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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욘1: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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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5.2.9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552) |
다시 쓰임 받는 길
(요나 1장 7-17절)
< 남
탓을 하지 마십시오 >
요새 남 탓하는 문화가 점차 거세지고 있습니다. 내 실패를 남 탓으로만 돌리면 오히려 길이 더
막힙니다. 남 탓은 죄의 대표적인 표식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 대해 하와 탓을 했고 하와는 뱀 탓을 했습니다. 또한 남 탓은
무책임의 표식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실패에 대해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 그때부터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것은
자기 모습은 외면하고 남 탓만 하면서 말로만 정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탓할 것이 있으면 한 템포 참았다가 냉철하고 정당하게 탓하십시오. 그와
동시에 남의 입장도 되어보고 자기 모습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성공한 사람이나 부모의 축복을 물려받은 사람 중에도 반듯하게 사는 사람을
힘써 존중해주고 칭찬해줄 줄 아는 넉넉한 마음도 가지십시오. 무엇보다 말씀 중심적으로 살려고 힘써야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씀은 더욱 씨가 됩니다. 말씀이 빈곤하면 영혼도 빈곤해지고 말씀이 풍성하면 영혼도 풍성해집니다. 기본적으로 살면서
‘피해의식’보다 ‘빚진 자 의식’을 더 가지고 빚을 갚으며 살겠다고 다짐하십시오. 최고의 자녀는 부모를 탓하지 않는 자녀이고 최고의 부모는
자식을 탓하지 않는 부모입니다. 최고의 친구는 친구를 탓하지 않는 친구이고 최고의 교인은 교인을 탓하지 않는 교인입니다. 남을 탓하고
불평하기보다 남의 덕을 많이 보고 사는 것으로 알고 감사하면 인생도 밝아지고 공동체도 밝아집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사람을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에게 새 사람이 될 희망이 정말 있을까?”그러나 얼마든지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새롭게
되도록 돕는 것입니까?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조급한 마음으로 그를 탓하면 새롭게 될 가능성은 줄어들지만 넉넉한 믿음으로 자기를 살피고 자기부터
바꾸려고 하면 그가 새롭게 될 가능성도 조금은 더 커집니다. 복된 변화는 자기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남 탓보다 자기 성찰을 먼저 하고 더
나아가 자기를 희생하려고 하면 하나님 앞에 새롭게 쓰임 받는 길이 반드시 열릴 것입니다.
< 다시 쓰임 받는 길 >
어느 날, 하나님이 요나에게 원수의 나라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요나는 그 사명을
외면하고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배가 난리 통이 된 상황에서 그는
바다에 던져졌다가 구원받고 다시 하나님의 쓰임을 받습니다. 요나처럼 한때 사명을 외면했다가 다시 쓰임 받는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자기 허물을 돌아보십시오
배가 풍랑으로 거의 파선 직전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서로 말했습니다(7절).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보자.” 그렇게 해서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뽑혔습니다. 무리가
요나에게 물었습니다(8절).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때 요나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9절).” 비록 그가 잠깐 사명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경외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을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신분을 밝힌 후 풍랑의 시련을 전도기회로 활용하려고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했습니다(10절). 풍랑을 자기가 사명을 외면한 탓으로 돌린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자기
성찰입니까?
보통 사람들은 무슨 일을 만나면 남 탓을 하고 환경 탓을 하고 심지어는 재수나 운명까지 탓합니다. 그러나 복된 성도는
어떤 문제나 사건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자기 잘못을 고칠 줄 압니다. 그처럼 어떤 일이 생기면 그 속에 담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지혜와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성패와 행복은 문제를 얼마나 슬기롭게 극복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은 어떤 일과 사건이 생길 때 가장 먼저 “이건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생각하고 “내 부족함
때문이야!”라고 자기를 성찰할 줄 아는 삶입니다. 요나는 자기가 탄 배가 폭풍을 만나자 그 폭풍이 자기 때문에 일어난 것을 금방 알았습니다.
그처럼 원인을 잘 파악하면 해답도 쉽게 나옵니다. 결국 문제가 생겼을 때 자기 탓이거나 자기 탓도 있는 줄 아는 것이 문제가 해결되는 최적의
길이고 다시 쓰임 받는 길입니다.
