운 인간의 각성된 의식이다.
  그러므로 묵상은 이 새로운 통찰, 더 높은 견지에서 본 자아에 대한 직관을 향하고 있다. (CTP 68)

  우리는 새로운 기도 언어를 창조하려고 한다. 이 새로운 기도 언어는 우리의 모든 전통을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부터, 직접적인 사랑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Af 318)

  위대한 것은 기도 자체이다. 만일 당신이 기도의 삶을 원한다면 기도함으로써만 그 길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방법과 목적을 너무 많이 주입받아서 기도의 삶에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기술을 습득하는 경우라면 당신은 한 지점에서 출발해서 그 다음 다른 지점으로, 그리고 또 다른 지점으로 옮겨 가야한다. 그러나 기도의 삶을 일구는 방식은 이와 다르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당신은 당신이 있는 자리에서 출발하며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심화한다. 그리고 당신은 이미 거기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CffP 56)

  분심이 든 적이 없다면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기도의 비결은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 뵙기를 갈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갈망은 언어나 감정보다 훨씬 깊은 단계에 있다. 때로는 쓸데없거나 해롭기까지 한 생각으로 가득 차 번민하는 사람이, 자신의 상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명확한 개념과 빛나는 목적과 부드러운 사랑의 행위로 넘치는 마음의 소유자보다 훨씬 더 열심히 기도하라는 추궁을 받을 수 있다.
  분심이 일어도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없을 때 속상해하여도 아무소용이 없다. 기도 생활에서 흔히 생기는 분심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임을 깨닫는 것이 우선적으로 할 일이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무모하고 허무한 생각에 시련을 당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은 관상 생활의 기본 시련 중 하나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에 매달리듯 이런 시련을 피하기 위하여 책을 읽고 또 그 글귀에 매달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를 단순한 영적 독서로 대치한다면 엄청난 열매를 잃을 것이다. 오히려 인내심을 가지고 분심과 싸워 이기고 자기의 무력함과 무능력을 조금이라도 배우면 많은 이득이 된다. 책이 묵상을 돕기보다 마취제의 억할밖에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책은 묵상을 망치고 말 것이다.(NS 221-222)

  기도와 묵상은 새로운 길과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언제나 친숙하고 '안전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깊고 간절한 열망이고 은총으로 감화 받은 것이라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실 것이고, 우리가 아직 상상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기도 안에서 준비하심으로써 우리를 통해 교회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기도와 신앙은 이러한 방식으로 미래를 향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 미래를 지상에서는 결코 온전히 깨닫지 못할 것이다. (CIWA 164-165)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 모든 면에서 자기 성소에 대한 도전을 그 자체의 깊이에서 뼈저리게 느끼는 수도자는,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실존적 전율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 안에서 공허, 진실성의 결함, 성실성의 추구, 현대인의 '상실 등을 체험하고 있으나, 현대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체험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더욱 깊은 형태로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체험한다. 현대인에게는 자신과 그의 세계에 대한 이러한 의식의 혼란이 오히려 권태와 영성적인 방황, 상실에 대한 체험처럼 나타난다. 허공이 암담한 절망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같이 보이는 가장 심오하고 가장 중심에 가까운 곳에서 수도자는 자신의 인간성과 자신의 세계를 마주 대하게 된다. 마치 카뮈적 인간이 '부조리'에 직면하고 이것을  그의 자유로 초월하는 것처럼, 수도자는 이 심각한 가능성에 직면하고 또 그 가능성을 거부한다. 절대적 절망에 대한 선택은 수토자기도의 순수하고 겸손한 간구로서 완전한 희망으로 바뀌게 된다. 수도자는 최악의 경우, 그 안에서 최선의 희망을 발견한다. 어둠으로부터 빛이 온다. 죽음에서 생명이 온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심연으로부터, 모든 것을 새롭게 하고, 창조되고, 구원된 세계를 변화시키고,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재건하기 위하여 하나님이보내신 신비로운 성령의 은총이 출현한다. 바로 이것이 수도자의 창조적이고 치유적 활동이다. (CTP 25)

