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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관상의 전통(觀想의 傳統)

수도관상피정 리차드 포스트............... 조회 수 2645 추천 수 0 2008.12.02 00: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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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관상의 전통(觀想의 傳統)
리처드 포스트  '생수의 강 "  두란노.

   우리 모두는 기도로 충만한 삶과 보다 풍성하고, 보다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갈망한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믿음에 대한 관상의 전통의 강물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는 길을 보여준다. 이 현실은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1). 관상의 모범.

   관상의 모범을 먼저 성경에서 찾아보면 “사도요한”을 들 수 있다. 그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대해 평생동안 관상한 흔적들이 엿보인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관상의 작품”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계시록은 강력한 예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요한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게 되는 것은 관상의 전통이 가져다 부는 변치 않는 선물이다.
   다음으로 역사에서 관상의 모범을 찾아본다면 “안토니우스”이다. 그의 필생의 소명은 오랜 세우러을 거쳐 관상한 사도행전에서 근거하였다. 어는 주일 복음서를 공부하던 중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말씀이 마음에 닿았다. 안토니오는 그 말씀대로 상속받은 재산 중 어린 여동생에게 필요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시기에 예수님의 격려의 말슴이 있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이 두 말씀에 힘입어 하나님을 찾기 위해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다.
   사막의 유혹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영적훈련(askesis)이 더욱 중요하다. 사막의 생활은 강력한 내면적인 집중을 얻기 위한 고독과 금식, 영적교제를 깊게 하기 위한 관상과 기도, 마음의 변화를 얻기 위한 성경공부와 관상, 아버지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육체노동과 귀신 좇는 일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영적생활 훈련들의 목적은 육체와 영혼을 의로움 안에서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험을 받을 때 굳게 설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안토니오는 이런 삶에서 이런 종류의 인격 형성이 풍부했다. 안토니오의 전기에는 “그의 육체적 측면들이 그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시킨 것은 아니다. 인격의 확고함과 영혼의 청결함이 그를 구별시켜 주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 혼란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외적 감각들도 평정을 유지했다.  혼의 기쁨으로 인해 그의 얼굴은 쾌활하였다.”  안토니우스는 “관대한 성격과 겸손한 영혼”을 소유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변화는 너무나 놀랄만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행위를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그의 생활 방식을 본받기를 열망했다” 이것이 사막에서 오랜 고독의 생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맺으신 열매이다. 20년의 광야생활을 후에 하나님은 그 시대에 띄어난 사역을 하도록 그를 세상으로 내어 보냈다. 그의 전기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의 삶으로부터 우리는 관상하는 삶과 하나님께서 자기 영혼의 시선을 돌리는 것에 대해 많은 점을 배울 수 있다.

   사부 안토니우스와 사도요한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무리 많은 영감을 준다해도 현제와는 거리가 먼 시대의 이야기들이다. 이런 관상적 삶을 현대에도 경험할 수 있을까? 특히 일상의 요구들과 압박들을 끊임없이 받고 사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을까? 이 절박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토마스 머튼”의 생애와 작품들을 읽고 관상할 필요가 있다.


2). 관상의 전통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한 자" 이것은 확실히 관상적 물줄기, 즉 기도로 충만한 생활에 관한 가장 깊이 있는 묘사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가 이 묘사에 미치기에는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가슴 시리도록 잘 알고 있다. 어떻게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한 자"가 될 수 있을까? 경건한 믿음의 권위자들은 이 과정을 우리에게 설명하기 위해 애썼다. "관상의 이 성스럽고 사랑스러운 불 ‥‥ 이 불타는 사랑 ‥‥ 이 강력한 사랑의 불과 상처 ‥‥  바로 이 사랑의 불 ‥‥ 불타오르는 사랑 ‥‥ 성스러운 사랑의 불" 등 뿐만 아니라 관상적인 생활 방식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들은 불과 사랑이다. 제거하고 정화하는 불, 감싸고 위로하는 사랑, 이것이 관상적 생활의 요소들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관상적 생활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한결같은 응시이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친구들 간의 친밀한 나눔"인 것이다. 관상적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들과 운동들에 대해 설명하겠다.

사랑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일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섬세하고도 깊은 사랑을 느낀다. 그 사랑은 업적이라기보다는 선물처럼 느껴진다. 처음에는 이 사랑이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기 때문에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비밀스럽고 평안하고 사랑스러운 유입"이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준다. 왜냐하면 기도 생활의 초기에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며, 처음에 우리는 강도에 있어서 큰 변동을 경험한다. 높아겼다 낮아지고, 뜨겁다가도 차가와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사랑은 좀더 깊고, 좀더 강하고, 좀더 안정되게 자란다.

