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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임하시는 마음

시편 이한규 목사............... 조회 수 541 추천 수 0 2015.03.03 23:5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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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시98:1-9 
설교자 : 이한규 목사 
참고 : 2014.12.22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519) 

주님이 임하시는 마음 (시편 98편 1-9절)


< 언제든지 만나주시는 주님 >

 인생에서 만남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축복은 만남이 상당히 좌우합니다. 좋은 만남은 좋은 미래를 만듭니다. 그러나 계산적으로 좋은 만남을 노리면 진짜 좋은 만남은 얻기 힘듭니다. 만남을 위한 만남은 만남의 가치를 떨어뜨립니다. 물질처럼 좋은 만남도 저절로 따라오게 해야 합니다. 소중한 가치에 헌신하고 개척자와 리더를 존중해주고 윗사람에게 충성하고 거룩한 비전을 품고 땀을 흘리면 좋은 만남의 가능성은 커집니다.

 좋은 만남을 계산적으로 만들려고 성공한 사람을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열심히 상처 받지 마십시오. 남의 시간도 소중히 여겨주고 자기 시간도 소중히 여기십시오. 억지로 연줄을 만들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열심히 충성하고 헌신하며 살다 보면 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연줄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하나님만 꼭 붙들고 자기계발에 힘써서 자기 체급을 높인 후 체급 높은 사람이 자신을 찾게 하십시오.

 제 친구 중에 상당한 재력가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연줄을 대려고 하겠습니까? 저의 거룩한 비전도 그 친구가 도와주면 성취가 쉬워질 수 있지만 그 친구에게 전혀 그런 부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수많은 부탁으로 귀찮을 친구에게 저까지 귀찮게 하면 되겠습니까? 저의 대학 때 신앙 동료 중에 현 정치권에서 꽤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분에게도 순수한 안부 전화 한 통조차 주의합니다. 얼마나 청탁전화가 많겠습니까?

 재력과 권력과 세력을 가진 사람은 억지로 연줄을 만들려는 사람들 때문에 힘드니까 나중에는 밉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전화번호를 바꿔버리고 소수의 사람에게만 전화번호를 알려줍니다. 그 전화 받는 대상에서 빠졌다고 그를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관계를 순진하게 자기중심적으로 펼쳐지기를 원하면 상처만 깊어질 뿐입니다. 정말로 탓할 것은 봄에 눈물로 씨를 뿌리는 좁은 문의 삶과 초창기의 삶을 회피했던 자신입니다.

 씨를 뿌릴 때는 구경만 하다가 즐겁게 추수할 때 이너써클로 진입하려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귀찮고 얄밉고 싫겠습니까? 그것을 내색할 수 없으니까 전화번호를 새로 만드는 방식 등으로 지혜롭고 정중하게 대화와 만남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절했다고 뒤에서 “저 사람 성공했다고 교만해서 안 만나주고 전화도 안 받는다!”고 자격지심을 표출하면 자신의 사회생활과 정신건강만 나빠집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체급이 맞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편하게 여깁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우리와 체급이 너무 안 맞아도 우리가 찾을 때마다 언제든지 만나주시니 얼마나 큰 복입니까? 성공한 사람을 찾아다니는 시간에 더욱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혼자 일방적으로 만나달라고 하다가 만나주지 않는다고 상처 입고 “그 사람 인격이 나빠! 변했어!”라고 하지 마십시오. 만나주기를 꺼려하는 사람을 만나려고 안달하지 말고 언제든지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만나려고 사모하십시오. 자기 마음만 준비되면 주님은 언제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 주님이 임하시는 마음 >

 성탄절은 초림하신 주님이 마음에 임하도록 하고 재림하실 주님을 만날 준비를 새롭게 다짐하는 날입니다. 주님은 어떤 마음에 임하실까요?

1. 은혜를 기억하는 마음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이 구절에서 ‘기이한 일’은 ‘기적적인 구원의 은혜’를 뜻합니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의 은혜에 대해 기뻐하며 찬송하는 고백을 합니다. 이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마음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감사를 아는 마음이 임하십니다. 축복과 행복도 감사를 아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행복한 환경보다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구하십시오. 성숙함이란 고난과 불편 중에도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믿음이 커지면 감사가 커지고 감사가 커지면 평안이 커집니다. 감사가 충만한 것이 결국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복된 공동체는 프로그램이나 세미나로 형성되지 않고 거룩한 공통 비전과 넘치는 감사로 형성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커지면 희망도 커집니다.