  가장 순수한 기도란, 기도가 끝난 후에도 생각해 낼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은총이 사라져 버려도, 우리는 그것이 다른 질서에 속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성찰하면 오히려 손상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을 성찰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한 기도는 어떤 증거도, 심지어는 자기 영혼의 증거조차도 바라지 않는다. 그 경험은 치유되지 않는 상처처럼, 우리의 영혼 속에 남아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려 한다면, 이 살아 있는 상처는 지식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지식의 장애물, 곧 영혼을 덮친 침묵의 봉인이 되어 말과 생각으로 가는 길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다. (NM450-51)

  묵상의 목표는 크게 하나로 집약된다. 곧, 우리의 내적 자아를 일깨워 성령과 일치함으로써 그분의 은총에 응답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묵상 기도를 통해 내적 지각력을 닦고 정화시켜야만 한다. 더불어 뜻밖에 불어 닥친 은총의 움직임에 함께해야 하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영성 생활에 대한 우리의 선입관과 전혀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야심 찬 열망을 곧추 세울 줄도 모른다.
  위로의 은총은 물론 우리를 겸손하게 이끄는 은총에 대해서도 우리는 협조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한다. 그러니까 우리를 우쭐하게 하는 은총뿐 아니라 자기만족을 여지없이 짓밟는 은총에 대해서도 말이다. 기도에 냉담해지고 무뎌지는 까닭은 대체로 은총에 무의식적으로 대항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무감각해져 결국 우리는 은총을 감지하지 못하게 된다.
  묵상은 하나님의 뜻과 활동에 자신을 위탁하도록 이끈다. 묵상은 자기를 포기하고 성령께 순종하도록 이끈다. 하나님의 뜻에 화합하지 않으려는 이의 묵상은 결국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고 추상적인 묵상으로 끝난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나님과 일치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화합하기를 기도하는 이는 보상으로 은총을 얻게 될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런 묵상이 우리 삶을 성화시킨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충실하게 묵상한 사람은 결코 자기의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SD&M 85-86)

  우리는 묵상할 때, 우리의 노력으로 '은총'과 '자비'와 '신앙'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행위에 뒤따르는 당연한 권리처럼 항구하게 보존되고 변치 않는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이것들은 항상 새로워지는 선물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은총의 생명을 우리에게 대한 당신의 사랑 안에서 직접적으로, 당신 친히 때에 따라 새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묵상의 은총'은 (마음의 기도라는 뜻에서) 역시 하나의 특별한 선물이다. 절대로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록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항구히 부여된 '습성' 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가 이것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원의를 생각하지 않고 우리 뜻대로, 완전히 자율적으로 혹은 자의적인 태도로 권리를 주장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록 자연적인 선물은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기도의 선물은 다른 은총, 즉 겸손의 은총과 불가분한 것으로 우리 존재와 생명의 심저가 그 원천이요, 목적이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고 또한 실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CTP 69-70)

  묵상이란 이중의 기능을 지닌 이중훈련이다. 첫째, 묵상은 정신과 기억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게 해주어서 자신을 반성하고 외적사물과 사업, 활동과 생각 그리고 현세의 것들로부터 물러설 수 있게 해준다. 둘째, 묵상은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는 방법을 알려 준다. 이것이 묵상의 진짜 목적이다. 무엇보다도 묵상은 하나님께 대하여 끊임없는 사랑의 관심과 신뢰를 갖도록 이끄는 것을 목표로 한다. (NS 217)

  무익한 내적 행위는 끊임없이 환상을 둘러싸고 변호한다. 이 무익한 행위를 포기하지 않는 한 나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변호하는 환상을 흘려 보내지 않는 한, 나는 이러한 행위를 포기할 수 없다. 내가 환상을 환상으로 인식하지 않는 한, 나는 환상을 제거할 수 없다. (NM 232)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가차없는 심판의 빛을 피할 수 있게 하는 거짓 평화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에게 계시된 혹독하고 쓰라린 진리를 용감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이다. 도와주시기를 열렬히 기도하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모든 노력에 자신을 너그럽게 헌신하면서 우리의 무기력, 우리의 이기심을 버리고 성령의 요구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은총이다.
  '어느 지점에 도달하였다.'는 착각, 안전한 상태를 이뤘고, 어떤 역할을 해냄으로써 안정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단순한 착각을 일으키는 묵상 방법이나 관상 형태는 결국 버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바리사이같이 근접할 수 없는 오만에 빠져 자기 과신으로 굳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심오한 진리에도 무감각해질 것이며, 또한 우리의 착각에 동조하지 않는 모든 이에게 문을 닫을 것이다. 존경할 만하고 물들지 않는 우리의 정체성을 그들이 허락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선'하게 될 수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선한 삶' 이 아니다. 이러한 '선함'의 삶은 상당한 재물, 오락, 영성적 안락 그리고 신심에 대한 확고한 평판이 제공하는 안전에 의존한다. 이와 같은 '선함'은 일상사에 의해서, 그리고 실제로는 중요한 도전이 되는 심각한 위험을 습관적으로 피함으로써만 보존된다. (CTP 103-104)

