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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요나 이한규 목사............... 조회 수 638 추천 수 0 2015.01.30 00: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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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욘1:1-10 
설교자 : 이한규 목사 
참고 : 2014.11.17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494) 

사명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요나 1장 1-10절)


< 사명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까지 가는데 최대 2주면 갈 수 있는 거리를 광야에서 돌고 돌아 총 40년 걸렸습니다. 계속되는 불순종 때문에 훈련기간이 늘어난 것입니다.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또한 맞서 싸우는 것도 능사는 아닙니다. 피해야 할 때는 피하고 맞서 싸워야 할 때는 싸우는 분별력과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특히 사명의 자리를 피하면 훈련시간만 늘어나고 훈련강도만 커집니다.

 너무 쉽게 환경과 사람을 바꾸지 마십시오. 때로는 힘든 자리도 필요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나중에 보면 그런 환경과 사람도 하나님이 훈련과정으로 허락하신 조건들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훈련이란 원래 힘든 것입니다. 그런 훈련과정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면 기막힌 상황은 기적의 산실이 됩니다.

 변화는 필요하지만 너무 쉽게 변하면 안 됩니다. ‘자리를 떠나는 변화’보다 ‘자기를 굽히는 변화’가 더 우선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굽힌 상황에서 자리를 떠나는 것은 선한 변화의 시발점이 될 수 있지만 자기를 굽힐 줄 모르는 상황에서 자리만 떠나는 것은 계속 돌고 도는 인생이 되어 시간 낭비, 정열 낭비, 인생 낭비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를 굽히더라도 자신감은 잃지 마십시오. 높은 자 앞에서 비굴해지지 말고 낮은 자 앞에서 교만해지지 마십시오. 성공했다고 자만하지 말고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자리가 낮아졌다고 마음까지 너무 낮아지면 안 되고 자리가 높아졌다고 마음까지 너무 높아지면 안 됩니다. 낮은 곳에 처하면 하늘을 바라보고 높은 곳에 오르면 아래를 살펴보십시오. 현재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상황이라면 그때는 더욱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높여드리십시오.

 너무 성급하게 열매만 찾지 마십시오. 조급하게 십자가를 타고 가려고 하지 말고 조용히 십자가를 지고 가려고 하십시오. 설익은 감은 떫어 먹지 못합니다. 마라톤을 단거리 하듯이 달리면 안 됩니다. 모든 일에는 최적의 때가 있습니다. 너무 서두르면 불행도 서둘러 찾아옵니다. 자신은 익었다고 여겨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직 익지 않았을 때가 많습니다. 어른이 되려면 대개 20년은 필요합니다.

 사람은 ‘빠른 것’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바른 것’을 원하십니다. ‘빠름’보다 ‘바름’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기다리지 못하고 빨리 후손을 얻겠다고 이스마엘을 낳아 약 39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아랍의 불화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더디게 하신 것은 더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너무 단축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더디심을 아쉬워하기 전에 자신의 미성숙을 아쉬워하십시오. 기다림의 과정을 잘 통과하면 축복의 때는 반드시 옵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인물로 만들어지는 시간입니다. 봄은 여름이 오는 것을 막지 못하고 가을은 겨울이 오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요셉의 감옥 문이 열릴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기다림의 기간을 만회하고도 남는 급격한 수직상승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성패는 기다림에 달려 있습니다. 기다림의 시험을 잘 통과하고 기다림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도 얼마나 축복을 빨리 주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준비가 안 되었을 때 주면 더욱 큰 문제가 생기기에 축복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결국 기다림의 기간은 사람이 기다리는 기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에는 반드시 끝이 있고 그때까지 잘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복된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시간 앞에서 자기 시간을 포기하십시오. 영원 앞에서 몇 년은 아침이슬 같음을 깨닫고 평생을 기다리게 해도 감사하며 사명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지금 작은 일을 해도 그 일을 하는 자신은 작은 존재가 아닙니다. 지금 하는 일이 돈도 안 되고 시시하게 보여도 그 일에는 내일의 많은 것과 많은 영혼의 생명이 달려 있을 때도 많습니다. 지금 하는 일을 행복하게 할 때 오늘의 행복이 내일의 행복이 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이 됩니다. 그처럼 사명의 자리를 회피하지 말고 잘 지키는 것이 복입니다. 그 사실을 본문의 요나 얘기는 잘 교훈합니다.

