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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와 가톨릭의 개혁(기독교 영성사)

수도관상피정 은성............... 조회 수 3697 추천 수 0 2008.12.26 22: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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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koabbey.com/13669
개신교와 가톨릭의 개혁(기독교 영성사)

   16세기는 어느 시대보다 강력한 종교적 소총돌이에 휘 말렸던 시대이다. 북유럽은 그 이전 400년 동안보다 더 심하게 유럽을 분열시킨 괴로운 싸움으로 말미암아 남유럽과 동유럽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대부분의 사려 깊은 가톨릭 신자들은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 하면서도 각기 매우 상이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개신교로 개종한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의 정치적 구조에서의 개혁뿐만 아니라 신학, 의식, 성레, 그리고 영성 등의 분야에서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견해에 이르렀다. 따라서 교황권과의 결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한편 가톨릭교회 내에 남은 개혁자들은 사제들의 교육적인 개혁, 감독 등의 분명한 악습의 시정, 그리고 교회의 집중적인 관리를 위해서 트렌트 공의회에서 승인을 얻으려 했다. 특히 스페인의 가톨릭교도들이 영적 개혁을 주도했다.
   가톨릭 측과 개신교측은 서방의 기독교계를 개혁하기를 원했으며, 중세 후기와 분명하게 결별하고서 현대로 옮겨 갔다.

1.기독교 영성을 재형성한 개신교 종교개혁

1) 은혜와 자유를 강조한 루터와 루터교들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는 영적 문제들을 시정하기 위해서 종교개혁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는 중세 후기의 많은 종교적 의무 속에서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추구했지만 만족을 얻지 못했다. 그가 로마서 1장에 기록된 바 복음과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바울의 말을 이해했을 때에, 비로소 낙원의 문이 열렸다.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의는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고, 인간이 노력하여 얻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일상생활의 일반적인 행동에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보속, 순레, 수도원 등과 관련된 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느꼈다.
   루터는 다른 개혁자들과는 달리 가톨릭의 유산을 버리려 하지 않고 그것을 개혁하기를 원했다. 그의 기준은 복음에 대한 그의 식견, 즉 사람들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이 기준에 의해서 그는 미사, 사제의 의복, 교회력, 교회의 건축물 등의 대부분을 그대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루터는 모국어로 된 성경, 찬송, 신조의 개혁 등을 도입 했고 또 교회의 순례(먼 곳에 있는 성지를 방문하는 일), 성유물(성경의 인물들과 성인들의 유해와 유물), 독신 서원 등의 종말을 내다보았다. 그는 이것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없는 것을 인간의 공로로 얻으려 하는 시도로 간주했다.
   오늘날 우리가 유익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결정하기 위해서 전통을 의지하듯이, 그 시대에 루터도 그렇게 행했다. 그는 교부들과 신비가들의 저서들을 의지하면서, 영적 전통을 판단하는 표준으로써 바울이 분명히 말한 복음을 사용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일부 작가들은 인정하고 일부 작가들을 배격하게 만들었다.
   그는 어거스틴의 반펠라기우스적 저서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영혼의 수동적 역할에 관한 버나드의 저서를 즐겨 인용했다. 그러나 그는 위 디오너시우스에게서 시작되어 마이스터 엑하르트에 의해 대단히 철학적으로 변한 신비주의의 흐름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루터는 신학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큰 적으로 간주했고, 영성에서도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반대했다.
   루터가 신비주의적 전통을 존중했다는 것은 그가 약 100년 전의 익명의 작품인 『독일 신학』(Theologica Germanica)을 출판한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 책이 평신도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 번 인쇄했다. 그러나 그의 독특한 관점들은 1520년에 펴낸 『기독교인의 자유』(The Freedom of a Christian)에 등장한다. 이 논문에서는 영혼이 그리스도와 결혼한다는 신비적인 상징이 새로이 중요성을 취한다. 즉 그리스도의 의와 영혼의 죄를 교환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역설적인 진술과 더불어 시작된다.

기독교인들은 만물에서 완전히 자유한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만물의 종으로서 만물에게 예속된다.

