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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와 현대신학의 과제

논문신학성경 황돈형............... 조회 수 265 추천 수 0 2015.02.03 18: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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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naver.com/jgspirit/80022952099 

삼위일체와 현대신학의 과제


황돈형(Bocum 대학, Dr. Theol)

삼위일체는 몰트만(Moltmann)이 강조한 대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삼위일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 세계를 향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 단지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차이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와 함께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야말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나타낼 뿐 아니라 또한 이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개방시키고 연관을 맺게 만드는 가장 실재적인 사태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논자는 이를 위해 먼저 비튜겐슈타인(L. Wittgenstein)을 통해서 현재의 신학이 당면하고 있는 새로운 인식의 패러다임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에 대하여 삼위일체가 갖는 신학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고자 한다.

1. 비튜겐슈타인 이래의 신학적인 상황

비튜겐슈타인을 통하여 현대 철학에 있어서 시대적 구분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의 전기 사상으로서 논리실증주의(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나 후기 일상 언어학파(Philosophische Untersuchung)를 이루는 과정에 있어서나 언어를 통해 새롭게 실재의 이해 가능성을 밝힌 것과 관계한다. 다시 말해서 비튜겐슈타인 이래로 일상적 언어 차원을 넘어서는 인식의 초월적인 근거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근대로부터 주장되어온 인식방법과 철학적 사유방식에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일찍이 중세 유명론적 사고의 결과로 말미암은 회의론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식의 확실성을 추구했던 근대적 Cartesian적 사고의 전형적인 출발은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에서 찾아진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데카르트가 cogito, ergo sum 명제로 강조하듯 모든 인식의 확실성을 인간의 사유에 기초함으로써 새로히 주관성의 철학을 시작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같은 데카르트 견해 이래로 모든 실재하는 것의 근본적인 확실성을 담지 하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의식과의 연관성에서 자아 중심적-Cartesian 'I'로서 규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주관적 자아를 중심으로 한 근대의 입장은 칸트(I. Kant, 1724-1804)를 통해 이론적으로 확립되는데 그것은 칸트가 인식의 확실성을 단순히 인간의 사유에 정초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성과 오성 가운데 밝혀지는 인간의 초월론적인 선험적인 구조에서 찾는 것과 그리고 모든 인간의 자유로운 윤리 행위의 근거 역시 인간의 실천이성 가운데 밝혀지는 양심의 부름에 따른 선험적인 도덕률에서 찾는 것과 연관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근대적인 인식과 행위가 전제하고 목적하는 바 실재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근거는 하이데거(M. Heidegger)도 강조한 바대로 자아 중심적-주체성의 실재관인 것이다.

이러한 자아 중심적 주체성의 실재관은 경험의 대상과 경험하는 주체 사이의 연관성을 포함하여 인식주체의 보편성의 요구에 따라서 이성(理性) 안에 기초한 논리성을 근거로 언어적인 차원에서 진술의 상호 이해의 가능성에 대한 필요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이제 초기 비튜겐슈타인의 인식론적 입장을 밝혀주는 Tractatus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Tractatus는 러셀(Russell)의 논리 원자주의의 영향 가운데서 문장의 구조와 사실적 연관관계의 구조 사이의 상응을 전제로 논리적인 체계 가운데 주관적 요소를 배제한 객관적인 이상적인 언어(Ideale Sprache)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상적 언어의 논리적 통일성을 근거로 경험에 대한 가능성과 의미 있는 언어적 표현의 가능성, 실재에 대한 인식의 새로운 방식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자아 중심적-주체성을 기초한 선험적인 인식보다도 이상적인 언어의 매개를 통한 실재 파악에 강조점을 두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언어 중심적 입장은 후에 일상 언어학파를 이룬 뒤에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다만 Tractatus에서는 논리적 연역체계의 공간 가운데 형성된 주장만을 사실로서 실재적인 것으로 보고자 한 반면 이제는 현실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발견되어진 삶의 세계로서의 세상을 언어적인 매개를 통하여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삶의 세계 혹 삶의 형식(Lebensformen)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과정으로서 이미 더 이상 그 뒤로 넘어갈 수 없는 실재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종류의 설명이나 과학적 탐구는 이제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내가 포함되어 살게 된 다양한 차원의 사회적 역사적인 연관관계로서의 삶의 세계를 통해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자아의 근거도 삶의 세계와 무관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없다. 나라는 존재 혹 나의 마음속에 있는 사유는 전적으로 이미 내가 수없이 반복하고 있는 타자와 연관된 삶의 세계를 통해서 이룩된 것이다. 이제 중요해진 것은 논리 원자론적 언어의 해명이 아니고 일상적 삶의 모습, 생활의 형식, 삶의 사실 속에 모든 인간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진 하나의 전체(das Ganze)로서 실재를 일상적인 언어 행위 가운데 파악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은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행위와 표현을 자신의 삶의 형식으로서 전개하는 언어게임(Sprachspiel)을 습득하여 그 언어적 상징과 연관성의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가능하여 지는 것이다.

