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놀이와 초월

마태복음 구미정 교수............... 조회 수 625 추천 수 0 2015.03.16 16:48:37
.........
성경본문 : 마19:13-15 
설교자 : 구미정 교수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index.php?mid=sermon&category=99215&document_srl=125518 

놀이와 초월

(마태복음 19:13-15)

 

2012년 10월 7일 주일예배

구미정 교수

(숭실대학교 외래교수)

 

 

<강남스타일> 그리고 호모 루덴스

 

요즘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모르면 지구인이 아닙니다. 본인 자신도 전 지구적 인기몰이에 많이 놀란 것 같습니다. 우리도 놀랐습니다. 이 놀람의 정체가 뭘까요? 제가 올해부터 <서울신문> 주말판 “생명의 창”이라는 코너에 칼럼을 쓰고 있는데, 최근에 쓴 기사가 “반전의 미학, 강남스타일”입니다. 그 글의 일부를 인용해 봅니다.

 

반전은 단순히 막판 뒤집기가 아니다. 이지러지고 어긋난 현실을 제자리로 되돌려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드라마나 동화 또는 전설이나 민담이 인과응보·사필귀정의 원칙에 충실한 것도 그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악행을 일삼는 자가 승승장구한다. 그로 인해 멘털이 붕괴되고 삶이 온통 풍비박산 난 사람은 끝내 억울해하다가 눈도 감지 못한 채 이승을 떠나기 일쑤다. 몰상식하고 배반적인 현실 앞에서 반전의 희망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마저 뛰어넘는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연일 화제인 것도 반전 코드 때문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전혀 강남스럽게 생기지 않은 그가, 이미 쌍둥이 아빠로 엄연한 아저씨인 그가, “오빤 강남스타일”이라고 우기는 것 자체가 반전의 혁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랫말에서 자신을 “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사나이”라고 묘사하고, 이런 게 ‘강남스타일’이라며 현실의 개념 없는 강남스러움을 조롱하는 것도 제게는 반전의 복음으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이 노래의 인기 요인은 오로지 반전 코드뿐일까요?

 

음악적 소양이 일천하니 리듬이나 박자 따위를 분석할 능력은 없지만, 인문학도로서 제가 관찰하기로는, 전 세계인을 함께 들썩이게 만드는 이 노래의 힘은 근본적으로 이 노래가 (제목에서 대놓고 강조되듯이) ‘스타일’을 이야기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타일’이 뭔가요? 여러분께서 보시기에 저는 ‘스타일’이 있나요? 여러분 자신은 어떠십니까?

 

스타일은 개성입니다. 문화이며 예술입니다.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에 급급하면 스타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그저 기능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단순한 기능 말고, 그 너머의 무엇, 즉 스타일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꼭 있더라는 것입니다. 물을 마셔도 그냥 벌컥벌컥 들이키지 않고, 버들잎 하나를 동동 띄우는 인간들이 꼭 있더라는 것입니다. 무덤만 해도 그렇습니다. 피라미드, 마우솔레움, 타지마할, 앙코르 와트 등은 단순히 무덤의 기능에 봉사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인류 문명사의 불가사의한 건축물들은 ‘스타일’을 고민하는 인간들이 없었더라면 생겨나지 못했을 터입니다.

이런 인간들을 일컫는 학명이 바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더군요.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이 용어는 네덜란드의 문화사가인 요한 하위징아(1872-1945)가 1938년에 지은 책 제목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가 문화,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대부분이 호모 루덴스의 놀이에서 나왔다고 선언합니다.

호모 루덴스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 노동하는 인간)에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개미와 배짱이 우화를 생각해 봅시다. 부지런히 일만 하고 놀 줄 모르는, 이른바 근면과 성실이 몸에 밴 개미가 호모 파베르이고, 놀기 좋아하는 배짱이가 호모 루덴스입니다. 호모 파베르는 산업혁명 이후 근대세계에서 인류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 제시된 인간상이지요. 노동이 숭앙되는 사회에서 놀이는 인간을 가난으로 몰아넣는 악마의 유혹으로 치부됩니다.

