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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천주(侍天主)의 믿음과 우리 사회의 갱생

요한복음 이은선 교수............... 조회 수 380 추천 수 0 2015.03.24 00:34:23
.........
성경본문 : 요14:1-2 
설교자 : 이은선 교수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index.php?mid=sermon&category=99215&document_srl=127130 

시천주(侍天主)의 믿음과 우리 사회의 갱생

(요14:1-2, 4:36-38)


2012년 12월 2일 주일예배

이은선 교수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 세종대학교 교육학과)


I.

 

지난 11월 중순 제가 함께 참여하고 있는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는 앞으로 5년 후인 2017년 개신교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서 ‘두 번째 종교개혁은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거기서 한 발제자는 한국 개신교 신앙인들의 자아중심주의와 세계소외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들의 사영리적(四靈理的) 하나님 신앙과 구원 신앙은 자신들의 신앙을 무소불위의 배타주의로 몰고 갔고, 그 배타주의와 자기중심주의는 그러한 신앙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가서 이제 그들의 정신은 삶의 어느 분야에서도 권위나 전문가를 인정하지 않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갔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서 인간 사고와 정신이 정지된 것을 말하며, 일찍이 <여성의 예속>을 쓴 스튜어트 밀이 지적한 대로 ‘결정이 난 견해는 깊은 잠에 빠진다’는 말처럼 그렇게 근본주의적 절대주의로 신앙은 더 이상 삶의 창조적인 행위 원리가 되지 못하고, 마치 정신의 외각에 씌워진 단단한 외피처럼 그렇게 삶에서의 모든 다른 영향력들을 차단하면서 정신과 감정과 행위력은 점점 고갈시켜 가는 현상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얼마 전 한국 사회에서 재독 한인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피로사회>라는 책이 번역되어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인을 포함한 현대인들은 뼛속까지 피곤해져있습니다. 근대 주체성의 시대이후 사람들은 삶의 모든 면에서 ‘주체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주체적 삶을 살기 위한 노력과 성과와 성공에 대한 몰두로 매우 피로해져 있고, 그는 그런 사회를 “성과사회”라고 명명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그 성과사회에서는 예전 규율사회에서처럼 밖에서부터 오는 규율이나 명령, 제재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성과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합니다. 즉 모두가 ‘자기 자신’이 되어서 스스로가 삶의 주인공임을 보여주어야 하는 성과사회에서는 그 성과치를 스스로 부과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한계를 모르고 극단으로 치닫기 쉽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또 다른 그림으로 저는 지난 11월26일 <한겨레신문>의 기획기사 <2012 대선 만인보-국토종단 민심기행>에 표제어로 실렸던 “마트 8년 일해도 월급 90만원... 여자들 살기 참 힘들어요”와 “중고생 자녀 둔 40대, 소득 56% 교육비로 ‘빈곤 악순환’”를 들고자 합니다. 이 두 서술은 2012년 초겨울 현재 한국 사람들, 특히 중년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뒤틀려져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줍니다. 이 두 서술이 그리는 삶의 모습은 바로 우리 옆 이웃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여기서 드러나는 삶의 비극성에 대해서 우리가 무감각해져 있는지 모르지만 사실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너무나 비참하고 잔인한 일입니다. 세계 10대 무역국 안에 꼽히고,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2만 불을 훌쩍 넘는 나라에서 자기 나라의 중추를 이루는 인구군의 여성들이 한 달 내내 일을 해도 그 나라가 정한 최저 임금도 받지 못할 정도로 열악한 노동 환경에 내몰려 있다는 것, 더군다나 그 노동의 대가가 다시 대부분 미래의 오는 세대를 위한 교육비로 쓰이지만 그 효과가 기만적이고, 그들의 일상의 삶은 비참할 정도로 점점 더 훼손되어간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II.

