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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신, 비움의 하나님

빌립보서 한완상 형제............... 조회 수 570 추천 수 0 2015.03.24 00:3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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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2:6-8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index.php?mid=sermon&category=129757&page=2&document_srl=128293 

폭력의 신, 비움의 하나님

(빌립보서 2:6-8, 마가복음 15:39)


2013년 1월 6일 신년예배

한완상 형제

(새길교회 신학위원)

 

   지난 해 12월 30일 뉴욕타임스에서 유대교 랍비 한 분이 (요나단 삭스) 애타심과 공동체 가치를 함양시키려면 종교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서방 사회는 신에 대한 감수성(sense of god)을 반드시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이 없어도, 관용, 친절, 애타심 같은 공공 가치를 얼마든지 함양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때때로 종교와 신에 대한 지나친 감수성과 확신이 분열과 폭력, 공포와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2주전 우리 공동체 새 신자들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의 하나님과 구약의 하나님과는 다르지 않은가 하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진솔된 질문이었습니다. 이런 질문 뒤에는 구약의 하나님이 복수와 증오의 신이며, 폭력과 공포의 신이라는 깨달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기야 신약에도, 심지어 예수님의 어록에도 공포의 심판자로서 하나님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저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감수성과 하나님의 인식이 과연 어떠한지 다시 한 번 성찰하고 싶습니다. 과연 예수님도 신구약 여기저기에 묘사되고 있는 복수와 폭력의 심판을 하나님의 본질 또는 본성으로 부각시키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아니라면, 예수님의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어떠한 존재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깊이 명상하고 싶습니다.

 

   먼저 구약에는 공포와 폭력의 신의 모습이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나고 널리 퍼져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아에게 구약의 신이 한 말씀을 보면 끔찍합니다. “땅은 사람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리라.”(창세기 6:13) 끔찍스러운 말씀이지요. 시편 137편을 읽어보세요. 다음과 같은 더 끔찍한 저주의 말씀이 적혀있습니다. “멸망한 바빌론 도성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너에게 되갚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네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비록 가해자 바빌론제국에 대한 피해자의 ‘정당한’ 보복행위라 하더라도 폭행살인자를 축복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습니다. 과연 압제자로부터 해방시키는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이 폭력을 부추기는 행위일 때 그것을 쉽게 정당화해도 되는 것일까요? 출애굽기에 나오는 신의 열 가지 재앙이 비록 강팍해진 바로 왕에 대한 반격에서 나온 하나님의 심판이라 하더라도 바로 왕 체제 하에 살았던 보통 이집트인의 장자들을 무참하게 죽이는 폭력행위를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던 이집트 집안의 모든 첫 번째 생명은 살육되었지요. 그런데 이 날을 유대인들은 유월절 명절로 그 후 길이길이 기억하고 기념하고 신성시했습니다. 창졸간에 장자를 잃은 이집트 부모의 입장에서 이것을 다시 생각해 보세요. 이런 폭력을 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것을 과연 해방적 조치로 칭송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를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왕 체제의 억압에 대한 히브리신의 ‘발악적’ 대응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있을까요.

 

   신약에도 공포의 심판주로 하나님은 계속 묘사되고 있습니다. 특히 묵시종말론적 신앙에 깊이 빠져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행악자들을 최후의 날에 가차 없이 징벌하시는 정의와 공포의 심판주였습니다. 바빌론 포로 이후에도 수 백 년 간 이스라엘 민족은 강대국들에 의해 억울한 침공을 당했고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고통이 클수록 그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최후 심판을 갈망했지요. 묵시종말론적 신앙은 이같은 갈망의 옥토에서 자라난 나무의 열매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때도 로마제국의 말발굽 하에 팔레스타인 땅은 신음했던 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례요한이 들판에서 소리높이 외쳤습니다. 그 외침의 핵심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비하여 회개하라는 메시지였지요. 이미 시퍼렇게 날선 도끼가 찍힐 나무뿌리를 겨냥하고 있음을 그는 알렸지요. 이것은 일종의 종말론적 신의 폭력을 예고한 것입니다.

