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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예수기도 (The Jeuse Prayer)

수도관상피정 다니엘............... 조회 수 3253 추천 수 0 2008.11.11 23:26:45
.........
출처 :  
<예수님의 이름 안에는 능력이 있다>

                  제목 : Creating Life with God  기독교 전통과 영성기도
                              (The Call of Ancient Prater Practices)
                  저자 : Deniel Wolpert (다니엘 월퍼트),  엄성옥 역.

             여정의 동반자 : 순례자

             “순례자가 예수 기도를 자기의 삶의 중심에 두고, 그 기도가 자신을 인도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허락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의 기도 습관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만들어 내는 놀라운 본보기를 본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침묵, 독거, 성경으로 기도하기로 이 글을 마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관상기도의 핵심에 위치합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동물이나 식물을 한 종류만 만들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에게 한 가지 유형의 기도 방식만 선물로 주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위 세상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의 이해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상을 보고, 어떤 사람은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은 침묵으로 말하며,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성령의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차이점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마음이 기적의 태피스트리에 대한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므로 찬양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점들 때문에, 하나님은 다양한 기도 방법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의 존재의 다양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기도방식은 우리가 한 분 하나님에게 말씀드리는 것을 허락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침묵과 독거, 그리고 거룩한 독서는 모든 기도 방식의 기초를 이룹니다. 그러나 그 기초에서 여러 가지 다른 기도 방식들이 생겨납니다. 본 글에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초점을 두는 기도 방식에 대해 탐구하려 합니다. 마음과 정신에 초점을 둔다고 해서 몸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며, 또 이러한 방식들에서는 외적인 관계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 방식들의 주된 강조점은 정신과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음과 정신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려면 별도로 한 권의 책을 저술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간단히 말하자면, 생각과 감정의 과정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사상들, 생각들, 기억들, 느낌들, 그밖에 다른 감각적인 정보들-내면의 정신적 공간의 내용 전체-이 포함됩니다. 이러한 기도 방식들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기도의 초점이 됩니다. 정신적인 사건들의 무수한 단편들이 걸러지고 분류되고 다듬어져서,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나는 비옥한 좋은 흙더미 안에 자리 잡습니다. 이 세 가지 기도 방식들 중 첫째는 예수기도이며, 이 글에서는 그것에 대해 다루려 합니다. 그것은 "다윗(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토시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표현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예수기도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문장을 포함하고 있는 성경 본문을 다루어야 합니다. 장님 바디메오는 길가에 앉았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막 10:47). 그는 예수께서 자기의 외침을 듣고 응답해 주실 것을 바라면서 자신의 존재의 어두움에서부터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소유하고 있지만 상실한 단어들의 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lectio divina 안에 있는 단어의 힘은 하나님께서 그 단어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실 수도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예수기도 안에 있는 단어의 힘은 기도하는 사람의 내면에 새로운 인간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 입니 다.     당신이 세상이 시작되던 시기의 인간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기록된 말도 없고 책도 없고 복사기도 없고, 팩스도 없고 이메일도 없습니다. 당신은 자기 부족들과 함께 땅에서 근근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당신에게 놀라운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작고 검은 표식들을 지닌 마른 갈대 조각입니다. 그 표식들이 단어들이라는 것을 그 사람이 말해주기 전에는 그것은 당신에게 중요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그 단어들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는 당신에게 그것을 읽어주며, 느닷없이 완전한 의미의 세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아니다. 이것은 가능하지 않다. 어떻게 그러한 표식들 안에 그렇게 많은 의미가 담길 수 있다는 말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갈대 조각에 적힌 표식들로부터 의미를 끌어내는 것은 마술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영적 조상들은 이 "마술을 창조의 행위와 결합했습니다. 말씀에는 의미가 담겨 있었고, 의미는 추상적인 상징이나 개념에 생명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세상이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말씀과 피조물의 관계를 고려해보면, 이름을 짓는 것은 강력한 행동처럼 보였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에게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면, 그는 그것의 본질-그 존재를 창조한 생각-을 이해한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관습의 근저에는 이름을 짓는 일의 힘에 대한 경외심이 놓여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는 눈먼 사람의 외침의 힘을 인정 할 수 있습니다. 눈먼 사람은 자신의 어두움의 내면에서부터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자기의 삶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합니다, 그는 자신의 외침이 메아리쳐 돌아올 때에 그것이 자신을 변화시킬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일이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은 눈먼 사람을 부르시고, 그의 믿음이 그를 온전하게 만들었다고 말씀하셨고, 그 즉시 그 사람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는 엄청난 힘이 들어 있다는 견해 및 성경에 기록된 이 이야기가 예수기도의 기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기도가 정확하게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마 특정의 시간과 장소에서 시작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방교회의 수도원에는 예수기도가 널리 보급되어 있습니다. 19세기말에 익명의 러시아 사람이 쓴 책의 출판을 통해서 예수기도는 더욱 널리 알려졌습니다. 󰡔순례자의 길』(The Way of a Pilgrim)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예수기도를 수도원의 울타리에서부터 세상으로 끌어냈습니다.