< 사명을 받는 요나 >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했습니다(1절). 요나는 북 이스라엘에서 엘리사가 죽고 거의 40년 만에 흑암 중에 한줄기 빛처럼 등장한 선지자였습니다. 그에게 어떤 말씀이 임했습니까?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이 하나님의 명령은 요나에게는 내키지 않은 명령이었습니다. ‘큰 성읍 니느웨’는 당시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앗수르의 수도였기 때문입니다(왕하 19:36).

 이 구절을 보면 3가지 명령이 나옵니다. 첫째, 일어나라는 명령입니다. 성도는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일어나 사명을 수행하는 것도 잘해야 합니다. 둘째,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성도는 주일 교회에 와서 예배와 교제를 통해 영적인 충전을 했으면 나머지 6일 동안은 세상에 나가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셋째, 니느웨를 향해 외치라는 명령입니다. 성도는 세상에 나가서 열심히 살면서 동시에 복음전파에도 힘써야 합니다.

 이 구절에서 외치라는 말은 큰소리로 전도하라는 말만은 아닙니다. 요즘은 큰소리가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기에 소리 없는 증인이 더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런 증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믿고 싶어지고 교회에 나오고 싶어지게 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고 가정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해야 합니다. 그처럼 증인의 삶을 살 때 그를 통해 세상은 점차 변화될 것입니다.

 어느 날, 숲에 사는 지빠귀가 사자에게 누구 소리가 더 멀리 퍼지는지 내기하자고 했습니다. 사자는 기가 막혀서 대꾸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지빠귀가 계속 졸라댔습니다. 할 수 없이 사자가 “그래 하자!”라고 하면서 으르렁거리며 큰 포효소리를 냈습니다. 지빠귀도 힘껏 소리를 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언덕 위 토끼에게 가서 누구 소리가 더 멀리 들렸는지 확인해보았습니다. 토끼는 두 소리를 다 잘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언덕 넘어 다람쥐에게 둘 중에 누구 소리를 들었는지 물었습니다. 다람쥐는 “사자 소리는 희미하게 들린 것 같고 지빠귀 소리는 분명히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언덕 몇 개를 더 넘어 사슴에게 똑같이 묻었습니다. 그때 사슴이 “사자 소리는 전혀 못 들었는데 지빠귀 소리는 크게 들렸다.”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자는 혼자 소리쳤고 지빠귀는 한 마리가 울면 다른 것이 따라 울면서 곳곳을 지빠귀 소리로 가득 채웠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소리가 작아도 그 소리가 진실한 소리라면 큰 파급력과 영향력이 나타납니다.

< 사명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

 니느웨를 회개시키는 사명이 내키지 않아 요나는 사명을 회피하고 동쪽 내륙의 니느웨와는 180도 반대쪽에 있는 서쪽 지중해 연안의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항구도시인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때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배 일정이 기막히게 맞는 것을 보니까 이것도 하나님의 뜻인지 모른다.” 그렇게 합리화하고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주고 배에 올랐습니다.