   이 역설의 근저에는 복음이 우리를 죄와 죽음과 사탄에게서 자유케 했으나, 또한 우리를 자유케하여 이웃들을 섬기게 만든다는 루터의 견해가 존재한다.
   루터는 일생동안 영적 공격, 혹은 Anfechtum 때문에 분투했다. Anfechtum이란 깊은 절망,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위치에 대한 도전으로서 죄책감이라는 깊은 심연과 사탄의 조롱에 빠지는 것을 의미했다. 루터는 이처럼 체험이 영적여행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지는 않았고, 악과 싸우는 영적싸움이라고 여겼다. 그의 신앙의 객관적이고 성례적인 측면이 여기에서 그를 구해냈다. 왜냐하면 그는 '나는 세례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그가 연약하고 죄악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그의 의심들도 제거된다.
   사실 루터는 기독교인들은 평생동안 죄인으로 지낸다고 믿었다. 기독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선한 의도와 선행과 기도와 성경 읽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죄인이며, 그들의 경건한 죄가 육적인 죄보다 더 악할 때도 있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 아래서 정죄 받은 죄인인 동시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대속 때문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의롭다고 간주한 성도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적 성장에서 외적인 변화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거룩함 안에서의 성장에 대한 주장들을 의심했으며, 그러한 성장을 목표로 삼지도 않았다. 루터는 단지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충실하게 머물러 있기만 원했다. 그는 여기서 벗어나는 운동은 모두 안전하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
   영성에 관한 루터의 가르침은 대단히 실용주의적이지만, 하나님과의 합일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는 의심스럽다. 루터는 기도하는 방법에 관해 질문을 받고서 대단히 실질적인 편지로 답변했다. 그 편지에서 그는 근본적인 것들, 즉 십계명, 신조, 그리고 주기도문에 근거하여 충고했다. 그는, 이들 가르침의 각 부분에서 배울 만한 것, 용서를 구할 근거가 되는 것,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릴 근거가 되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도와달라는 간구의 근거가 되는 것을 발견하여 꽃다발을 만들라고 충고했다.
   이처럼 근본적인 것들에게 돌아가려는 태도가 루터의 『소요리 문답』(Small Catechism)의 기초가 된다. 이 책은 그 후 루터교의 영성에 영향을 미쳐왔다. 이 책에서 루터는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버금가는 방법으로 이 기본적 문서들에 대해 설명 한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스라엘의 옛 계명들을 내면화하셨으며 누구도 무죄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허용치 않으셨다.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theology of the cross)과 "십자가의 영성"(spirituality of thecross)을 요구했다. 그는 "영광의 신학"(theology of glory)에 반대했는데, 이 신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 시대의 신학자들이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하나의 커다란 체계로 해석하기 위해서 인간의 상황을 초월하는 입장을 위했다. 그러나 루터가 주장하는 십자가의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기대와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으로서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더불어 시작된다. 루터는 십자가위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고 한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인류에게 사랑의 은혜를 드러내 주신다. 십자가의 영성도 우리를 천국으로 들어올려주는 승리와 대리 기쁨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루터의 영성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하면서 자신이 체험한 자유에 초점을 둔다. 그것은 가톨릭의 영적 전통의 일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새로이 평신도, 성경, 그리고 교회의 경건한 행동에 반대되는 세속적인 행위 등을 강조한다. 우리가 "신령한 사람"의 모습을 그릴 때 생각하는 일반적인 모습과는 달리 강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속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루터의 장점과 약점은 부분적으로는 어거스틴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는 거의 절대적으로 죄, 용서, 십자가 등에 관심을 두고 치료, 변화, 부활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처럼 기독교적 삶에서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많은 루터 교도들이 미지근한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이다. 자아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과 반대가 된다는 그의 견해는 대단히 큰 해를 끼쳐 왔다. 그러나 은혜와 자유를 강조한 것은 아주 훌륭한 기독교 전통을 이룬다.
   루터가 죽은 후 그의 추종자들은 로마 가톨릭 교도들과 루터교회 내의 왜곡으로부터 그들 자신과 루터의 가르침을 변호하기에 바빴다. 때로 "정통 시대" 혹은 "신앙고백 시대"라고 하는 이 시기는 루터의 가르침을 체계화하고 옹호하는 시기였다. 가톨릭 스콜라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신학의 기초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두었던 것처럼, 루터교 스콜라주의에서는 그 신학의 기초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두었다. 설교를 통해서는 대단히 형식적이고 학구적으로 가톨릭교회, 개혁파, 재세례파, 비 정통 루터파의 잘못들을 탄핵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혁신가와 나중에 루터교의 정통 신학자들 중 최고가 된 젊은 지성인 사이에 훌륭한 우정이 발달되었다. 요한 아른트(John Amdt, 1555-1621)의 설교와 저서가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의 것과 같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는 혁신가였다. 그는 루터주의의 "순수한 교리"를 옹호하기보다는 루터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참된 영적갱신을 진작하는데 더 관심을 가겼다. 네 권으로 이루어진 그의 저서 『진정한 기독교』(Ture Christianity)는 잠든 루터교도들을 깨우는 종소리요, 죄를 자각하라는 예언자의 소리요, 매 일 거듭남을 통해서 중생하라는 도전이었다. 그는 가톨릭적이고 이단적인 경향으로 흐른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요한 게르하르트(Johann Gerhard, 1582-1637) 때문에 정죄 받지는 않았다. 게르하르트는 15세 때에 아른트의 영향을 받아 목회사역을 시작한 인물이다. 게르하르트는 루터교의 경건을 진작시키라는 소명을 받았기 때문에 작은 경건 서적을 저술했다. 그러나 그 시대는 논쟁적이고 현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좋아하고 마음에서 우러난 애정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른트는 17세기 말에 등장할 루터교 경건주의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루터의 신학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의 체험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동시대인들은 루터를 조목별로 요약할 것을 원했다. 그러나 아른트는 사람들이 루터가 경험한 그리스도를 발견하기를 원했다. 그리스도에게만 매달리는 것이 루터와 아른트의 공통된 주제이다. 루터가 여러 교구에서 발견한 것으로 인해 매우 놀라서 『소요리 문답』 저술을 계속했듯이, 아른트는 그 시대의 죄악상을 보고 통탄하면서 『진정한 기독교』를 저술했다. 이 책은 루터교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건서적이다.