평강
   동일한 시기에 평강이 살짝 들어온다. 이 평강은 분석하거나해부할 수 없는 것이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빌 4:7)이다. 이 조용한 안정, 곧 인생 방향의 견고함은 충돌이나 걱정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부재보다는 오히려 존재이다. 이 평강은 많은 경우, 특히 초기에 주의를 흩뜨리는 다수의 것들로 인해 방해를 받는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평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여전히 실재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평강의 조용한 방법은 시끄러운 우리 마음의 잡음들을 물리쳐 버린다.

기쁨
   우리가 경험하기 시작하는 또 하나의 움직임은 기쁨이다. 매우 힘든 인생을 살았던 매우지혜로운 한 여인은 기쁨의 실체를 잘 포착해서 이렇게 말했다. "즐거운 일이 앞에 놓여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쾌감과 우정과 희락-깊은 희락-이 있다. 그리고 쾌활함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향해 웃으시고, 우리 영혼도 하나님을 향해 웃는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것을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달콤하고 즐거운 삶‥‥ 매혹적이고 불가사의한 비전"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그것은 방해받지 않는 기쁨이 아니다. 우리는 밀물과 썰물, 정교한 기쁨이 고통스러운 열망과 뒤엉키는 경험을 한다.

공허
   관상적 생활과는 반대되며, 거의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공허가 있다. 사랑스러운 기쁨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에, 우리는 강렬한 갈망과 동경과 추구-추구하지만 발견 못함-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완전한 발견은 아니어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하다. 아마도 불만스러운 만족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십자가의 요한은 그것을 "생생한 갈증 ‥‥ 사랑을 향한 긴급한 갈망"이라고 부른다.
   많은 경우, 공허는 어두움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숨어 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을 경험한다. 건조함, 곧 마음의 사하라 사막 또한 경험한다. 이 모든 경험을 하는 동안 고독은 고마운 동행자가 된다. 우리는 홀로 계신 분과 함께하면서 혼자 있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 공허, 이 어두움 이 건조함이 곧 기도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바란다. 이것은 고행적인 부류의 천국의 교제이다. 기쁨이 잔치라면 공허는 금식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다 영혼의 성장을 위해 필요하다.


   관상적 생활 안에서 우리가 성장하며 경험하는 또 하나의 실재는 불이다. 물론 문자 그대로의 불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재하는 불인 것은 확실하다. 어쩌면 문자 그대로의 불보다 더 실재적일 수 있다. 사랑의 최초 움직임은 이제 더 강렬해지고, 한결같이 불타는 정열이 된다. 불순종이나 무시 등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거나 아예 끊어지도록 만드는 모든 것은 극도의 아픔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불순물, 곧 모든 아집, 모든 미움, 자기를 내세우고 싶어하는 요구들을 태워 버리는 하나님의 정결케 하는 불을 느끼다 못해 오히려 환영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 죄들이 타 없어질 때 보편적인 사랑의 씨앗들이 꽃을 피우게 된다.

지혜
   이것은 성령의 좀더 깊은 움직임인 지혜로 인도한다. 지혜는 열매가 없는 지성주의나 비인간적인 인식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과 내적 유입을 말한다. 우리는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합 2:14)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만큼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인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깊은 자기 교통(self-communication)으로 변한다. 이 자기 교통에 대해 우리는 들을 수 있고 참여할 수도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변형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점차적으로 그리고 천천히 내면의 기능들을 '사로잡으신다.' 처음에는 마음과 의지를, 그 다음에는 생각을, 그리고 상상력을, 그리고 정열들을 사로 잡으신다. 그 결과는 인격 전체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되는 변형이다. 우리는 점점 예수님의 습관들과 감정들과 소망들과 믿음과 사랑을 갖게 된다.


3). 관상의 전통의 중요한 장점.

   관상의 전통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많은 강점들을 가져온다. 그 중에서 네 가지를 살펴본다.
관상의 전통의 가장 기본적인
   첫 번째 공헌은 우리 "처음사랑'(계 2:4)의 불길에 계속해서 부채질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관상의 가장 기본적인 공헌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너는 마음-사랑밖에 가진 것이 없다."  관상적 생활은 우리를 항상 우리의 처음으로 부르고, 항상 뿌리를 찾도록 하고, 항상 우리의 기초를 상기시켜 준다. 우리에게 "예수님과 거듭 거듭 거듭해서 사랑에 빠지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메시지가 단순하다고 쉽게 생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처음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빨을 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에서 온다는 사실을 습관적으로 상기해야 한다.