  묵상을 통해 나는 내 삶의 심오한 곳에 침투하고 있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원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 그분께 대한 나의 절대적 의존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침투는 진실이어야 한다. 이것은 내가 참되게 생활하는 무엇이라야 한다. 이것은 내  삶에 관한 나의 모든 관념과 나의 목적이 얼마나 참된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계있다. 그러나 현재 살고 있는 사회의 외적 행동 규범에만 내 행동을 부합시키려고 한다면, 나의 삶과  목적은 피상적이고 인위적인 것이 되고 만다. 결국 이는 하나의 역할을 배우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결과를 남는다. 때로는 묵상 방법과 그 프로그램들이 단순히 종교적 역할을 이행하는 것을 익히는 데 목표를 두기도 한다. 그리스도와 성인들을 '모방' 한다는 생각도, 만일 그것이 외적으로만 머문다면 순전히 흉내내기에 그칠 위험이 크다. (CTP 68-69)

  마치 우리의 개별적 자아가 우리 행동의 원천이요 목적인 것처럼 여겨서 우리 존재와 자연적 능력을 완전히 자율적인 방식으로 향유하고 사용한다면, 우리는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이며 우리의 행동이 아무리 자연스럽게 보여도 그것은 영적 의미와 진정성이 결여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우리의 허무와 무능을 깨달으면서 묵상을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슬프고 절망적 체험일 필요는 없다. 반대로 이 체험은 우리를 모든 즐거움과 모든 생명의 근원과 직접 접촉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깊은 평화와 환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묵상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허무의 중심부로 귀환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분과 우리와의 관계는 가장 깊은 현실 속으로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초연한 객관적 견지에서 종교적 진리를 고찰하면서 단지 마음으로, 상상으로, 혹은 기껏해야 열망으로만 묵상하려 한다. 묵상은 '우리 마음을 발견하고' 찾으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묵상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 정체성의 터전에 대한 깊은 깨달음 속에 잠기는 것이라야 한다. '우리 마음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가장 깊은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되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외면적이고 일상적인 자아가 많은 점에서 하나의 가면이고 조작임을 인식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것은 우리의 참 자아가 아니다. 우리의 참 자아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둠과 '허무' 안에,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속해 있는 그 중심부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 묵상의 현실은 이것을 인식하는 데 달려 있으므로, 사실 이것 없이 묵상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자기 모순이다. 마치 발이 없이 걸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CTP 70-71)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조건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마저도 하나의 은총이다. 그리고 우리가 원할 때마다 항상 이 깨달음에 도달할 수는 없다. 묵상을 배운다는 것은, 어떤 인위적 기술을 익혀서 하고 싶을 때는 언제나 '참회'와 허무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폭력의 결과가 될 뿐 진실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묵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주려 하실 때 언제든지 이 은총을 받기 위한 역량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겸손으로 향한 항구한 마음의 태도, 현실성과 감수성과 유연성을 향한 주의력을 포함한다. 묵상을 배운다는 것은, 단순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혹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요구를 거절하는 데서 비롯되는 마음의 습관적인 완고함과 정신적 마비와 과장에서 서서히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한다.
  만일 실제로 우리 마음이 눈에 띌 만큼 무관심하고 냉담한 채로 있으며, 이 방법으로 묵상을 '시작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때는 이 냉담 자체가 우리의 궁핍과 무력함의 표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것을 기도를 위한 하나의 동기로 여겨야 할 것이다. 역시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관습에 떨어지고 만다는 것과, 하나님의 은총 없이 우리의 자발성을 회복할 길이 없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은총을 위하여 인내로, 그러나 열렬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 기다림 자체가 우리에겐 하나의 겸손을 배우는 학교가 될 것이다. (CTP 71)