   야곱 뵈메(Jacob Boehme, 1575-1624)는 그다지 운이 좋지 않았다. 그의 저서들은 비 정통적인 것이라고 정죄되었지만, 그는 오늘날까지도 신비적 저술가들과 구도자들에게 영 향을 미치고 있다.
   추종자들이 볼 때에 루터는 위압적인 인격의 소유자였다. 오늘날에도 루터교도들이 루터를 존경하고 연구하는 태도는 다른 어느교파에서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다. 그는 한 번도 어떤 체계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교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의 정력적인 투쟁과 직선적인 선포를 본받고 있다. 그러나 루터교의 전통이 항상 루터를 따르지는 않았고, 항상 루터를 완벽하게 안 것도 아니다.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의 저서들을 철저하게 연구하게 되었다. 루터교의 전통과 루터는 하나의 대화 안에, 때로는 긴장 안에 선다.

2) 기독교적 삶의 훈련을 갱신한 개혁주의 개신교 운동

   개신교 중에서 개혁파는 스위스에서 루터와 동시대의 인물인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의 지도하에 시작되었다. 쯔빙글리는 루터보다 더 가톨릭 전통을 거부했다. 루터와 쯔빙글리는 1529년 단 한 차례 만났는데, 그 때에 이들 두 사람 사이에는 성만찬의 의미와 실천에 관해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그 직후 쯔빙글리는 가톨릭 군대와 전쟁 중에 사망했다.
   쯔빙글리는 오직 말씀의 영성을 원하여 의식이나 성례는 전혀 강조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에서 낭독하는 성구집, 사제의 의복, 악기, 눈에 보이는 교회 예술 등 가톨릭적 전통을 거부했다. 그는 이것들을 중심되는 말씀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았다. 성경에서 명한 것이 아닌 관습은 가톨릭교도들이 만들어 낸 것이므로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기 교회의 오르간을 열지 못하도록 못질을 했다고 한다.
   쯔빙글리의 영성의 특성은 내면성과 성서에 대한 지식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내적 제자도와 외적 제자도를 예리하게 구분했고, 내면적인 것만을 소중한 것이라고 간주했다. 표면적인 것은 "세상"과 동일시되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인간의 무지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가톨릭 전통에서 금욕적이고 성레적이고 신비적인 차원의 것들은 거부하고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를 포함하여 개혁파전통의 여러 부분에 영향을 미치게 될 성경에 기초를 둔 합리주의를 채택했다. 개혁파 전통에서 이 부분은 칼빈에게서 비롯된 보다 온건한 요소와 긴장 관계에 있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보다 후대의 개혁가이다. 그는 개신교적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 당국의 추적을 피해 간신히 프랑스에서 도망쳤다. 경찰이 현관문을 두드리는 동안에 뒷문으로 도망친 것이다. 칼빈은 연구하는 학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제네바 사람들은 칼빈이 그곳에 정착하여 새로운 종교 질서와 정치질서를 경험하는 자기들을 지도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곳에서 그는 그 무렵 순교자로 간주되고 있었던 쯔빙글리의 전통을 물려받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칼빈의 신앙은 훨씬 성 찬론적이었기 때문에 매주 성찬식을 거행하기를 원했지만 이미 쯔빙글리가 주장하는 일년에 네 번 행하는 유형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칼빈의 신학은 흔히 예정론(창조 이전에 하나님은 이미 구원받을 자들을 선택 하셨다는 교리)을 포함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후기 칼빈주의는 신학적인 강조점과 영성에 있어서 칼빈의 원래 의도와는 사뭇 다르게 되어 있었다. 칼빈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에 대한 의식에서 생겨난 것이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를 의롭다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의롭다 할 수 있다면, 칭의라는 선물은 하나님께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되어야 한다. 칼빈이 주장한 예정론의 핵심은 우리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안전하다는 것을 아는데서 오는 위로였다. 우리는 최후 심판에 대해 걱정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만만하게 살면서 근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다.
   칼빈의 영성의 출발점은 예정론이 아니라, 신자와 그리스도의 신비적 합일이었다. 그는 인간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결합되며 평생 그 결합 안에서 성장한다고 가르쳤다. 이 결합(합일)은 가톨릭 전통이나 정교회의 전통 안에 있는 신비가들이 주장하는 합일과는 매우 다르게 여겨진다. 이 신비적 합일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지 점진적인 여러 성장 단계를 지닌 긴 여정의 종착점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신비가이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말했다.
   칼빈은 이 과정에서 칭의와 성화는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그는 칭의는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루터의 견해에 완전히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주어지는 성화(사람들이 거룩해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을 일컫는 용어)의 은사를 보다 강조했다.
   칼빈은 영적 훈련을 강조했으며, 반면에 루터는 규정된 관습으로부터의 자유를 귀중히 여겼다. 칼빈의 저서들을 보면 그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아를 아는데 있어서 지성의 능력에 대해 의심을 품었으며, 언어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 그리고 온유하심에 압도되어 있었다. 그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아버지시요 어머니이신 하나님에 대해 논했다.
   루터교처럼 유럽에 있는 개혁파 전통은 스콜라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스스로를 교리적으로 정의했다. 쯔빙글리의 영성은 때로 칼빈의 영성의 그늘에 가려지며, 칼빈의 신학은 신비적 합일에 대한 그의 사상들보다는 예정론을 중시함으로써 잘못 해석되었다. 개혁파전통은 다른 전통보다도 기독교인의 공적인 책임이라는 개념을 잘 보전해 오고 있다. 개혁주의 신앙은 사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대해 무관심하지 못한다. 기독교인들은 공동생활의 건강을 유지해야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3) 급진적인 제자도를 요구한 재세례파