 

그러면 왜 오늘 우리 교회와 사회, 우리 자신들의 삶이 이렇게 외면적인 성과를 위해서 한계를 모르고 치닫는 삶이 되었고, 끝 모르는 경쟁과 자리다툼, 분쟁의 고단한 삶이 되었을까요? 왜 한국 교회는 이토록 사회의 비난을 받을 정도로 독선적이고, 어느 집단보다도 더 물질주의적이 되어 가면서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여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여러 차원의 분석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가장 간략하게 단순화해서 말해 본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과 존중감을 잃어버렸지 때문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이 때문에 모든 좋은 것이 밖에서 오는 줄 알고 밖에 나가 찾아 헤매느라 힘과 에너지를 모두 쓰지만 정작 중요하고 소중한 내면과 몸과 가족과 전통은 놓치고 마는 형국입니다. 그렇게 밖에서 찾아 헤매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리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서 남과 끝없이 경쟁하고 싸웁니다. 자신이 없기 때문에 스펙을 더 쌓기 위해서 현재적 삶의 모든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고 수입의 대부분을 교육비에 쏟아 넣을 정도로 우리 시대는 미래에 몰두합니다. 자신감 없고 자율적이지 못한 한국 교회의 민중이 교회를 서구 중세 시대의 교회로 돌려놓는데 일조하고 있으며, 자신감 없는 성직자와 교회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곤고히 하기 위해서 온갖 교리적 경직과 독재, 축적과 세습으로 악을 더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결코 개인 혼자 떨어져서, 철저한 자연성 안에서만은 살 수 없도록 조건 지워져 있습니다.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인간적인 감정을 기르고 꽃피우기 위해서 도구를 필요로 하고, 사회적 삶와 문화적 도구를 요구합니다. 이렇게 개인과 사회, 자신의 몸과 외재적 도구가 함께 어우러져야 우리 삶은 건강하고, 거기서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은 손상되지 않고 균형 속에서 잘 발휘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혹독한 비판자 이반 일리치(Ivan Illich)와 같은 사상가는 “사람들 사이의 그리고 사람과 환경 사이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공생”(conviviality)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 공생이란 함께 살아감의 기쁨과 환희가 있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오늘날은 후기 산업 자본주의의 횡포로 이 자율적 공생의 삶이 한없이 손상되었고, 인간의 본래적 자율성과 창조성, 자존감은 각종 인공 제도적 도구들의 독재와 독점으로 말할 수 없이 훼손되어 있습니다. ‘학교’라는 인위적 도구는 모든 배움을 독점하고서 급기야는 소득의 50%이상을 교육에 쏟아 넣도록 한다거나, 모든 사람들을 평생 ‘학생’으로 만들면서 오늘 소비지상주의의 사회에서 그 소비사회를 계속 유지 진행시키는 가장 탁월한 기제가 되었다고 비판합니다. 오늘날의 관료적 의료제도는 우리가 이미 잘 경험하듯이 사람들을 점점 더 값비싼 의료제도의 노예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정치와 복지에 대해서도 일리치는 말하기를, “모든 세대가 한 결 같이 자신을 빈곤하게 만드는 부를 추구하느라 모든 자유를 소외시킨 시대, 정치를 한갓 불만 가득한 복지 수령자를 조직하는 일로 전락시키고, 전문가 독재를 탄생시켜서 정치를 아예 실종시킨 시대로 기억할 것이다.”라고 우리 시대를 질타합니다. 오늘 대선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는 한국 사회의 정치와 거기서의 복지 논쟁에 많은 시사를 주는 언급이라고 생각합니다.

 

III.

 

