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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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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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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칠보산자유학교 '아이와 강' 강연회/ 2008. 9. 24
자유학교' 무슨 뜻일까요? 무슨 뜻인가요? '자유스런 학교'일까요?
자유스런 학교, 자유를 사랑하는 학교... 저는 '자유를 배우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누가 자유를 배울까요? 누가 자유를 배울 자격이 있나요? 물론 사람이겠죠?
아마 선생님들이 더 먼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아무나 다 배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유를 배울 수 없다. 자격이 없다. 그게 누구일까?
자유로운 사람은 자유를 배울 수 없다. 배울 마음도 없다.
공자님이 오시고 소크라테스가 와도 못 가르칠 사람은 누구일까? 다 아는 사람(知)이다.
세상에 다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면 못 배운다. 꽉 찬 그릇에는 무엇을 넣지 못한다.
제일 잘 배우는 사람은 자기가 무식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은 안다' 고 말했다. 많은 사람은 그것을 모른다.
누가 자유를 배울 수 있을까?
지금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배울 수 있다. 다 알지 못 하는 사람.
그래서 학교에 오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웃음)
무엇이 자유롭지 못한 것인가?
안병무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독일에 유학 갔을 때 독일말을 못했다고 한다.
안병무 목사님은 독일학교에서 동선이 딱 세 군데였다. 침실, 식당, 강의실...거기만 왔다갔다 했다.
1년 넘게 그랬다.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갔는데 거기서도 잠자는 데, 운동장, 식당...거기만 왔다 갔다했다.
그런데 독일에 있을 때는 괴롭지 않았는데, 교도소에서는 힘들었다.
상황을 별로 다를 것이 없는데 교도소 와서는 아주 괴로웠다.
차이는? 자유다. 학교에서는 내가 스스로 밖에 나가지 않은 것이다.
교도소는 나가고 싶지만 못 나가는 것이다.
내가 안 하는 것하고,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자유가 아닌가?
밥을 굶어도 행복하게 굶고, 어떤 사람은 굶는 게 비참하다.
기륭전자 88일째 단식하는 데 가 보았는데 그 분이 나를 보고 웃었다.
밥 먹는 것보다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웃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분은 먹을 것이 없다기 보다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기 의지로 밥을 굶는 것이다.
자유(自由)라는 한문이 자(自)는 나, 유(由)라는 것은 말미암는다, 거기로부터 비롯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유는 나로 말미암는 것이다.
밥 못 먹게 해서 굶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내가 스스로 안 먹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별 것 없잖나? 내가 스스로 하면 되지 않은가?
내가 스스로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다. 굉장히 구속을 많이 느낀다.
나도 하고 싶은 대로 못한다. 때로는 환장할 것 같다. 얼마나 산다고...
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하지? 왜 몸이 말을 안 듣지?
스스로 생각해도 약이 오른다. 그래서 자유학교(넓은 의미의)에 가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부자유한 상태에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유를 배울 상태로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진짜 배우면 그 인간은 정말 잘 사는 것이다.
너 한평생 뭐했냐? 고 했을 때 "마침내 나는 자유롭게 되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몇 살을 살다 죽어도
잘 산 것이다.
세상에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있으니 희망이 있는 것이다.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나도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분 가운데 한분이 공자님이다.
60쯤 되는 분들 귀 기울여 보세요. ‘지천명(知天命)’은 하늘이 나에게 무엇을 명하는지 알았다.
그것이다. ‘이순(耳順)’은 내가 육십오인데 이순하고 싶다.
‘이순(耳順)’은 ‘귀가 순하다’ ‘귀가 착하다’는 뜻이다. 여러 해석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풀이한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그것에 대해 화를 안 난다는 거다. 이게 잘 안 된다.
그런 기회는 자꾸만 오는데 잘 안 된다. 공부하다 보면 언젠가 귀가 착해질 것이다.
공부라는 것은 그런 맛이 있는 것이 있다. 어느 나라 수도를 아는 게 뭐가 중요한가?
지구 한 바퀴 돌면 다 알 수 있다.
동학혁명이 언제 일어났는지 모르면 어떤가?
이순에 멈추지 않고 갔더니 ‘고희(古稀)’라고 해서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했다.
