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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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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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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abbey.com/13668
하나님을 봄 (Vision of God )
(기독교영성사전, 은성 pp. 698-699)
이것은 영성 생활의 목표인 지고선(summum bonum)을 지칭하는 고전적 정의이다. 이 용어는 거의 모든 세계적인 종교들에서 발견되지만, 원래 기독교보다는 플라톤주의에서 기원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지고선을 나타내는데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간주했다.
커크(K. E. Kirk)는 "마음이 청결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것은 공관적 전통에서 반복되지 않지만, 구약성서에서 여호와는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욥은 오랜 시련을 통해서 새롭게 깨우친 후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보고 회개했듯이, 욥도 하나님을 봄으로써 회개했다.
성경신학의 전성기에 "말씀"은 최고의 상징이었다. 사회학자인 데이비드 마틴(David Martin)이 신비주의가 종교에 대한 절대적인 정의를 제공한다는 것을 거부했듯이, 지금도 그렇게 주장되고 있다. "인간은 내면의 성으로 들어가거나, 조명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말씀-로고스, 이성, 구현-에 의해서 살아간다. 말씀은 의지의 행위인 순종을 요구한다. 철학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무어(G. E. Moore)는 선을 고찰하면서 봄(vision)을 나타내기 위해 준-심미적인 상징을 사용했고, 그것을 아름다운 것에서 유추하여 생각하며, 도덕적 행위자를 관상자로 간주했다. 한편 어떤 사람은 관상자란 본질적으로 불가피하게 선을 원하고 행하는 행위자라고 간주하려 한다. 아이리스 머독(Iris Murdoch)은 『선의 주권』 (The Sovereignty of Good, 1970)에서 봄(vision)이라는 표현과 시각(sight)이라는 은유를 회복시키려 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순히 하나의 의지가 아니라 "보는 통일체"이며 철학적 편견이 없는 사람은 시각에 의해서 태도의 변화를 묘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전에 싫어했던 사람을 다른 시각으로 봄으로써 사랑하고 사모하게 된다.
지고선을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에는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을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지적인 시각이며, 감각에 속한 욕망들로부터 이탈함에 의해서만 획득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정신적 훈련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금욕과 윤리적으로 엄격한 판단이 포함된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은 매우 히브리적일 뿐만 아니라 반-성육신적일 수도 있으며, 인간 예수는 하나님께로 가는 하나의 단계요 갈보리는 긴 여정의 한 장소에 불과하게 되며, 모든 인간관계가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며 이웃 사랑이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명령이 된다. 이것이 기독교 영성의 역사에서 실제로 이루어져 온 현상이다.
그러나 현대의 철학적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확신을 얻어야 한다. 아이리스 머독은 언어철학자들. 극단적인 논리에 의거하여 단순히 종교를 반대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허무주의와 무의미함을 선도해 온 사람들을 논박하려 한다. 그녀는 행동주의에 반대하여 자신의 도덕 철학의 기초를 인간 심리학에 두며, 과학뿐만 아니라 심미적 경험을 의지하려 한다. 심미적 경험은 우리를 감각적인 것 안에 가두어둘 수도 있다. 아이리스 머독은 플라톤이 예술가들을 추방했다는 불편한 사실에도 대항했다(The Fire and the Sun, 1918).
기독교만이 지고선인 봄(vision)의 개념을 공정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우리를 초월하는 곳으로 이끌어간다. 우리는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본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경우에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기이한 경험 안에서 예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사랑 안에서 예수를 본다. 그것은 예배 안에서 우리의 전인(全人)을 통일시켜준다. 그것은 단순히 무엇이 진리인지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통찰을 추구하는 것, 단순한 "바라봄"(gaze)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아직 성취할 수 없는 것을 항해 나아가게 해 준다. "하나님을 보려는 갈망에 만족하지 않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을 바라봄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보려는 갈망의 불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에는 한계가 없으며, 선을 향한 갈망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그 갈망의 성장이 종식되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데 있어서 성장을 중단하게 만드는 한계도 없다" (Gregory of Nyssa, Life of Moses 239).
Dorothy M. Emmet, The Moral prism, 1979; Kenneth E. Kirk, The Vision of God, 1931; Vladimir Lossky, The Vision of God, 1963; John Macquarrie, Paths in Spirituality, 1972, pp. 120-6.
