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마5:28 |
---|---|
설교자 : | 최만자 자매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index.php?mid=sermon&category=99215&document_srl=125233 |
세 남자 이야기(마태복음 5장 28절)
2012년 9월 16일 주일예배
최만자 자매(새길교회 신학위원)
요즘 청춘들의 로망이 ‘성당누나’와 함께 ‘교회오빠’라고 하는 말 들어 보셨나요? 하도 새로운 단어들이 빠르게 생겨나니 그 말들 따라 이해하기도 힘듭니다. 아무튼 ‘교회오빠’라는 말을 듣고 그래도 교회 다니는 남성들이 이상형으로 생각된다니 다행이다 싶었는데, 교회오빠는 교회 다니는 오빠를 말 하는 게 아니랍니다. 교회에 다닐법한 오빠인데 실상 교회에는 그런 오빠는 없다고 하네요. 그러면 이 교회오빠는 어떤 남자를 말하는가? 싶은데, 그 교회오빠는 ‘넉넉한 품성, 따뜻한 배려심, 건전하고 절도 있는 성실성, 부드러운 미소를 띤 가정적일 것 같은 젊은 남자’ ‘똑똑하면서도 재미있는 남자’를 말한다고 합니다. 이는 한마디로 좋은 신랑감의 조건에 해당된다고 하겠지요. 이런 남성상을 교회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남성이 이런 남성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남성성은 가부장제 사회가 규정하여 온 남성다움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라고 생각되지요. 그렇다면 요즈음은 가부장적 전통적 남성성과는 많이 다른 남성성을 이상적인 남성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며 다르게 말해 새로운 남성성을 추구하고 있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남성성을 가진 남성이 교회에는 정작 없다고 하니 교회에는 어떤 남성들이 있을까요? 한국교회에 형성되어 있는 남성성 혹은 남성상은 어떤 것일까요?
한국교회가 초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형성하여 온 남성성을 이숙진(이대) 선생이 몇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내용을 옮겨보면, 기독교가 수용된 개항기에는 문명과 신앙의 힘으로 부국강병을 꿈꾼 문명적 남성지도자 상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한국 전통적 남성성을 야만으로 규정하면서 문명적이고 강인한 서구 가부장적 남성성을 교회남성에게 강화하였습니다. 그런 남성성은 강력한 가부장적 하나님 이미지를 통해 신앙적 강인함을 부가시켰고, 절대적 통치자. 십자가 군대의 대장 예수라는 강한 전투적 남성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분단체제가 고착되고. 군사정권이 등장하고, 월남파병을 하고, 유신독재를 거치면서는 한손에 망치, 한손에 총 칼 들고 나가 싸우는 남성성이 추구되고, 장기집권 도모를 시도한 군부독재시대에는 군사적 남성성이 강화되었지요. 군사문화는 학교, 교회, 등 모든 영역에 거대한 뿌리를 내려 ‘대한민국은 군대다’라고 할 정도가 됐습니다. ‘태극전사’ ‘반공투사’가 등장하였지요. 산업화가 되면서는 가정과 일터로 성역할이 확연히 이분화 되어 여성은 가사노동, 남성은 일터에서 임금노동자. ‘수출전사’가 등장합니다. 이때 교회는 영적 전사-그리고 배타주의, 반공주의, 권위주의, 정복주의, 군사주의 등이 상호연동 된 남성성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교회의 영적 투사는 국가 안보를 위한 반공투사가 되고 교회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해내는 중심 조직이 되었고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집중하여 물질적 번영을 추구하면서 교회는 성장주의가 폭발되고 나눔은 없고 장엄한 교회건축, 외형불리기, 양적팽창, 공격적 선교하는 영적 전사가 양산되었다고 합니다. 교회까지 침투한 군사문화는 서구 기독교 전통에 내재한 가부장주의와 한국 유교전통, 일본제국주의 통해 강화된 가부장주의 등이 합하여 한국교회의 남성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영적 전사인 남성성은 경쟁심과 배타성, 공격성, 섬김 받음을 그 특징으로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시민적 남성성이 추구된다고 해요. 민주화 결실로 복종문화 권위주의는 이제 극복대상이 되고, 개인 간의 차이를 무시하고 공동목표 향해 돌진하던 ‘국민’은 개인의 자율성에 기초한 주체 곧 ‘시민’으로 대체됩니다.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의 기본원리가 지배하게 되어 여기 조응 못하는 남성들은 위기를 느끼면서(소위 경쟁에 약한 남성들) 새로운 남성성을 만들어 변형된 가부장사회를 이루어서 남성지배를 지속하려 노력하게 됐다고 합니다. 지금 가장들은 명퇴. 비정규직화에 시달리는데, 전업주부이던 여성들이 가장역할을 하는 경우가 된 가정이 많아지면서 남성들의 위기감이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민주화와 다양한 소비자본주의 체제로의 변환은 새로운 남성성을 구성하는 요인이 되어 요즈음 유행하는 메트로 섹슈얼, 꽃미남, 차도남 등 스마트한 지적 능력, 스위트한 매너, 스마일을 갖춘 국민남편이 인기이며. 교회오빠도 이런 맥락에서 생긴 용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이제 군사적이고 권위적 남성성은 더 이상 새 시대를 주도할 수 없고 오히려 시대착오적 존재가 됩니다. 