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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복음 김재성 목사............... 조회 수 715 추천 수 0 2015.03.24 00:27:41
.........
성경본문 : 마13:24-30 
설교자 : 김재성 목사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index.php?mid=sermon&category=99215&document_srl=126352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복음 13:24-30)

 

2012년 11월 4일 주일예배

김재성 목사

(현 한신대학교 신약학 교수, 새길교회 창립 시 전도사로 사역)


1. 심판에 중점을 두는 해석들

 

새길교회는 창립할 때에 제가 전도사로 섬기던 곳이어서 올 때마다 고향교회 같은 푸근한 느낌을 느낍니다. 오늘 이 곳에서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됨을 감사드리고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이 본문에 이어서 다른 비유들이 몇 개 나오고, 그 다음 36-43절에는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만 따로 비유를 설명해주는 것은, 예수의 본래 말씀이 아니라, 후대에 덧붙여진 해석입니다. 예수의 처음 비유에서는 추수 때까지 밀과 가라지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는 은혜로운 관점이 나오지만, 후대 해석 부분에서는, 악인은 불 아궁이에 들어가고 의인은 해와 같이 빛날 것이라고 하는 심판의 관점이 나옵니다.

 

스타인이나 키스트메이커 같은 전통적 주석가들은 이 해석 부분에 나타나는 심판의 주제가 후대의 것이 아니라 예수의 본래 비유에서부터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하여 최후의 심판을 경고하면서, 사람들에게 가라지가 되지 말고 밀이 되라고 권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의 문제점은, 예수의 본래 비유와 후대의 해석을 구별하지 않고 한 덩어리로 다루는 것입니다. 심판의 주제는 후대에 덧붙여진 것인데, 후대의 것이 본래의 예수의 비유를 규정하여, 본래의 비유가 갖고 있던 은혜와 공존의 관점이 파묻히게 만듭니다. 또, 페르시아적 기원을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선악의 이원론을 구약성서나 복음서의 가르침인 것으로 당연하게 전제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처음부터 뱀이 있었지만, 그것은 별개의 기원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악을 선과 별개의 기원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은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부터 분리하여 심판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는 형제를 심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7:1-5). 예수는 하나님에 대해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은혜로운 분으로 묘사하셨습니다(마 5:45).

 

2. 은혜에 중점을 두는 해석들

 

예레미야스나 그닐카 같은 비평적 주석가들은 후대의 해석 부분을 마태 기자의 것으로 보며, 이 부분에서 강조되고 있는 심판의 주제는 본래 비유의 주제가 아니라 후대 공동체의 관심사였다고 봅니다. 악한 세상에 대항하여 자기를 정의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의 관심사가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관심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강조하고 지옥을 묘사하는 것은 마태 기자의 특성입니다. 비유의 후대 해석 부분에 나오는 표현들, 이를테면, 악인들을 끌어다가 불 아궁이에 쳐 넣는다거나, 그들이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는 표현, 또는 의인들은 해처럼 빛날 것이라는 표현 등등은 전형적인 마태 기자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후대 해석에 의해 덧입혀진 것들을 벗겨내고 나면, 본래의 가라지 비유는 심판이 아니라 은총의 비유가 됩니다. 이 비유의 주제는 가라지를 제거하는 것이나 가라지를 변화시켜 밀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는 말씀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루츠는, 후대의 해석 부분이 사람들에게 밀이 될지언정 가라지가 되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은, 본래 비유가 갖고 있는 밀과 가라지라는 ‘구상어들’과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밀도 가라지도 자신들의 모양을 변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라지 비유를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려는 교화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본래의 주제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3. 선과 악의 이원론을 넘어서는 것

 

예수님의 이러한 은혜로운 관점은 후대 교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후대에 와서 이러한 복음서의 관점과 상반된 관점이 나타났는데, 그것의 대표적인 예는 적그리스도론입니다. 그것은 철저한 이원론인데, 예수나 바울 사도의 가르침에서는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후서에 처음 나오는데 그것은 진정 바울 서신이 아닌 후대의 작품입니다. 그 외에는, 하나님과 사탄의 이원적 대립과 투쟁을 그리는 것은 주로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 전체에서는 지극히 일부분이고 가장 후대의 문서들에 속합니다.