이로써 분명하게 언급될 수 있는 것은 실재에 대한 이해는 더 이상 자아 중심적 주체성에 기초한 선험적 인식이나 아니면 상호 연관적인 이상적 언어로 결정 지워지지 않고 우리 자신이 이미 속하여 있는 언어적 현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을 언어 중심적으로 표현한다면 언어는 그 특성상 언어 그 자체로 나타내고 관계하는 실재의 인식과 연관되어서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방식으로 전제된 어떠한 인식방법도 거부하며 단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상황의 여러 가지 연관관계의 다양성을 통하여 나타나는 새로운 해석학적인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누구인가 묻는 자기 동일성에 대한 질문이나 우리가 자명하다고 전제하는 모든 것은 이제 여러 가지 다양하게 말 되어지는 언어적인 현실 속에서 새롭게 그 의미를 규명 받도록 요구받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진술의 초월론적인 근거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보다도 어떻게 동일 경험에 대한 상이한 진술 가능성을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앞서게 되는 것에 있다. 즉 실재에 대한 한가지 특별한 언어방식 보다도 다양하게 말 되어질 수 있는 실재에 대한 다원론적 언어방식이 추구되고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학적인 인식의 대상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의 세계 가운데 밝혀진 언어적 과정을 무시하여 논의될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학적인 언어의 가능성 역시 전제되어진 어떤 초월론적인 인식체계를 통하여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언어게임으로서 상이한 연관 체계를 그 가능성으로서 보여주고 있는 현실 속에서 새롭게 그 스스로의 정당성과 보편성을 나타내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적 현실에 대한 철학적인 숙고를 신학적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여기서 언어적인 현실에 대한 철학적인 요구를 신학적으로 두가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언어적 현실 가운데 실재가 드러나고 파악될 수 있다는 방식을 인정하고 그 구체적인 언어의 현실 가운데 신학적 언어 그 자체의 가능성을 살피든지 아니면 비튜겐슈타인이 말하는 언어적 실재관을 전제로 여러 가지 다양한 인간의 궁극적 실체에 대한 경험으로서 종교적 경험들을 다루는 종교적 언어에 대한 문법적 메타 언어로서 신학적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적 신앙의 언어로서 그 자체로 실재를 드러내는 방식이 있든지 아니면 기독교라는 신앙의 언어 뿐 아니라 기타 여러 가지 종교적 언어를 초월적으로 포괄하는 언어체계를 통해 실재를 표현하고자 하는 또 다른 형이상학적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강조하여야 할 점은 본래 신학적 인식의 특성은 하나의 형이상학적 언어체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언어체계를 이루는 언어적 현실 가운데서 그 스스로 자신의 인식 가능성을 확립하고 나타내는 신앙의 언어에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즉 신학적 언어의 가능성을 현실적인 언어의 차원에서 묻는다는 것은 신앙의 특성이나 그 고유성을 무시하고 철학적-인식론적인 실재관에 대한 맹목적인 적용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학적인 언어는 신앙의 언어로서 그 자체가 이 세상과의 연관성을 밝히고 그 가운데서 세상의 의미를 드러내는 구원의 언어인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비튜겐슈타인 이래로 시급한 과제가 되어 온 신학적 언어의 가능성의 문제를 단순히 철학적인 문제로서가 아니라 신학적인 문제로서 신앙의 현실이 갖는“세상성”이라는 입장에서 논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이 신학적 언어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기독교적 신 인식을 결정하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더욱이는 신앙 자체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되는 출발점으로서 신앙의 근본사태인 삼위일체를 살피는 것은 매우 시급한 과제이다.