   가톨릭교회나 루터교회나 개혁교회와 의견을 달리하는 여러 다양한 작은 집단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방에서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재세례파라고 불렸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유아 세례를 받고 있었다.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그들의 신앙이 악용되어, 그들은 물에 빠뜨려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이 집단들은 근본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통된 의견과 다른 주장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정부를 위협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영감이 성경의 가르침을 대신한다고 했다. 그들은 영적이고 정치적인 무정부 상태를 촉진하는 듯이 보였다. 1534-1535년에 윈스터를 과격하게 정복한 일 때문에 가톨릭교도와 개신교인들은 이들을 좋지 않게 보았다. 두 사람이 "왕"이 되어 자기들의 견해에 완전히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일부다처제를 인정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세상에 임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많은 재세례파교도들은 이 "왕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 집단의 공통된 신념은 유아세레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즉 신약성서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는 신앙을 소유한 후에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유일한 참 제자들이 되어 공적인 의무나 전쟁에 참가하여 싸우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포함한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세상에서 박해 받는 사람들의 비밀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 집단 내에도 대단히 다양한 집단들이 있어서 어떤 집단은 평화주의인 반면,  어떤 집단은 군국주의였다.

   16세기의 많은 과격한 집단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집단이 있다. 그것은 메노 시몬즈(Menno Simons, 1496?-1561)가 이끄는 집단이다. 그는 다양한 과격한 집단들을 규합하여 메노파(Mennonites)를 구성했다. 메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위격은 하나의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믿었으며, 회심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이 세상의 길을 따르지 않고 중한 죄를 범하지 않고서 살게 될 것이라고 가정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범죄한 사람들을 파문함으로써 거짓 가르침과 부도덕한 행동들로부터 보호해야한다. 아만파(Amish: 17세기에 스위스의 목사 J. Ammann이 창시한 분파)는 이러한 교회의 규율을 가장 철저하게 채택한 메노파이다.
   이처럼 메노파의 영성은 거짓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공동체 가부여한 엄격한 도덕법, 평화주의, 단순한 생활 양식, 성령의 직접적인 영감, 개인적인 제자도 등을 기대하는 데서 발달해 왔다.

4) 성공회는 공동기도서 안에서 일치를 발견했다.