요즘에는 고희가 흔하다. 어쨌든 칠십에 자유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유는 평생 배우는 것이다.
숫자에 얽매일 것 없다. 예수는 서른 살도 안 됐는데 자유로웠다.
내가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거리낌이 하늘의 법도를 어김이 없었다.
내 맘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것이 자유다.
공자의 후학들이 자기 스승에 대해서 얘기하는 부분이 <논어>에 나온다.
후학들은 우리 선생님은 ‘네 가지’가 없었다고 했다.
공자사절(孔子四絶)...
무의(毋意): 뜻이 없었다. 뭘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 자기 생각을 갖지 마라
무필(毋必): 그것은 반드시 해야겠다는 것이 없다./무엇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지 마라.
무고(毋固): 굳어진(고집) 것이 없었다. /자기 나름의 신념, 가치관을 고집하지 마라.
무아(毋我): 내가 없다. /자기를 비워라.
예를 들면 두 사람이 만나서 밥을 먹는데 한사람은 자장면을 먹고 싶고, 한사람은 설렁탕이 먹고 싶다.
이럴 때 둘이 의(意)를 가지고 있다. 이 두 '의'가 비등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자장면에 설렁탕을 말아 먹으면 돼요.(앞에 앉은 어린이 말)/웃음
싸운다. 싸움이 해결되는 방법은? 한사람이 양보하면 해결되는 것이다.
누가 필(必)자가 없어진 것인가? 설렁탕 먹고 싶은 사람이 양보했다면 누가 더 자유로운
사람인가? 누가 더 큰 사람인가?
수수께끼 하나 낼게요. 형은 동생 집에 못 들어가는데 동생은 형 집에 들락날락 한다 무엇일까?
그릇이지요. 우리가 살면서 큰 사람 될 기회가 참 많은데, 한사코 작은 사람 되려고 노력한다.
이때 공자님은 저런 분인 것이다. 그 품 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학교에서 자유를 공부하면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물러지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었다. 바나바가 누구를 데려가자고 했다.
바울은 그 조카를 못 데려 가겠다고 얘기했다. 뜻이 팽팽하면 갈라진다.
더 나쁜 것은 한쪽이 힘으로 한쪽을 눌러버리는 것이다. 대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그렇게 끝난다.
자식은 힘으로 해결하려는 부모를 보고 '나중에 보자'고 생각한다. 그럴 수 있다
힘으로는 이긴 것은 이긴 것이 아니다. 힘이 없어서 진 것이다. 반드시 뒤에 갚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전부 힘을 기르려고 한다. 경쟁에서 이길 생각만 한다.
이것이 고약한 것이고, 인간 세상에 이런 일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내가 이긴 것은 좋지만 진 사람은 어떡하나?
그래서 차라리 둘이 갈라지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그것보다 나은 것은 양보하고, 져주는 것이다.
형이 동생보다 힘이 세지만 져 주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어린 손주가 팔씨름을 한다. 할아버지가 졌다.
그것은 져 준것이다. 져주는 것은 약자가 못하고, 강자만이 할 수 있다.
져준다는 것은 져서 준다는 말이다.
이럴 때 이긴 것은 자기 힘으로 이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 때 진 사람은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을 ‘심복’이라고 한다.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두 사람 관계는 훨씬 좋아진다.
무아(毋我)는 그만큼 사람이 부드러워지고 넓어지는 것이다.
흐르면 흐를수록 깊어지고...사람은 배울수록 그렇게 된다. 그렇게 하자.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생각이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에 황희 정승의 일화를 보면 공자에 버금간다.
일하던 사람들이 서로 다투다 한 사람이 와서 황희 정승에게 일러바친다. 네 말이 옳구나.
이놈에게도 옳다 하고, 저놈에게도 옳다 한다, 제3의 다른 사람이 와서 이 사람도 옳고
저 사람도 옳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했더니 그렇게 말한 너도 옳다 라고 하였다.
노자는 성인(聖人), 무상심(無常心) 이라고 했다.
성인은 한결 같은 마음이 없다. 어제 마음이 오늘 마음이 아니다, 달라진다.