2.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길

삼위일체라는 신학적 언어의 가능성을 구체적인 기독교적 신앙의 현실성, 즉 삶의 세계에 연관된 기독교적 언어 현실성에서 찾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단지 기독교적 종교 경험을 전제로 기독교적인 특성을 현실의 도덕적 윤리적 체계내의 논리적인 과정을 거쳐 그 타당성을 증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은 결국 기독교적 신앙을 표현하는 용어들이 문화와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떻게 그 사회적인 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는가 묻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적 경험이라는 일반화된 종교성에 대한 사회학적인 질문으로서 아직도 기독교적 경험이 도대체 왜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 다시 말해서 왜 삶의 세계 속에 기독교적인 것이 또 다시 말 되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비튜겐슈타인이 주장한 언어게임으로서 현실의 이해문제를 신학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고 생각한다는 것은 이제 보다 분명하게 기독교적 언어로서 삼위일체라고 하는 언어의 해석학적 가능성을 살펴보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삼위일체라는 언어를 사용할 때 얼 만큼 이 언어가 자기 자신의 개방성 가운데 우리의 현실을 하나님과 연관된 것으로 드러내게 되는지를 질문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a) 일찍이 삼위일체 교리의 형성과정에서 밝혀지는 것처럼 삼위일체는 시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찬양하는 영광송과 관계되어 온 맥락에서 이룩된 신앙의 언어이었다. 교리적인 진술로서 삼위일체론은 성서 안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신앙 고백을 다루는 신학적인 해석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고 이루어진 궁극적인 진리와 실재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교회는 삼위일체를 진리의 규범으로 전승하며 여러 가지 이단적인 사설과 논쟁을 통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형성하여 온 것이다. 먼저 니케아 회의(A.D. 325)는 삼위일체를 양태론적 입장이나 종속론적 삼신론의 입장과 구분 짓는 매우 중요한 회의로서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 본질, 한 실체임을 강조함으로써 예수 안에 이루어진 계시의 현실이 곧 신적인 본질과 동일한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니케아 회의에서 아직 밝히지 못한 성령의 신성에 대한 숙고와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본질의 성격 그리고 각 위격의 관계성은 콘스탄티노플 회의(A.D. 381)에서 정리될 수 있었다. 즉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모두가 하나의 본질(mia ousia) 하나의 본성(mia physis) 하나의 신성(mia theotes) 이신 분으로서 동일 본질(homoousios) 이시며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바로 세분 사이에서 각각 서로 구분되는 위격의 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목하여야 할 점은 ousia, 즉 실체라는 것은 존재의 실질적인 현실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단지 어떤 인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 자신과의 상응한 인식을 포함한 형식적인 것도 포함하는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존재를 실존(existence)으로서 이해할 때 예수의 사건을 삼위일체론적으로 파악하며 삼위의 일체된 존재를 ousia (substance)로서 설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essence, 즉 실체로서의 그 자신 안에 존재의 근거와 의미가 충만히 드러나는 존재의 사건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로써 실체론적 존재론의 입장에서 삼위일체를 ousia로 해석하는 것은 삼위일체의 초월론적인 성격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경험된 현실은 이 세상 안에 이루어진 완전한 인간 예수의 현실이지만 또한 이 세상과 완전히 구분되고 그 근원이 이 세상에 있지 않는 신적 실체의 현재를 뜻하는 초월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세계는 그 자체로 폐쇄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개방되고 그 가운데 자신의 완전을 획득하는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실체론적 삼위일체론의 세분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새로운 현실로서 초월적인 면을 상실하며 점차 존재론적 철학의 입장에 영향을 받으며 추상적인 개념의 논리성에 빠지기 시작하여 삼위일체론이 원래 나타내야 할 실질적인 개념의 활동성- 실체론적 존재론의 표현을 빌리자면, Actus purus, Actus primus- 의 의미는 사라지고 이 세상과 분리된 신적 존재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비밀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b)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삼위일체론이 의미하는 바 초월론적인 실재론의 입장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파악함에 있어서 분명히 함께 생각하여야 할 점은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Wittgenstein이 말하는 바 실재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언어적 현실을 통해서 논의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인 것이다. 이와 연관하여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두 가지 중요한 방향이 제시될 수 있는데 첫째는 삼위일체를 모든 것을 포괄하는 다양한 언어적 체계의 문법으로서 보고 실재를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상징적인 요소로 파악하고자 하는 종교 신학적인 입장이다. 그리고 둘째는 삼위일체란 언어적인 가능성의 현실 속에 스스로 자기 자신의 본래적인 의미와 함께 실재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가능하게 하는 사건으로서 이해하는 계시 신학적인 입장으로서 삼위일체는 그 자체가 새로운 계시적 현실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b. 1) 최근의 종교신학에서 일반적으로 찾아 볼 수 있는 경향은 삼위일체를 역사적 예수와의 연관성에서보다도 실재에 대한 상징적인 해석으로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삼위일체란 실재에 대한 통찰과 함께 이루어진 근원적인 경험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예수 외에서도 모든 인간이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의 상징적인 해석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 힉(J. Hick)은 현대 인식의 패러다임(paradigm)의 변화를 기독론 중심에서 신론 중심으로의 전환 이라고 말하며 이를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에 비교될 만한 것으로 특징짓는다. 여기서 신 중심적인 전환은 그 내용상 자기-중심성에서 실재-중심성 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이것은 역사적인 한계 속에 주어진 여러 가지 초월의 경험들 상호간에 있어서 대립적인 면보다도 상호 보완적인 하나의 전체(das Ganze)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실재와의 관계성을 해석함에 있어서 totus deus와 totum dei를 구분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안에 경험된 실재라는 것은 그 자체로 실재에 대한 완전한 경험인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러나 결코 실재 전부는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성육신을 신화적인 언어로서 이해하며 예수는 실재가 드러나는 과정에 있는 하나의 분기점으로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힉은 예수 안에 경험된 실재를 이제까지 사용되어 왔던 ousia, hypostatis, nature 등의 언어적 표현을 통해 삼위일체의 제 2 인격으로서의 나타내고자 했던 것, 즉 실재와 예수사이의 실질적인 동일성을 말하는 것 대신에 과정신학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예수의 삼위일체를 역사적인 상황가운데 실재가 드러나는 하나의 특이한 상대적인 존재로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파니카(Panikkar)에게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실재, 즉 신, 인간, 우주의 전체성에 대한 살아있는 상징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전체로서의 실재로서“범 우주적인 신-인 양성적 실재(cosmotheandric reality)”이다. 이러한 실재관을 전제로 인간의 언어적 현실의 초월적인 영역으로서 실재에 대한 불 가시적 기원을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한다면 이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유일한 중개자로서 그리스도는 역동적인 통일의 본질로서 아들이신 하나님, 로고스를 지칭한다. 그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두 극을 연결시키는 실재로서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신성의 터전으로서 모든 인간의 존재론적인 규정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성령은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내적 규정에 대한 동력으로서 이해하고자 한다. 삼위일체는 이제 모든 인간에게 이미 주어진 실재의 구조에 대한 언어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엄밀한 입장에서 보면 삼위일체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분의 역사적으로 한정된 구체적인 인격의 삶을 통해서 가능하여진 실재의 초월론적인 언어를 의미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과정철학에 의하여 전제된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언어체계가 되고 만 것이다. 이로써 분명하여진 것은 삼위일체를 실재에 대한 상징적인 이해로 파악하는 현대의 종교 신학적인 입장은 언어가 갖는 보편성의 요구에 대하여는 만족스러운 것일 수는 있지만 자신을 스스로 나타낸다는 본래적인 가능성으로서의 언어란 면에 대하여는 아무런 역동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런 입장에서 보면 삼위일체란 실재에 대한 포괄적인 해석을 의미하는 형식언어이지 결코 언어적 현실 가운데 형이상학적인 전제 없이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는 가능성의 언어는 아닌 것이다.