 

   하기야 예수님의 어록 중에도 이같은 종말론적 심판과 폭력의 신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세상 끝날에도 이렇게 할 것이다.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 사이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서, 그들을 불 아궁이에 처넣을 것이니, 그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50) 정말 예수님께서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씀하셨을까요? 당시 녹음기가 없었고, 당장 그 자리에서 제자들이 예수님 육성을 펜으로 옮겨 적지도 못했을 터인데, 더구나 마태 공동체의 기억과 그 기억에 의한 구전으로 재구성한 예수어록일 터인데, 과연 그것을 예수님 말씀으로 단정 할 수 있을까요?

 

   그러기에 저는 예수님의 하나님 감수성과 하나님 인식을 새삼 성찰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먼저 너무나 유명한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깊은 뜻을 다시 찾아내어 깊이 음미해 보고 싶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을 선한 인간으로 규정한 것 자체가 파격적인 재규정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결단코 사마리아인을 선한 존재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순한 잡종인간으로 여겨졌기에 결코 유대인의 이웃이 될 수 없었습니다. 불결하고 불경한 존재이기에 마땅히 경멸과 차별, 심지어 저주와 폭행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은 원수요, 적이요, 악이었습니다. 하기야 유대인도 사마리아인에게는 마찬가지로 원수였지요. 이 점을 유념하면서 이 비유의 깊은 뜻을 다시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모든 종교들이 추구하는 영생과 구원이라는 목표에 이르는 길을 찾는 이에게 적절한 메시지이기도 하지요.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비결이 무엇인지 도전적으로 예수님께 물어온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라고 일렀지요. 보이지 않은 신을 보이는 이웃사랑으로 실천해 보이라고, 증명해 보이라고 깨우쳤지요. 보이는 이웃사랑을 실천함으로서 비로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진리를 예수님께서 깨우쳐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이 비유의 핵심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외연은 끝없이 깊고 넓지요. 이웃사랑은 또 다른, 더 깊은 사랑결단을 사랑실천으로 증명해보여야만 비로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이 메시지가 비유의 핵심이지요. 더 깊은 사랑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그래서 이 비유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이웃사랑만으로는 영생과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부터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당시나 지금 21세기 우리에게나 이웃은 우리에게 항상 가까운 존재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고향사람, 동창, 같은 클럽 회원, 같은 종교 믿는 이, 같은 정당 정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웃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동질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좋아하고 사랑하지요. 이런 동질적 존재인 이웃을 사랑한다고 영생과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의 사랑은 이런 이웃사랑보다 훨씬 감동적으로 더 깊고, 훨씬 감동적으로 더 넓지요. 그렇다면 어디까지 그 사랑이 깊게 뻗어가야 하나요. 우리와의 동질성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질적 존재를 보살피고, 보듬고, 사랑하는 데까지 뻗어가야만 하지요. 한마디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깊이까지 내려가고, 그 수준까지 올라가야 하지요. 원수사랑 못하면서 이웃사랑 한다고 큰소리치지 말라는 뜻이지요. ‘때문에의 사랑’ 수준에 머물면서 ‘불구하고의 사랑’에 도달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바로 이같은 진리를 깨우쳐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비유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이 등장하고, 선한 주역의 역할을 그 사마리아인이 맡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하나님다움의 참 모습을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제사장과 레위인에게서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음을 먼저 폭로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 종교인들과 종교제도에 대한 예수님의 날카로운 비판이기도 하지요. 기존의 종교로서는, 영생과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존 종교지도층이 원수로 경멸하고 제거하려 했던 잡종의 불순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구원과 영생의 길이 있다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도대체 사마리아인의 어떠한 행동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본성과 본질을 드러내주는 (계시해 주는)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어떤 것이었나요? 한마디로 그것은 바보짓 같은 사랑실천이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무시하고 지나쳐버린 불쌍한 동족, 곧 강도만나 가진 것 모두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거의 죽게 된 동족 유대인들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바로 보살펴주고, 바로 보듬어 주는 사랑을 주저 없이 실천했습니다. 사마리아인에게 원수가 되는 딱한 유대인을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바로 사랑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불경?불순한’ 사마리아인이야 말로 유대인의 하나님, 예수의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임을 이 비유가 드러낸 샘이지요. 비록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기를 거부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신다는 유대인의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것이 예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정말 놀랍게 전복적인 하나님 해석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이제 이 비유의 보다 깊은 의미층에 도달하고 싶습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진정한 이웃사랑이 완성되고, 나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에 이르게 되어, 마침내 영생과 구원에 도달하게 된다는 이 비유의 진리는 참으로 소중한 진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무슨 깨달음일까요?