2. 자기를 희생하려고 하십시오
요나의 진솔한 고백을 듣고 무리들이 심히 두려워하며
말했습니다(10절).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요나에게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풍랑이 점차 거세지니까 무리가 요나에게 말했습니다(11절).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그 질문을 보면 무리들이 요나를 상당히 존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요나가 엄청난 대답을
했습니다(12절).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요나는 폭풍의 시련이 자신 때문임을 인정하고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책임감과 희생정신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은 이기적인 사람이 희생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기적입니다. “불치병이 나았다. 갑자기 떼돈 벌게
되었다.”는 것만 기적으로 여기면 그렇게 선전하는 사람에게 몸과 영혼이 팔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치병의 능력을 내세워 구세주가 되지 않고
십자가의 희생으로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기적을 오해하면 영혼은 큰 해를 당합니다. 잘못된 기도원과 수많은 치병행각자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다급한
사람들이 돈과 목숨 잃고 그것을 지켜보던 지인들의 믿음까지 잃게 했습니까? 기적 광고자들의 기적 놀음에 속지 마십시오.
어느 날,
몇 명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9-40).”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부활’을 뜻하지만 더 나아가 ‘변화의 기적’을 뜻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표적은 사람이 변화되는 기적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은 다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베드로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고, 세리 삭개오는 가장 위대한 자선가가 되었고, 창녀 막달라 마리아는 가장 위대한
성녀가 되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등진 인생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향한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이 최대 기적입니다. 또한
자기만 위해서 살던 사람이 자기를 희생하고 나누는 존재로 바뀌는 것이 바로 성도가 추구해야 할 요나의 표적입니다. 그런 표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3. 좋은 동지와 함께 하십시오
요나의 책임적이고
희생적인 말을 듣고 그런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을 누가 바다에 던지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무리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고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풍랑은 더욱 심해지면서 형편이 더 어려워졌습니다(13절). 결국 견디다 못해 무리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14절).”
그 부르짖는 내용을 보면 이미 그들은 요나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열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먼저 드렸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후에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자 풍랑이 곧 그쳤습니다(15절). 사명에 불순종하는 사람을 바다로 내던지자 바다가 평온해진 것은 때로는
불순종하는 사람을 버려야 할 때도 있음을 도전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인데 어떻게 사람을 배 밖으로 던집니까? 그러나 그를
사랑하기에 회개하고 생각을 바꿀 기회를 주려고 배 밖으로 던지는 것입니다. 그만큼 배에 함께 탄 동지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자기 곁에 좋은
친구를 두어야 합니다. 나쁜 친구를 두면 하나님이 좋은 친구를 붙여주지 않습니다. 좋은 친구를 자기 곁에 두려는 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이 없는 행위도 아닙니다.
인물이 되려면 협력도 잘해야 하지만 협력도 잘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옆에 있을 사람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삶은 생각대로 됩니다. 또한 자기와 함께 하는 동역자의 생각대로 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긍정적이고 신실한 믿음의 동지를
자기 옆에 두어야 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행동해서 큰 풍랑을 초래했고 결국 함께 배에 있었던 사람들이 같이 피해를 당했습니다.
그처럼 자신이 탄 배에 함께 승선한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와 믿음에 의해 때로는 큰 풍랑을 겪기도 하고 반대로 큰 축복을 얻기도
합니다.
롯이 큰아버지인 아브라함과 함께 할 때는 자신도 큰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으로 들어가서 결국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생각은 삶을 만드는 제일 요소입니다. 더 나아가 동역자의 생각도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남의 생각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기에 처음부터 한배를 탈 사람을 잘 선별하고 때로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을 조심스럽게 배에서 내리게 할 필요도
있습니다.
어떤 교인은 교회에 꼭 필요한 아주 핵심적인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스스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곳에는 내가
없어도 잘 된다. 그래도 내게 이런 좋은 봉사 자리가 주어졌다. 그 사실에 대해 감사하면서 늘 겸손하게 봉사하자!” 얼마나 복된 성도입니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남 탓을 하겠습니까? 사실상 그런 사람 때문에 무엇이든지 일이 잘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늘 힘을 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협력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좋은 동지도 붙여주시고 때가 되면 그를 멋지게 들어 쓰실 것입니다.