 인생의 성패는 자기 현실에 대한 자기 반응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현실이든지 그 현실을 감사로 반응하면 현실 너머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지고 그때부터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또한 그때 마음이 편해지고 머리가 환해지면서 창조적인 지혜와 아이디어도 생깁니다. 결국 감사 반응은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습니다.

 삶이 지옥 같이 느껴지는 제일 이유는 환경과 상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감사가 전혀 없는 곳입니다. 감사가 넘치면 그곳이 하늘나라가 됩니다. 상처, 사건, 사고, 질병 등의 절망적인 상황을 감사로 번역하는 탁월한 영적 번역가들이 되십시오. 감사 없이 축복을 기다리는 것은 구름 없이 단비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아의 항아리에 감사의 물을 채울 때 그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로 변합니다.

 남이 변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항상 자기 변화가 우선입니다. 자기를 ‘감사하는 자기’로 변화시키면 만족하지는 않아도 초월할 수는 있습니다. 진짜 핵심적인 축복은 만족이 아닌 초월입니다. 초월할 때 만족을 주는 것이 조만간 찾아옵니다. 최고의 영성은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면 하나님이 그 마음이 찾아와주셔서 약할 때 강함 주시고 부족할 때 만족 주시고 가난할 때 부요케 하시는 역사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2. 공의를 나타내는 마음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이 구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의 공의’를 명백히 나타낸 것이었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공의를 충족시키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통해서 주목해봐야 할 것은 구원이 ‘공짜’라는 사실보다는 구원을 통해 하나님이 명백하게 나타내신 ‘공의’입니다.

 성도는 ‘공짜’를 추구하는 마음이 아닌 ‘공의’를 추구하는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성도라고 해서 무조건 좋기만 하면 안 됩니다. 공의를 따라서 분별력 있게 좋아야 합니다. 성도는 ‘호인’은 되어야 하지만 ‘호구’가 되면 안 됩니다. 요새는 호인과 호구가 묘하게 동일시되어 표현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남편을 호인으로 보지만 그 호인 남편 때문에 속 썩어 미치려는 아내들이 많습니다. 맨날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어리석게 당하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 경우에는 호인이라기보다는 호구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호인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바른 질서와 공의를 세우지 못하고 마음고생만 하면 그것을 지켜보는 사모와 자녀들은 상처가 깊어집니다. 그런 목사님들은 사랑이 많은 호인 목사님으로 여기기 쉽지만 사랑을 명목으로 공의와 질서를 세우지 못하는 목사님은 사실상 ‘호인 목사님’보다는 ‘호구 목사님’에 가깝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무조건 좋게 보면 공의가 서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좋게 보는 것이 진짜 좋은 것입니다.

 처음 복음서를 보며 품는 의문 중의 하나는 사랑이 많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꾼들의 상을 둘러엎고 채찍질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사랑이 많은 예수님이 꼭 그렇게 했어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또한 이런 의문들도 듭니다. “왜 사랑의 사도 요한이 자신의 서신에서 이단을 그토록 무섭게 정죄했을까? 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무섭게 말했을까? 왜 성경은 그런 내용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기록했을까?” 시간이 꽤 지나서야 그런 성경 장면과 성경 말씀에서 사랑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책임의식을 약화시키는 사랑도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명목으로 공의와 질서와 리더십을 세우지 못하고 ‘열린 것’만 좋아하다가 거의 무장해제 수순까지 가는 것은 ‘호인의 모습’이 아니고 ‘호구의 모습’입니다. 사람을 사귈 때도 잘못된 호인 칭호에 도취되어 나쁜 친구를 정리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나쁜 친구는 과감히 멀리해야 합니다. 그것은 차별도 아니고 사랑이 없는 모습도 아닙니다. 나쁜 친구를 멀리해야 하나님이 좋은 친구를 주십니다.

 돕는 것도 지혜롭게 도와야 합니다. 아무나 무작정 돕지 말고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나 도움 받고 책임의식이 약화될 사람은 신중하게 도와야 합니다. 특히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과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얌체들을 돕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닌 공의를 망가뜨리는 한심한 일로 보일 수 있고 진짜 도움이 필요한 책임적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공의로운 호인은 되어도 공의가 상실된 호구가 되면 안 됩니다.

3. 즐겁게 찬송하는 마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구원이 이스라엘을 향해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기에 주어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3절). 그래서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자기의 찬송하는 마음을 담아 온 땅에게 하나님을 즐겁게 찬송하라고 외칩니다(4절). 그리고 수금과 음성과 나팔과 호각 소리로 하나님을 즐겁게 노래하고 외치라고 선포합니다(5-6절). 호각은 양이나 염소 뿔로 만든 맑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또한 자연 만물들도 찬양하라고 의인화된 표현을 써서 찬양을 강조합니다(7-8절).

