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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시18:3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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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4.11.24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499 ) |
시편(24)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십시오
(시편 18편 32-50절)
< 진정한 영성 >
기억력을 잃은 노모를 모시는 A 집사가 있었습니다. 그 집사는 멋에 대한
인식도 다 없어진 노모를 위해 좋은 옷을 사서 입혀드리고 치장도 잘해드리면서 노모가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게 해드리며 지극정성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습을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주위 사람들도 겉으로 내색은 안했지만 속으로는 그 신앙과 영성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영성을 탁월하게 여기지 않고 그저 당연한 일을 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A 집사 교우 중에는 비슷한 상태의 노모가 있는 B 권사가
있었습니다. 그 권사 입에서는 늘 ‘예수, 성령, 믿음, 영성’이란 말이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또한 자신이 대단한 신앙과 영성을 가진 것처럼
기회만 생기면 남에게 가르치듯이 신앙적인 조언과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 오직 예수뿐이야! 성령 충만하면
돼!”
그처럼 자기 은사와 영성을 과시했지만 평소에 자기주장과 고집이 강했고 쉽게 상처도 잘 받아서 감정통제를 못했으며 성도의
향기도 잘 풍기지 못했습니다. 기억력이 없는 노모를 요양병원에 보내고는 별로 관심도 없었습니다. 또한 신앙과 영성이 별로 없는 형제들은 최소한
병원비라도 매달 분담해서 냈는데 정작 자신은 병원비 분담금도 안 냈습니다. 다만 명절 때 남이 보는 데서 노모에게 용돈 조금 드리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교우들은 그 권사가 “오직 예수로 살아야 해!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면 속으로는 “이제는 그런 말만 하지 말고 당신 삶부터 돌아보시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적을 하면 상처를 입고 불같이 화를
내며 싸움을 걸어올까 봐 착한 교우들은 가만히 그 권사의 말을 그냥 들어주었지만 속으로는 생각했습니다. “저렇게 자기 모습을 못 보다니! 병든
영혼이다!”
A 집사와 B 권사 중에 누가 더 영성이 높습니까? 스스로 영성이 높다고 여기는 것은 사실상 가장 영성이 없는
것입니다. 영성을 자랑하는 B 권사의 모습은 노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A 집사보다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요양 병원비를 잘 내는
불신자 형제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이름을 많이 내세우면서 오히려 예수님 이름을 부끄럽게 하는 B 권사와 같은 사람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왜 한국 교인들이 이단에 쉽게 빠지고 수준 낮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까? 참된 영성에 대한 착각과 오해
때문입니다.
가끔 보면 B 권사와 같은 종교인이 영성과 능력을 내세워 인생역전을 꾀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 시도는 대개
실패합니다. 혹시 성공해도 단기 성공으로 끝나고 끝은 안 좋게 됩니다. 또한 일반 사회와 역사는 그 행태를 지탄함으로 전체적으로는 실패한
종교인이 됩니다. 문제는 그런 종교인에게 미혹되어 소중한 인생을 허무하게 날리는 영혼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미혹에 빠지지 않습니까?
영성과 능력을 자랑하고 선전하면 진짜 영성과 능력이 없는 것이란 상식적인 사실만 알고 대비해도 영혼이 미혹되는 것을 상당히 방비할 수
있습니다.
< 이원론 사상을 주의하십시오 >
살다 보면 사람들 사이에 태어날 때부터 격차가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봅니다. 그런 현실을 불의하게만 보지 마십시오. 선대의 도움으로 후대가 한참 앞서 출발하는 것을 정당하게 여겨주며 그런 현실이기에
자신이라도 후대를 위해 축복의 터전을 닦아주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십시오. 선대가 축복의 터전을 일군 것을 다 ‘무(無)’로 돌리고 모든 2세가
모든 면에서 똑같이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더 불의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입시나 게임처럼 똑같은 출발선상에서 경쟁하는
분야도 있는 반면에 물질의 유무처럼 선대의 영향으로 출발선부터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는 태도와 여유도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축복도 축복이지만 가정의 축복도 축복이고 더 나아가 몇 대에 걸친 가문의 축복도 축복입니다. 그런 현실 때문에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그런
현실을 오히려 역전 인생을 꿈꾸는 거룩한 도전의 원천으로 삼으면 됩니다.