 요나의 사명 회피는 잠깐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곧 하나님이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심으로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습니다(4절). 요나의 불순종으로 배가 폭풍을 만나는 모습을 보십시오. 소명 받은 한 사람이 잘못하면 세상은 더 어지럽게 됩니다. 하나님은 때로 자연환경과 주변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그런 환경적인 메시지를 잘 읽고 사명을 새롭게 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살다가 역풍이 불면 가장 먼저 자기 성찰의 질문을 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사명을 외면하고 딴 길로 가는 것은 아닌가?” 사명에 불순종하는 ‘요나(요놈의 나)’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명에 순종해야 기적적인 역사도 나타납니다. 축복과 기적은 이상한 신앙행위나 대단한 인간 능력자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집회에서 어떤 능력자가 기적과 치유와 은사를 준다고 선전하면 그곳에는 절대 가지 마십시오. 사람이 그 정도로 높아지는 것은 우상숭배가 되고 축복은커녕 무서운 진노를 예고한다는 점은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축복과 기적은 말씀과 사명을 따라 살려는 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축복의 길을 대개 알면서도 그 길로 잘 가지 않는 것입니다. 사명을 회피하면 인생에 풍랑이 생깁니다. 결국 인생에 풍랑이 일 때는 사명을 새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사명감이 분명한 상태에서 주어지는 시련은 더욱 큰 축복을 위한 시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명감을 잃지 않았다면 조금 더 기다리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은 시련당한 것보다 몇 배의 보상으로 갚아 주실 것이고 역전인생과 최종승리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해서 풍랑을 만났지만 결국 그 풍랑을 통해 다시 사명을 되찾았습니다. 요나가 없어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통해 니느웨를 회개시킬 수 있지만 시련을 통해 요나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풍랑도 축복입니다. 인생의 풍랑은 다시 사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식입니다. 사명을 피해 도망가는 길은 실패의 길이지만 사명을 따라 사는 길은 승리의 길입니다.

 요나가 탄 배가 거의 깨져 승선한 사람들이 거의 죽을 뻔했지만 진짜로 죽지는 않았습니다. 성도는 고난과 시련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고난과 시련은 다시 사명을 새롭게 하고 더 큰 축복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순종하며 살려고 하십시오.

 심리학자 아브라함 마스로우는 많은 현대인의 실패의 원인을 <요나 증세>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요나 증세란 자신의 위대성을 의심하며 자신의 고귀한 사명을 기피하는 증세를 뜻합니다. 요나 증세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요나가 잠깐 사명을 회피했지만 시련 후에 회개하고 새로운 역전 인생의 역사를 만들어냈습니다. 인생은 소중한 것입니다. 한 시간도 소중한 것입니다. 한 시간이 잃어지면 인생의 일부가 파괴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처럼 고귀한 인생과 시간을 활용해 고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려고 하십시오.

< 기도는 자판기가 아닙니다 >

 큰 폭풍으로 배가 거의 깨지게 된 상황에서 그 배 안에서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잠자고 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사공들은 두려워해서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면서 난리를 피웠습니다. 그런 난리 통에서도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들었습니다(5절).

 어떤 사람은 요나가 자신의 불순종으로 그런 난리가 났다는 생각 때문에 양심에 가책이 생겨서 배 밑층으로 피했다가 무력감에 사로잡혀 의식을 잃고 잠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나 그렇게 깊이 못잡니다. 그런 난리 통에서도 요나가 그렇게 깊이 잠들 수 있었던 것은 고난 중에도 태평함을 잃지 않는 천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 요나는 ‘구약의 베드로’처럼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고 가끔 불순종하는 행동을 하지만 난리 통에서도 깊이 잠들 수 있는 단순함과 태평함이 그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의 불순종하는 모습은 배우면 안 되지만 난리 통에서도 깊이 잠들 줄 아는 모습은 배워야 합니다. 인생을 “될 대로 되라!”고 하며 살면 안 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될 대로 되라!”고 하는 담대한 믿음은 필요합니다. 그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망하면 망하리라!”는 믿음을 가질 때 평안도 생기고 고난 중에 잠도 잘 자면서 오히려 사는 길이 열립니다.

 당시 큰 풍랑 앞에서 사공들이 두려워서 각각 자기의 신을 불렀던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처럼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조용히 잠자는 것’이 훨씬 나은 믿음의 표식입니다. 기도도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는 ‘불안해하며 하는 기도’가 아닌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행위 자체가 무조건 응답을 가져다주는 마술봉은 아닙니다. 오래 큰소리로 기도하면 큰 마술이 펼쳐질 줄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처럼 기도의 바른 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 선장이 배 밑층에서 깊이 잠든 요나를 발견하고 말했습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6절).” 이 이방인 선장은 자신이 알고 있는 기도에 관한 상식대로 많은 신에게 많이 기도하면 폭풍이 물러갈 줄로 생각하고 요나에게도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기도는 기도를 입력하면 응답이 자동적으로 출력되는 자판기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입니다. 인간은 강철영혼이 아니기에 큰 문제 앞에서 처음에는 불안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점차 마음이 안정되어야 하고 기도를 끝마칠 때쯤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평안 가운데 감사해야 하고 더 나아가 기도한 후에 다시 멋지게 일어서서 새로운 일을 시도해야 합니다. 시도가 뒤따르는 기도가 참된 기도입니다.