 

그런데 하위징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인간에게서 호모 루덴스의 특징이 거세되면 어떤 결과가 야기되는지, 나치 제국의 출현을 보며 똑똑히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호모 루덴스』가 출판된 연도는 예사로이 지나칠 문제가 아닙니다. 1938년은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해이기 때문입니다. 이듬해에는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야만과 광기로 미쳐 돌아가는 세상의 한가운데서,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전체주의 사회의 한복판에서 하위징아가 놀이를 외쳤다는 것, 생각만 해도 통쾌한 반전 아닙니까? 놀지도, 쉬지도 않고, 더더구나 생각하지도 않은 채, 무조건 생산과 효율의 가치에만 복무하는 인간이 얼마나 끔찍한 세상을 만드는지, 하위징아의 경고는 매우 호됩니다.

 

그러니까 본인 스스로 천생 호모 루덴스인 가수 싸이는 호모 파베르의 시대가 갔음을 호기롭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의 ‘산업 역군’들께는 정말로 죄송하지만, 또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놀 궁리나 하는 ‘철부지’들을 향해 그분들이 혀를 끌끌 차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이미 세상이 달라졌노라고 21세기 신인류를 대변하여 항변합니다.

 

그래서 제 눈에는 그 노래에 어우러진 ‘말춤’이 한때 말죽이나 쑤던 곳이라는 뜻의 말죽거리로 불렸던 양재동의 과거를 복기하려는 단순한 풍자라기보다는 호모 파베르의 기계론적 세계관 아래 짓눌려 있던 호모 루덴스의 원시적 생명력을 복원하려는 살풀이로 보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말’은 전쟁이나 정복 이미지를 재현하기는커녕, 왕성한 리비도(libido)를 노골적으로 은유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이 노래가 1970년대에 나왔더라면 어땠을까요? 국가의 돌진적 산업화 구호에 온 국민이 강제동원 당하던 시절, 자고로 건전가요란 이래야 했습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이 ‘새마을 노래’는 2절을 넘어가면서 노골적으로 맘몬 숭배적 노동관을 설파합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2절) … 소득증대 힘써서 부자마을 만드세.(3절)” 게다가 4절에 이르면 노동과 전투가 절묘하게 합체하지요.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새 조국을 만드세.”

 

반면에 그 시대에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같은 노래가 ‘퇴폐가요’로 분류되어 금지 당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싸이의 행운은 무엇보다도 시대를 잘 만났다는 사실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2008년 광우병 시위 때, 소위 촛불소녀들이 떼를 지어 우리나라 헌법 제1조를 노래로 부르면서 춤을 추는 것에 문화충격을 받았다니까요. 바야흐로 호모 루덴스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다윗과 예수의 공통점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의 족보를 다윗 왕에게 결부시킨 마태복음 저자에게 유감이 많습니다. 족보란 것이 본래 부계혈통을 강조하기 위함인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다윗의 후손인 요셉과 혈연적으로 아무 상관도 없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자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를 요셉의 족보와 연결시킨 근거는 생물학적 논리보다는 마태공동체의 신학적 필요라고 보는 게 옳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저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의 기억 속에서 가장 강력한 왕으로 자리 잡은 다윗과 나란히 놓는 시도가 썩 내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그 둘 사이에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면, ‘왕’의 이미지가 아닌 호모 루덴스의 전형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정치가로서 다윗을 그리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인간적으로는 상당히 ‘멋’있는 남자임을 부인하기가 어렵습니다. 양치기 출신인 그는 물맷돌 하나로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물리친 전쟁 영웅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눈이 아름답고 외모도 준수한”(사무엘상 16:12) 데다가 악기를 다루는 솜씨마저 출중한 것도 모자라 시까지 썼으니, 어느 여자인들 안 넘어가고 배기겠습니까? 노래하고 춤을 추며 예술을 탐닉하는 정열적인 호모 루덴스가 다윗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1세기 갈릴리 지방을 무대로 고만고만한 열두 제자를 거느리고 유리걸식한 예수님에게서 호모 루덴스를 봅니다. 어느 계층의 사람이든지 쉬이 어울리는 그의 얼굴에서 근엄함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먹보에 술꾼’(마태복음 11:19; 누가복음 7:34)이라는 별명이야말로 그의 호모 루덴스적 면모를 여실히 입증하지 않나 싶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율법을 뻔히 알면서도, 배곯는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제지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호모 루덴스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유연성과 호방함일 것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여자와 어린이, 세리와 창녀가 예수님의 주변을 떠나지 않은 것도 그가 호모 루덴스이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요?