인생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닌 마라톤입니다. 한참 앞서
출발한 사람도 당대와 다음 대와 다음다음 대에서는 뒤쳐질 수 있고 한참 뒤에서 출발한 사람도 당대와 다음 대와 다음다음 대에서는 앞설 수
있습니다. 영원히 앞서는 존재도 없고 영원히 뒤처지는 존재도 없습니다. 인생에는 역전패도 있고 역전승도 있습니다. 때로는 오랜 가문의 축복이
당대에 급격히 무너질 수도 있고 반대로 오랜 가문의 설움이 당대에 급격히 해소될 수도 있습니다.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고 남의
축복도 인정해주면서 역전인생을 꿈꾸며 열심히 사십시오. 그처럼 역전인생을 꿈꾸고 이루는 것은 복된 일이지만 역전인생을 땀과 성실과 정당한 방법이
아닌 사기와 불의와 강탈과 땀이 없는 술수로 이루려고 하면 안 됩니다. 또한 남을 지렛대로 이용하고 남의 이름을 도용해 이루려고 해도 안
됩니다. 더 나아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워 이루려고 해야 하지 하나님의 이름을 사칭해 이루려고 하면 안 됩니다.
살다 보면
남의 이름을 이용하거나 도용해 유익을 얻고 자기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유명인을 잘 안다고 하면서 자기를 높게 보이려는 것까지는
이해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판검사나 권력자를 사칭하고 심지어는 대통령까지 사칭해서 돈을 갈취하고 목적을 이루려는 것은 나쁜 태도입니다. 가장
못된 태도는 신을 사칭하며 마치 자신이 신통력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하면서 돈과 영혼을 갈취하는 태도입니다.
구원받은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란 자부심으로 사는 것은 사칭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능력자’라고 하면서 능력을 내세우고 자기에게 와야 선택된
사람이 되고 더 나아가 자기를 ‘치유의 종’이라고 과대 선전하면서 병을 고쳐준다고 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사칭입니다. 그런 사칭은 고대로부터
성행했던 큰 죄였기에 하나님은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3계명에 두신 것입니다.
제 3계명을 어기는 사람들을
보면 ‘영성, 은사, 예언, 치유, 계시’란 말을 자주 씁니다. 이런 말도 자주 씁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 병아
떠나가라!” 문제는 그런 말을 쓰고도 문제와 병은 그대로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니면 말고!” 식의 거짓 언행이 되면서
예수님의 이름은 그만큼 깎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입으로는 그런 말을 사칭자도 할 수 있고 사기꾼도 할 수 있고 악마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시도 때도 없이 “예수 이름으로!”라고
한다고 병과 귀신이 물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치유 자판기에 넣는 동전이 아닙니다. 주기도문도 주님의 기도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고
그 기도에 담긴 의미대로 살겠다는 고백적인 마음을 가지고 많이 외운다면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을 많이 외우면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치유되고 저주가 물러간다고 말하면 그것은 ‘주기도문’을 마치 ‘주문’처럼 남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영성을 자랑하는 어떤 목사는
유명한 설교가의 설교도 다음과 같은 한 마디 말로 단칼에 난도질합니다. “저건 육적인 설교야!” 그러면서 자신은 상당히 영적인 설교를 하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정작 그 자신의 설교를 녹음해서 그대로 문서로 기록해보면 교리 문제도 많고 상식 이하의 내용도 많고 도저히 문서로 남기기조차
부끄러운 두서없는 내용들도 많습니다. 그처럼 문제도 많고 준비도 없고 두서도 없는 설교가 영적인 설교입니까?