순례자

   순례자의 여정은 성경과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 "나는 교회에 갔습니다·… 여러 가지 말씀 중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은 특히 내 마음에 강하게 다가왔습니다"(󰡔순례자의 길』 3). 그 구절은 이 단순한 사람의 의식 속에서 작용하여 곧 그의 삶의 윤곽을 정해 주었습니다.
   그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갔지만, 목회자들은 그 기도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질문했지만,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스타르치(startsi)를 만났습니다. startsi 라는 러시아어는 "노련한 장로들", 또는 영적 지도자들-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달시키는 일을 지도해주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우리의 구도자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끊임없이 마음으로 드리는 예수기도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계속해서 입술로, 영으로, 마음으로 거룩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끊임없는 임재와 은혜를 구합니다. 무슨 일을 하거나 어디서나 항상, 심지어 잠 잘 때에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 기도는 다음과 같이 합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순례자의 길』 9)"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장님 바디메오처럼 모든 곤란을 무릅쓰고, 조용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부단히 하나님께 소리쳐야 합니다. 순례자는 지도자에게서 이러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의 결과를 찾기로 결심하고서 예수기도와 러시아교부들의 신비신학을 다룬 한 권의 책으로 무장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아주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기도를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는 단어에 집중할 수 없었고, 곧 자신의 생각과 편견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기도는 점차 그의 생각의 일부가 되어갔으며, 마침내 그는 계속 그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곧 그는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힘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약 삼 주가 흐른 후에 나는 마음속으로 고통을 느꼈고, 그 다음에는 매우 기분 좋은 따뜻함과 위로와 평안을느꼈습니다. 그로 인해 나는 그 기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 나의 모든 생각이 그 기도에 몰입되며 큰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순례자의 길』 38)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독교 전통 안에 있는 많은 요소들은 한 단어나 구절을 되풀이하여 말하는 방법을 장려합니다. 그것의 가장 좋은 예는 주기도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배 때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합니다. 또 다른 예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아멘"이라는 단어나 시편을 반복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용을 의식하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과 반대되는 태도로 이러한 형태의 기도를 실천하면, 관상적인 집중-하나의 요점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기술이 발달합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세상,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죄악된 세상이 마치 사방으로 무한히 확대되는 커다란 백지와 같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종이가 우리 앞에 놓여있고, 우리는 그 종이에 자신의 삶의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는 과정은 우리를 매혹시켜 우리는 자신을 망각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찾는 일도 망각합니다. 반복적 기도 방식은 마치 태양을 향해 들어 올린 확대경과 같은 작용을 합니다. 그것이 영적 에너지의 광선을 종이의 한 점에 집중시키면, 그것은 서서히 그곳을 태워 구멍이 생깁니다. 집중하다 보면 우리는 이 구멍을 통과하여 다른 쪽으로 튀어나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갑니다.
   순례자는 기도의 경험을 하는 중에 다른 공간-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에 사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이러한 변화가 발생한 후로는, 그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지 않았고,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놀라게 만드는 방식으로 삶에 반응했습니다. 그는 강도를 만나 매를 맞았을 때에 기쁨으로 반응했습니다. 누군가가 거처할 곳이나 동행을 제공해도, 그는 눈을 맞으며 걸어가면서 기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유식한 성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도가 그의 마음과 접촉할 때에 그의 존재 전체가 변화되었고, 심지어 그의 겉모습도 변화되었습니다. 이 변화가 바울이 묘사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갈 5:22-23). 사람들이 놀라면, 순례자는 단순하게 응답했습니다 :