하나님을 봄 (Vision of God )
(기독교영성사전, 은성 pp. 698-699)
이것은 영성 생활의 목표인 지고선(summum bonum)을 지칭하는 고전적 정의이다. 이 용어는 거의 모든 세계적인 종교들에서 발견되지만, 원래 기독교보다는 플라톤주의에서 기원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지고선을 나타내는데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간주했다.
커크(K. E. Kirk)는 "마음이 청결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것은 공관적 전통에서 반복되지 않지만, 구약성서에서 여호와는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욥은 오랜 시련을 통해서 새롭게 깨우친 후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보고 회개했듯이, 욥도 하나님을 봄으로써 회개했다.
성경신학의 전성기에 "말씀"은 최고의 상징이었다. 사회학자인 데이비드 마틴(David Martin)이 신비주의가 종교에 대한 절대적인 정의를 제공한다는 것을 거부했듯이, 지금도 그렇게 주장되고 있다. "인간은 내면의 성으로 들어가거나, 조명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말씀-로고스, 이성, 구현-에 의해서 살아간다. 말씀은 의지의 행위인 순종을 요구한다. 철학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무어(G. E. Moore)는 선을 고찰하면서 봄(vision)을 나타내기 위해 준-심미적인 상징을 사용했고, 그것을 아름다운 것에서 유추하여 생각하며, 도덕적 행위자를 관상자로 간주했다. 한편 어떤 사람은 관상자란 본질적으로 불가피하게 선을 원하고 행하는 행위자라고 간주하려 한다. 아이리스 머독(Iris Murdoch)은 『선의 주권』 (The Sovereignty of Good, 1970)에서 봄(vision)이라는 표현과 시각(sight)이라는 은유를 회복시키려 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순히 하나의 의지가 아니라 "보는 통일체"이며 철학적 편견이 없는 사람은 시각에 의해서 태도의 변화를 묘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전에 싫어했던 사람을 다른 시각으로 봄으로써 사랑하고 사모하게 된다.
지고선을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에는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을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지적인 시각이며, 감각에 속한 욕망들로부터 이탈함에 의해서만 획득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정신적 훈련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금욕과 윤리적으로 엄격한 판단이 포함된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은 매우 히브리적일 뿐만 아니라 반-성육신적일 수도 있으며, 인간 예수는 하나님께로 가는 하나의 단계요 갈보리는 긴 여정의 한 장소에 불과하게 되며, 모든 인간관계가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며 이웃 사랑이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명령이 된다. 이것이 기독교 영성의 역사에서 실제로 이루어져 온 현상이다.
그러나 현대의 철학적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확신을 얻어야 한다. 아이리스 머독은 언어철학자들. 극단적인 논리에 의거하여 단순히 종교를 반대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허무주의와 무의미함을 선도해 온 사람들을 논박하려 한다. 그녀는 행동주의에 반대하여 자신의 도덕 철학의 기초를 인간 심리학에 두며, 과학뿐만 아니라 심미적 경험을 의지하려 한다. 심미적 경험은 우리를 감각적인 것 안에 가두어둘 수도 있다. 아이리스 머독은 플라톤이 예술가들을 추방했다는 불편한 사실에도 대항했다(The Fire and the Sun, 1918).
기독교만이 지고선인 봄(vision)의 개념을 공정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우리를 초월하는 곳으로 이끌어간다. 우리는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본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경우에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기이한 경험 안에서 예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사랑 안에서 예수를 본다. 그것은 예배 안에서 우리의 전인(全人)을 통일시켜준다. 그것은 단순히 무엇이 진리인지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통찰을 추구하는 것, 단순한 "바라봄"(gaze)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아직 성취할 수 없는 것을 항해 나아가게 해 준다. "하나님을 보려는 갈망에 만족하지 않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을 바라봄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보려는 갈망의 불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에는 한계가 없으며, 선을 향한 갈망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그 갈망의 성장이 종식되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데 있어서 성장을 중단하게 만드는 한계도 없다" (Gregory of Nyssa, Life of Moses 239).
Dorothy M. Emmet, The Moral prism, 1979; Kenneth E. Kirk, The Vision of God, 1931; Vladimir Lossky, The Vision of God, 1963; John Macquarrie, Paths in Spirituality, 1972, pp.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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