어불성설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성도들이 20세기 후반기처럼 기복주의와 무속주의와 신비주의 이단에 빠지지 않으려면 “저
설교는 육적인 설교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일단 주의하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신학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왜 그들이
교리와 신학을 무시합니까? 자기 말을 교리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말을 교리로 삼는 것이 먹혀서 세력이 커지면 그는 종교계의 김일성처럼
카리스마를 뽐내며 전횡을 일삼는 것입니다.
물론 신학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 연구 및 진리 분별을 위해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영성주의자들이 기복주의나 신비주의나 무속주의로 영혼을 미혹할 때 그 미혹을 무엇이 막습니까? 바른 신학과 바른 설교가 막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학을 ‘마귀 학문’이라고 매도하고 바른 설교를 ‘육적인 설교’라고 매도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바른 신앙을
도전하는 설교를 향해 “저 설교는 육적인 설교야!”하고 말하면 즉시 영혼 방어 시스템을 작동시켜 다음과 같은 내적인 경고음을 울리십시오.
“아무개가 이단성을 가진 사람이 하는 대표적인 말을 했음. 큰 주의가 요망됨!” 그 동안 성도의 바른 삶을 도전하는 설교를 ‘육적인 설교’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한국 교인들이 기복주의와 신비주의와 무속주의에 빠지고 심지어 이단에 빠졌습니까?
설교에는
성도의 바른 삶을 도전하는 윤리적인 말씀도 많아야 합니다. 윤리가 없는 진리는 결코 참된 진리가 될 수 없음은 상식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66권까지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역사관과 윤리도 필요하기에 <12권의 역사서>도 포함시키고 3천
년 전 솔로몬 시대의 신적인 윤리교본인 <잠언>도 포함시키고 심지어는 하나님 얘기가 한 번도 안 나오는 <에스더>도 성경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성도의 바른 삶을 도전한다는 의미에서 육적인 설교도 꼭 필요합니다. 바른 설교를 마치 틀렸다는 뉘앙스를 주기
위해 ‘육적인 설교’라고 매도하고 몰상식한 이상한 설교를 ‘영적인 설교’라고 하며 사람을 미혹할 때 그 미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고 육신으로 부활했다는 기독교의 대 진리는 육신의 중요성을 잘 말해줍니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선악으로 나누는 이원론은 가장
신앙적인 것 같지만 기독교의 대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가장 불신앙적인 사상으로서 이단이 내세우는 영혼 미혹의 제일 도구임을 잊지
마십시오.
기독교는 육신도 중시하고 육신적인 삶도 중시합니다. 그래서 ‘결혼하는 삶’을 ‘결혼하지 않는 삶’보다 차원 낮게 보지
않고 가정에서 십자가를 지는 영성을 동굴에서 수도하는 영성보다 차원 낮게 보지 않습니다. 성도는 교회 안에서도 승리하고 세상에서도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설교를 ‘육적인 설교’라는 매도하며 영혼을 미혹할 때 그 미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을 사칭해 불의한
역전인생을 꾀하는 종교인에게 넘어가면 그의 도구가 되면서 자신의 역전인생의 꿈과 희망은 더욱 강탈당하게 됩니다.
< 영성
자랑을 주의하십시오 >
자기 영혼은 자기가 힘써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자기 영혼을 지키려면 일단 영성을 자랑하는 사람을
주의하십시오. 이단이 내세우는 ‘영성, 능력, 신통력’이란 말은 영혼 미혹을 위한 사전포석으로 이용될 때가 많습니다. 사실상 ‘참된 영성’과
‘영성 자랑’은 180도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영성 자랑’을 주의해야 합니다. 영성을 자랑하는 삶은 영성이 없는 삶이고 진리와
동떨어진 삶입니다.