 

하루는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는 도중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데려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부탁했더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습니다. 아마도 원활한 행사 진행을 위한 호모 파베르의 효율적인 조치였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도리어 나무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마세요.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입니다.”(마태복음 19:14; 마가복음 10:14; 누가복음 18:16) 또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큰 사람입니까?” 따지는 제자들 앞에 어린이 하나를 세우시고는 생생한 실물교육을 펼치기도 하셨습니다. “진심으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돌이켜 어린이들처럼 같이 되지 않으시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십니다.”(마태복음 18:3)

 

왜 하필 어린이인가요? 여러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오늘은 어린이를 호모 루덴스의 원형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보려고 합니다. 어린이야말로 놀이의 주체입니다. 놀이가 빠진 어린 시절은 앙금 없는 찐빵과도 같습니다. 놀이는 어린이의 전매특허입니다. 놀이에 빠져 있는 동안만큼은 시간과 공간을 철저히 잊어버릴 정도로 몰입하는 게 어린이입니다. 어른은 그렇지 않지요. 어른의 놀이라는 게 기껏해야 회식 후에 노래방을 가는 게 고작인데, 거기서도 어른들은 높으신 분의 비위를 맞추며 ‘영업’하기 바쁩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더 많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간주 뛰어넘기 버튼을 누르고, 점수 확인조차 생략하며, 남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자기가 부를 곡을 찾느라 분주한 것이 어른의 슬픈 자화상이 아닙니까? 효율이라는 시장의 가치에 완전히 잠식당해 버렸습니다.

 

여러분의 어린 시절은 어떠십니까? 저의 경우에는 놀았습니다. 놀되, 아주 잘 놀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루 종일 감시하는 ‘헬리콥터 맘’이 없었거든요. 아버지의 부재와 그로 인한 어머니의 생계벌이 노동이라는 가정환경이 최적의 놀이 조건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인천 부개동 근처 공동묘지에서 살았습니다. 집 근처에 무덤이 즐비한 산동네였지요. 갑자기 닥쳐온 가난이 어른에게는 천형일지 몰라도, 아이에게는 축복일 수 있다는 걸 저는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것도 모든 아이에게 주어지는 행운은 아니지요. 몇 번째 서열로 태어나느냐가 중요한데, 저에게는 마침 저보다 먼저 태어난 언니가 있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놀 수 있었습니다. 정말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코를 질질 흘리며 온 산을 헤집고 뛰어다녔습니다. 지천이 놀잇감인지라, 아이들은 모이기만 하면 판을 벌였지요. 돌멩이들을 모아 공기놀이를 하고, 종이를 오려 인형놀이를 하고, 아카시아 줄기를 따서 미용실 놀이를 했습니다. 상상력이 부족해서 문제지,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저는 그 시절에 이미 터득했습니다.

 

그때보다 훨씬 풍요롭게 된 지금, 우리 시대의 어린이들은 대체 왜 놀지 않을까요? 아, 죄송합니다. 놀기야 놀지요. 안 놀면 사람인가요? 한데 도시 아이들의 놀이라는 게 어딘가 기형적입니다. 이미 규칙이 다 정해져 있는 게임기, 놀이를 주도해버리는 휴대폰, 실물과 똑같은 전쟁놀이‧병원놀이‧소꿉놀이 도구들, 면․모 따위의 천연직물이나 돌․나무 등 자연소재보다는 견고한 금속과 차가운 플라스틱이 주를 이루는 장난감들, … 이런 식으로 노는 건 아동발달 측면에서 거의 가치가 없다네요. 아이를 주체로 만들기보다는 소비자로 만드는 놀이, 상상력보다는 효율적으로 규칙을 따라잡기에 급급한 놀이는 오히려 아이의 인격 성장에 방해가 된다네요. 그러고 보면, 돈이 없어서 장난감을 사지 못했던 저의 어린 시절, 그저 머리핀 하나만 있어도, 천 조각 하나만 있어도 무궁한 놀이가 창조되었던 그 시절이 얼마나 축복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박 2일>이니 <무한도전>이니 <런닝맨>이니 하는 예능프로그램들이 인기 있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놀이본능을 거세당한 호모 파베르의 욕망을 대리만족시켜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연출된’ 상황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유명 연예인들이 고액의 출연료를 받으며 놀이를 ‘연기’하는 동안, 수많은 스텝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린다는 ‘불편한 진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기꺼이 채널을 고정하는 건, 그렇게라도 놀이욕구를 달래주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호모 파베르의 현실이 억압적이라는 뜻이겠습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스튜어트 브라운이라는 분이 『플레이, 즐거움의 발견』이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 보면 살인범의 심리를 연구한 결과 공통적으로 지나치게 생산적인 일만 강요하는 부모 밑에서 성장했더라는 것입니다. 미국 전체 아동의 13%가 ADHD(과잉행동장애)에 시달리는 것도, 20%가 뚜렷한 이유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것도, 200만 명이 ‘리탈린’(주의력결핍 치료제)을 복용하는 것도 놀지 못해서라니, 어린이에게서 놀이를 박탈하고 무조건 능률적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호모 파베르가 되라고 강요하는 이 문화는 얼마나 대량학살적인가요?