교회에도 권위주의 체제, 관행들이 깨어져서, 권위에 기초한 교회권력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며, 민주화 세례를 받은 시민적 성도들은 목회세습, 권위계승하려는 카리스마 리더십에 순종적이지 않고 도전하는 경우들이 많아집니다. 한편 카리스마 권위와 가부장적 권위, 권력 등을 생명처럼 여기던 보수 교회들이 약삭빠르게 변신을 시도하여 군사적 언어인 전도폭발성회를 ‘새 생명 축제’로 개명하고, 다양한 시민적 성도의 눈높이에 맞춤하여 교회문화를 완곡하고 부드러운 형태로 변화시키지요. 두란노 아버지학교. 아바러브스쿨 등 교회기반 기획프로그램들은 다정다감함, 배려심의 남성성을 각인하는 장치들로 역할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숙진 선생의 이런 분석에 공감하면서 근래에 이런 보수교회들에 청년들이 구름처럼 몰린다는 소리를 듣는데 바로 이런 변화 적응 프로그램으로 청년들을 부르기 때문이구나 이해가 갔어요. 지금 한국교회는 아직도 군사적이고 권위주의적 남성성이 지배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시민적 남성성의 영향를 받고있는 양극적 남성성의 혼재와 부조화로 애매해 있다 하겠습니다.
시몬느 드 보봐르가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가부장제 사회는 여자만 아니고 남성 또한 억압하여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이래야 돼’라고 규정하면서 그 규정에 의한 남성다움을 얼마나 강요하여 왔는지요. 지금은 새로운 남성성을 요구하는 시대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가부장제 전통이 규정한 남성성은 지배적 영향을 주고 있기에 오늘의 남성들이 혼란스럽고 압박감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남성들에게 강요된 남성다움에서 가장 억압적인 것은 아마도 성공한 남자가 되어야 사람구실 한다는 것과 (안되면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리지요), 독립심이 강해야 하고 모든 것에 창조적 책임감 있어야 하고 돈 벌어 가족 부양해야하고,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등등의 강요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야 남성답다는 이 이미지가 우리들 마음 깊이 뿌리내려 제2의 천성이 되어버렸다고 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비정규직 사회, 청년실업률이 최고로 높은 사회에서 자살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요인의 하나라고도 보여집니다.
남성성을 재고하게 된 것은 여성운동 경험 이후의 일이라고 봅니다. 여성해방운동을 통해 여성들이 자신을 성찰하고, 인간사회를 성찰하면서 이제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듯이 남성도 자기성찰하고 인간사회 구조를 성찰하여 새로운 세상을 지향해 가는 남성해방운동의 필요성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남성도 여성도 가부장제가 규정한 젠더질서를 넘어서면서 배려하고 돌볼 줄 아는 사람, 내 가족, 내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문제에도 적극 관여하는 정의롭고 따뜻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가지는, 오늘 성서 말씀처럼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따라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남성, 여성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성서와 한국교회사와 현재 우리의 자리에서 참 괜찮은 남성이다 싶은 세분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의 아버지 요셉입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크리스마스 때 조차도 별로 관심 받지 못하고 성서의 기록에 미미하고 짧게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새로운 남성성을 찾는데 본이 될 수 있는 남자라 생각이 들어요. 성서에는 마태복음 1:18-25, 2:13-15, 2:19에서 천사의 지시를 받고 참 순하게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오지요.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아기 예수를 애굽으로 피난시켰다가 다시 나사렛으로 데려온 이후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는 2장에서 인구조사를 위해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에 갔다가 말구유에서 예수의 출산을 돌보고, 그후 생후 팔일 때 성전에 가서 아기의 정결예식을 드려주고, 2:41에서 예수의 열두살 소년시절이 나옵니다. 그 명절에 성전에 갔다가 예수를 두고 와서 다시 찾아서 나사렛으로 데려오는 모습이 나오고는 그는 성서 기록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미미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새롭게 깊이 생각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생각 때문입니다.