 

   원수가 우리를 먼저 사랑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할 염두도 못내는 종교인들에게 특히 원수를 우리 종교를 대적하는 악이라고 확신하는 독선적 종교인들에게, 원수가 먼저 우리를 사랑한다는 진실을 깨우쳐주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비유 가르침에서 적어도 두 가진 더 깊은 교훈을 더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인들이야 말로 원수로부터 더 겸손히 배워야한다는 교훈이요, 다른 하나는 종교인의 원수가 결코 악이 아니며, 사탄이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이 두 가지 깨우침을 우리가 깊게, 올곧게 수용한다면, 참된 평화는 구조적으로 꽃피게 될 것입니다. 원수로부터 배우는 은밀한 기쁨은 원수와 깊은 역지사지 하는 연장선상에서 이뤄질 수 있습니다. 겸허하게, 진솔하게, 철저하게 원수로부터 배운다면, 그 원수는 저절로 사라지고 없어지고 맙니다. 바로 인자무적(仁者無敵) 또는 애자무적(愛者無敵)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지요. 바로 여기서 주님의 샬롬이 꽃피게 되지요. 싸워서 죽여야 할 원수가 사라졌으니, 전쟁이나 전투가 일어날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밀림의 강자 사자가 마침내 약자인 소의 여물을 먹게 되는 상황, 곧 참 평화가 펼쳐지게 되는 상황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의 꿈이 아니든가요. 이 꿈이야말로 아직도 분단된 비극의 현실속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수는 악이므로 원수사랑 명령을 절대로 순종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종교인들이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습니다. 이런 독선적 종교인들에게 예수님은 원수가 결코 악마가 아니라는 진리를 깨우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악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원수는 절대로 악하고 반대로 우리는 확실하게 선하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원수는 악할 수 있고 또 선할 수 있으며, 우리도 악하기도 하며 선하기도 하지요. 우리는 항상 선하기만 하다고 믿는 것은 가장 피해야 할 독선과 교만입니다. 그렇다면 이같은 진실인식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실천은 분명합니다. 원수 속에 있는 악과 내 속에 있는 악이 서로 악수하면서 공동으로 발악(發惡)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두 악이 발악하게 되면 바로 폭력의 악순환이 작동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선택은 오직 한가지뿐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선과 원수 속에 있는 선이 서로 다정하게 손잡고 발선(發善)하는 일입니다. 발선은 바로 평화 만드는 선순환을 작동시키는 힘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교우들에게 이 발선을 강력하게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로마서 12:20-21)

 

   원수를 구체적으로 사랑 할 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는 것) 원수 속에 얼어붙었던 착한 것들이 숯불의 힘에 의해 녹아내리면서 힘차게 작동하게 됩니다. 원수 속의 선한 것이 나의 원수사랑으로 되살아나 발선의 효과가 나타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일이요, 평화를 만드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은 발선의 하나님이시며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결단코 폭력과 공포의 신이 아닙니다. 전쟁과 전쟁승리를 무조건 예찬하는 전쟁영웅의 신이 결코 아닙니다. 승리주의 신이 절대로 아닙니다. 더더군다나 결단코 발악의 신이 아닙니다.