  이미 여러 구획으로 분리된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다른 구획마저 막아 버리고 이 구획이 다른 모든 구획들보다 더 중요하니 이제부터는 그 구획을 다른 구획들로부터 분리하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당황스럽고 산만한 서구인들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묵상으로 돌진할 때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동양 전통들은 묵상하는 사람을 더 자연스럽게 배려하는 이점이 있다.
  묵상에 대하여 생각하기 전에 당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리된 당신의 존재가 협력적이고 단순한 전체로 들어갈 수 있도록, 당신의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통일성을 회복하여 통합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말은 당신이 '나'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당신이 발설한 그 '나'를 지원하는 누군가가 정말로 있기 때문에, 당신의 산란한 실존의 파편들을 함께 모아 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CQR 3)

  묵상으로 가는 가장 일반적인 관문은 무미건조한 사막을 통과하는 것이다. 비록 당신이 그 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내면의 고통과 근심만 자각하게 되더라도, 안정과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은 이 어둠과 메마름 속에 빠지고 붙들린다. 진보해 감에 따라 당신은 메마른 정적 속에서 쉬는 법을 배우며, 위로를 주시는 엄청난 현존이 이 체험의 중심에 있다는 확신이 더욱 커진다. 당신은 그 현존이 어떤 빛 속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는다. 그러나 그 빛은 당신의 본성과 당신 본성이 지닌 모든 능력에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의 모든 능력을 무한히 넘어서고, 그 빛의 순수함은 당신의 이기심과 어둠과 불완전과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NM 275-276)

  어떤 면에서 관상기도는 사막, 공허함, 가난을 단순하게 택하는 것이다. 어둡고 무미건조한 미지의 오솔길을 다른 모든 길보다 더 좋아하면서 직관적으로 또한 자발적으로 그 길을 찾을 때 이미 그 사람은 관상의 의미를 알기 시작하는 것이다. 관상가는 아는 사람이기보다 모르는 사람이며, 즐기는 사람이기보다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시험하려 들지 않는다. 드러난 모든 현상을 꺼리지 않고, 신앙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하나님의 현존과 우리를 위한 사랑의 실재라는 신비를 체험하는 데 필수적이면서도 매우 역설적 조건이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욕망들, 곧 보려고 하고, 알려고 하고, 맛보려고 하고,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려고 하는 모든 욕구를 '내던질 수 있을 때' 에만, 우리는 저항할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이 현존을 체험할 수 있으며, 우리의 모든 내적 생활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는 실재를 참으로 맛볼 수 있다. (CTP 89)

  관상 생활이란 '거기' 에 무언가가 있어서 주변을 더듬거리다 결국에는 획득하게 되는 어떤 객관적인 무엇이 아니다. 관상 생활은 우리의 주체적 실존에 대한 하나의 차원이다. 관상 생활의 발견은 새로운 자기 발견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단순한 심리학적 발견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으며 자아 상실 안에서만 발견되는 심오한 정체성의 발현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자아를 상실함으로써 자아를 찾는 것은 '관상'의 일부이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 (마 16;25)이라는 복음 말씀을 기억하라. (CIWA 340)

  관상이란 사람의 지적 · 영성적 삶의 최고 표현이다. 관상은 깨어 활동하며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생명자체이다. 그것은 영적 놀라움이다. 생명과 존재의 거룩함에 대하여 저절로 우러나오는 경외이다. 그것은 생명, 깨달음, 존재에 대한 고마움이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과 존재가 비가시적이고 초월적인 원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닫는 것이다. 관상은 무엇보다도 그 원천의 실상을 의식하는 것이다. 관상은 그 원천을 설명할 수 없지만 희미하게, 그러나 이성과 단순한 믿음을 넘어서 확실히 안다. (NS 1)