   영국국교회는16세기에 엄청난 역전을 경험했다. 17세기에 극단적인 로마 가톨릭 견해와 개혁파 개신교의 견해로 말미암아 유명한 순교자들이 생기고 내란이 발생했다. 다양한 관점을 조정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영국 국교회는 신학적 과점에서의 폭넓은 차이점을 수용했다. 우리 시대에 그러한 체험으로부터 발달해 나온 것이 가톨릭과 개신교와 정교회라는 전통 속에 서있는 신부(新婦)가 성공회라는 견해이다. 성공회는 스스로를 보편적(catholic)이라고 여기므로, 이 교회를 개신교로 분류하는데 대해서는 약간의 질문이 생긴다.
   성공회에서는 가능한 한 자기들의 교제 안에 많은 견해를 포함시키기를 원하며, 그러므로 신학적 견해나 윤리적 견해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하나의 예배형식, 즉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 안에서 연합하는데 동의 해왔다. 그들은 예배가 자기들의 일치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신학보다 우선하는 것이라고 본다. 어느 성공회 교인은 "공동기도서는 생활의 규칙이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되는 성공회의 방법을 규wjd하고 형성하고 뒷받침 해 준다"라고 표현했다.
   성공회의 영성에서 강조하는 것은 개인적인 성장을 위한 배경이 되는 공동전례(기도)이다. 그 기도서를 처음으로 저술한 사람은 토마스 크랜머이다(1549). 그 후 그 기도서는 많이 개정되었다.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공회 예배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이 기도서에 수집된 기도문들은 성공회의 감수성과 세련된 문학적 양식들을 드러내 준다.
   16세기 이후의 성공회의 영성에 관한 이야기에는 여러 시인들이 포함된다. 최초의 시인들 중에는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 "형이상학적" 시로써 놀라운 심상들과 심오한 경건을 드러낸 존 돈(John Donne,1571-101)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성공회 저술가들 중에는 『거룩한 삶』(Holy Living)과 『거룩한 죽음』(Holy Dying)의 저자인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1613-1667,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라는 진지한 소명』(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의 저자인 월리암 로우(William Law,1686- 1761), 그리고 『기독교력』(The Christian Year)을 작성한 존 케블(John Keble, 1792-1866) 등이 있다.
   초기의 성공회에는 후대에 보다 분명하게 강조될 세 가지 주요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진보적 교회, 혹은 폭넓은 교회(18세기)에서는 성서와 자연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진리를 적용하고 표현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지성의 역할을 강조했다. 복음적 교회, 혹은 저교회(low church ; 18세기)에서는 회심과 활기찬 찬송을 위한 전도를 특별히 강조함과 동시에 유럽에서의 개신교 개혁 자들의 가르침을 강조했다. 보편교회, 혹은 고교회 (high church , 19세기)에서는 감독들과 성례의 역할, 교회의 초기 교부들, 그리고 로마 가톨릭주의와의 유대를 강조했다. 성공회에서는 이 처럼 많은 요소를 지닌 강력한 영성의 전통을 발달시켜왔다. 공동예배가 중심이 되며, 개인적 신앙생활은 그러한 배경 안에서 실시된다.

   16세기에 나타난 네 가지 형태의 개신교회, 즉 루터교회, 개혁교회, 재세례파, 그리고 성공회 등은 시간이 흐르면서 수적으로도 증가하고 다양해졌다. 이들 교회들은 공통적으로 성경의 필요성,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다양한 악습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원리와 일반적인 영적 관습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2. 가톨릭교회의 개혁

   일부 가톨릭 신자들이 좌절하여 교회를 떠나고 있을 때에, 한쪽에서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교회 생활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하는 악습들을 억제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교회의 제도적인 삶에서의 변화, 그리고 개신교인들의 신학적 도전에 대한 반응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트렌트 공의회(Council of Trent)에서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다루려 했다. 이 회의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북 이탈리아에서 개최되었다. 정치적인 측면의 개혁은 어려웠다. 그러나 사제들의 교육을 개선하는 것과 주교들의 악습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일에서는 발전이 있었다. 예를 들면 감독직을 매매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신학적인 측면에서, 트렌트 회의에서는 개신교 운동과는 구분되는 가톨릭주의를 정의한 교리적 진술들을 작성하여 개신교인들이 공격해온 것들을 옹호했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트렌트 회의가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반응을 나타낸 것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이후 400년 동안 가톨릭측과 개신교측은 서로를 배격해왔다. 1960년대에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에야 비로소 기독교계의 이 두 지파 사이에 진지한 대화의 문이 열렸다.