< 니느웨에 빛을 비추는 인물 >

 난리 통에 잠을 잘 잘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십니다(시 127:2). 잠은 건강의 필수요소입니다. 잠이 부족하면 질병 가능성이 커지고 피부도 까칠해집니다. 잠을 통해 하나님은 몸과 마음을 놀랍게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때 피로가 풀리고 뇌세포가 새로워지고 새로운 에너지가 축적됩니다. 깨었을 때 사람이 하는 일보다 잠들었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더 큰 일입니다.

 잠을 적게 자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적게 자도 평안하게 깊이 자면 됩니다. 잠은 걱정과 근심과 불안을 덮어주는 사랑의 이불입니다. 잠은 약해지는 연습이고 죽는 연습입니다. 그때 누가 공격해오면 꼼짝없이 당합니다. 그때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그러다가 잠에서 깨는 것은 부활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또한 잠은 겸손의 연습입니다. 잠은 왕과 종을 같게 만들고 현인과 바보를 같게 만듭니다.

 잠을 잘 잘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잠자는 시간은 ‘하루 중에 주일의 안식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마음을 가질 때 잠도 잘 자게 됩니다. 그리고 성도는 잠을 잘 자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남을 잘 자게 하는 인물을 꿈꿔야 합니다. 어둔 세상을 밝히는 인물이 되고 주어진 힘을 맘대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인물이 되면 그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편안한 잠을 자게 될 것입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물질문명으로 인한 급속한 종말의 위험도 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더 평안과 안식을 찾아 헤맵니다. 왜 불안과 두려움이 생깁니까? 이기주의로 모질어진 마음이 내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에 사로잡히면 아무도 믿지 못하고 믿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런 불신이 체질화되면 하나님도 불신하면서 불안과 두려움도 커지는 것입니다.

 살면서 불안과 두려움이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현저히 줄일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행동하는 믿음으로 살면 됩니다. 원수도 사랑하기로 작정하고 죽음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기로 작정하면 불안과 두려움은 힘을 잃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도 주시지만 때로는 죽음도 주십니다. 그처럼 죽음의 배수진을 치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나가면 불안과 두려움이란 내면의 짐승은 사라지고 오히려 사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어떻게 “죽으면 죽으리라!”는 굳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평소에 지나친 욕망을 절제하는 훈련을 잘해야 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의 크기는 욕망의 크기와 비례합니다. 욕망은 신기루처럼 삶을 더 메마르게 합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욕망의 절제를 위해 애쓰는 거룩한 반역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욕망으로 흐르는 사회를 역류해 올라가고 욕망으로 세운 세상질서를 깨뜨리면서 짙은 욕망의 구름을 뚫고 하늘빛을 세상에 비춰주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 거룩한 반역자들이 되려면 선교마인드를 가지고 힘써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요새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눈물이 심해지고 있고 상대적 박탈감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빈부격차’보다 더 무서운 것은 ‘비교의식’입니다. 사람이 비교의식에 젖으면 물질문명과 풍요도 전혀 기쁘지 않게 됩니다. 음식에 후추를 타 먹는 것이 소원이었던 조선시대 왕보다 더 잘 먹고 누리면서도 자기보다 더 잘 먹고 누리는 사람들을 보면 늘 속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비교의식에 젖으면 잘 사는 사람이 마치 니느웨 사람처럼 무조건 싫게 보일 수 있습니다. 또한 권력자와 재벌의 세계는 더욱 싫은 니느웨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이 어떤 죄를 저질렀다고 하면 자기 모습은 외면하고 무서운 댓글의 돌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잘 나가는 사람이 어떤 선행을 하고 놀라운 인생 변화를 이뤄도 진의를 의심합니다. 그처럼 니느웨를 무조건 배타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니느웨를 배타하는 것에 있지 않고 니느웨로 들어가서 빛을 비추는 것에 있습니다.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는 사명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성도에게 권력자와 재벌의 세계로 들어가 거기서 빛을 비추라는 사명도 주셨습니다. 성도를 대단한 존재로 보셨기에 니느웨로 들어가 그곳을 빛의 세계로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꼴 보기 싫다고 니느웨를 욕만 하고 그 세계를 외면하면서 하나님의 뜻과는 180도 반대로 다시스로만 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는 니느웨로 가서 복음의 빛을 비추는 일도 잘해야 하고 거룩한 성공모델이 되어 나눔을 실천하는 일도 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당대의 재벌이었습니다. 그가 75세의 늦은 나이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면서 약 3900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여깁니다. 이삭은 재벌 2세였지만 본인 자신도 성공모델의 신화를 썼습니다. 재계를 무조건 외면하는 것은 너무 축소지향적인 사고입니다. 그들 중에 소수라도 ‘의로운 길’을 가고 ‘사회적 기업’의 비전을 가지고 나가면 엄청난 선한 역사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인물이 나오기를 위해 기도하고 그런 인물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물론 다시스로 가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시골로 가서 목회하는 목사도 필요하고 오지로 가서 선교하는 선교사도 필요하고 사회의 음지로 들어가서 돕는 손길을 펼치는 사회운동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명 받은 사람이 다 그런 곳으로만 가려고 하면 안 됩니다. 소명 받은 사람도 정계와 재계로 진출하려고 하고 명동과 상해와 뉴욕의 상권으로도 진출하려고 해야 합니다. 목회자나 선교사나 사회운동가가 되는 것만이 소명 받은 것은 아닙니다.