저는 이러한 모든 지적들을 들으면서 신앙인으로서, 그래서 ‘종교적’으로, 그것도 되도록 가장 보편적인 종교의 언어로 답하고자 노력하면서 결국 ‘聖(거룩)의 평범성의 확대’가 우리 시대의 참으로 중요한 관건이라는 말로 응대하고자 합니다. 저는 앞에서 서술한 우리 교회와 사회의 모든 황폐화가 모두 자신이 귀한 존재이고, 성스러운 존재이며, 바로 우리 자신 안에 인간답고, 좋고 선한 삶을 위한 근거와 토대가 놓여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단순화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왜곡이 될 수 있지만 예를 들어보면, 계속 차만 타고 다니는 대신에 우리의 걸어 다닐 수 있는 두 다리가 있다는 것, 정제되고 문화화 된 비싼 음식과 난방 대신에 거칠지만 저렴하고 영양은 더 좋은 음식과 그것을 천천히 꼭꼭 씹어 먹을 수 있는 우리의 치아가 있다는 사실, 햇빛이 있는 낯의 활동과 밖의 활동을 더 늘려서 우리 몸의 자연적 생명온도를 높임으로써 인위적인 실내 난방온도를 내리고 비싼 난방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것, 어린 아기의 보육과 양육에 관해서는 임금을 지불하고 돈으로 산 공공 보육과 양육이 웬만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족 안에서의 보육과 교육보다 더 좋을 수 없으므로 공공보육만 확산하려고 하지 말고 이미 마련되어 있는 가족 안의 보육과 양육, 교육을 더욱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는 일, 또한 ‘내 몸이 최고의 의사다’라는 믿음과 자각을 가지고 우리 몸의 자연 치유력을 신장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질병 치료에 있어서의 자율적 공생의 방식을 회복하는 일, 이렇게 그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정도로 우리 안의 자가 능력, 자율성, 우리 정신의 고유한 힘과 능력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저는 지금 우리 개인과 사회의 갱생을 위해서 가장 긴요하게 요청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국방과 안보의 일에서도, 남과 북이 서로 한 언어를 쓰는 민족과 이웃사람들로서 자신 안에 있는 진정한 인간적 힘의 상징인 ‘용서하고’, ‘약속하는’ 힘과 능력을 믿고서 당사자들끼리 전격적으로 화해하고 용서한다면, 통일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면서 남에게 자신들의 국방의 통수권까지 맡아달라고 사정하며 막대한 돈을 들이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귀한 존재성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해서 너와 네 가족과 네 땅과 네 영역도 같은 정도로 귀하고 거룩하다는 인정, 그래서 지금까지의 독점과 인위적인 조작으로 공생의 삶을 해친 경계와 구분을 푸는 것을 저는 ‘聖의 평범성의 확대’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말은 만인과 만물의 귀함과 소중함을 단지 자연론 적이거나 또는 사회과학적인 근거로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본에까지 내려가서, 또는 ‘聖’과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하면서 그 토대를 세우고자 하는 일이 바로 신앙인과 종교인의 일이고, 그런 표현의 참 좋은 예가 바로 ‘侍天主’, ‘하늘을 모시고 있음의 존재’라는 언술이라고 보았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본문, 요한복음 14장 1절의 말씀이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시천주의 믿음을 매우 뛰어나게 표현해 준 언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하늘 부모님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자리다툼을 위해서 그렇게 싸울 필요가 없고, 자신의 지분과 자리를 위해서 그렇게 스스로를 죽이는 줄도 모르게 성과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두는 각자의 지분과 고유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태어난 것이라고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고 신뢰한다면 오늘 우리의 일자리 찾기와 직업 선택, 제도적 학교교육에 대한 입장과 태도, 우리의 교회 생활 등에 있어서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자리와 지분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더 이상 남과 싸우지 않습니다. 한계를 모르는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이미 세워진 인위적 체제와 도구 안에서의 증명되고 보장된 삶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자율적이고 창조적이고 공생적인 공존이 가능해지고, 그런 의미에서 일찍이 플라톤도 한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방부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이상사회를 이루는데 가장 관건이 되는 사항으로 ‘一人一事’, 각자가 자신의 일과 지분을 가지는 일로서의 ‘정의’를 들었습니다.

 

IV.

 

이렇게 하늘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고 우리를 안심시키며 시천주의 믿음과 거룩의 영역을 급진적으로 확대하기를 원하시던 예수는 필연적으로 그 시대가 제도화하고 독점적으로 도구화시킨 시천주의 영역과 경계를 흔들어야 했고, 해체해야했습니다. 유대인 청년 예수가 대면한, 당시 공룡처럼 거대해진 독점과 도구는 바로 그 시대의 안식일 자체였습니다. 마태복음 12장 1절부터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시대의 보수적 기득권자 바리새인들의 눈에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안식일의 성결법을 깨는 일, 안식일 날 무척 배가 고팠던 예수의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면서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보고 분노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고 물리치시는 예수, 회당에 들어갔다가 손이 오르라든 사람을 만나서 그 병을 고쳐주자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어도 괜찮은가 하고 다시 경악해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져있어도 구할 터인데 하물며 양보다 더 귀한 사람의 경우에야 말할 것도 없지 않느냐고 되물으십니다. 그런 그를 보고 바리새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특권을 보장해주고 모든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안식일의 성결이 그렇게 근본에서 도전을 받자 그들은 나가서 결국 “예수를 없앨 모의”를 시작했다고 마태는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러나 제자들을 더 모으면서 이사야서 42장 1-3절의 말씀,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정의를 선포할 것이다. ...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라는 구절로 이끄십니다.