   두 번째, 관상의 전통은 우리를 단지 지성적으로 믿는 종교를 넘어서도록 인도한다. 지성적 공식화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끈질기게 강조한다.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은 "관상적인 사람은 ‥‥ 위험을 각오하고서 자신의 마음을 언어와 관념 너머의 사막에 내어 놓은 사람이다. 그 사막에서 우리는 벌거벗은 순수한 신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듯이, 그것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을 옥죄이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미완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대개 믿음을 우리에게서 조금 멀리하려는 영속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이하면 우리의 객관성과 시각을 잃을 수 있다. 우리의 자립심도. (오, 우리는 얼마나 자립심을 상실할까 봐 두려워하는가!) 조지 매터슨이 자신의 기도에서 말한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 관상적 물줄기이다.

저를 포로로 만들어 주소서, 주님.
그러면 제가 자유케 될 것입니다.
제 칼을 버리게끔 만드소서,
그러면 저는 정복자가 될 것입니다.

   세 번째, 관상의 전통은 기도의 중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관상적인 사람들은 기도가 선한 것이거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필수적인 것, 곧 제1순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방교회의 은자(隱者) 테오판은 이 사실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한일 기도가 올바르면 모든 것이 올바르다."
   하지만 관상의 전통은 기도의 중추적 성격만을 강조하는 것 이상을 제안한다. 기도를 바라보는 특이한 시각을 제안한다. 침묵을 강조하고 쉬지 않는 기도를 말한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의 임재를 실천하는 일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지속적으로 거하는 일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기 위하여 저는 중보기도 외에는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저는 그저 단순하게 사랑으로 저의 시선을 하나님께만 두고 삽니다. 그것은 실제적이고 끊임이 없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제 영혼의 은밀한 체험입니다.

   네 번째, 믿음에 접근하는 어느 방법보다도 관상적 물줄기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 삶의 고독을 강조한다. 옛적의 영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외로운 골짜기'를 홀로 지나야 한다.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해 그 곳을 지날 수는 없다. 내가 가야만 한다." 고독은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역할에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의 역사를 써 가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또한 당신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의 중요성을 확인하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또한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분량의 고독이 필요함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험하고 사막 같은 영성이다. 우리는 영혼의 황폐하고 메마른 땅을 탐험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 땅은 악몽 속에서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하려고 애쓰는 곳이다. 그 곳은 우리가 진정한 소망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소망은 절망과 소망이 얼마나 비슷한지를 안 후에만 찾을 수 있다. 그 곳은 십자가가 잔혹이 아니라 긍휼을 의미하는 것이며,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의미하는 것임을 발견하는 곳이다. 이것들은 관상의 전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내용의 일부이다.

3). 잠재하는 위험에 대한 이해

   하지만 관상의 전통의 모든 것들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운동들에는 고난과 위험들이 있고, 관상의 물줄기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사전 경고를 받게 되면 우리는 미리 무장을 하고, 위험한 여울과 강한 역류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위험들은 전통이 왜곡된데서 나오는 것이지 전통의 본질적인 요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덧붙이기 원한다. )

   관상의 전통을 연구할 때 부딪치는 가장 명백한 위험은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분리되는 경향이다. 이 분야에 대한 대부분의 글들을 수도사들이 저술했다는 사실은 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관상적인 생활이 컴퓨터 프로그래머나 기계 운전자나 집에서  일하는 아버지들이나 하루 종일 빨래와 청소로 씨름해야 하는 어머니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 의아해 하기 쉽다. 좀더 솔직해 보자. 사막의 수도사들은 기저귀 가는 일이나 애 봐 주는 사람 구하는 일이나 사친회 모임에 참석하는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았는가.
   하지만 우리에게는 모든 일상의 삶이 기도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개발해야 하는 장소임을 절대적으로 고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동떨어진 삶을 살며 관상적인 삶을 열정적으로 표현하라는 부르심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들과 가정과 직장과 이웃들과 친구들과 지내는 중에 하나님과의 교제의 역사를 쌓아 간다. 이런 장소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하는 '신성한 장소들'에 포함된다. 교회 출석과 성경 읽기와 또 다른 '종교적' 활동들이 우리의 전체 경험 중 일부를 차지하겠지만 진정한 성스러운 장소는 우리의 사무실이나 작업대, 우리 자녀들과 함께 지내는 놀이터, 배우자나 아니면(미혼이라면) 깊은 고독 가운데서 지내는 우리 집이나 아파트의 조용한 지성소이다.
   형태는 미묘하지만 동일한 위험은 관상적인 생활에 열정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일부 사람들은 현재의 사회 문제들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도와 경건이 우리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도구로 쓰여질 때, 우리는 이 비뚤어지고 일그러진 영성이 사기꾼임을 폭로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은 깨어지고 피 흘리는 인류에 대한 관심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진정한 기도 생활은 우리를 타락한 세상의 고통과 아픔과 부정과 연결시켜 준다.