 

요한계시록 14:3-5에서는, 인간 행위의 도덕적 기준을 높이 설정하여, 인류 가운데 144,000명만이 구원받으리라고 합니다. 그들은 동정을 지킨 자여야 하고, 거짓말을 단 한 번도 해서는 안 되며, 흠잡을 데가 전혀 없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선(善)입니다.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라 자기의 선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 아닐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원론의 또 다른 문제는 우리 속에 있는 어두운 면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속의 어두운 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7:15-19에서, 그는 자신이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속에 자리잡고 있는 어두움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어두움을 융 심리학에서는 ‘그림자’라고 합니다. 선악의 이원론에 빠진 사람은 이러한 그림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하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합니다.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의 비유(눅 18:9-14)에서, 바리새파 사람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선과 동일시하고, 자기에게 있을 수 있는 악의 그림자를 모두 세리에게 투사했습니다.

 

아리아 사람의 우수성을 자아-이상으로 삼았던 나치는 그에 상응하는 집단적인 그림자를 유대인에게 투사하였습니다. 19세기에 미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을 소유하는 것이 백인에게 명백하게 지워진 운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집단적인 그림자를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투사하였고, 나치가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만큼이나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원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이처럼 선악의 이원론과 그림자의 투사는 잔인한 폭력을 정당화해줍니다.

 

4. 둘 다 함께 자라게 두라

 

예수는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 속의 어두움까지도 잘 알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하니까, 예수는 “왜 나더러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아버지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는 자기 안의 그림자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의 관점에서 볼 때, 가라지는 악이나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밀과 가라지는 하나가 없어져야 다른 하나가 사는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어느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도 살 수 없는 상호적인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당시 농사의 관점을 끌어들였습니다. 가라지의 정확한 번역은 독보리인데, 그것은 뿌리를 깊이 내리고, 다른 곡식과 뿌리가 엉켜 있기 때문에, 그것을 뽑으려면 곡식도 뽑히게 됩니다. 뿌리가 엉켜 있다는 것은 밀과 가라지를 엄밀히 구별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뜻입니다. 만일 가라지만을 뽑아내려고 한다면 실제로는 밀도 같이 뽑히거나 뿌리가 상해서 죽게 됩니다.

 

또한 농부에게서는 곡식과 가라지의 차이는 하나는 사람의 양식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양식이 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가라지는 악한 것이라기보다는 쓸모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식물이 인간에게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해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잡초라도 광합성을 하고 사람에게 이로운 산소를 만드는 일은 하고 있습니다. 또 어제는 잡초로 여겨진 것이 오늘에 와서는 약초로 판명되는 경우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이 가라지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사람들을 선과 악으로 나누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으로만 또는 악으로만 이루어진 순수혈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선과 악이 다 있는 혼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최고의 피조물이지만 또한 홀로코스트의 가스실을 만들 수 있는 그런 괴물이기도 합니다.

 

가라지 비유의 배후에는 또 다른 중요한 것이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최종적인 심판을 내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덕적 시각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어스름이 깔리는 밤에 주님과 악마를 구별하려면 좋은 시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 존재는 만성적으로 난시다!”라고 했습니다. 특히 우리가 우리 이웃의 행위를 가늠할 때,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항상 왜곡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살아갑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면, 그것은 신자들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입니다. 우리는 서로 판단할 수 없고, 실제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명령입니다(마 7:1).

 

많은 사람들이 서부극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복잡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있고, 우리는 한눈에 영웅과 악당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살 자격이 없는 악당을 살인의 자격이 있는 주인공이 한방에 쏘아서 쓰러뜨립니다. 007이니 미션임파서블이니 하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늘 그런 살 자격이 없는 악당과 살인면허를 가진 해결사들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실제의 삶에서, 그렇게 살 자격이 없는 악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인면허라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선은 결코 혼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밀 가운데 가라지가 있고,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든지, 우리 주위의 누구를 보든지, 그 누구도 순수하거나 선하기만 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선과 악의 모자이크입니다. 우리의 미덕 속에는 우리의 가장 어두운 죄가 숨어 있습니다. 이상한 잡종 피조물 그것이 우리 자신일 것입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권력욕과 도착적 자만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미에 대한 대단한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미국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조지 워싱톤은, 흑백혼혈의 첩을 자기 재산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로 분류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미덕과 악덕의 복합체입니다.