 

저는 여기서 그러면 오늘 우리 시대의 ‘안식일’은 무엇일까를 묻고 싶습니다. 당시 안식일의 성결법은 사람이 웅덩이에 빠져서 죽어가는 데도 안식일이기 때문에 구해주어서는 안된다고 할 정도로 어이없는 ‘사람 잡는’ 금기였습니다. 도저히 인간적인 상식과 보편적인 정서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성결법’으로 구획해 놓고 사람 잡는 일을 태연히 하고 있던 것이 안식일의 성결법이었다면 그러한 일은 그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이 과외비를 벌려고 모든 인간적인 정서와 몸의 한계를 무시하고서 밤낮없이 노동하면서도 임금 100만원도 받지 못하는 오늘 한국의 어머니들을 묶어놓는 비정규직 고용법과 교육법, 쌓아놓은 쌀이 썩어가는 데도 바로 이웃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을 가져다주지 못하게 하는 대한민국 국가보안법과 남북교류법, 여전히 여성들을 몸적 성으로 차별하면서 온갖 불이익과 불의를 가하는 한국 사회의 가부장주의 법, 오늘 이 땅에 이방인으로, 다른 문화의 사람들로 와서 온갖 굿은 일을 하면서도 말할 수 없는 억울함과 불의를 겪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구획하는 이주노동자법 등, 오늘 우리 시대에 깨어져야 하고 해체되어야 하는 안식일의 법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한국 교회를 위해서는 이 모든 사회적 불의의 법보다도 더 근본적인 해체되어야 할 법이 바로 그러한 독점과 인위적 조작의 안식일을 깨려고 오신 예수 자신을 다시 불천위의 안식일로 규정해 놓은 일, 거기에 빗대어서 온갖 특권과 독점을 누리는 한국 교회의 성직자주의가 그 토대로 삼는 기독교 그리스도론적 독점과 독단을 들고자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지난번의 종교개혁에 관한 심퍼지움에서 발제한 한인철 교수에 따르면, 오늘 한국 교회의 신앙과 삶의 분리와 예수를 믿기는 하되 예수를 살지는 않는 “기현상”의 원인은 바로 한국 개신교인들은 한 편으로 예수처럼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여기서 “설마 그러랴 싶지만”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한 교수에 따르면 그렇게 실제로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고,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합니다. 먼저 하나는 죄인이 인간이 아무리 구원을 받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인 예수처럼 살아보겠다고 하는 것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 될 수 있기나 한 양 행동하는 교만한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기독교인들이 예수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다시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율법적인 신앙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표현된 이러한 왜곡된 사고와 태도가 바로 예수를 배타적이고 유일회적으로 신화화하는데서 오는 실체론적 그리스도론의 결과라고 지적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특히 한국 교회에서 견고한 배타적 그리스도론으로 굳어진 가현적 그리스도론의 결과이며, 여기서 예수의 인간성은 단지 가현적인 우연으로 이해되면서 그의 삶은 우리의 삶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론이 배타적 근본주의로 자리 잡게 되자 한국 기독교 신앙의 화석화와 행위 없음은 당연히 따라 나오는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한 교수는 “이러한 주장은 예수의 삶을 이 시대에 재현해 보려는 신앙적 의지를 사실상 원천 봉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시 “결정이 난 견해는 깊은 잠에 빠진다”라는 진실이 확인이 되는 것을 봅니다. 오늘 한국 교회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안식일의 바리케이드가 너무나 견고하고 높아서 그것의 해체와 재건이야말로 오늘 한국 교회의 불의와 기쁨 없음과 피로와 퇴폐에 대한 제일의 긴요한 치료약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V.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는 것으로 저의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 성서 본문으로 들었던 요한복음 4장 36절에서 38절까지의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한국 사회와 교회가 이렇게 탐욕과 피로와 분쟁이 많은 한 이유는 바로 이 실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한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인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의 표시로 모든 좋은 것의 열매를 자신이 차지하는 것으로 보기를 좋아합니다. 한국 사회와 교인들이 결코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축복과 구복의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오히려 하늘의 진리로서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른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했고, 우리가 얻는 열매도 우리 스스로가 수고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는 것을 인식하라고 일깨우십니다. 저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앞에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시천주의 믿음과 그 하늘의 우리 안의 탄생과 더불어 우리 삶의 조건으로 사멸성을 인정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부활신앙은 이렇게 사멸성을 우리 삶의 또 다른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의미의 부활과 갱생의 의미가 아니라 더 지독한 욕망과 욕심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거기서 끝없는 분쟁과 자기주장과 세대를 이어가는 이기주의와 욕심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거두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심는 것에 힘을 썼다면 그 열매나 거두는 추수의 일은 하늘의 영역인 것을 인정하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것을 일치시키려고 고집을 부리고, 그렇게 안 되면 서운해 하고, 자신을 더욱 쥐어짜면서 거두기까지 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의 피로는 더욱 가중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늘의 법칙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논리와 이해타산을 무화시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이는 그가 심지는 않았지만 거두는 일에는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허용하라는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원래 이 이야기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달라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가 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남편을 여섯 명까지 바꾸면서도 여전히 목말라하고 갈구하는 여인에게 그래서 내려놓음도 역시 생명의 법인 것을 말씀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 예수의 법을 우리가 받아들이면서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신앙의 이름으로 우리 사회의 성과주의를 더욱 부추겨오던 일을 그만둘 때, 교회의 복음이 우리 사회의 평안을 증진시키는데 좀 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진정으로 시천주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죽음의 쏘는 가시도 그 안에 모두 포괄되는 것이라는 더 큰 믿음 안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그 증거이고, 그래서 우리 신앙의 그루터기 이고, 안내자가 되신다고 믿습니다.