b. 2) 위와 달리 이제 삼위일체를 현실의 실재적인 구조에 대한 언어적 체계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의 분명한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다. 이러한 시도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과 연관되어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삼위일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사건 가운데 밝혀지는 신앙의 새로운 현실을 알려주는 언어로서 하나님이 자신을 예수라는 인간의 구체적인 실재 가운데 인간과 스스로 연관적이게 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나는 계시의 언어임을 의미한다. 즉 칼 바르트(K. Barth)가 주장한 바대로 삼위일체는 단순히 신론에 속하여 논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보다 더 근본적으로 신학의 서론적인 문제에 속하는 것으로서 어떻게 신학적인 언어가 가능하게 되는가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삼위일체적 계시로 가능하여진 신학적인 언어는 신앙의 현실로서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가운데 알려진 하나님의 인간성에 대하여 자신을 새롭게 개방할 수 있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삼위일체적인 계시의 언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대화의 관계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 안에서 - 세상 한 가운데서 세상적인 모양으로서 - 우리에게 발생하고 알려짐으로써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자신의 것으로서 포함하시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간성을 자신의 것으로 용납하심으로써 이루신 하나님 자신의 인간성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의미하며 이것은 칼케돈(Chalcedon) 신조에서도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두 가지 본성의 단일한 인격 가운데 있는 통일로서 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발생한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의 계시 가운데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하나님을 위한 인간으로서 계시되며 하나님의 신성과 인간의 인간성은 서로를 향해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열려진 것으로 밝혀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성에 의하여 영접되고 예수의 인간성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에 의하여 존재가 가능하도록 용납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인간성은 결코 그 자체로 그 존재의 근거와 목적을 갖지 못하며 철저히 하나님의 신성을 통해서 새롭게 근거와 참된 완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인간성은 비록 창조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연관 속에서 이미 긍정되고 우리에게 수여되었다고 할지라도 또 한번 육신이 된 똑같은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본래적인 의미와 완성을 알게된다. 그리하여 죄로 어두워지고 파괴된 상태에 있는 인간의 인간성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자유로운 사랑과 은총 가운데 그 분의 신성에 용납되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으로서 결정적으로 그 분이 계시하고 정한 바 새로운 실재 가운데 알려지고 개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이제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그의 인격을 통한 그의 행위 가운데서만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이제까지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종말론적인 성취로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 하나의 이름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자기전달을 통해서만 밝혀지는 것이다. 즉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전제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먼저 인간의 현실에로 자신을 스스로 규정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결정하는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만 비로소 계시적 언어로서 경험됨으로써 그 스스로 자신의 진리를 나타내면서 구체적으로 우리의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변화를 이루며 이 변화 가운데 우리의 언어를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개방적이게 만드는 것이다.