단지 침묵하면서 마음 깊은 곳으로 내려가서 예수님의 이름을 더 많이 부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즉시 내면의 빛을 느끼며,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이 빛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볼 수도 있습니다. (『순례자의 길』 78)

   순례자는 자신의 관심을 끈 성경구절대로 행하여 결국 예수기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기도는 침묵과 성경을 결합한 것입니다. 순례자가 예수기도를 삶의 중심에 두고서 그 기도가 자신을 인도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허락한 것에서, 우리는 하나의 기도 방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만들어내는 훌륭한 본보기를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면, 예수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순례자 친구는 그것이 쉽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쉽다면, 이런 종류의 기도를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이 더 많아야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기도는 실천해 볼 만한 일입니다.

예수기도의 실천

   예수기도는 아주 단순합니다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침묵 속에서 거듭 반복합니다. (순례자의 묘사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구절을 약간 변형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당신에게 편하다고 여겨지는 변형문을 사용하십시오. 예수의 이름이 들어가기만 한다면, 정확한 어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제 도전이 임합니다. 당신은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분심거리들을 어떻게 합니까? 정신이 방황할 때에는 무엇을 합니까?  15분 전에 기도를 멈추고 계속 친구들이나 상사와의 갈등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어떻게 합니까? 그저 다시 예수기도를 반복합니다. 순례자도 이와 동일한 문제들을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분심을 무시하기가 어렵지만, 반복하다 보면 쉬워집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집중하는 것이 도전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살면서도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는 소원을 그다지 갖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항상 자신의 참 자아를 대면하는 일을 피하여 도망치고 있으며, 진리를사소한 것들과 교환합니다. (『순례자의 길』 79)

   여기에서 지혜로운 순례자는 관상생활의 중요한 문제를 언급합니다. 우리가 예수기도와 같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과 정신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에, 먼저 만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 자신의 미움, 자신의 사소한 염려, 자신의 이기적인 편견, 자신의 상처 등을 봅니다. 종종 그것은 아름답지 못한 광경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래서, 우리는 도망칩니다. 예수 기도가 올바른 기도가 아니라고, 지금은 기도할 때가 아니라고, 그 기도가 참으로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즉, 우리가 자신의 실존의 고통으로부터 피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추구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계속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돌아가십시오. 당신의 일정 안에서 주어지는 시간, 예를 들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시간과 같은 독거의 시간을 사용하십시오. 당신이 홀로 있을 때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침묵할 때에 예수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산책을 할 때, 자동차를 타고 갈 때, 아니면 집에 있을 때 예수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짧게, 다시 말해서 10-15분 정도 기도하다가, 익숙해지면 점점 더 오랫동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얼마 후면, 당신은 마치 머릿속에 맴도는 노래를 반복하여 기억하듯이 자발적으로 기도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경우, 예수기도를 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잠이 오지 않는 밤입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으면 뒤척이거나 안달하지 않고 예수기도를 시작합니다. 순례자는 잠잘 때에도 예수기도를 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종종 나는 곧 잠이 듭니다. 잠이 오지 않는 시간은 훌륭한 기도의 시간입니다. 밤의 깊은 침묵 속에서, 나는 내 마음과 정신을 나의 창조 주-무한 속으로 울려 퍼지는 부드러운 음성-께 들어 을립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룹으로 하는 예수기도