1) 이냐시오 로욜라가 제수잇 교단을 세움

   루터가 독일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옹호하고 있던 시기에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of Loyala, 1491?-1556)는 영적 서적들을 읽고서 심오한 회심을 체험했다. 그는 1521년 팜플로나 전쟁에서 중상을 입은 후 병원에서 지내면서 예수님의 생애와 성인들의 생애에 대한 책을 읽었다. 그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했으며 기독교 영성사에서 가장 훌륭한 책 중의 하나인 『영신 수련』(Spiritual Exercises)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이냐시오는 감사의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서 성지를 여행한 후에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곳에서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 들었다. 결국 1540년 이 집단은 로마로 가서 예수회(Society of jesus)라는 새로운 교단 설립 허가를 받았다. 이냐시오는 교단의 최고위직에 선출되었으며, 남은 생애를 로마에 있는 사령부에서 지내면서 교단을 이끌었다.
   『영신 수련』은 실제로는 묵상을 지도하는 사람을 위해 기록된 교본이다. 여기에 수록된 교훈들은 특별하면서도 융통성이 있다. 그것은 묵상을 하는 사람이 30일 동안 지내면서, 그 동안에 많은 체험을 통해서 삶의 방향과 분별력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기간 동안 묵상하는 사람은 날마다 영적 감독을 만나며 4-5시간 기도하고 미사에 참석하고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이냐시오는 감독이 이 프로그램을 개개인의 형편에 따라 조정하는 것을 장려했다.
   『영신 수련』이 지닌 역설적인 특성은 대단히 합리적이면서도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감정에 호소한다는 점이다. 묵상자는 성경에 등장하는 광경을 재구성하기 위해서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 과정에서 묵상자는 마음의 움직임에 참석하고 그것을 느낀다. 이 프로그램은 개개인에게 다소 분명하면서도 확고한 통로 안에서 자유를 주며 예수를 따르는 방법에 대한 분명한 결정에 이르게 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날마다 자기 양심을 살피는 것도 『영적 훈련』에 규정되어 있는 중요한 훈련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굴복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식별하는 훈련이다.
   이냐시오가 세운 제수잇 교단은 급진적인 새로운 형태의 수도원운동이었다. 그것은 교단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 탁발교단들(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크회)보다 한 발 앞섰다. 한 곳에서 머무르겠다는 서원이 수도서원의 일부였던데 반해, 제수잇 회원들은 자기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여행하는 것을 의무로 여겼다. 또한 "행동 속에서의 관상"이라는 이상은, 곧 제수잇 회원들은 항상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지는 않고 가끔은 혼자 거한다는 것, 그리고 함께 모여 지내는 사람들을 위한 경건회는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이전의 전통을 버린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공동 예배보다 훨씬 우위에 있음을 의미했다. 제수잇 회원들은 각기 자신의 성무일과, 즉 그날을 위해 정해진 기도문으로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일을 행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냐시오의 이상은 부분적으로 바울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루터의 종교개혁의 기초도 바울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냐시오와 제수잇 회원들은 완전히 루터주의에 반대했으며, 교황에 대한 특별한 충성과 순종을 서원했다. 이냐시오는 바울의 선교사로서의 생활, 몇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만물의 찌끼처럼 되려는 태도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냐시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에서도 감명을 받았다. 그는 『영신 수련』에서 성경과 이 책만을 추천했다. 그러나 이냐시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와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특히 학문적이고 지적인 추구를 모독한 점에서 그렇다. 그의 교단은 최고의 학문의 표준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제수잇회에는 세 가지 중요한 관습이 있는데, 그들은 이것을 최고로 유익하게 발달시켰다. 『영신 수련』에서 정의한 피정은 1599년의 규칙서에 보다 자세히 정의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전통적으로 알려져 있는 영성생활의 3단계(정화의 단계, 조명의 단계, 일치의 단계)가 4주의 피정 단계에 맞추어 연결되어 있다. 둘째, 영적 지도는 피정을 통해 성장하는 것으로서 제수잇 회원의 전문분야가 되었다. 후일 제수잇 회원들은 유럽의 많은 강력한 통치자들의 고해신부나 지도자가 되었으며, 교황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의심도 받았다. 셋째, 제수잇 학교 안에 많은 연대와 조합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소년들의 영적 헌신을 격려하기 위해 모인 청년 집단인데, 이들은 장차 제수잇 회원이 될 사람들이었다. 사도 바울의 감화를 받은 것으로서 봉사를 위해 여행한다는 이상 때문에 많은 제수잇 회원들은 유럽은 물론이요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로 선교사가 되어 나갔다. 가장 유명 한 인물로는 중국에서 활동한 마태오 리치 (Matteo Ricci, 1522-1610)와 인도에서 활동한 로베르토 데 노빌리(Roberto de Nobili, 1577-1656)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자기가 활동하는 선교지의 문화를 매우 존중하여, 기독교를 그 문화에 맞추어 조정했다. 결국 그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유력하고 유식한 계층에서 추종자를 얻었지만, 영속적으로 유지될 교회를 세울 수는 없었다. 이것은 사회에서 가난한 한계 계층의 사람들이 선교지의 문화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 선교사들의 활동에 의해 기독교에 이끌려온 후대의 선교사와 매우 대조가 된다. 초기의 제수잇 교단은 신비적인 것과 실질적인 것의 균형을 유지했지만, 이냐시오가 사망한 이후에는 그러한 균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이 교단은 방향을 전환하여 도덕주의와 절대론을 채택했고, 비밀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속이기도 했는데, 이것은 모든 개신교 통치자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제수잇 회원이라고 고발되었으며, 그들이 스페인이나 프랑스를 위해서 개신교 통치자들을 전복시키려 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1774년에 이 교단은 정치적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폐지되었다가 1814년에 정치적인 음모가 없이 재 건되어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교단이 되었다.