 그처럼 우주 만물이 찬양하는데 구원받은 성도는 당연히 찬양해야 합니다. 때로 힘든 상황을 만나고 어떤 길이 막혀도 하나님의 플랜 B를 신뢰하고 즐거운 찬송을 잃지 마십시오. 고난 받으신 예수님처럼 어떤 고난도 감수하겠다고 각오하면 고난이 주어져도 예수님처럼 반드시 부활의 은혜와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겨울에 등산 갔다 온 후 사우나에 가면 피부에 윤기가 흐릅니다. 찬바람이 피부를 건강하게 만든 것입니다. 얼굴을 닦아 피부 각질이 깎이면 점점 피부가 없어져야 하는데 오히려 새로운 피부가 나면서 더 피부가 좋아집니다. 반면에 피부를 보호하겠다고 피부의 각질을 벗겨내지 않으면 오히려 피부가 노화되고 나빠집니다. 생명이 없는 물건은 깎으면 점차 닳아 없어지지만 생명이 있는 것은 깎으면 그곳에 새 살이 돋습니다. 생명이 없는 자에게 고난은 불행의 원천이지만 생명이 있는 자에게 고난은 새 살을 돋게 하는 것입니다.

 비바람이 칠 때도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면 거기에는 태양이 빛나는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처럼 믿음의 고도를 높이면 문제를 만나도 기쁨과 찬송을 잃지 않습니다. 사람이 물에 빠져죽는 것은 물이 깊기 때문이 아니라 수영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문제가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니고 문제를 풀 실력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친 파도가 닥칠 때 어떤 사람은 휩쓸려 죽지만 어떤 사람은 파도를 타고 써핑과 카약을 즐깁니다. 믿음의 고도를 높이고 즐겁게 찬송하면 마음이 싱싱해지고 강건해집니다. 그런 마음에 주님이 임하십니다.

4. 공평을 실천하는 마음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이 구절에서 ‘땅을 심판하러’란 표현은 ‘불의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심판하러’란 뜻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불의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심판하러 임하실 텐데 그 하나님의 심판도 찬양해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왜 하나님의 심판을 찬양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고 공평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강림은 세상을 의와 공평으로 심판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려면 의와 공평의 실천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특권의식을 버리고 차별적인 마음과 편견적인 마음도 힘써 버려야 합니다. 편견은 정신이 병든 약자가 남을 보편적으로 매도함으로 자기를 높이고 위로하려는 일종의 병입니다. 특히 공평의 실천을 위해 중요한 것은 자발적인 나눔의 실천입니다. 나눔이 중요해도 나눔을 강요하면 안 됩니다. 나눔의 강요는 위선적인 공산주의를 낳습니다. 좋은 이상이 극단주의로 흐르게 하면 안 됩니다.

 며칠 전 한 북한 추종자가 아시안 게임 폐막식 때 북에서 온 권력자 일행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저희가 박근혜를 처리하겠습니다.” 그가 북한에 가서 3대 세습으로 국민들을 고통에 빠트린 김정은을 향해 “저희가 김정은을 처리하러 왔습니다.”라고 할까요? 그러면 기관총으로 즉시 사살됩니다. 아마 북한에 가면 비굴하게 김정은을 찬양할 것입니다. 진보 진영에서 보수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잘못은 비판하면서 더 잘못하고 있는 북한에 대해서는 침묵만 하면 그것은 진보를 가장한 모습입니다.

