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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관상에 들어가는 세가지 방법

수도관상피정 토마스 머튼............... 조회 수 2607 추천 수 0 2008.12.02 00:41:06
.........
출처 :  
토마스 머튼이 말하는 - 관상에 들어가는 세 가지 방법 -

  토마스 머튼이 구체적으로 구분을 하지는 않았지만 관상의 세 가지 방법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머튼은 관상기도의 시작은 세 가지 모양으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머튼은 관상을 순수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순수한데 사람이 순수하지 못하기에 사람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돌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과 욕망을 완전히 끊어 버림으로써 영혼 자신마저도 사라져 버리는 완전한 관상에 대해서 더 할 말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단하다든지 고상하다든지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은 교만의 죄에 해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머턴은 완전한 관상은 그 속성상 모든 겸손의 완성이라고 말하빈다. 교만은 어떤 형태로도 관상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관상을 완전히 잘못 알아 관상도 아니고 관상일 수도 없는 것을 관상으로 받아들였을 때에는 그것은 자랑거리나 무절제한 욕망이나 아니면 죄의 계기가 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의 하나님,  자유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한 자유를 말합니다.
다음을 읽으시고 깊이 묵상해 보세요.

   1. 시작하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것은 갑자기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상상이 사라지고 말과 개념이 잠잠해지며 전 존재가 경이와 심연과 명료함을, 그러면서도 비움과 하나님을 알아들을 수 없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자유와 명석함이 갑자기 마음속에서 피어납니다. 다른 두 가지 방법은 평상시의 상태일 수 있습니다.

   2. 관상에로 들어가는 가장 평범한 방법은 무미건조함의 사막을 통해서입니다. 그 사막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어떤 내적 고통과 불안만을 의식한다하더라도 이렇게 어둡고 무미건조한 곳에 붙들려 있습니다. 어떤 안정과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곳은 그곳뿐이기 때문입니다. 발전함에 따라 이런 무미건조한 고요함 속에서 쉬는 법을 배웁니다. 이런 경험을 하는 가운데 위로에 대한 확신과 강한 힘이 생깁니다. 그리하여 본능과 본능의 모든 기능에는 고통인 빛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 주신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됩니다. 그 빛은 본능보다는 무한히 높은 곳에 있고 빛의 깨끗함은 이기심과 어둠과 그리고 불완전함과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다음으로 맛과 휴식과 향유가 가득한 '고요함'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감각이나 상상, 또는 지성을 채워 주고 만족시켜 줄 것이 아무것도 없기는 하지만 마음이 깊고 총명하며 마음을 사로잡는 사랑을 체험하며 편히 쉽니다. 사랑은 타볼 산에서 사도들을 에워싸 "주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게 한 빛나는 구름과도 같습니다. 이 구름의 깊은 속에서부터 확인의 암시, 말없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전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의 전 존재를 진리와 참다운 평화로 넘치게 하는 이 깊고 아름다우며 의미 있는 평온은 우리의 제2의 인격의 사명과 관계가 있는 것이며 그 사명에 수반되는 것이고 표시라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알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관상의 구름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리고 우리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신비스럽게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관상 자체는 그리스도 자신이 되고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감미롭고 순수한 일치 안에 흡수됩니다. 이런 평온은 무엇보다도 성찬예식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계시는, 느낄 수 있는 현존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들을 감싸주십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이 되시고 밤에는 불기둥이 되십니다. 그들이 마음을 흩뜨리는 일에 몰두하게 되더라도 자신을 잠깐 살펴보면 하나님을 쉽게 되찾습니다. 어떤 때에는 그들이 심연으로 돌아가 하나님 안에서 쉴 생각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뜻밖에 당신의 어둠과 평화로 그들을 끌어들이거나 고요와 말할 수 없는 기쁨의 파도로 그들의 내면에서부터 밀고 들어오십니다.

   기쁨의 이런 파도는 하나님과의 강한 감응과 접촉에 집중됩니다. 그 접촉은 우리의 영혼을 놀라움과 기쁨으로 일깨워 줍니다.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의 외침같이 솟구치는 불길과도 같고, 때로는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기쁨을 주는 상처와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불길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시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강한 불길로 접하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영(靈)의 이런 깊은 움직임은 하나님께서 이런 행복과 안온한 빛에로 이끄시는 모든 사람에게 감명을 주려고 꾸준히 애쓰는 것 같습니다.