c) 요약과 정리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존재자체에 대한 교리적인 서술이나 혹 세상의 실재에 대한 상징적인 언어로서 파악하는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계시 신학적인 입장에서 삼위일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진실된 연관성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인간의 언어에 로운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① 삼위일체는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교리적 진술이 아니다. 세상과 분리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이해 되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삼위일체란 하나님께서 자신 자신을 예수의 역사 가운데 드러낸 사건으로 예수 안에 알려진 하나님 자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유의 완전성과 전체성(totus Dei 가 아닌 totum Dei)을 증거 하는 신앙의 언어인 것이다.

② 삼위일체는 세상의 실재에 대한 상징적인 언어가 아니다. 삼위일체는 세상의 현상에 대한 서술어가 아니다. 삼위일체는 세상의 존재의 깊이라든지 혹 세상의 근본적 질서에 대한 언어로서 세상을 설명하고 해석하여 줌으로써 자기 자신도 다시금 해석되어 버리고 해소되고 마는 언어가 아닌 것이다. 삼위일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세상과 인간의 역사 자체를 새롭게 개방하는 전적인 하나님의 타자성으로서 역사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언어를 의미하는 것이다.

③ 삼위일체는 역사에 대한 궁극적인 해석의 방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이런 의미에 있어서 삼위일체는 역사의 보편적인 해석의 가능성으로서 해석학적인 원칙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예수의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동일성을 뜻하는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의 유일회성이 중요한 것이다. 즉 하나님 자신의 사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삼위일체는 인간 역사의 과정 가운데 해소되는 목적이 아니고 역사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궁극적인 자기전달인 것이다.

3. 계시의 언어로서 삼위일체적 현실 이해

그렇다면 우리가 밝힌 바대로 이와 같은 삼위일체적 계시의 언어에 알맞은 현실적인 신학적 인식은 어떻게 묘사될 수 있는가?