2) 아빌라의 테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 갈멜회의 갱신

   예수의 테레사(Mother Teresa of jesus, 1515-1582)라고 불리는 아빌라의 테레사는 스페인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가요 개혁자였다. 그녀는 12세기 중반에 성지의 갈멜산에 세워진 갈멜 교단의 수녀가 되었다. 데레사는 최근의 완화된 갈멜회 규칙이 아니라 초기의 엄격한 규칙을 따른 개혁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녀가 이끈 개혁 운동은 "맨발"의 수도회라고 불리게 되었다. 테레사는 수녀들을 위해 많은 새 집을 건설하고 개혁 운동을 많은 권위직 사람들에게 옹호하는 일에 참여 했다.
   그러나 테레사는 무엇보다 신비가로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전기는 그녀가 받은 시련과 발달 과정을 직접적으로 나타내 준다. 그녀는 1538-9년에 중병이 걸렸던 일, 1554년에 회심하여 깊은 영성생활에 들어간 일, 1559년에 그리스도께서 창으로 그녀의 가슴을 찌르는 환상을 본 것 등을 기록했다. 그녀 주위의 사람들은 그녀가 빈번하게 환상을 보는 것과 "말투"(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그것들은 마귀에게서 온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녀는 다른 신비가에게서 건전한 충고를 얻기까지 깊이 걱정을 했다.
   그녀의 저서인 『내면의 성』(Interior Castle)은 영적 발달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다. 그녀는 일곱 개의 "저택"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여행, 정화의 단계에서 조명의 단계를 거쳐 일치의 단계까지 묘사한다. 또 그녀는 기도와 묵상과 관상을 분류했다. 그녀는 두 종류의 수동적 관상, 즉 고요한 기도와 합일의 기도에 대해 저술했다. 그녀는 날마다 이 두 종류의 기도를 실천했다. 자기보다 나아가 어린 동료, 십자가의 요한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이 여행의 끝부분 가까이에 있는 호된 시련을 지적한다. 그녀의 글은 요한의 글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가 쉽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의미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비유들과 일상생활에서의 체험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테레사는 시도 썼지만, 시에 있어서는 십자가의 요한을 따라가지 못했다.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 1542-1591)의 저서들은 극적인 역전의 삶을 반영 하고 있다. 요한은 청년시절 갈멜 수도회의 개혁운동에 참여하면서 데레사로부터 상당히 큰 책임을 부여 받았다. 그녀는 이미 수녀들 사회에서 개혁운동을 시작했었으며, 이제 요한은 수도사들 사회에서 그 운동을 시작해야 했다. 실제로 테레사가 자신의 표현대로 "영적 결혼"을 경험하는 동안 요한은 그녀의 영적 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다.
   요한은 후일 개혁을 반대하는 교단 소속의 적들에게 납치되어 6개월간 감옥에 갇혀 지내기도 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시를 짓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머리속으로만 짓다가 나중에는 종이에 기록했다. 감옥에서 도망친 요한은 다시 갈멜회의 개혁분야의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그는 1580년대에 대부분의 산문 저서들을 저술했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정보누설자"가되려 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교단의 총대리가 참석한 헙의회에서 자신의 견해를 솔직하게 발표했기 때문에, 직분을 빼앗기고 외딴 곳으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49세로 사망했다.
   요한은 고난과 갈등의 삶을 통해서 영적 신학에 관한 저술을 했으며, 그로 인해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박사로 선정되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갈멜산의 등정』(The Ascent of Mount Carmel),『어두운 밤』(Dark Night), 『신령한 아가』(Spiritual Canticle), 『살아있는 사랑의 불길』(Living Flame of Live)등이 있다. 이 산문체 저서들은 문체의 탁월함에 있어서는 그의 시만큼 존경을 받지 못한다. 시에 대한 그의 설명은 반복적이며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스페인어로 쓰인 가장 훌륭한 시에 속한다. 다음에 있는 것은 그의 시 이다.