   관상을 시작하는 이 세 가지 방법 모두에 있어서 다소 애매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어떤 것의 문턱에 있음을 압니다. 두 번째 시작에서는 그런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어둠과 무미건조한 상태 밑에는 평화가 있다는 막연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만을 가질 뿐입니다. 스스로 이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어디론가 가고 있으며 그 여정은 안내를 받고 있고, 그리고 안전하다는 것을 압니다.

   세 번째에서 우리는 보다 확실하고 친근한 하나님의 사랑의 면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도 없고.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우리의 어떤 노력도 피해 가는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과 정신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우리는 이 '현존' 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계셔서 우리 안에, 우리 밖에, 그리고 우리 주위에 계시기는 하지만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 숨어 계십니다.

   하나님과의 이런 접촉이 깊어지고 보다 순수해지면 그 구름은 엷어집니다. 구름이 맑아지는 데에 비례해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은 우리 안에 훌륭한 비움을 열어 줍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순수하게 비워진 우리의 기능, 재능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만들어 주신 결과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런 결과를 직접 만들어 주시고 또 이 결과를 통해서, 다른 매개체는 쓰지 않으시고, 당신을 알려 주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에 그 체험은 순전히 주관적이고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는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이런 결과는 깨달음의 빛으로 보완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이런 결과를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고, 이 결과들은 우리를 어둡고 더할 수 없이 맑은 경지로 갑자기 끌어올려 줍니다. 이 경지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연적 모든 지식을 완전히 헛되게 하지만, 당신은 확실해지십니다.

   이런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둘입니다. 하나는 우리 자신이고 또 하나는 이런 결과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을 알려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분리된 느낌, 하나님과 우리 자신 사이에 거리가 있고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이런 의식이 있는 한, 우리는 아직도 완전한 관상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관상 체험의 확실한 주체로서의 '나', 자신과 자기의 관상을 의식하는 '나', '어느 정도의 영성'을 소유할 수 있는 '나'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아직도 홍해를 건너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집트를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다양성, 활동, 불완전, 노력 그리고 욕망의 영역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내적 자신. 진정으로 불멸하는, 죽지 않는 인격, 자기와 하나님에게만 알려진 새롭고 비밀스러운 이름에 걸맞은 '나'는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관상'까지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나'는 경험을 축적하고 그 경험을 손상시키고 또 반성하는 그런 주체의 하나가 아닙니다. 이 같은 '나' 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아는 피상적이며 경험적 자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는 영성적이며 감추어져 있는) '인격(person)' 과 외적이며 경험적 자기, 내적이며 감추어져 있는 자기에게 탈을 씌워 주는 심리적 개체인 '자아(ego)' 를 혼동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이와 같은 외적 자아는 사라져 가는 그림자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자아의 내력(來歷)과 존재는 둘 다 죽음과 함께 끝납니다. 내적 자아에는 내력도 끝도 없습니다. 외적 자아는 '가지는' 것도 많고, '즐기는' 것도 많고, '성취하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든 소유와 기쁨과 성취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외적 자아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벗어 버리고 썩어 없어질 외관(外觀)이요 그림자입니다.