① 신앙의 인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밝혀진 세상의 현실성은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 자신 안에 유일한 존재 근거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알려질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성부 하나님으로서) 인간을 위한 하나님으로서 드러낸다. 그리고 예수의 역사적인 실재가운데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뿐 아니라 더욱 더 자신이 수납한 인간성과 역사적인 삶을 통해서 인간을- 비록 불 신앙의 인간에게는 아직도 감추어진 현실이지만- 하나님을 위한 인간으로서 규정하며 나타낸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서로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형이상학적으로 세상과 인간이 없이도 이해되거나 밝혀질 수 있는 그런 분으로서가 아니고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하나님으로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 예수 안에서 바로 자기 자신을 반복적으로 나타내시며 인식하시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진실이 발생하게 되며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인식은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를 위한 하나님 자신의 사건으로서 알려진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과의 화해로서의 새로운 현실은 성령을 통해 세상 가운데 자기를 전달하며 우리의 믿음 가운데 가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 가운데 경험하는 모든 현실은 오로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자기 계시의 언어로서 가능한 것이다. 즉 하나님 안에서만 현실적일 수 있는 것이다.

② 이와 연관되어 강조되는 신앙의 인식은 하나님께서 하나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자신을 인간의 언어로 나타내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안에서 여전히 자유로우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자신을 증거 하심으로써 그 계시 가운데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아닌 인간의 경험된 무엇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 속에 자신을 나타내심으로써 더욱 진정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연관되어 하나님 자신의 계시의 행위 속에서 아직도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숨겨진 어떤 다른 것을 찾고자 하나님의 전체성을 말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전체성(totum dei)에 대한 또 한 번의 형이상학적인 이해가 될 뿐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구체적인 역사적인 현실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완전한 자기전달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전달로서의 하나님 인식은 이제 우리 가운데 존재론적인 언어가 아니고 종말론적인 언어로서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하이데거(Heidegger)가 말하는 것과 같은 존재의 언어로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의미 전체로서 무엇이 나타났는가 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타자성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연관성을 분명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주로서 근본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관계한다고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단 하나의 유일한 하나님 자신의 그 말씀으로서 단지 세상의 종합과 완성이 아닌 분으로서 세상의 참된 목적이시고 진리가 되시기 때문이다. 즉 예수는 이 세상을 “아직 알려지지 않은 비밀”로서 나타내는 세상의 진리들(Weltlogoi)과의 구분과 차이에서 “세상의 진리의 비밀”로서 그 유일한 빛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시의 인식에서 세상의 진리란 그리스도안에 밝혀진 세상의 하나님과의 화해와 연관되어진 것으로서 세상의 변화를 통해서만 자신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타자성을 가르치며 그리고 바로 이러한 차이에서만 발생하는 하나님과의 연관성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진리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타자성 가운데 밝혀진 하나님과의 연관성을 의미하는 비유들인 것이다. 이러한 비유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철저히 자기 자신을 우리 인간을 위한 분으로서 나타냄으로써 인간을 하나님을 위한 인간으로서 새롭게 만든 사실을 알리는 것이며 비유의 연관성은 항상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적 계시 가운데 있는 종말론적인 현실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③ 이와 연관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이미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십자가와 부활의 현실을 알리는 진리로서만 인간 역사의 종국을 밝히는 것이다. 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계시의 현실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결정을 알리는 의미의 종말론적인 언어의 전개 과정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상대화되고 역사의 술어가 됨으로써 인간 경험의 한계 속에서 정당성을 얻기 위해 해석되어야 할 세상의 언어가 아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계시는 세상과 역사를 종말론적 전망 가운데 세우며 그리스도안의 화해의 현실로서 하나님께 개방시키고 연관시키는 해방의 언어인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대로 삼위일체는 인간의 언어적 현실 가운데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실재를 알리는 역사적인 말씀의 사건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진리를 의미하며 또한 인간 세상의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을 이루는 것이다. 즉 삼위일체는 단지 과거에 속한 교리적 진술로서 형이상학적인 사변이 아니고 오늘 우리의 현실 가운데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실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댓글 '1'

갈렙

2015.02.18 21:15:17

삼위 일체 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신비 안에 존재하시는 신에 대해 인간의
인식으로는 결론을 내릴수 없다고 말한다. 학문적인 용어로 어렵게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결론은
모른다이다. 수많은 삼위일체 신론에 대한 책을 읽어 보아도 결론은 매한가지이다. 조금도 진리에
접근하지 못한채 겉돌기만 하는 학문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냥 단순히 성경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계시로 알수 있다고 말하면 될것이 아닌가?
그런데 학자들이라고 자칭 말하는 자들은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알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무조건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영적인 눈을 감게 했다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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