어느 어두운 밤
나는
갈급한 사랑의 동경으로 불타올라
눈에 뜨이지 않게 밖으로 나갔다.
나의 집은 정적에 쌓여 있었다.
-아, 참으로 순전한 은혜여 !-

어두움 속에서 안전하게
감추인 비밀의 사다리 곁에
어두움 속에 숨어
나의 집은 정적에 쌓여 있었다.
-아 순전한 은혜여 !-

오, 나를 인도하는 밤이여 !
새벽보다 사랑스러운 밤이여 !
연인을 그 사랑하는 자와 결합시키며
그녀의 연인 안에서 변화시키는
밤이여.

내가 오직 그분만을 위해
간직해온 두근대는 가슴 위에
그분은 누워 잠자며.
나는 향기로운 백향목 숲의 부드러운 바람 속에서
나는 그분을 어루만졌노라.

작은 탑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와
그분의 머리카락을 날릴 때.
그분이 부드러운 손으로
나를 얼싸안으시니.
나는 모든 감각이 정지되는 것 같았노라.

나는 내 사랑하는 분에게 기대어
나 자신을 버렸으며 자신을 망각했네,
모든 것이 정지되었고, 나는 자신에게서 빠져나갔노라.
나는 백합화 사이에서
모든 염려를 잊었노라.

   십자가의 요한이 사용한 가장 유명한 개념은 어두운 밤이다. 그는 이 비유를 최소한 두 가지로 사용한다. 즉 하나님을 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 그리고 산꼭대기, 즉 하나님과의 합일을 향한 영혼의 여행 체험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첫번째 의미에서는, 위 디오니시우스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중세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은 어떤 개념이나 비유로도 묘사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부정의 신학이다. 그러나 두번째 의미는 종종 신령한 길의 일부가 되는 길 잃음, 혼동, 가뭄, 공포 등을 표현한다.

토론 문제

1. 다양한 형태의 영성을 가진 개신교주의의 지류들을 비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개신교 종교개혁은 영성면에서의 혁명인가, 아니면 단순히 과거의 요소들을 달리 혼합한     것에 불과한가?

2.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그것은 십자가의 요한이 묘사한 것과 비슷한     가, 비슷하지 않은가?

3. 테레사처럼 영적 성장의 단계를 추구하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은 무엇이며 그에 대한 상급     은 무엇인가?

4. 가톨릭측과 개신교 영성의 차이점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가? 가톨릭교도들과 개신     교인들의 영성의 상태는 16세기에 그들이 지니고 있던 영성보다 개선되었는가?

참고 서적

Luther, Martin, "A Simple Way to Pray,"  Luter's Works, Vol 43. Philadelphia:
   Fortress,1968. Pp,187-212.
Trobisch, Walter. "Martin Luther's Quiet Time," Complete Works of Walter Trobisch.
Downers Grove, III.: Intervarsity Press, 1987. pp. 703-14.

영성훈련: 주기도문과 자기 성활

   우리는 루터에게서 단순한 기도 방법을, 그리고 이냐시오에게는 날마다 자기를 성찰해야 한다는 개념을 배웁니다.        

1. 얼마 동안 침묵을 지키십시오. 그 다음에 주기도문을 한 번에 한 구절씩 암송하면서 루터가 제안한 것처럼 각 구절을 위해 "꽃다발"을 만들어 보십시오. 한 구절을 암송하면서 감사해야 할 일, 회개해야 할 일, 그리고 일상생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다음에 다음 구절을  암송하십시오. 만일 한 가지 생각이 특별히 귀중하다고 생각된다면, 계속 그것에 집중하십시오. 주기도문 전체를 암송할 일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2. 날마다 행하는 자기 성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내게 도움이 되는 방법을 제시해 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간단하게 하루를 되돌아보면서, 특별히 내게 일어난 문제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음날 아침에는 전날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하십시오. 자신의 생각을 인도하기 위해서, 통찰, 검토, 감사회개, 중생 등의 단어를 사용하십시오.        
   첫째, 성령 하나님께 통찰을 구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성향이 무엇을 무시하는지, 은사인지, 능력인지, 죄 인지를 깨달으려고 노력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하루에 일어났던 일들을 검토해 보십시오. 그날 받은 모든 은사를 생각해보십시오. 잘못된 일을 선택했거나 옳지 않은 태도가 있었다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신경질적인 죄의식이나 깨진 인간관계를 치료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중생이란 이전에 빠졌던 함정을 오늘 피하는데        도움이 될 것에 대해 지극히 실질적인 결정을 내리며 아울러 새로운 하루를 위해 하나님의 용서와 능력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날마다 자기 성찰을 통해 발견한 것들을 간단하게 기록해 두는 것이 유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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