   외적 자아는 육신이고 내적 자아는 영혼이라고 하는 것 또한 잘못입니다. 이런 실수는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이런 실수는 대단히 그릇된 인상을 줍니다. 뭐니 뭐니 해도 육신과 영혼은 불완전한 실체이며 하나의 전 존재의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내적 자아는 우리의 '부분'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내적 자아는 우리의 '전 실체'입니다. 내적자아에 덧붙여지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뜻밖의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고 하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과 육신은 둘 다 진정한 자아에 속합니다. 속한다기보다는 존재한다는 펀이 더 낫겠습니다. 반면에 '외적 자아'는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입니다. 이 환상은 제멋대로 우리의 육신과 영혼의 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적 자아가 인간 타락의 결과로 내적 자아의 기능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이것이 타락의 주요 결과 중의 하나입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모상인 내적 자아로부터 소외된 것입니다. 사람은 영성적으로 안과 밖이 뒤집힌 것입니다. 그래서 '외적 자아'는 사실은 해서는 안 되는 내적 자아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위해서 우리는 실제로 우리 자신이 무엇이든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소외된 우리의 상태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낮선 지역', 먼 지방에 있는 타락한 자식들입니다- 우리는 살겠다고 간 그 고장에서 먼 여행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항상 고향에 얌전히 있지 않습니다.) '외적자아'를 하나님께서도 존중하셔서 '내적 자아'가 자기의 몫을 아직 하지 못할 때에 그 기능을 외적 자아가 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마치 우리의 외적 자아가 우리에게 되라고 가리키는 그런 우리인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가 전혀 '아니고' 또 우리의 '자아'로 보이는 것은 곧 무(無)로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널리 퍼진 잘못 중의 하나는 피상적 '인격주의'입니다. 인격주의는 '인격'을 외적 자아, 경험적 자아와 동일시하고 이런 자아를 키우는 데에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환상에 대한 한 예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환상은 흔히 사람들이 '성격'이라고 하는 것이며, 더 심하게는 '역동적' 그리고 '성공적' 성격이라고 합니다. 이런 잘못이 종교 안으로 들어오면 더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릅니다. 우리의 문화적 자아와 영성적 자아를 통째로 더럽히는 심리학주의와 자기표현이라고 하는 예찬입니다. 우리의 실체,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우리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빈 것으로 보이는 것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실체로는 있는 것 같지도 않은 것, 우리는 실체가 아닌 것 같은 것, 우리는 이런 실제로 있지 않음 위로 떠올라 감추어진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실체에로 가는 길은 겸손에로 가는 길입니다. 겸손은 실체가 없는 자아를 거절하고 우리와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의 진정한 실체인 '빈' 자아를 받아들입니다. 이런 실체는 '하님 안에',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물론 존재론적으로는 하나님과는 구별이 됩니다. 어떤 의미로도 하나님의 본성의 한 부분이거나 하나님의 본성에 흡수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이런 자아는 "나는 원해", "나는 사랑해", "나는 알아", "나는 느껴" 하고 말하는 경험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내적 자아는 알고, 사랑하고, 경험하는 자기 고유의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사람의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신원을 밝히는 방법이며 일치의 방법이고 결혼과 같은 방법입니다. 이런 방법에는 모든 선을 끌어당기는 별개의 심리적 개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알고 스스로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은 '하나의 영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 중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신 순수함과 비움의 심연의 문턱에 서 있는 '나'로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기다리는 '나' 로서 체험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순수한 관상인 가장 가까우면서도 신비한 통합적 지혜로부터 멀리 있는 것입니다.

   문턱의 이쪽, 우리 편에서 보면 이 어둠과 비움은 깊고 방대하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비록 거기에 방책이 있는 것은 아닌데도 우리는 그 경계를 넘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거기에 심연 또한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웬일인지 다음 단계에는 뛰어내려 우주를 날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거기에 있습니다.

   다음 단계가 오면 그 단계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다음 단계로 접어드는 전이 과정을 모릅니다. 어떤 것에도 뛰어들지 않습니다. 아무 곳에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온 길도 모르고, 나중에 되돌아갈 길도 모릅니다. 그러나 길을 잃은 것은 확실히 아닙니다. 날지도 못합니다. 공간이 없습니다. 아니면 모두가 다 공간입니다. 어떻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음 단계는 계단이 아닙니다.

   한 등급에서 다른 등급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고 있는 일은 '우리'라는 독립 개체가 확실히 사라지고 무한한 자유(하나님)와 구별이 되지 않는 순수한 자유, 사랑(하나님)과 일치한 사랑밖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기다리고, 찾고, 얻으려 하는 두 가지의 사랑이 아니고, 자유롭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체험이라고 하겠습니까? 사람의 기억 속에서만 체험이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어떤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까지도 잘못인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 일이 일어나는 주체가 있어야 하며, 경험도 경험의 어떤 주체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열되고 한정된 피조물의 체험의 주체는 이미 사라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니고 성과(成果)입니다. 우리가 원하면 우리는 체험을 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체험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자신을 반성하거나 체험을 한다거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판단하는 그런 모양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영원한 것도 아니며 불변의 것도 아니고 영원히 정지하고 있을 만큼 엄청나게 큰 활동도 아닙니다.