사람은 은혜를 받을수록 자기를 감추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됩니다. 물론 자기 이름을 높이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고단수도 있긴 합니다. 예를 들어, 치유 능력자란 사람이 자기가 치유를 준다고 하면 정체가 탄로 나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를
준다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의 언행을 계속 지켜보면 그가 말로만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지 아니면 정말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지 금방 판별할 수 있습니다.
영성이 높을수록 영성을 억지로 과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이단들은
자신을 영성 있게 보이게 하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몰몬교의 창시자 요셉 스미드는 다음과 같이 자화자찬하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내
오른팔이다. 역사상 교회를 완전히 지탱할 수 있었던 사람은 나뿐이다. 그 일은 예수도 못 이뤘다. 예수 추종자들은 그에게서 달아났지만 말일 교회
성도들은 내게서 달아나지 않았다.” 그렇게 자랑한지 한 달 만에 그는 횡사했습니다. 영성 자랑은 심판의 제일 원인입니다.
일전에
어떤 목사는 강원도 어디에 금맥이 있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계시를 받아 금맥을 찾는 것은 목사의 할 일이 아닙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1992년에 종말이 온다고 남발한 수많은 계시들이 다 틀리면서 그때부터 한국 교회가 급격히 신뢰를 잃고 성장 동력도
잃었습니다. 능력 있는 목사란 그런 헛된 계시를 남발하는 목사가 아니라 양떼들을 사랑과 진리와 희망으로 인도하며 비전을 제시하는
목사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수많은 자칭 예언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예언했지만 결국 모두 거짓말쟁이로 판명 났습니다. 너무 미래의
일을 알려고 하지도 말고 아는 것처럼 하지도 마십시오. 몰라야 할 것은 모르게 놔두는 것이 지혜이고 또한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 지혜도 없이 자기 영성과 능력을 과시하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능력을 행한다고 하고 계시를 남발하는 것은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가끔 보면 어떤 사람이 영성을 과시하는 말을 할 때 그 말을 안 들어주면 상처를 입을까봐 잘못된 말인 줄
알면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그 들어주는 사람이 더 사려도 깊고 더 영성도 깊은 사람입니다. 즉 영성이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영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성이 있다고 자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기분이 상할까 염려해서 그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이 더 영성이 있는 것입니다.
‘참된 영성’과 ‘영성 자랑’은 180도 반대개념임을 인식하고 누군가의 영성 자랑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또한 은사도 영성을 자랑하는 도구가 되게 하지 마십시오. 은사는 자랑할 것도 아니고 비교할 것도 아니고 꾸며낼 것도 아닙니다. 은사는
각 성도에게 필요에 따라 성령님이 직접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만들어내는 획일적인 모조품이 아닙니다. 은사를 영성의 표시로 오해하고 누군가 꾸며낸
은사에 순진한 성도들이 미혹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발견하는 아이러니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욕심은 있는데 내면이 빈 사람일수록 ‘하나님 얘기, 성령 얘기, 영성 얘기’가 유독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말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가볍게 일컫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사실 성자일수록 하나님의 높으신 이름이 혹시
자신의 허물로 훼손될까봐 하나님의 이름을 주의 깊게 일컬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은 완전히 반대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컬으면서 자기 영성을 과시하는 사람들 중에 진실로 존경 받는 인물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 다윗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물이 되었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최대한 높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
은혜를 지속시키는 비결 >
본문에는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다윗의 고백이 곳곳에 나옵니다.
본문 3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 사람의 힘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더 생깁니다.
그래서 군인이나 역도선수는 대개 두꺼운 허리띠를 찹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힘을 자신의 허리띠로 삼아 대적을 완전히 물리쳤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 발을 암사슴의 발 같게 해서 자신을 높은 곳에 세우셨고 자신의 손을 가르쳐 싸우게 했으며
하나님이 힘주심으로 자기 팔이 일반인이 잘 당길 수 없는 놋 활을 당겼다고 고백합니다(34절). 이 고백을 보면 다윗은 체구가 작았지만
강견이었고 물맷돌만 잘 던진 것이 아니라 무술실력도 탁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힘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의 방패를 자신에게 주셨고 능력의 오른손으로 자신을 붙들고 높여주심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35절).