애기 때 가진 생각, 몸은 매일 달라지는데 마음은 달라지지 않는다면 말이 되는가.
자기 굳은 한결 같은 마음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예수가 제자들 몰래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제자들이 물어봤다. 왜 안 가겠다고 하고서 갔습니까?
예수가 말하기를 그때 갈 생각이 없었는데 생각기 달라졌다. 그래서 갔다.
내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얘기지만 깜짝 놀랐다.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상심이다.
자기가 한 말에 구속되어 있는 것은 무상심이 아니다.
문익환 목사님이 민주화운동하고 투옥됐을 때 건강을 기원하고 있는데 금식을 하고,
절명시를 썼다고 들었다. 절명시는 민족의 통일에 넋을 바치겠다는 시이다.
그 때 이십 며칠을 굶고 계셨다. 나중에 다시 음식을 들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아버지 목사님(문재린)이 아들목사(문익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너 뜻에 반대할 생각이 없는데, 하나만 물어 보겠다"하시면서 '너 속에 통일을 이루는 데 중요한 공을
세우겠다고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봐라' '공명심이 있으면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다시 생각해봐라'라고 말씀하셨다.
문익환 목사님은 자기 마음에 그런 마음(공명심)이 있다는 생각을 하여 회개하고 음식을 드셨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문익환 목사님께 편지를 썼다. 절명시를 썼던 마당에 다시 음식을 드신 것은 대단하다.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목사님 존경합니다'고 썼다.
단식도 어려운 것이지만, 절명시를 쓰고 다시 밥을 먹게 된 것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이미 정신은 죽었다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백성심위심(以百姓心爲心)-많은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다.
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탕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아버지’이다. 자식이 유산 달라고 하니까 줘버린다.
무엇하는지 물어 보지도 않는다. 탕자가 결국 자기발로 들어온다.
너에 의해(아들에) 내가(아버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보통사람은 잘 안 된다.
흉내 내지 마라(웃음).
나도 그렇게 해 보려다 큰 코가 다쳤다. 절간에 좋은 문구가 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막지 않는다. 앞에 간 그런 분들 따라가면 그런 경지가 나온다.
사도 바울이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 누구에게도 구속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
배워야 한다. 처음부터 아는 사람 없다
자유롭고 싶은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한테 배워야 하고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습해야 한다.
운전은 종이로만 가지고 할 수 없고 몸으로 해야 한다. 학습이다. 습(習)은 되풀이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 머리로 배우고 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습이란 한자는 새가 알을 품고 있는 것이다.
알을 품으면 아무것도 안하고 한결 같은 몸짓을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선생님은 예수이고, 불교도라면 선생님은 붓다, 부처이다.
아쉽지만 아무 종교가 없는 사람도 배울 수 있는 분이 있다.
예수도 노자도 이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바로 '자연'이다.
노자가 사람은 땅에서 배우고(人法地), 땅은 하늘에서 배우고(地法天) ,하늘은 도에서 배우고 (天法道),
도는 자연에서 배운다.(道法自然)고 했다. 자연은 원래 그러함, 자연은 최고 선생님이다.
자연의 반대말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사람 손이 들어간 것, 인위적인 것이다.
자연에서 배우면 틀림없다. 예수도 없고, 부처도 없지만 자연은 있다. 자연에서 배우길 바란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도 자연에서 배우라고 했다. 왜? 자연은 가르치질 않는다. 가르칠 생각이 없다.
그러니까 자연은 아무나 배울 수 있다. 자연에 가까이 사는 것만이 아니고 연구하고, 배우는 것이다.
어느 미국 의사가 쓴 글에 보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을 때 자기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 안 죽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순하게 잘 죽는 사람이 대체로 농사짓는 사람이 그렇다.
농사짓는 사람은 자기 죽음을 잘 받아들인다.
제일 힘들게 가는 사람이 철학자, 성직자, 예술가 등이다.(웃음)
농사꾼은 일하면서 자연에서 늘 삶과 죽음을 본다. 사람이 자연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연 앞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다. 철학자, 예술가들은 영원한 가치, 목사는 영생을 얘기한다.(웃음)
'수원칠보산자유학교' 사람들은 자연을 스승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묻고 답하기
질문1)
박한용/ 종교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 알은 껍질이 약하면 안 된다. 종교는 하나의 알이다. 그래서 틀이 있다. 껍질은 틀이다.
