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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吾 동화] 왕으로 된 왕의 생각
산책길에 한 늙은이를 만났다.
늙은이는 분명 늙은인데 몸에서 젖비린내가 풍겼다.
청하지도 않았건만, 바람결처럼 한 토막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옛날 어느 먼 나라에 왕이 있었다. 그리고 충직한 내시가 있었다. ‘충직’이라는 말로는 그의 됨됨이를 모두 담지 못할 만큼, 왕이 하는 말을 곧장 행동으로 옮기는데 마치 손발이 머리를 따르는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고 날렵했다.
왕은 내시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없었고 생각하기도 싫었다.
내시는 말 그대로 왕의 그림자였다.
하루는 왕이 내시에게 말했다.
“네가 있어서 참 좋구나. 고맙다. 내가 하도 고마워서 하는 말인데, 원하는 것 있으면 말해보아라.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마.”
내시가 말했다.
“아무 바라는 것 없습니다. 전하를 시중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왕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한 번 생각해보아라. 아무러면 원하는 것이 없기야 하겠느냐?”
“전하, 정말 없습니다. 전하를 모시고 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대만족입니다.”
하지만 왕은 어떻게든지 내시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너는 내가 속으로 생각만 해도 벌써 알고 그대로 움직인다. 그러니 이제 내가 너를 ‘내시’라 부르지 않고 ‘왕의 생각’이라 부르리라. 괜찮겠느냐?”
“그야, 전하께서 그러신다면 그런 거지요. 제가 어찌 괜찮다 아니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왕이 내시한테, 아니, 왕의 생각한테 말했다.
“내가 너에게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든지 보여줘야겠다. 하루 동안 재미있게 놀이 하나 해보자. 너와 나를 바꾸는 거다. 오늘 해질 때부터 내일 해질 때까지 네가 왕이고 나는 내시, 아니, 왕의 생각이다. 어떠냐?”
내시, 아니, 왕의 생각이 왕에게 말했다.
“그야, 전하께서 그러신다면 그런 거지요. 좋습니다. 오늘 해질 때부터 내일 해질 때까지 제가 왕이고 전하께서 내시, 아니, 왕의 생각이십니다.”
“됐어. 재미있겠다. 기다려지는구나.”
여느 날이 그랬던 것처럼, 그날 저녁에도 해가 졌다.
왕과 내시, 아니, 왕과 왕의 생각이 함께 나란히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튿날, 지는 해는 관두고 떠오르는 아침 해도 둘이서 함께 나란히 볼 수 없었다.
왜냐고?
간밤에 일이 있었던 것이다.
내시, 아니, 왕의 생각이 왕으로 되자마자 명을 내렸다.
“저 왕의 생각, 아니, 저 내시를 당장 목 베어 죽여 버려라.”
왕의 생각이 된 왕은 왕이 된 왕의 생각을, 그것이 아무도 어길 수 없는 왕명이었으므로, 막거나 피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내시를 왕으로 삼은 것이 다른 누구 아닌 바로 자기 아닌가?
그래서 이튿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둘이서 함께 나란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다음은 어찌 되었소?”하고 물어보았지만, 젖비린내 풍기는 늙은이가 난데없이 내 앞에 나타났던 것처럼 그렇게 간데없이 사라져버린 뒤였다.
미처 이름을 알아볼 짬도 없었다.
월간<풍경소리>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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