더 나아가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지경을 넓혀주시고 자신을 실족하지 않게 해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36절). 즉 하나님은 구원하시고 힘주시고 지켜주시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성공과 승리까지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 다윗의 승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원수가 완전히 파멸되는 철저한
승리였습니다(37-38절). 그 완전한 승리가 본문 39-45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승리로 알지 못하는 이방민족까지 다윗을 섬기게 되었고
어떤 국가들은 다윗의 연전연승하는 소문만 듣고 전의를 상실한 채 항복했습니다(44-45절).
그때 얼마나 다윗의 명성이
높아졌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 승리를 자기 힘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46절).
또한 자신이 전쟁에서 이겼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방민족들이 복종하도록 도와주셨고 또한 자신을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고 대적들 위에 자신을 높이
드셨다고 고백하면서 이방 민족들이 보란 듯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습니다(47-49절).
그 모습을 보면서 이방
민족들이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라고 여기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 때문에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했을 것입니다. 왜 성도가
성공하고 승리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본문 50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이 고백은 자기 가문이 위대해서 영원히 지속된다는 교만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자신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가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의 고백입니다. 결국 이 시편은 다윗이 수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전체 이스라엘의 왕위에 막 올랐을
때 쓴 시편으로 추정됩니다.
이 구절에서 자신의 가문이 영구하게 된다고 한 다윗의 고백은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펼쳐짐으로 영적인 의미에서는 그대로 이뤄졌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영원히 지속시키는 제일 비결은 자신이 받은
은혜와 축복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낸 영적인 암행어사처럼 은밀한 선행의 손길을 베풀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3일 전에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제 4호인 12월호가 나왔습니다. 매월 정기구독자가 많이 늘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어려움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이 비전은 동참한 몇몇 분들의 계산을 초월한 헌신적인 조력이 없었다면
지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분들에게도 적절한 사례를 드릴 날이 언젠가 오게 될 줄 믿습니다. 가끔 물질적인 헌신을 통해 월새기 팀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며 월새기 사역을 지탱시켜주는 분들도 있습니다. 한 달 한 달이 기적의 연속입니다. 제게는 우리 팀원들뿐만 아니라 그분들도 다 영적인
암행어사들처럼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은밀하게 받드는 영적인 암행어사의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도
받고 그 받은 은혜도 지속됩니다. 앞으로 당대와 후대가 복 받기를 원하면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자랑거리를 많이 만들되 그 자랑거리를 힘써
감추고 은밀한 선행을 실천하십시오. 그와 동시에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최대한 돌리고 그런 삶을 후대에게 힘써
가르치십시오.
첫째 딸 은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어느 날 아파트에 사는 것과 다세대 주택에 사는 것의 차이를 인식하고는
식사하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우린 언제 아파트로 이사 가요? 버스가 많이 다녀서 여긴 시끄러운데....”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은혜야!
아빠는 목사님이라서 돈이 없어! 아빠가 돈 없이 그냥 목사님 할까? 아니면 목사님 하지 말고 돈을 많이 벌까?” 은혜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마침내 말했습니다. “아빠! 그냥 목사님 하세요.”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은혜야! 너는 앞으로 어렵게 사는 친구들에게는 더 잘해줘야
돼!”
부모는 자녀가 겸손과 이웃 사랑을 통해 은혜를 예비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유사합니다.
하나님은 육신적인 면에서도 모범이 안 되면서 ‘하나님, 예수님, 성령’이란 말을 자주 일컬으면서 영성을 자랑하는 사람을 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용히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육신적인 면에서도 모범을 보여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며 사는 사람을 진정으로 기뻐하십니다. 항상
다윗처럼 영육 간에 모범이 되고 말이 아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높이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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