1) 요셉의 기록에서 첫째 중요한 모습은 요셉이 정혼한 마리아가 자기가 아닌 다른 이의 아기를 임신했음에도 그를 받아들이고 아기와 엄마를 지극히 돌보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여 피신시키고 다시 고향에서 안전한 삶을 살 터전을 마련해 주는 따뜻하고 자비로운 남자라는 점이지요. 현대사회에서도 정말 어렵고 보기 드문 남성입니다. 만약 그가 마리아를 데려오지 않으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는 ‘사람을 죽이는 율법주의 사회를 거부하여 율법주의 사회에서 의롭고 경건한 남성다운 강한 남자라는 가부장사회의 인정받음을 우선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 사회의 젠더질서를 넘어선 것이지요. 그와 반대로 한 여자와 아기의 생명을 살리는 길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였으며 이 선택으로 당하게 될 불이익들 - 비난, 돌팔매질, 조롱, 멸시 등 - 을 감수할 각오를 하고 생명을 선택한 것입니다. 나는 성서 기록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을 찾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을 알리고 마리아를 데려오라고 한 이야기를 거꾸로 읽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율법의 길인가, 생명의 길인가, 또 내 아이가 아닌 아이를 가진 여인과 아기를 어떻게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밤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가 아무도 몰래 마리아를 가만히 끊고자했다는 기록은 그의 긴 고통을 나타내 주지요. 그러나 고통으로 몸부림 친 기도에서 요셉은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 진정한 경건이며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됐을 것이고, 거기서 그의 자비와 연민과 긍휼히 여기는 영혼의 본성이 살아 움직였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비로소 그때 천사의 세미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너무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에 관심을 쏟아 하나님의 명령에 묵묵히 순종만 하는 요셉만을 생각하는데,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정작 들어야 할 소리는 요셉의 고민하면서 털어놓는 속마음일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요셉은 따뜻한 정의로움, 자비로운 용기를 가진 남자로 보입니다.
2) 두 번째로 생각할 점은 예수탄생 이야기의 주제를 기억하는 것과 상관이 있어요. 마태는 예수탄생을 기원전 4년으로 보고 있으며, 누가는 기원 후 6년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4년은 나사렛에서 6Km 떨어진 세포리스에서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하는 큰 반란을 일으킨 해이며, 기원후 6년은 바로 그 세포리스에서 로마 분봉왕 안티파스가 자기의 수도 건립위해 대대적 건축 노역을 시작한 해이지요. 마태에서 요셉은 아기예수를 애굽으로 피난시켰다가 헤롯이 죽은 후 다시 나사렛으로 삶의 터전을 만든 이후 등장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혹자는 요셉이 이때 반란군에 함께 했다가 죽었거나 행불자가 된 것 아닌가 봅니다. 누가에서 요셉은 예수의 열두 살 때 성전에서의 이야기 이후 등장하지 않지요. 그래서 요셉이 대대적 건축에 목수로 부역 당했다가 죽었거나 행불자가 된 것 아닌가도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탄생 이야기의 주제는 ‘권력자 헤롯과 젖먹이 해방자’와의 대결이야기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나사렛 대중의 처절한 비극적 운명의 한복판에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대중의 집단적 기억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런 극한적 상황에서의 한 남자, 한 가부장 요셉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민족 비운의 무거운 짐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아내를, 아기를 가족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모든 위험 무릅쓰면서 그는 비운의 이스라엘 한 남자로서 어떠한 상황에서의 임신이건 약혼자의 다른 씨앗 아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아이의 미래를 위한 보호에 전력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어요. 누가 2장에서 인구조사를 위해 베들레헴으로 가는 이야기를 신학자들이 메시야가 베들레헴 다윗의 동네에서 탄생한다는 구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한 짜임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당시의 조세납부 문제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침략자들은 조세 탈취, 착취로 먹고살고 부를 쌓는다. 