 

<참고문헌>

 

이은선,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1.

이반 일리치, <이반 일리치, <학교 없는 사회>, 심성보 옮김, 미토 2004.

이반 일리치, <성장을 멈춰라-자율적 공생을 위한 도구 Tools for Conviviality>, 이한 옮김, 미토2004.

한병철, <피로사회>,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2.

한인철, <종교개혁에 터한 한국 개신교 신앙양식의 허와 실>,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2012년 가을심포지움 자료집 <두 번째 종교개혁은 가능한가?>, 2012.11.16, 기독교회관 조에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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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59 마태복음 은혜의 빚을 갚자 마26:1-16  최장환 목사  2015-03-25 706
11858 창세기 자신감을 잃지 말자 창22:1-19  최장환 목사  2015-03-25 495
11857 빌립보서 폭력의 신, 비움의 하나님 빌2:6-8  한완상 형제  2015-03-24 575
» 요한복음 시천주(侍天主)의 믿음과 우리 사회의 갱생 요14:1-2  이은선 교수  2015-03-24 380
11855 민수기 찢어진 성전 휘장 -일상에 기댄 비상, 세속에 깃든 거룩 민17:12-13  서진한 목사  2015-03-24 974
11854 에배소서 너의 담을 허물라 엡2:14  이상익 형제  2015-03-24 468
11853 마태복음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13:24-30  김재성 목사  2015-03-24 718
11852 호세아 왜 광야로 데려가시려 하는가? 호2:14-20  김경재 목사  2015-03-24 415
11851 사도행전 계시대로 증거하라 행4:19-20  강종수 목사  2015-03-22 251
11850 마태복음 일용할 ‘근심’을 주시고 마6:34  김부겸 목사  2015-03-22 448
11849 누가복음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 눅23:34  김부겸 목사  2015-03-22 554
11848 요한복음 너희도 가려느냐!” 요6:66-69  김부겸 목사  2015-03-22 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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