  관상이란 외적 자아 기능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관상에서만 깨어나는 깊은 초월적 자아와 우리가 보통 일인칭 단수로 동일시하는 피상적인 외적 자아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대립이 있다. 이런 피상적 '나'는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우리의 '개체성' 이며 '경험적 자아'이지, 하나님 앞에 존재하는 우리 안에 숨겨진 신비로운 인격이 아니다. 세상에서 일하고 생각하며 자신의 반응을 관찰하며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는 진정한 '나'가 아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우리 대부분이 죽기 전에는 찾지 못하는 신비스럽고도 알려지지 않은 '자기'의 흔적, 가면,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외적 피상적 자아는 영원하지도 않고 영성적이지도 않다. 그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자아는 결국 굴뚝에서 나는 연기처럼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대단히 연약하고 덧없는 것이다. 관상은 이런 '나'는 진정으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고 관찰과 반성의 범주를 넘어서는, 설명할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나' 에 대한 일깨움이다. 말이 많은 사회에서 그것은 본래 숨겨져 있고 이름도 없으며 알려지지도 않기 때문에 감히 자신을 가지고 '나'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세상에서 진정한 '나'는 뚜렷하게 말로 할 수 없으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것은 할 말이 너무 많으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해당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기 때문이다. (NS 7)

  관상의 길이란, 결코 은밀한 체험을 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자기를 비우는 '기술'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부르심에 대한 역설적 응답이요, 우리를 고독 속에 밀어 넣고 암흑과 침묵 속에 잠기게 한다. 이것은 우리를 위험에서 물러나게 하고 보호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오히려 사랑과 능력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험을 통하여 우리를 안전하게 이끌고 가는 것뿐이다. 사실 관상의 길은 길이 아니다. 그리스도 홀로 길이시며, 그분은 볼 수 없다. 관상을 '사막' 이라 하는 것은 빈 마음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단순한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상태는 우리가 모든 길들을 버리고 자신을 잊고 그리고 볼 수 없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길이 되었을 때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CTP 92)

  관상가가 되려면 우선 자기 분수를 제대로 지키는 법을 배워야한다. 성스럽게 보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회개시키겠다고 안달하는 것처럼 석연치 않은 것도 없다.
  성찰을 하는 데 있어서 심각한 장애는 자기에게 맡겨지지도 않은 사람들을 지도하려는 열정, 부탁도 받지 않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는 열정, 자기의 권한 밖에 있는 사람을 바로잡으려는 열정이다. 당신은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남의 문제에 대한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끊어 버려야 한다.
  가능한 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하고, 그들의 타고난 허물과 괴팍함에도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발아야 한다. (NS 255)

  관상 생활은 반드시 자유와 침묵의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이 공간 안에서 가능성들이 표출될 수 있고 일상적인 선택을 넘어서는 새로운 선택이 드러난다. 이러한 공간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창조해야 하며, 스스로 존재 가치를 일으켜야 한다. 여기서 새로운 체험이란, 잠정적이거나 그저 고요한 시간에 대한 체험이 아니라, '순수한 시간(temps vierge)'의 체험이다.
  관상 생활이 제공하는 공간은 채워져야 하는 빈 공백이 아니고, 정복되거나 침해받지 않아서 손상되지 않은 공간이 아니며, 공간자체의 잠재력과 희망을 즐길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순수한 시간이란 인간의 고유한 시간이다. 그러나 이 시간은 인간의 자아(ego)와 그 자아의 요구에 지배받지 않는 연민의 시간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열려 있으며, 공동의 착각과 비판을 이해하는 마음속에 뿌리박혀 있다. (Al 117)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누구의 안내도 받지 않는 관상가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믿는다. 그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훌륭하고 열광적이며 기분 좋은 내적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기분이 좋고 열광적으로 느끼면 느낄수록 그는 자기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자신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또 자기가 정말 성인이라는 인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준다면 그런 사람은 도시나 수도회, 또는 나라까지도 파괴할 수 있다. 세상은 이런 환상에 의한 상처로 덮여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별다른 해를 주지 않는 따분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막다른 골목을 배회하다가 개인감정의 아늑한 안식처에 안주한다. 아무도 그런 사람을 진정으로 부러워하거나 동경하지 않는다. 영성 생활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도 그들이 현실에 대하여 스스로를 기만하고 헛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지만 실상 행복을 시사하거나  전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평화스러워 보이지만 그들의 평화는 겉치레일 뿐이고 들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할 말도 많다. 그들이 말을 했다하면 '최상급'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도 설득하지 못한다. 그들은 순수한 믿음이 요구하는 철저한 희생보다는 쾌락과 감정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은 성화되지 못한다. 즉, 참된 관상의 불꽃이 꺼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관상의 어둠으로 인도하신다면, 자기 의지의 거짓된 달콤함 속에 안주할 수 없다. 자기 위안이라는 잘못된 내적 만족과 자기의 판단에 대한 절대적 확신에 철저히 속을 수도 없다. 약간 불편을 느끼고 속이 거북해서 트림을 해 독을 뿜어낸다. (NS194-196)