당시 로마권력과 유대 민중 갈등의 핵심은 조세납부에 있었고 이 조세를 극대로 받아내기 위한 철저한 호구조사를 하였으며, 조세착취에 시달려 고향에서 도망하거나 고향을 떠난 이들조차도 다시 조세대상에 넣어 철저한 호구조사를 하는 그 상황에서 예수가 탄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갈등은 비천한 사람들과 이 세상의 권력자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며 그것이 이야기 배경의 전모입니다.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와도 유사하며 두 이야기의 기조와 강조점은 폭정에 시달리는 이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왜 영아를 살해할까? 지금 반헤롯 인사들을 처형하면 될 텐데?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정권유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상대를 최고조로 위협한 수단으로 영아살해 방법을 택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요즈음 인혁당 사건이 얘기되고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굴욕적 한일 외교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반공이데올로기로 엮어 조작하다가 당시 판사들이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판정을 내림으로 그 조작에 실패했지요. 10년 후 다시 유신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반공을 극대로 내세워 다시 조작극을 만들고 정부에 결탁된 당시 판사가 이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후 18시간 만에 초고속으로 사형집행한 살인의 행위를 저질러 위협을 준 사건입니다. 훗날 다시 그 진상이 다 밝혀져 대법원이 무죄 판결을 하였는데도 아랑 곳 없이, 조금의 역사인식도 없이 감히 역사란 단어를 사용하여 역사가 판단할 것이라고 하는 파렴치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제3공화국이 금새 다시 올 것 같은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권력의 속성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고조의 위협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것이지요. 요셉은 매우 평범한 남자이고 목수라는 천한 계층의 삶을 살았지만 민족의 고난과 위기와 미래에 대한 인식을 가진 상식선의 정의로움을 체현하고 있는 사람, 그 정의로움으로 가족을 지키고 생명을 지키는 따뜻함을 동시에 가진 남자로 보입니다.
두 번째 기억하고 싶은 남성은 김춘배 목사님입니다.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김 목사님이 특별하게 한국교회 여성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한 첫 남성이기 때문입니다. 1920년대 한국교회에는 그동안 당해온 성차별에 대해 여성들이 반발하여 일어난 시기이지요. 당시 성차별 현실은 한국 기독교의 초석을 이루다시피 많은 헌신과 공헌을 한 여전도사(전도부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데서 제기되었습니다. 전도부인들은 교회의 많은 일들-주일성수, 교회 안에서의 행동, 가족의 통제와 관리, 위생과 보건 등의 책자로 여성교인들 교육시키고, 종교적 전도사업을 담당하고 생활교양을 가르쳤고, 문서활동도 병행하고 야학을 열어 국어, 산술, 한글 신철자법, 주의 기도문, 사도신경 교수 등 온갖 교회일을 담당했어요. 그들은 일상적 교회생활 전반에 결친 지도자요 정신적인 지도자, 아픔을 나누는 친구며 조언자로 역할 했다. 그런데 저들의 임금은 당시 남자 목사가 70-100원인데 비해 5-10원 정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가정에서 가장 역할을 했고 가족생계 유지자들이었으며 과부나 독신이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교회는 가사노동에 메인 여성에 대한 시각이 부정적이어서 가사노동에 메이지 않은 여성을 필요로 하여 전도부인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한 자로써 가정의 책임 없이 교회일에 전력할 자라야 되고 마땅히 독신자로 교회에서 어디든지 임명하면 가야한다고 요구하였지요.
여전도인들은 이런 현실에 대해 반기를 들었고 1922년 남감리교회 여전도사 300명이 증급운동으로 태업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요구사항에서 여전도인들을 인간으로 대우하라는 것, 임금을 올려라는 것 등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여전도인을 의지 없는 단독 여자로 책 주머니나 들고 이집 저집 돌며 군소리나 하여 호구지책 하는 사람으로 대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여사역자를 일종의 비열한 직업자가 되게 한다고 호소했고 예수께서 자유와 평등을 말씀했는데 오늘 기독교는 계급과 차별이 많다고 하면서 운동했다고 합니다.