   예수기도를 그룹에서 이용하면 어떨까요? 예수기도에는 말로 표현되는 부분들이 없지만, 그룹에서도 예수기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또 침묵할 때와 마찬가지로, 기도한 후에 그룹 토의를 하는 것도 유익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나는 교회의 예배에서 이 기도를 사용했습니다. 나는 먼저 교인들에게 각기 혼자 다른 곳으로 가서 15분 동안 기도하라고 말했습니다. 교인들은 자유로이 홀로 앉아서 기도하거나 걸으면서 기도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방에 머물러 있으면서 함께 조용히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 그렇게 각기 기도한 뒤에, 5-6명씩 그룹으로 모여 자신이 경험한 것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이 나눔의 형식은 단순했습니다. 각 사람은 몇 분 동안 자신의 기도 경험이나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께 주목한 것에 대해 묘사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해석하거나 충고하거나 논평하지 않고 듣습니다. 이 소그룹 모임은 매우 유익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일어난 것을 발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듣는 것도 가치가 있습니다.
   순례자가 행한 가장 놀라운 업적들 중 하나는 그가 행한 것 자체가 아니라 혼자 힘으로 행했다는 사실이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관상기도는 매우 도전적인 일이기 때문에 난관을 헤쳐 나가는 것을 도와주며 인내하라고 격려해 줄 공동체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그룹은 지원과 양육에 기여합니다. 그룹 모임에서의 나눔은 우리의 경험의 정당성을 인정해주며, 우리만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eke도록 도와줍니다. 만일 한 학급이나 청년회처럼 지속성이 있는 기존의 그룹이 얼마 동안 규칙적으로 예수기도를 행하기로 결정한다면, 그 그룹은 그 기도의 효과가 꽃을 피우는 것 을지켜볼 수 있는 훌륭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룹은 다른 기능도 발휘합니다. 순례자의 고독한 여정은 그가 끈질기게 여행했기 때문만 아니라 그가 길을 잃고 망상이나 광기 속을 방황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명적이었습니다. 우리가 깊은 기도의 세계에 들어가서 자신의 분심과 마귀들의 공격을 받을 때, 하나님의 길이 아닌 길에 미혹될 수 있습니다. 그룹이 행하는 한 가지 기능은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막아주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룹의 지도자(만일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 그룹이 예배 모임에 속하는 그룹이라면 예배 인도자)는 반드시 예수기도를 실천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이 글에서 설명하는 기도들을 실천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어떤 기도도 가르치려 하거나 지도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 기도의 힘, 그리고 기도할 때에 발생할 수 있는 장애물 등에 대한 지식을 얻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지식이 없다면, 그룹의 경험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순례자는 방랑하며 길을 가다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집니다. 그는 우리의 귀에 예수기도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커다란 선물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처럼, 그도 우리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이 장에서 예수기도가 계속 우리와 동행했듯이, 이제는 우리가 그 선물을 가지고 가서 여행에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 훈련

   개인으로 행하는 경우

* 얼마 동안 기도할지를 결정하십시오. 처음에는 15분 정도만 기도해도 좋습니다. 기도에     익숙해지면서 점점 더 많은 기도 시간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 예수기도는 산책을 할 때, 사무실에서, 버스 안에서, 밤늦게 침상에서, 교회에서 등 어느    곳에서든지 할 수 있습니다.
* 정신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 기소서"라고 반복하십시    오.
* 그 문장을 계속 반복하십시오.
* 그 문장이 당신의 존재 속으로 흘러들어가게 하십시오.
*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도를 마치십시오.

그룹으로 행하는 경우

* 지도자나 그룹에서는 얼마 동안 기도할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 공간이 허락한다면, 참석자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좋습니다 ; 기도할 장소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 또는 그룹 전체가 하나의 기도 장소를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 회원들은 개인적으로 위에서 묘사한 것과 같이 예수기도를 실천합니다.
* 그룹 전체가 다시 모일 때에, 각각의 회원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발표할 기회를 갖습니    다. 이 시간의 목표는 서로의 문제점을 고쳐주거나 누가 바르게 기도하는지를 결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 지도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회원들을 격려하고 지원해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 회원들은 혼자 힘으로 예수기도를 시도하도록 서로를 격려해 줄 수 있습니다.*

댓글 '1'

김양수

2008.11.26 18:14:08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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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7 수도관상피정 마음의 기도 file 토마스 머턴 2008-10-16 2467
1286 경포호수가에서 당신마저 죽으면... 피러한 2008-10-09 2654
1285 영성묵상훈련 애절한 아픔을 격지 않게하기 위해서 루디아황 2008-10-08 2505
1284 영성묵상훈련 자살은 살인 행위다 [2] 루디아황 2008-10-04 2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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