 왜 한국교회가 이렇게 초라해졌습니까? 은혜 받았다고 하면 무조건 신학교로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사람들 중에 사명감을 가지고 니느웨로 가려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큰 인물이 되어 생명의 빛을 비춰주어야 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니느웨로는 가지 않고 다시스로만 가려고 하면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왜소해질 것입니다. 니느웨로 가서 정계와 재계의 큰 별이 되어 니느웨에서도 빛을 비추고 다시스로 가는 사람도 은밀하게 후방에서 힘써 돕는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니느웨로 가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큰 별들이 된 후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복음의 빛을 비춰줄 인물들을 많이 배출해야 합니다. 교회가 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물 한 사람이 대형 교회 하나보다 더 큰 일을 할 때도 많다는 사실은 이제는 거의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예수 믿고 인물 되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사십시오. 그래서 인물을 기르든지 인물이 되든지 둘 중의 하나는 꼭 이뤄서 하나님의 소명을 멋지게 이뤄내는 복된 성도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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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12 시편 빠르게 하기보다 천천히 시38:1-22  최장환 목사  2015-01-28 418
11611 고린도전 네 성전을 세우라"(Build Your Temple) 고전3:16-20  김영봉 목사  2015-01-27 941
11610 고린도전 나무처럼"(Like a Tree) 고전3:1-9  김영봉 목사  2015-01-27 1016
11609 고린도전 그 나라의 사람이 사는 법(The Way of the Kingdom People) 고전1:18-25  김영봉 목사  2015-01-27 989
11608 히브리서 지금 올 수 있겠니?"(Are You Ready to Come Now?) 히12:22-29  김영봉 목사  2015-01-27 885
11607 이사야 소리 없이 강한 헌신” (A Silent But Strong Dedication) 사42:1-4  김영봉 목사  2015-01-27 2692
11606 요한복음 첫 사랑의 기억"(A Memory of First Love) 요21:15-17  김영봉 목사  2015-01-27 2003
11605 마태복음 신실한 소수자"(Faithful Minority) 마2:1-12  김영봉 목사  2015-01-27 2183
11604 고린도전 영원을 꿈꾸는 사람 고전7:29-31  강승호 목사  2015-01-27 471
11603 고린도전 성숙한 인격과 덕을 갖춘 사람이 됩시다. 고전10:23-31  한태완 목사  2015-01-27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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