  다음 단계가 오면 당신은 그 단계로 들어가지 않고 다음 단계로 접어드는 전이 과정을 모르며, 어면 것에도 뛰어들지 않는다. 아무 곳에도 가지 않는다. 그래서 온 길도 모르고 나중에 되돌아갈 길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날지도 못한다. 공간이 없거나, 아니면 모두가 다 공간이다. 어떻든 아무상관이 없다.
  다음 단계는 하나의 단계가 아니다. 한 등급에서 다른 등급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 일어나고 있는 일은 '당신'이라는 독립 개체가 확실히 사라지고 무한한 자유(하나님)와 구별이 되지 않는 순수한 자유, 사랑(하나님)과 일치한 사랑밖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것과 같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기다리고, 찾고 얻으려 하는 두 가지의 사랑이 아니고, 자유롭게 사랑하는 사랑이다.
  이것을 체험이라고 하겠는가? 사람의 기억 속에서만 체험이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일어나는 어떤 일이라고 말하는 것까지도 잘못인 것 같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 일이 일어나는 주체가 있어야하며, 경험도 경험의 어떤 주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열되고 한정된 피조물의 체험 주체는 이미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당신이 아니라 성과이다. 원한다면, 당신은 체험을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체험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반성하거나 체험한다거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판단하는 그런 모양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영원한 것도, 불변의 것도 아니며 영원히 정지하고 있을 만큼 엄청나게 큰 활동도 아니다.
  이쯤 되면 모든 형용사는 그 의미를 잃고 만다. 말마디들은 뜻을 잃는다. 하는 일마다 토를 붙이며 "이것은 그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하고 말해 주지 않으면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은유는 이제 아무 소용도 없게 되었다. '어둠' 에 대하여 말을 해야 한다면 말해 보라. 그러나 어둠에 대한 생각은 이미 포화 상태가 되었고 조잡한 것으로 꽉 차 있다. 어쨌든 그 어둠은 이미 어둠이 아니다. '비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비움'은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것으로 공간과는 관계가 없다. (NS 282-284)

  관상으로 가는 길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너무 분명하지가 않아서 극적이라고도 할 수 없다. 관상에는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도, 대단하다고 칭찬할 만한 것도 없으며 평범하다고 할 만한 것까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관상가에게 최고의 가치는, 가난한 모든 사람들의 삶을 특징짓는 일상적인 일과 가난과 고통과 단조로움 안에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관심을 끌지 못하며 잊혀진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쓰라린 고통과불안정, 그리고 비천함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금욕주의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완전히 의존한다. 무시당하고 멸시받고 잊혀진다. 존경이나 위로는 전혀 모른다. 명령을 받고 몇 푼 안 되는 돈이나 아니면 돈을 전혀 못 받고 일을 한다. 이것은 어려운 훈련으로 신심이 깊다는 사람들도 대부분 최선을 다해 피하려고 하는 것들이다. (NS 250)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관상을 가르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 그것을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무엇을 쓰거나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누군가가 깨달을 수 있도록 최소한의 도움을 주는 것이다. (NS 250)

  관상 생활이 당신에게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밖에 없다. 당신은 당신의 침묵을 과감히 통과하고 당신 마음의 고독 속으로 두려움 없이 진입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당신을 통하여 당신과 함께 하나님을 찾는 외로운 사람들과 그 고독을 나누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실로 언어와 설명을 넘어서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빛과 능력을 재발견할 것이다. 그 빛은 너무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당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친밀한 일치이며, 하나님의 영과 당신의 비밀스럽고 가장 깊은 자아의 기저에 있는 본질적 일치이다. 당신과 그분은 참으로 하나의 영이기 때문이다. (MJ 1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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