   두 번째 위험은 "지나친 금욕주의"이다. 금욕주의(asceticism)는 단순히 말하면 '훈련'이라는 뜻을 가졌다. '선수'(athlete)라는 영어단어가 이 단어와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영적인 삶 가운데서 훈련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이 운동에 지나치게 빠지듯 '영적 포식'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도 볼 수 있다.
   현대인들은 이런 유혹의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드물다. 오히려 우리는 이와는 반대의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위험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았다. 예를 들자면, 유명한 이집트인 '기둥 성자' 시므온 스틸리테스는 30년 동안 18미터 높이의 기둥에서 살았다. 그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둥에 자신의 몸을 묶었다. "밧줄이 그의 살을 파고들어 그 주위가 썩어 악취가 나고 구더기들이 우글거렸다. 시므온은 상처 부위에서 떨어진 구더기들을 주워 상처 위에 다시 놓으며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것을 먹으라'고 벌레들에게 말했다.
   유럽과 영국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지나친 금욕주의의 예들을 볼 수 있다. 모든 행태들이 이전 것에 비해 훨씬 더했다. 시아란 성자는 빵을 모래와 섞어 먹었다. 케빈 성자는 7년 동안을 서 있었다. 핀추아 성자는 7년 동안 철 족쇄로 겨드랑이를 채우고 공중에 매달려 지냈다. 이테 성자는 딱정벌레들이 그의 몸을 뜯어먹도록 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지나친 모습에 질겁을 한다. 물론 질겁할 일들이었다. 하지만 현대 시대의 지나친 행태들과 그 모습이 많이 다를까? 예를 들면 우리는 사람들의 일생이 '철로 만든 방들'을 획득하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나친 금욕주의와 과도한 운동은 같은 집착에서 비롯된 극과 극이다.
   금욕적인 실행의 진정한 목적과 올바른 위치를 이해함으로써 지나친 금욕주의를 피할 수 있다. 영적인 삶에서의 훈련을 통해 올바르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단지 금식을 위해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기는 잔치를 배우기 위해 금식하는 것이다. 영적인 삶의 훈련들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영원히 즐기는 것이다. 목적은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회락이라"(롬 14 :17). 목적은 자유롭게 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니님과의 즐겁고 유쾌한 사랑 관계이다.

   세 번째 위험은 우리의 믿음을 명료하게 표현하려는 지적인 노력의 가치를 감소시키려는 경향이다. 이것은 때로 반지성주의에 가까워지게(혹은 적대심으로 빠져 들게) 된다. 이런 경향을 확고한 신학에서 벗어난 여러 가지 신비주의 종파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이 전통에 충실한 정통 작가들도 마음-믿음을 강조하려다가 고의는 아니지만 이 문제에 한 몫을 더하게 된다.
   왜 이런 위험이 나타났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들은 모두 의지를 끌어들이지 못하거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차갑고 둔감한 신학을 보아 왔다. 하지만 생명이 없는 지성주의를 바로잡는다고 해서 올바른 합리와 명확한 생각의 결여를 드러내서는 안된다. 우리는 지성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이 둘은 분리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나중에 다시 다루겠다. 이 위험은 많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

   네 번째 위험은, 믿음의 공동체를 무시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체스판 위험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많은 관상적인 이들은 사랑이 가득하고 양육하는 책임을 지는 모범을 보일 의도를 가진 공동체들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여러 번에 걸쳐 보게 되겠지만 전통의 가장 큰 강점은 심각한 약점이 될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상적인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고독을 강조하지만, 우리가 절대적으로 귀 기울여야 할 그 메시지가 특히 서구 문화에서는 '하나님과 나' 만을 생각하는 개인주의로 인도될 수 있다. 특정 신비주의적 표현들, 특히 반(反)제도적 정신에 물든 것들은 이 위험에 빠지기 쉽다. 때로는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반지성주의와 연결되어, 사람들이 과거에 활발했던 신학 저술들을 외면하게 만든다. 그 결과는, 빈번하게 무지한 이단을 낳는 교리적 순진함이다.
   우리에게 관계가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때로 엘리야나 세례 요한을 부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예외는 규칙을 증명해 줄 뿐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의 믿음을 고립되어 행하지 않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격려하고 자신의 통찰을 전해 주는 형제자매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의 천국의 공동체- '성도들의 친교' -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공부하고,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용기에서 힘을 얻고, 그들의 실수를 통해 배우고, 그들의 가르침으로 인도받음으로써 우리는 능력을 받는다.
4). 관상의 전통의 실천

