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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7:2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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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798964 |
정용섭 목사
만물의 무상 앞에서
고전7:29-31, 주현절 후 셋째 주일, 2015년 1월25일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신약성경은 장르로 볼 때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복음서, 역사서, 서신입니다. 복음서는 4권, 역사서는 사도행전 1권, 나머지 22권은 다 서신입니다. 서신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은 바울입니다. 대략 10 편 내외가 바울의 편지로 분류됩니다. 편지라는 문학 형식이라는 게 늘 그렇지만 바울은 편지를 쓸 때 수신자가 처한 구체적인 형편을 고려해야만 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2천 년 전의 것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볼 때 이해가 가는 것도 있지만 이해하기 까다로운 것도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도 그런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이 속한 고전 7장은 결혼, 이혼, 재혼, 믿지 않는 배우자 문제, 처녀와 과부 문제 등이 거론됩니다. 바울이 이런 주제를 신앙의 본질로 여기고 일부러 쓴 거는 아닙니다. 고린도교회 교우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 질문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깊이 있게 하려면 부부 사이에도 가능한 성관계를 하지 않고 사는 게 좋지 않으냐는 것이었습니다. 고전 7:1절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극단적으로 쾌락적인 삶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고, 극단적으로 금욕적인 삶을 신앙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5절에서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 일정한 기간 각방을 쓰자고 합의한 게 아니라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각방을 쓰다가 시험에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권면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6절에 이르기를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허락하는 것뿐이지 명령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25절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주께 받은 계명’이 없어서 개인적인 의견만 피력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주제는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신앙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겁니다. 이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고전 7:1-40절에서 소상하게 언급했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려는 핵심은 어떤 기준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바울은 독신으로 사는 게 훨씬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독신의 금욕생활이 불가능한 사람에게는 자기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처녀들은 결혼할 수 있고, 과부들도 재혼할 수 있습니다. 다만 결혼, 또는 재혼은 그만한 부담을 각오해야 합니다. 가족을 부양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꼴 보기 싫은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어도 가족이 있으면 그게 잘 안 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이유도 그런 부담을 지기 싫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쨌든지 이런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 아닌 듯이...’
바울이 이렇게 공론화하기 어려운 주제에 대해서 극단적이지 않으면서 분명하게, 그리고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권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방향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오늘 설교 본문인 고전 7:29-31절에서 밝혔습니다. 여기에 똑같은 형식의 문장이 반복됩니다. ‘... 하는 사람은 ... 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다섯 항목입니다.
1)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2)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3)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4)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5)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여기에 거론된 다섯 항목은 여기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을 가리킵니다. 권력이 있는 자들은 권력이 없는 자 같이 살아야 합니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은 노래를 못하는 사람 같이 살아야 합니다. 네 번째로 거론된 매매하는 자들은 부유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부자지만 가난한 사람 같이 살라는 겁니다. 다섯 번째로 거론된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소유가 많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즘 말로 소비지향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삶이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곧 일종의 냉소주의 입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장사도 해야 하고, 집과 물건도 필요한대로 구입해야 합니다. 고전 7장의 주제인 남녀성관계도 그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세상의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되 거기에 몰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몰입은 거기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세상 일이 절대적인 것이 되어서 사람이 거기에 지배당합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세상의 일에 지나치게 몰입된 분들이 있습니다. 돈벌이에 영혼까지 맡기면서 삽니다. 떵떵거리고 살지 못해서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니까 기독교인들도 어쩔 수 없긴 합니다. 오늘의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벌이는 구원론적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기에 목숨을 겁니다. 최근에 세금연말정산 문제로 나라 전체가 시끄럽습니다. 예년에는 원천징수 되었던 세금 중에서 돌려받는 액수가 제법 되었는데, 그래서 13월의 월급이라는 말도 있었는데, 금년에는 오히려 물어내야 할 돈이 많아졌다는 겁니다. 여론이 비등하자 정부와 청와대에서는 몇몇 보완책을 내기에 급급합니다. 저는 여기서 구체적인 경제 정책과 거기서 벌어지는 시행착오 자체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복지 예산의 필요성으로 세금을 더 걷게 되었으면 정부가 솔직하게 설명해서 국민들의 양해를 구하면 되고, 국민들도 늘어난 세금을 감당할만한 것인지를 좀더 차분하게 생각하면서 생각을 모아가면 될 텐데, 모두가 당장 큰 일이 난 것처럼 들썩거려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보면 세상의 일에 지나치게 몰입해서 일어나는 게 아닐는지요.