 남한처럼 목숨 위협이 없는 곳에서는 반대 목소리를 심하게 무례하게 내면서 용감한 척 하고 북한과 같은 가족 전체의 목숨까지 위협되는 곳에서는 훨씬 나쁜 현실을 목격하면서도 잘못되었다는 최소한의 소리도 낼 용기조차 없다면 얼마나 비겁하고 비굴한 모습입니까? 그처럼 입으로는 정의와 공평을 내세우지만 진짜 정의와 공평을 말해야 할 대상에게는 전혀 말도 못하는 불공평과 위선 때문에 건전한 진보진영 사람들도 그들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균형 있고 공평하게 펼쳐가는 사고를 계속 훈련하고 키워가십시오. 참된 리더가 되려면 여야의 소리를 공평하게 듣는 귀를 발달시켜야 합니다. 언론도 야권 논조의 한겨레신문도 필요하지만 여권 논조의 TV조선도 필요합니다. ‘힘의 기득권’을 가진 자에게 유리한 시스템에 경각심을 울리는 한겨레신문도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의제 면에서는 한겨레신문이 ‘명분의 기득권’을 가진 위치에 있을 때가 많기에 물리적인 힘이 없다고 꼭 약자만은 아닙니다. 결국 자신이 어떤 언론을 선호할 수는 있지만 반대편 언론도 필요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통일이나 남북화해 등의 의제에서 한겨레신문이 감상적이고 이상적인 통일론에 치우치는 것 같으면 TV조선에서 철저한 이성적인 논리로 딴죽을 겁니다. 그런 모습이 밉게 보일 수는 있지만 냉철하게 보면 ‘통일’과 같은 의제에서는 한겨레신문이 여당이고 TV조선은 야당인 셈입니다. 그래서 조선일보의 딴죽 거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이상을 좇아가는 순수한 사람들이 계산적인 전술가들에 의해 농락당하고 파멸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여당과 야당은 서로의 소리를 참고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 북한의 실세 3명이 와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흥분할 때 TV조선 패널들이 말했습니다. “너무 흥분하지 맙시다. 그것이 좋은 징조일 수는 있어도 냉철하게 전략을 세워 대응합시다.” 그것을 딴죽을 거는 소리로만 듣지 말고 그런 말도 남북화해란 의제에서 ‘야당의 소리’로 여기고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젊은 혈기를 넘어서 침착한 분별력을 구하기까지 약 20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극단은 늘 주의해야 합니다.

< 작은 자를 살펴주십시오 >

 무엇보다 공평한 사회를 만들려면 늘 작은 자를 살피고 작은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더 나아가 힘써 자기 것을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외형에 끌리는 본능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조차 그런 본능적인 시대상을 좇아간다면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일반인들은 실망합니다. 그런 실망을 주지 않도록 성도는 없는 자들과 작은 자들의 설움을 이해하며 그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주는 마음을 더욱 키워가야 합니다.

 일전에 한 교회 목회자가 저를 찾아와 이렇게 목회의 아픔을 토로했습니다. “이 목사님! 저와 오랫동안 교분이 있고 제 설교를 좋아하고 개인적으로 매우 친했던 분이 저희 교회 근처로 이사 왔는데 바로 코앞의 저희 교회를 놔두고 서울의 한 대형교회로 등록하더군요. 정말 실망이 되고 마음이 아프네요.” 그런 안타까운 현실이 이 땅의 현실임을 인정하면서도 생각이 깊은 성도는 작은 자에 대한 관심을 늘 더 가지고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 중에도 어떤 선교사는 후원자가 많아서 어려움 없이 사역을 펼쳐나가지만 어떤 선교사는 후원자가 거의 없어 일반생활조차 힘들 정도입니다. 그런 상황을 이해하고 소외감과 외로움의 물이 자기통제의 둑을 넘어 선교의 불길을 끄지 않도록 어려운 선교사들을 위해서는 더 기도와 후원의 손길을 베풀어야 합니다.

 선교 후원기관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선교사들의 후원 편차를 줄이는 조정자 역할을 잘하는 것입니다.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에서는 선교사들을 위한 후원금을 보낼 때 선교사 개인보다는 본부로 보내게 합니다. 특정 선교사에게 후원금을 보내고 싶을 때도 지정한 상태에서 본부로 보내게 합니다. 그래야 선교헌금이 사역을 잘하는 일부 선교사들에게만 지나치게 몰리지 않게 최대한 공평하게 배분해서 사역 차이로 인한 후원 차이가 생활 차이로까지 크게 벌어지지 않도록 조정합니다.

 사람에게는 “사랑 받고 있다!”란 느낌은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 받고 있다!”란 확신이 있고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면 낙심되는 일을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에 쓰임을 받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마음과 능력을 구하십시오. “나는 못해!”라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붙들고 주님과 동행하면 자기 한계와 약점을 극복해서 얼마든지 나눌 수 있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 모습이 탁월해서 선택하기보다 가능성을 보시고 선택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고 늘 다음과 같이 용기 있게 고백하십시오. “나는 현재의 내가 좋다. 나도 가능성이 있다. 지금은 부족해도 앞으로 더욱 성장할 것이다.” 그처럼 믿음으로 자신을 격려하고 나갈 때 하나님도 그를 격려해주시며 복된 길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항상 주님이 임하는 마음을 준비하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축복 받은 후에 보다 많은 사람들을 품어주고 도와줌으로 하나님의 뜻을 멋지게 이루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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