 

우린 새길스타일

 

스튜어트 브라운은 쥐 실험도 했답니다. 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은 노는 것을 허용하고, 다른 그룹은 전혀 놀지 못하도록 한 다음에, 고양이 냄새가 나는 족쇄를 발에 채웠답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모든 쥐들이 본능적으로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 숨었는데, 차츰 시간이 지나자 변화가 생기더래요. 놀이가 허용되었던 쥐들은 슬슬 환경을 탐색하면서 다시 쥐구멍 밖으로 나왔지만, 놀이가 박탈당했던 쥐들은 옴싹달싹 못한 채 공포에 떨다가 도망 간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더랍니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과 답을 주는 사람.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선생 입장에서는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이 아주 골치 아프지요. 학생이 공부나 하면 되지 말이야, 하면서 ‘기능’론적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나름의 ‘스타일’을 모색하는 아이들을 문제아 취급합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의 특징이 호기심이 많답니다.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실험하고 새로운 답을 모색합니다. 반면에 답을 주는 사람은 이미 존재하는 정해진 규칙 안에서 그 규칙을 성실하게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관심이 있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저는 새길교회가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교회라고 믿습니다. 새로운 교회를 실험하고 새로운 교회상을 모색하려는 놀이정신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모여서 한국교회에 전혀 없던 ‘새길스타일’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기성교회의 신조와 제도에 찌든 사람들에게는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지요. 새길교회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답을 알기는 아는 것 같은데, 이것이 정답이다, 강요하거나 고집부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아직은 거울처럼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듯이 명확하게 떠오를 답을 향해 신나게 걸어갈 뿐입니다. 이것이 호모 루덴스의 신앙생활입니다.

 

놀이의 반대말은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놀이와 일이 서로 반대말이 되면, 그 인생은 불행합니다. 놀이 따로, 일 따로, 그렇게 분열적으로 살면, 놀이는 점점 음지화되고 일은 점점 무의미한 고역이 됩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 현상이 빚어지는 거지요. 행복한 인생은 놀이와 일이 서로 통합된 삶입니다. 놀이하듯 일하는 사람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노예노동이 아니라 일을 통해 몰입과 초월을 경험하기에 아무리 곤하여도 지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교회놀이도 이와 같기를 소원합니다. 분명 곤하기는 한데, 지치지 않을 수 있음은 그것이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라 그렇습니다. 남이 알아주든 말든 밤새워 일하면서도 얼굴 가득 피곤함보다는 환희가 넘치는 사람이 호모 루덴스입니다. 삶이 놀이요, 놀이가 삶인 사람, 말하자면 한 세상 사는 일을 “소풍놀이”을 비유한 천상병 시인 같은 이가 우리 시대의 희귀한 호모 루덴스겠습니다.

 

저는 새길스타일이야말로 하위징아가 분석한 호모 루덴스의 놀이에 딱 들어맞는다고, 들어맞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놀이의 반대말은 진지함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수님이 서로 대립한 것도 진지한 엄숙주의자의 눈으로는 호모 루덴스의 행태가 너무 가벼워 보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한 집단이 지나치게 진지해지면, 거기서는 발랄한 창조 에너지가 싹틀 수 없지요. 약동하는 불굴의 생명 에너지는 호모 루덴스의 놀이정신에서나 나오는 법입니다.

 

저는 놀이의 초월적 특징에 주목합니다. 놀이에는 무한한 상상력에 기대어 현존질서를 뒤집어엎는 비판적‧해체적 특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놀이의 제1원칙은 공평이어서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놀면서 부잣집 아이라고 봐주거나 가난한 집 아이라고 막 대한다면, 그 놀이는 현실의 재현일 뿐, 참된 놀이라고 할 수 없지요. 놀이공간은 반칙이나 편법이 통하지 않는 초월공간입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순서와 역할을 맡고, 공정하게 규칙과 벌칙을 적용받습니다.