   이쯤 되면 모든 형용사는 그 의미를 잃고 맙니다. 말마디들은 뜻을 잃습니다. 하는 일마다 토를 붙이며 "이것은 그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하고 말해 주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은유는 이제 아무 소용도 없게 되었습니다. '어둠' 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하면 말해 보십시오. 그러나 어둠에 대한 생각은 이미 포화 상태가 되었고 조잡한 것으로 꽉 차 있습니다. 어쨌든 그 어둠은 이미 어둠이 아닙니다. '비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움'은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비움은 공간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가 자유입니다. 자유는 완전한 사랑이며 순수한 버림입니다. 자유는 하나님이 하신 일의 결과입니다.

   그 자유는 다른 사람에게 주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 사랑은 자기 존재와 관련된 충동의 지배를 받는 행위와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희생으로 끊어 버림은 덕을 닦기 위해 계획하고 실천하는 그런 끓어 버림이 아닙니다.

   자유이신 하나님 안에서 떠돌며 사는 것이 자유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순수성입니다.

   이제 관상은 본연의 자기 모습을 갖게 됩니다. 피조물에게 하나님께서 넣어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 사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삶과 함께 사는 피조물의 삶이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다만 하나님 안에 사시는 하나님만 계실 뿐입니다.

   혐의(嫌疑)를 벗어 자유로워지고 성공을 하고 실패를 한 사람이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자기 자신을 독립된 어떤 개체라고 하거나 엄청난 체험을 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어지는 단계의 정상이고 또 비교적 대단하지 않은 다른 경험에 비추어 보아 대단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며 비교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우려가 여행에 대해서 갖는 개념 '길', 발전의 개념에 상응하는 단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아직도 이것은 시작입니다. 그것은 어떤 단계도 재어 보거나 생각할 수도 없는 새로운 질서의 최하위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영성 생활의 완성이 아닙니다.

   모든 것과 욕망을 완전히 끊어 버림으로써 영혼 자신마저도 사라져 버리는 완전한 관상에 대해서 더 할 말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단하다든지 고상하다든지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은 교만의 죄에 해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완전한 관상은 그 속성상 모든 겸손의 완성입니다. 교만은 어떤 형태로도 관상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관상을 완전히 잘못 알아 관상도 아니고 관상일 수도 없는 것을 관상으로 받아들였을 때에는 그것은 자랑거리나 무절제한 욕망이나 아니면 죄의 계기가 됩니다.

   우연적이며 외적 자아의 사물과 가치와 영광에 대한 무질서한 특성인 교만은 하나님과가 떨어져 사는 독립된 '자아'를 반성할 수 없는 곳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반성할 수 없거나 자기를 의식하거나 알 수 없는 사람이 무엇에 대해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윤리적으로 말하면 그는 없어진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의 원천과 동기와 목적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상의 본질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는 순수하고 영원한 기쁨입니다. 즉 완전하신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완전하시고 또 완전 자체이시라는 진리에 있는 평화롭고 끝없는 환희입니다.

   그 기쁨을 찾아 얻고 해방감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 기쁨을 자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공기가 공짜니까 이 사람은 거만하다", "이 다른 사람은 바다가 젖었으니까 거만하다",  "산이 높고 산꼭대기의 눈이 깨끗하고 눈 위로 바람이 불어 높은 봉우리로부터 구름 기둥을 만드니까 잘난 체하는 사람이 있다."

   여기에 죽어서 묻혀 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는 살아 돌아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난날 그가 살아 있을 때에 그가 살다가 죽어 묻힌 지방의 하늘을 햇빛이 가득히 비친다고 그 사람을 교만하다고 하시겠습니까?

   순수한 관상을 통해서 하나님 안으로 사라진 사람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만이 남아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곳에서 활동하는 '나'입니다. 사랑하고 알고 기뻐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교만하실 수 있으십니까? 혹은 하나님이 죄를 지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런 사람이 일생에 한 번 잠깐 동안 하나님 안으로 잠적했었다고 가정합시다.