세상일에 몰입하다보면 경우에 따라서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철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 행태의 극단이 테러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의 고등학생이 테러를 일삼는 이슬람 과격단체인 IS에 가입했다고 합니다. IS은 테러를 통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세상에 알리고 있습니다. 신은미 씨의 공개연설 장에 아무개 고등학생이 사제 폭탄을 터뜨린 일이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극우 인사들은 그런 행태까지 애국자의 것인 양 옹호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판단하기가 쉽지 않기는 합니다. 우리는 안중근의 이등박문 암살을 국가를 강제로 강탈한 일본 제국을 향한 당연한 저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에서는 테러 행위에 불과할 겁니다. 실제 테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요즘 말로 ‘갑을관계’에서 보듯이 일상에도 보이는 보이지 않는 테러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유형무형의 테러 문제 자체를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세상의 일에 너무 깊이 몰입해서 결국 이런 파괴적인 충돌과 행위들이 일어나는 게 아니냐, 하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이런 일은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모두가 세상에 몰입하는 걸 인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기독교인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까요?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대답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독재 권력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입장에서 로마 권력은 악입니다. 거기에 투쟁해만 합니다.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이 반로마 무력투쟁에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초능력을 발휘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민중들을 선동해서라도 로마 정권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이룰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로마 정권과 정면으로 맞서지는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전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도 역시 로마 정권이 지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로마 정권에 의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직장을 잃고, 체포당하고, 심지어 순교도 당했습니다. 반로마 무력투쟁이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시민불복종운동이라도 벌일 만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반대로 말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 이런 구절로 인해서 바울이 오해를 받습니다. 기독교를 어용종교로 떨어뜨린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이런 구절을 근거로 해서 반정부 운동도 벌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해석은 다 오해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바울이 전한 복음은 로마 정권의 차원에 속한 게 아니었습니다. 더 근본적이고 원천적인 것이었습니다. 수준이 달랐습니다. 어른이 아이들 싸움에 정색하고 나설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아무리 부패해도 기독교인들은 교회만 잘 나오면 된다는 말이냐, 하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반문도 오해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이 정의와 평화의 기운으로 가득하게 되기를 위해서 투쟁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누룩과 소금, 또는 빛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런 누룩과 소금의 존재론적 능력으로 산다는 세상은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밀가루 안에 누룩을 넣으면 밀가루는 부풀어 오르게 됩니다. 어둔 방에 촛불을 키면 밝아집니다. 기독교인들이 인격이나 도덕과 윤리에서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깨닫고 믿는 그 신앙이 그런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늘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없이 교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기독교인은 세상에 너무 깊이 몰입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 있는 자들은, 또는 남편 있는 자들은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하고,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장사를 해서 돈을 잘 버는 사람도 돈이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 돈은 곧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하지 못한 것처럼 살고,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건강한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지금 바울이 핵심 주제로 삼고 있는 결혼, 이혼, 재혼, 처녀와 과부, 성생활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몰입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혼한 사람은 독신자처럼 살고, 독신자는 결혼한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꼭 그래야만 할까요? 세상에 몰입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라는 말이냐, 하고 질문하고 싶으신가요?
만물의 무상(無常)
바울은 31b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아주 간단하고 명백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기차 여행을 한다고 합시다. 차창 밖으로 많은 것들이 보일 겁니다. 그중에 우리 마음을 완전히 빼앗을 정도로 아름다운 호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기차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순식간에 다 지나가고 맙니다. 그런 지나가는 것에 몰입하면 그것과 더불어서 그의 삶은 황폐화되고 맙니다.
본문이 말하는 ‘세상의 외형’은 헬라어 ‘스케마 투 코스무’의 번역입니다. 코스무의 원형은 코스모스입니다. 세상, 우주를 가리킵니다. 스케마는 헬라어 영어 사전에 따르면 form, nature입니다. 우리말 성경의 외형은 별로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외형은 표면적인 것만 가리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Wesen dieser Welt(이 세상의 본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루터 번역이 원문에 더 가깝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개념에서 볼 때도 그 형상(form)은 단순히 외형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겉모습만이 아니라 근본과 본질을 포함한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즉 만물의 무상을 가리킵니다.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갑니다. 우리 자신을 물론이고, 지구 안의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지구 자체도 지나갑니다. 태양도 사라집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우리의 인생도 구름이나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는 것처럼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원래 세상은 다 그런 거 아니냐, 그래서 제행무상이라는 말이 있고, 인생이 화살처럼 빠르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별로 새로운 것도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만물의 무상 자체를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토대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에 이어서 고전 7:32절부터 독신으로 사는 사람과 부부로 사는 사람들에게 각각 신앙 문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전적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노력하지만,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한다는 겁니다.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가족이 있으면 아무래도 거기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됩니다. 가톨릭의 사제들은 결혼하지 않고 개신교회의 목사들은 결혼합니다. 각각 장단점이 있긴 하지만 가족 문제까지 짊어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목사의 입장이 더 어렵습니다. 바울은 이런 현실적인 상황을 거론하면서 이런 문제로 ‘당신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이렇습니다.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전 7:35b). 가족을 멀리하고 교회에만 잘 나오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믿음이 좋다는 어떤 이들은 가정살림을 등한히 하면서 교회에만 매달려 삽니다. 심지어 자녀들 대학 등록금을 교회당 건축 헌금으로 바치면서 자랑스럽게 간증을 합니다. 주를 섬긴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이런 행동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영혼이 하나님에게 기울어져 있느냐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십시오. 오늘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가족도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내나 남편, 자식이나 부모도 다 지나갑니다. 천국에 가서 다시 가족을 만나리라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천국에서는 특정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두가 가족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가족 문제, 부부문제 등으로 인해서 영원한 생명의 주님에게 집중하는 일에 지장을 받는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 아닌 것처럼 살아라.’ 하고 충고했습니다.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살아야 합니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돈이 많은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소유가 많은 자들은 그 소유가 참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은 지나가고, 하나님만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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