 

자고로, 세속적으로는 ‘뽀통령’이라고도 불리고 신화적으로는 ‘뽀느님’으로도 일컬어지는 전 세계 110개국 어린이들의 구원자인 뽀로로 가라사대, 노는 게 젤 좋답니다. 뽀로로의 놀이공간에서는 남극펭귄과 북극곰, 곧 현실에서는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두 생명체가 자연스럽게 만나 어우러지니, 이것이야말로 이사야서 11장에 나오는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뛰노는 상생세상의 비전이 성취된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노는 게 젤 좋습니다. 일하는 것, 쉬는 것, 노는 것, 이 세 가지는 인생에 영원할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노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어른의 지혜와 어린이의 천진함으로 가득차시길 기원합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사람 각자가 교회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한다면, 새길스타일을 드러내야 할 주체는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의 교회놀이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1837 하박국 여호와의 응답 합2:1-20  구하라 목사  2015-03-20 448
11836 하박국 하박국의 호소 합1:1-17  구하라 목사  2015-03-20 738
11835 스바냐 예루살렘의 형벌과 보호 습3:1-20  구하라 목사  2015-03-20 288
11834 스바냐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습2:1-15  구하라 목사  2015-03-20 536
11833 스바냐 여호와의 날 습1:1-28  구하라 목사  2015-03-20 317
11832 학개 성전을 건축하라 학2:1-23  구하라 목사  2015-03-20 423
11831 학개 만군의 여호와 학1:1-15  구하라 목사  2015-03-20 456
11830 마태복음 예수님의 기도 마7:7-8  이승남 목사  2015-03-20 678
11829 이사야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사랑 사53:5  한태완 목사  2015-03-20 1071
11828 마가복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들으라. 막1:3  김경형 목사  2015-03-19 578
11827 고린도전 열등감을 자신감으로 바꾸라 고전1:18-31  한태완 목사  2015-03-19 936
11826 시편 의인은 결국 승리합니다 시36:1-12  이한규 목사  2015-03-18 612
11825 디모데전 축복을 예비하는 4대 삶 딤전6:17-21  이한규 목사  2015-03-18 775
11824 느헤미야 큰일 성취에 필요한 것 느6:10-19  이한규 목사  2015-03-18 446
11823 느헤미야 시련 중에 필요한 자세 느6:1-9  이한규 목사  2015-03-18 479
11822 창세기 찬란한 비전을 이루는 길 창15:1-7  이한규 목사  2015-03-18 565
11821 느헤미야 리더의 자질 4가지 느5:14-19  이한규 목사  2015-03-18 838
11820 시편 막힌 길을 여는 길 시35:14-28  이한규 목사  2015-03-18 760
11819 시편 기도는 헛되지 않습니다 시35:1-13  이한규 목사  2015-03-18 948
11818 시편 자연을 사역자로 시104:1-5  강승호 목사  2015-03-18 351
11817 요한계시 지혜로운 사람 계1:1-20  최장환 목사  2015-03-18 450
11816 열왕기하 영향력있는 자 왕하8:1-19  최장환 목사  2015-03-18 473
11815 요한복음 밥상을 차리신 예수 요21:8-19  조은하 교수  2015-03-16 818
» 마태복음 놀이와 초월 마19:13-15  구미정 교수  2015-03-16 625
11813 누가복음 충실한 제자의 요건 눅4:18-21  권진관 형제  2015-03-16 453
11812 예레미야 신앙인의 불신앙 렘7:1-11  한인철 목사  2015-03-16 940
11811 마태복음 세 남자 이야기 마5:28  최만자 자매  2015-03-16 670
11810 마태복음 과학적 질문 신학적 답변 [1] 마19:24-26  강종수 목사  2015-03-15 341
11809 신명기 정직한 지도자의 축복 신6:18  이승남 목사  2015-03-15 517
11808 민수기 자기 중심에서 복음으로 민21:4-9  강승호 목사  2015-03-14 1482
11807 마태복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막5:25-34  최만자 자매  2015-03-14 1223
11806 사무엘상 긴 호흡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삼상3:15-4:1  박득훈 목사  2015-03-14 854
11805 누가복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file 눅20:22-25  이선근 형제  2015-03-14 971
11804 요나 됨의 영성 욘1:12  김부겸 목사  2015-03-13 355
11803 요한복음 하늘은 밥 속에 있다 요6:22-59  김부겸 목사  2015-03-13 460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150 세종시 보람1길12 호려울마을2단지 201동 1608호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