껍질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종교란 틀은 깨어지기 위해서, 벗어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나는 벗어나고 싶은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아무 때나 벗어나면 안 된다. 병아리도 때가 돼야 나온다.
나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엄마가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가만있으면 된다. 사실은 가만있는 것은 아니고 그 과정에서 알이 성숙하는 것이다.
종교는 원이다. 가만있으면 안 된다.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라는 분을 선생으로 모신다.
자기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다. 나는 사람이다 하면 일본사람, 미국사람 없다, 여자, 남자,
늙은이 그런 거 없다. 지금은 열심히 공부할 뿐이다. 안 돼도 배워보는 것이다.
사는 게 예배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말이 아니다.
최고의 답을 적고 왔다고 나는 생각하고 여기까지 왔다.
지금은 수염이 짧지만 전에 수염이 길 때는 이런 질문도 받았다.
사람들이 수염을 왜 기르냐고 물어봤다, 나는 기르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저 스스로 자라는 것이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물론 가만히 있은 것은 아니고 아이들도 부모들이 키우는 게 아니라 저 스스로 크는 것이다.
아이들하고 함께 하는 선생님은 정말 복 받은 것이다.
배우는 것 6할, 가르치는 것 4할. 그렇게 하면 정말 좋은 선생님이다
(이현주 목사님이) 시골에서 아이들 가르칠 때 성경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어려운 이웃을
왜 도와줬을까? 물어보았다.
경상도 중학생 아이가 말하기를 '제 생각에는요, 누가 죽어갔걸랑요,
지나다 보니 잘 아는 사람이었던갑죠. '그게 답이다. 아이들에게 배울 게 많다
예산 살 때 치과에 간적이 있었다. 일곱 살 아이가 의사를 기다린다. 아이가 징징거리며 울고 있다.
지난번 아이였다. 자꾸 징징거리니 엄마가 화를 내면서 하는 말이, "이따 아프면 울어!,
지금은 의사선생님도 없는데 왜 우냐?" 그랬더니 아이가 울음을 그친다.
(맞아, 지금은 안 아프니 안 운다.) 의사선생님이 오셔서 '오늘은 안 아픈 날이야',
치료를 받아보니 안 아프다. 방금 전의 5분도 앞으로 5분도 징징거릴 필요 없다.
바람같은 사람. 바람은 어디서 오고, 어디서 오는지 모른다. 과거로부터 미래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순간 착실하게 사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것이 잘 되는데 어른은 되지 않는다.
(단소를 가져오셔서) 이 단소를 유치원 아이에게 불어 보라고 하면 '저요' '저요' 한다.
불어보라고 줬더니 '후'. 그것도 부는 것이다. 그게 아이다. 학교 들어가면서부터는 못 분다고 한다.
꼭 소리를 내야 하나. 나를 남과 비교하니 있는 그대로 순간을 못 사는 것이다.
자연은 눈치 보지 않는다. 추우면 물은 그냥 얼어버린다.
낭떠러지 만나면 물을 그냥 떨어져 버리고 평지를 만나면 고여 있는다.
자연에서 배우면 사람도 그럴 수 있다.
(질문2) 손정민/ 목사님 이왕 들고 계신 김에 단소 한 번 불어주세요.
- 예전에 어디서 불어보라고 하는데 안 불었다. 집에서 단소가 뭐라고 했다.
왜 여러 사람 있는 데서 안 부냐. 그래서 내가 얘기했다, 내가 머리는 나쁘지만 창피한 건 안다.
그랬더니 단소가 또 말한다. 꼭 잘 불어야 되냐?(단소) 그러니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불 수 있는데 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잘 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소가 나를 가르쳤다.
내가 판단해 둔 것, 내가 나를 잘 못 분다고 평가한 것, 내 행동으로부터의 자유가 무엇인지.
<단소 연주>
나는 시간 속에서 흘러가는 존재이다.
오늘 나보고 내기 어려운 시간을 나눠줬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나눠줄 시간이 없다.
내가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오늘 여러분과 이 시간을 즐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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