   인생의 나머지 모두는 죄와 덕행 중에, 선과 악, 고통과 몸부림, 질병과 건강, 은총과 슬픔, 성공하고 후회하며, 계획하며 또 희망하며 그리고 사랑과 두려움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를 보았고 생각했으며 그것들을 파악했습니다. 판단도 하고 말도 했으며 현명하게 처신도 하고 그렇지 못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관상의 초심자 단계를 알게 모르게 드나들었습니다. 그는 구름,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감미로움을 맛보았습니다. 기도하며 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의 생애는 이런 모든 것으로 뒤엉켜 뒤죽박죽이 되어 불확실했습니다. 이들 중의 가장 좋은 여건에서도 그는 아마 죄를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온전치 못한 관상 중에 죄를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어느 한순간만이라도 하나님 안으로 진정으로 들어갔더라면, 그의 삶은 순수했을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렸을 것이며, 따라서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고 순수한 사랑을 하고 있을 그때에 죄를 지을 수 없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그런 일치가 무절제한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사실을 알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를 바라는 것이 무절제한 욕망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을 위해서 이루어지기를 무절제하게 바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하기 위하여 비우고 하나님의 기쁨으로 변모하며 죄를 지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이 두 가지 욕망을 제대로 알고 실현할 때입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온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이행하는 것은 순수한 사랑의 이런 황홀경에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모든 사람이 몹시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잠깐 동안이 아니고 영원히 바라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이기 때문에 세상의 힘입니다. 그들은 우주의 파멸을 막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모릅니다. 온 세상이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다. 창조의 첫째 목적은 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땅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인생을 송두리째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송두리째 끊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의 소유로 넘겨졌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뿐입니다. 기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뿐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기쁨을 즐기기에는 너무 허약합니다. 기쁨은 이렇게 양순한 사람들이 아니면 모두 심한 고통을 줍니다. 그들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뜻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들의 뜻인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시는 것을 다 하십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할 수 있는 것을 다 이루는 사람은 그들뿐입니다. 그들의 자유는 한이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불행을 이해하려고 우리에게 가까이 옵니다. 그리고 그 불행을 그들의 드넓은 결백 안으로 끌어들여 없애 버리고 세상을 그 빛으로 깨끗이 씻습니다.

   오시오. 와서 저 빛 안으로 들어갑시다. 깨끗한 노래를 부르며 삽시다. 옷을 벗듯이 세상사를 벗어 버립시다. 벗은 몸으로 지혜로 들어갑시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외칠 때에 그들이 온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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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6 수도관상피정 하나님의 뜻에 일치함 ( Confirmity to the Will of God ) 은성 2008-12-26 2901
1325 경포호수가에서 앞으로 2년 피러한 2008-12-17 2286
1324 영성묵상훈련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성령과의 관계 진주중앙 2008-12-09 2629
1323 인기감동기타 성령의 세례와 충만은 어떻게 다른가 박일민 2008-12-09 2391
1322 주보회보신문 보이지 않는 성령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창골산 2008-12-09 2427
1321 수도관상피정 이탈 ( Detachment ) 은성 2008-12-06 2476
1320 수도관상피정 연합의 길 (Unitive Way) 은성 2008-12-06 2940
1319 수도관상피정 수덕주의 (Asceticism) 은성 2008-12-06 2518
1318 수도관상피정 수도원 영성, 수도원주의(Monastic Spirituality, Monasticism) 은성 2008-12-06 3885
1317 수도관상피정 영혼의 노래들 십자가요한 2008-12-06 2676
1316 목회독서교육 자비량목회는 성경적인가? 교회개혁 2008-12-03 3714
1315 수도관상피정 [인터뷰] 관상이란 하나님과의 친말한 삶-유해룡 교수 뉴스엔조이 2008-12-02 3834
1314 수도관상피정 귀용부인의 옥중서신 잔느귀용 2008-12-02 3048
1313 수도관상피정 관상의 전통(觀想의 傳統) file 리차드 포스트 2008-12-02 2654
» 수도관상피정 관상에 들어가는 세가지 방법 토마스 머튼 2008-12-02 2607
1311 정치건강취미 발가락 맛사지의 치료 효과 연상원 2008-11-27 4253
1310 정치건강취미 [한방 건강이야기]고혈압 약 끊어도 되나 장동민 원장 2008-11-27 4763
1309 영성묵상훈련 죄, 그리고 상처 루디아황 2008-11-23 2486
1308 더깊은신앙으로 어떻게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인가? file 이현주 목사 2008-11-17 3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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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 수도관상피정 관상기도 일일수도회 교안 file 다니엘 2008-11-11 3065
1305 수도관상피정 위빠싸나 명상, 마음챙김...심리치료 박성현 교수 2008-11-11 4514
1304 수도관상피정 관상기도: 깊은 사귐의 기도: 권명수 2008-11-11 3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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