여전도인 만 아니라 교회여성들도 여성문제의식을 갖고 문제제기하여 여권투쟁을 했습니다. 교회여성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남자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녀 모두 협력해서 일하기를 하나님이 바라신다고 깨닫게 되고 자신들의 지위향상은 남성들의 온정으로 얻게 됨이 아니고 자신들의 힘으로 쟁취해야함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33년 장로교 총회에 여성들이 여장로 제도를 통과해 줄 것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1933년 9.13 동아일보는 함남노회 여전도회원들 150여명의 연서로 여자에게 장로의 자격을 부여하라는 요구가 있었으나 동로회가 부결 하였다고 보도했고 이번 총회(1934년)에도 여자에게 목사 자격 부여하라는 요구 즉 여자의 참정권 요구가 상정될 것으로 주목된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1934년 6월 27일 동아일보는 함남노회 22개 교회 여성 639명이 제 15회 함남노회에 여자들의 치리권 부여를 청원했는데 이번이 두 번째라 하고 이 운동이 성공될 때까지 여성들이 계속할 계획이라 한다고 게재하고 있습니다.
이때 여성들을 지지하고 나온 사람이 함남 성진 중앙교회 김춘배 목사입니다. 그는 이 시기에 ‘기독신보’에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삼’이라는 글을 썼는데 요지는 ‘21, 22회 총회에서 여성치리권 헌의 부결은 잘못된 것이며 성서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한 것은 고대 한 지방교회의 풍습이지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김춘배 목사님의 이와 같은 총회에의 도전은 교권에 대항하는 대단한 사건이었으며 그분의 용기 있는 결의는 누구도 따르기 힘든 행동이었지요. 그리하여 23회 장로교 총회에서 김 목사는 정식으로 제소됐고 이 문제를 위한 연구위원회가 구성되어 나부열, 박형룡 등의 목사가 연구위원이 되었습니다. 1년 후 이 연구위원회는 ‘여자가 교회일 협조함은 정당하나 치권은 남자의 특권인 것이 성경의 뜻이며, 교회가 영구히 인정하여 온 신념이다’ 그리고 ‘여자는 잠잠하라 한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라고 결론 내리고, 김춘배 목사에 대하여는 장로교 교역자로서 용납할 수 없다하여 해직처분을 내렸습니다.
김춘배 목사님은 용기 있게 약자인 여성들의 편에 서서 여성을 살리는 길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교권에 의해 당할 많은 위험들을 감수하면서 여성들 편에 섰고 연대하였던 것이지요. 처음으로 공개적 입장을 표명하여 여성안수를 지지한 최초의 남성이었습니다. 가부장적 질서가 강경하던 그 시절에 이렇듯 여성안수 지지를 한 것은 남성중심의 지배질서를 거부한 새 시대를 여는 일이었으며 약자인 여성들의 편이 되는 훌륭한 남성의 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춘배 목사는 결국 교권에 굴복당하고 1935년 2월 20일 연구위원회에 성명서를 내어 자신의 성서해석이 교회에 폐해가 된다면 취소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 권력 편에 서지 않았으며, 해명도 성서해석으로 이유를 냈고 여권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 번째 남성은 우리교회에 교인으로는 아니지만 자주 출석하며 신학강좌에는 꼬박이 참석하는 분입니다. 이 분은 신학을 공부하였고 목사안수도 받았고 고등학교 교사도 지냈으며, 제주도를 비롯하여 몇 교회에서 목회를 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그런 경력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새길 예배와 모임에 참석하고 새길이 가진 장점을 인정하고 표시 없이 동화되어 왔습니다. 이분은 학구열이 매우 강하여 오강남, 길희성, 한완상과 같은 분들의 책을 열심히 읽는데, 누군가 이 글들을 2독 하라고 권유해서 자신은 20독을 한다고 해요. 뿐만 아니라 거기 나오는 참고서들(reference)까지 찾아서 읽으신다고 합니다. 그 열정이 참으로 대단하지요.