   각 전통들을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그러면 관상적인 수단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의 일부분으로 경험될 수 있는지 물어야한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한 권의 책으로 쓸 수도 있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간단히 설명하기로 한다.

   첫 번째, 고독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장소들을 정해 놓고 실험해보라. 새벽에 산책을 나가 당신의 세상(도시든지 교외든지)이 깨어나는 소리를 들어 보라. 하루 동안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당신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알아보라. 공항이나 버스터미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하여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 알아보라. 혼자만의 하루-아니면 3일, 또는 7일- 침묵 수도회를 가지라. 도심으로 가서 사회 정의 수도회를 가져 보라. 다음 비행기나 버스 여행이 당신의 개인 수도회가 되도록 해보라. 한 달 동안 차의 라디오를 끄고 출퇴근하며 작은 수도회를 가지라. 새벽 2시에 일어나 그리스도의 임재를 상기시키는 촛불을 하나 켜고 한 시간 동안 밤의 소리를 들으라. 당신을 위한 광야의 시간을 가질 많은 방법들을 생각해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두 번째, 얼마 동안은 평상시의 성경 읽는 시간을 접어 두고 그 시간에 성경 말씀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라.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는 시간으로서 우리의 마음과 지성과 영혼을 신적인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돌리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외적 내적 감각들이 나침반의 바늘처럼 성령님이라는 북극성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다. 천천히,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가며 성령님이 인도하신다고 느끼는 단어나 문장에 이르렀을 때는 잠시 멈추는 것이다.
   성경을 읽던 중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라고 말한 느헤미야의 멋있는 말씀을 찾았다고 하자. 우리는 멈추고 기다리고, 포기하고 잠잠히 있는 것이다. 어쩌면 성령께서 우리의 약점을 속속들이 이해하시고, 힘이 부족한 이유들을 드러내시고,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주위 환경에 의존하지 않는 힘을 갈망하게 하신다. 우리는 성경으로 기도하기 시작한다. "주님, 당신의 기쁨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없는 것들, 예컨대 음식과 피상적인 대화들과 쓸데없는 것들 속에서 기쁨을 얻을 것을 갈망했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의 기쁨에 완전히 젖게해주소서." 성령님의 지시를 받을 수 있다. 아니면 찬양을 하고 춤을 출 수 있다. 아니면 의식적인 지성으로는 깨닫지 못하는 언어로 기쁨에 찬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 외에 많은 것들이 있다. 여기서는 단지 힌트만 주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성경으로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세 번째, 계획한 '신성한 여가'를 미리 정해 놓고 싶은 끊임없고 영속적인 인간적 갈망을 꺽으라. 낮잠을 자라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이웃을 찾아가 한 시간이라도 같이 보내라. 해가 지는 광경을 보도록 서로 도우라. 산보를 하라. 운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식물 공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산보를 즐기기 위해 산보해 보라, 기도를 하루쉬어 보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어 보라. 그들에게서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의 노래를 들어 보라. 샤워 대신에 목욕을 하라.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낭비해 보라. 아이디어들은 무한하다.

질문 : 관상의 전통이란 무엇인가?
해답 : 하나님을 사랑스럽게 주목하는 삶이다.

질문 : 왜 우리는 그것을 탐구해야 하는가?
해답 : 그것을 통해 우리의 소외감을 극복하게 하는
       성스러운 안식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관상적인 사람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가 "관상하는 삶"이라 지칭하는 특정한 소명을 말하기보다는,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이끌어 창조적이고 구원하는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관상적 사랑의 신령한 습관을 말하는 것이다. 토마스머튼은 “나는 관상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확인했을 뿐 아니라, 그것의 꾸밈없음과 진지함과 겸손함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그것의 통합을 끈질기게 주장했다"고 기록했다. 사랑스럽게 하나님을 주목하고 점점 자라가는 하나님과의 연합(일치. 합일)을 통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탐구하는 모험에 당신을 초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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