 

주인은 일꾼들에게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농부에게 제정신이 아닌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본성에서는 그것은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종종 악을 근절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그 자체가 악이 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들이 악을 근절하려고 했을 때는 언제나, 그들은 결국 자기 의에 빠지거나 잔혹해졌습니다. 수많은 이교도들이 기독교의 종교적 순결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가 악을 근절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들은 결국 매카시즘이나 마녀사냥, 삼청교육대 같은 것으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인간의 정의가, 처벌을 수단으로 해서 악을 근절하려 할 때, 언제나 그것은 불의가 됩니다.

 

“추수 때까지”라는 구절은 중요합니다. 하나님만이 추수의 주체가 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가라지로부터 밀을 악으로부터 선을 구별하기에 충분한 현명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예수는 인간의 영혼 속을 깊이 들여다보았습니다. 군중에게 비난받던 삭개오에게서 예수는 숨어 있는 관대함을 보았습니다. 용감한 제자 베드로에게서 예수는 겁쟁이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거리의 초췌한 창녀에게서 예수는 가장 큰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우리는 선 속의 악과, 때때로 사악함 속에서 빛나는 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진실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추수의 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추수 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도, 이 세상 안에서도,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시도하면 우리는 파멸의 위험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가라지가 무성한 우리 마음 밭에, 하나님이 사랑의 씨를 심으시고, 그것들이 꽃피고 열매 맺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은총 속에서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햇빛과 자비의 이슬을 누리는 것 말고는 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5. 평화를 주시는 주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가라지 비유를 이런 은총의 비유가 아닌 심판의 비유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알곡이 되지 못했다는 자책과 후회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후대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 심판의 주제를 예수의 말씀인 것으로 받아들여서, 늘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져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모습을 그리며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을 붙잡고 계속해서 괴롭히는 것은 선악의 이원론입니다. 그것 때문에 늘 행복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EBS에서 <이야기의 힘>이라는 프로를 보았습니다. 유치원생들을 모아놓고 하루 동안 착한 일만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다들 따분해하고 좁니다. 하지만 호랑이가 등장하고 “팥죽 한 그릇 주면 안 잡아먹지”하는 장면이 나오면 긴장하고 웃고 재미있어 한다는 겁니다. 위대한 드라마 작가들에게서 어떻게 그렇게 재미있는 극본을 쓰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대체로 선만 있어선 안 되고 선과 대립되는 요소가 있어야 재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배트맨 영화에서 배트맨만 나오면 안 되고, 조커가 있어야 이야기도 되고, 재미도 있다는 것입니다. 흥부만 아니라 놀부가, 콩쥐만 아니라 팥쥐가 있어야 재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흥부가 되어라 콩쥐가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서 66권이 온통 이야기책이고 드라마들입니다. 많은 드라마 작가, 소설가들이 그들의 작품의 영감을 성서에서 얻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성서가 선악의 이원론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는 하나님도 화를 내고 질투를 하고 모순이 많으신 분으로 나타납니다. 욥기 1:6-7에서는, 사탄도 “하나님의 아들들”(bene elohim) 가운데 하나이고, 천상회의의 정규 회원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에 불과합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 있지 독립된 원리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선악 이원론의 대립적 관점을 극복하고,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는 은혜롭고 푸근한 관점을 회복할 때, 우리는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녀들을 대할 때도, 가라지를 제거하고 심판하는 관점이 아니라,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는 너그러운 관점으로 봐주고 기다려주고 믿어준다면, 그들은 가라지와 경쟁하고 그것들을 이기면서 더 건강하고 위대하게 될 것입니다.

 

내 속에는 선뿐만 아니라 악도 있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둘 다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하시는 주님의 은총 속에서 살 때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고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같은 분도 자신을 선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 사도 같은 분도 자기 안에 악한 자아가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물며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야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우리 속의 그러한 그림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삶의 에너지를 주고, 우리를 오히려 위대하게 만들어 가시는 분입니다. 우리 눈에 지독하게 거슬리는 형제자매의 미운 점들은 사실은 내 속에 있는 그림자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배척하거나 제거하려고 하지 말고 함께 공존하는 지혜를 찾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 가운데 있는 가라지들 속에서, 내 안에 있는 그림자들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보고,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맛보며, 은혜 가운데 정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주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

밀과 가라지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우리는 선악을 구별할 눈이 없습니다.

어제의 악이 오늘에 선이 됩니다.

놀부가 없으면 흥부도 없고

팥쥐가 없으면 콩쥐도 없습니다.

둘 다 있어야 세상은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들을

선악 간에 판단하지 않게 하소서.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시는 은총 속에서

공존의 지혜와 평화의 길을 찾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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