 

   저는 여기서 빌립보 감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죽는 것을 유익한 일(빌릴보서 1:21)로 고백했던 사도 바울의 위대한 신학적 비전과 감동적인 신앙고백에 주목합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담대하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전과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빌립보 1:20) 여기서 존귀함을 받는다는 뜻은 영어로 높이 올림을 받는 것(exalt), 극대화되는 것(magnify), 그리고 영광 받는 것(glorify)을 뜻합니다. 감방에서 자신의 존재는 쪼그라지고, 줄어들고, 낮아지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바울의 감방살이를 통해 높이 올림 받기를 바랐습니다. 자기는 수모를 당해도 그리스도는 영광을 받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죄수인 자신은 쪼그라들더라도 예수님은 극대화되시길 바라면서 죽어도 유익하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같은 실존적 고백은 바울의 심오한 신학 곧 하나님의 자기비움(Kenosis)의 신학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자기비움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동시에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빌립보 공동체에게 바울은 감옥에서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시면서 이렇게 비움의 감동적 힘을 찬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모습과 본질을 갖추고 계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높다는 것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가장 낮은 인간의 모습 곧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나아가 자기를 낮추시어 참으로 겸손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고, 처절하게 자기를 낮추어 십자가 형틀에 못 박혀 죽으셨기에 그때부터 오늘까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처참한 처형마당에서, 그 처형 순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각인시켜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자기지움(cross out)과 자기부정의 극점(極點)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그 낮은 십자가의 처참한 예수의 모습은 사랑의 하나님의 가장 높은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역설적으로 최하의 극점이 최고의 절정점(부활)으로 이어집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처형했던 로마의 중대장(백부장)이 예수의 처형과 그 죽음을 직접 목격한 후 이렇게 탄성을 내질렀던 것입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마가복음 15:39)

 

   흥미롭게도 유대인 아닌 이방인이었던 로마 장교가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오히려 저주하고 처형했는데 이방인이 예수의 정체를 제대로 깨달았던 것이지요. 또한 더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물위로 걸어가셨던 기적이나, 38년 중병환자를 치유했던 기적 등을 행하셨을 때 이같은 탄성이 터져 나옴직한데 말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수괴악마의 마력을 행사한다고 정죄했습니다. 힘있게 기적을 행했을 때 하나님다움의 참 모습이 드러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참하게 고통의 극점에서 숨을 거두셨을 때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의 하나님은 바로 이같은 자기비움의 정점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왜 그런가요? 그것은 바로 비움의 힘이 사랑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폭력의 힘, 저주와 복수의 힘, 무서운 심판의 힘이 결단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같은 하나님 다움, 하나님 아들 다움의 힘을 백마를 타고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로마로 위풍당당하게 진군하는 승리자 가이사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모습과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의 하나님은 이미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위엄을 당연히 거부하십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예수님이야 말로 사랑의 하나님의 감동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계시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요한복음 19:20). 정치범으로 오해받아 처참하게 처형당하여 죽으시면서 자기를 죽인자들을 용서하신 후 마지막 순간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셨지요. 이 고백의 깊은 강동은 2천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더욱 절박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예수의 모습과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후 비행기 조종사 군복을 입고 거대한 미국 항공모함에 올라가 “임무 완수했습니다(Mission Accomplished)."라고 성급하게 선포했던 유치한 부시 대통령의 모습을 비교해 보십시오. 누가 진정한 승리자인지, 누가 진정한 평화를 만드는 분인지, 누가 감동적으로 이 악한 세상을 선으로 변화시키는 주체인지를 깊이 성찰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지우시고, 비우시고, 내려놓으시고, 낮추시면서 인류와 세상, 개인과 구조, 역사와 인간을 모두 아름답게 새롭게 변화시키는 사랑의 그 위력, 그 감동적인 힘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힘이요, 예수님의 하나님의 본질임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새해 첫 주일에 저는 오늘도 이 시간 여러분에게 조용히 다가오시어 그 비움의 감동을 깨닫게 해 주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을 만나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쁨을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비움의 감동으로 새 힘, 새 용기, 새 희망을 가지시고 새해를 뜻깊게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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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38 하박국 여호와의 응답 합2:1-20  구하라 목사  2015-03-20 405
11837 하박국 하박국의 호소 합1:1-17  구하라 목사  2015-03-20 693
11836 스바냐 예루살렘의 형벌과 보호 습3:1-20  구하라 목사  2015-03-20 266
11835 스바냐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습2:1-15  구하라 목사  2015-03-20 477
11834 스바냐 여호와의 날 습1:1-28  구하라 목사  2015-03-20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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