저보다 7-8년 선배이신데(연대 신학과) 지금 진행 중인 수다로 푸는 성서이야기 모임에 꼭 참석하십니다. 결석도 지각도 없으십니다. 그리고 교제로 쓰는 책도 열심히 밑줄 그어가며 읽고 오시고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고 언행이 참 자유로운 분입니다. 제가 궁금해서 아니 이 모임에 왜 오십니까하고 물으니, 도대체 여성신학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공부하러 오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8년 동안 거동이 불편하게 되어 목사님이 보살피고 집안 살림 다하고 산다고 하십니다. 환자 보살피면서 그 많은 책들 읽고 살림살이 다 하고, 거기다 대단한 등산가이시어 젊은 시절부터 합하면 국내, 국외를 합해 200 여 개 산을 올랐다고 하네요. 요즘도 아침에 집안일 다 해 놓고 사모님 점심 챙겨놓고, 전철이 닿는 산을 골라 산행을 하고 오후 너 댓 시쯤 내려와 집에 도착하여 저녁 챙기고 집안일 마무리하고 책 읽고 지내신다고 합니다.
오늘날 고령화 사회, 건강하면 무슨 걱정이 크겠습니까. 하지만 누구 신세 지게 될 상황이 사실 두려운 것이 오늘의 세상인데 일반적으로 불편한 남편 보살피는 여성은 당연시 하지요. 더욱이 보살핌이 많이 요구되는 사회는 여성에게 더 많은 짐을 지우고 요구를 합니다. 그러나 아내를 보살피는 남편은 극히 예외적이고, 이 상황이 길어지게 될 때는 남자들은 참아내기 힘들어 하며 가정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참 현명하게 자신의 생활도 잘 챙기면서 지혜롭게 가정을 꾸려나가고 불편한 아내를 지극히 잘 보살피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는 분, 불편한 사람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의지가 되어주는 분, 그의 인간애가 지극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는 새로운 남성성을 형성해 내어야 할 때이며 남성성의 혼재 속에 억압당하는 남성을 해방시켜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제는 가부장제가 규정한 남성다움, 여성다움 그리고 역할의 이분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남성다움, 여성다움이 아니라 진정한 나의 인간다움을 찾아 살아야 하며, 가정의 형태도 바꾸고 사회의 역할 구조도 바꾸고 초대교회가 성령의 은사에 따라 살았듯이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집니다.
미국 버클리에서 새로운 생활 형태의 모색을 시도하는 이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합니다. 직장 생활과 가정일을 겸하는 아버지 - 남자들이 많은 직장 일로 집에 오면 아이들은 자고 있고 그래서 가족과 함께 지내지 못하며 인생이 삭막하고 행복하지 못하다는 호소들이 많다고 합니다. 지금 버클리에서는 남성들이 일을 줄이고 자녀나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더 많이 갖는 것이 인생에서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물질의 풍요보다는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의좋게 지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알게 되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도 사회일과 가정일을 겸하여 하며 주부의 일도 자연스럽게 한다고 합니다. 아내도 경제활동하면서 부부가 협의하여 생활방식을 꾸민다는 것이지요. 지난 시간들은 아버지들의 부재로 자신도 불행하고 아이들 - 특히 남자 아이들, 그리고 여자 아이들도 아버지와의 불행한 관계를 만든 경우가 많았다는 반성을 합니다. 우리 삶의 형태, 그 방식이 근본적으로 전환되어야 할 때에 우리가 살고 있고 이를 인식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남자의 이야기를 다시 기억하면서 그들이 각각 왜곡된 자기시대가 요구한 남성성을 넘어서서 따뜻한 정의를 통하여 생명을 살리고 약자편이 되어 힘을 주고 가족에게 충분한 사랑을 나누는 새로운 형태의 삶의 모습 보여준 것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오늘 성서본문 마태 5:48은 그 1절에서 산상설교로 시작하여 원수사랑에 이르기까지 초기 예수공동체-마태 공동체의 삶의 방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고 그 결론적 어투로 하나님의 완전하심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합니다. ‘완전한’이라는 희랍어 단어 teleios는 telos라는 명사에서 왔는데 그 뜻은 목표, 목적, 끝, 딱 알맞음 등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이 ‘완전함’(perfect)을 어찌 이루겠습니까? 그러나 목적을 향하는 삶을 살아가는 삶, 완전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향하는 삶, 그 목적에 딱 알맞은 삶을 이루기 위하여 사는 삶을 산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성공논리에 기 못 펴고 사는 오늘의 청년들, 여성다움의 강요에 숨통 조이며 사는 여성들, 가부장제 문화로 많은 억압과 상처를 받은 우리들이지요. 이제 함께 새로운 인간성을 찾아 나가고 선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열어나가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서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이르도록 바라게 됩니다. 예수를 따라 살고 예수를 닮아 산다면 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