4. 늘 희망을 가지고
사십시오
그때 무리들은 폭풍의 제일 원인이 하나님의 종의 불순종에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무리들은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했습니다(16절). 이 구절에서 “서원을 했다.”란 표현을
보면 단순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제사를 드렸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했다는 암시입니다. 요나를 배 밖으로 던지면서 엄청난 반전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다 요나가 죽은 줄 알았지만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미리 준비해서 요나를 삼키고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게 하셨습니다(17절). 그 3일은 요나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3일이었습니다. 그때 요나가 회개하고 기도하며 자기 사명을 새롭게
하자 마침내 물고기는 요나를 뱃속에서 토해냈고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니느웨로 가서 말씀전파의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반전의
역사입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기쁜 일은 옛날에 나쁜 평가를 받았다가 오해도 풀리고 한 차원 더 성숙해지면서 다시 좋은 평가를
받는 일입니다. 아직 살아있기에 그런 재평가의 기회는 늘 있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가지십시오. 과거에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도 얼마든지 칭송받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대중의 여론은 자신의 희생적인 태도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 재평가와 반전의 역사를
꿈꾸며 사십시오.
에로 영화에 출연해 에로 배우로 이미지가 굳어버린 한 연예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대마초를 했다가
붙잡혔습니다. 이미지가 더 망가졌습니다. 한 인격체로서 그런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 대마초에 손을 댔다가 붙잡혔습니다. 그녀의
이미지는 완전히 망가져서 더 이상 이미지를 회복할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녀는 대마초는 마약이 아니란 소송까지 냈지만 사람들은 자기변명이라고
냉소했습니다. 가끔 그녀에 대한 소식이 인터넷에 보도되면 부정적인 댓글 일색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자기가 사는 아파트
난방비 비리를 폭로했습니다. 그로 인해 일부 해당 주민들로부터 크게 욕도 먹고 손찌검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사회적인 큰 이슈가 되면서
그때부터 그녀에 대한 소식이 인터넷에 보도되면 긍정적인 댓글 일색입니다.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대마초 연예인’에서 ‘난방비 투사’로
바뀌었습니다. 그녀의 직설적이고 도전적인 삶을 특별히 변호하거나 칭찬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과거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긍정적인 이미지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 >
그처럼
사람에 의해 재평가 받는 일도 기쁜 일이지만 하나님에 의해 다시 인정받고 쓰임 받는 일은 무엇보다도 기쁜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쓰임
받는 존재가 됩니까? 성령님이 그 마음에 찾아와주시면 됩니다. 어떻게 의심병 환자인 도마가 신실한 사도로 변할 수 있었습니까? 다시 찾아와주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면 얼마든지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남 탓을 잘하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닌 자기를 성찰할 줄 아는 책임적인 사람을 만나주십니다.
일전에 한 종교단체에서 “내 탓이오!”란 스티커를
자동차 뒤에 붙이는 운동을 했습니다. 그 운동은 얼마 후 흐지부지 끝났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스티커를 붙인 사람이 조금만 잘못 운전해도
뒤에서 “저 사람 자기 탓이라고 하더니 왜 저래?”라고 하면서 남 탓 심리를 더 부추길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일은 항상
광고하듯이 하지 말고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비록 그 운동은 큰 성과가 없었지만 “남 탓만 하지 말자!”는 그 운동이 도전하는 의미는 늘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자기가 선택해 어떤 결정을 했으면 자신이 그 결과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남 탓을 줄이고
자기 성찰을 늘리십시오. 문제의 원인은 내 안에 있고 더 나아가 문제해결의 요소도 내 안에 있습니다. 가끔 보면 컴퓨터 키보드만 두드리며 열심히
비이성적인 댓글로 남 탓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남 탓, 리더 탓, 정치인 탓, 조상 탓을 하다가 나중에는 하나님 탓까지 합니다.
스스로 일어서 내일을 창조하려는 의지가 없이 그렇게 남 탓만 하면 어떻게 복된 삶이 펼쳐지겠습니까?
책임적이고 성공적인 사람은
남 탓을 하기 전에 자기를 돌아보고 좋은 것은 배워서 실천하고 나쁜 것은 반면교사로 삼아서 반대로 실천합니다. 어차피 세상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기에 자기부터 변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도 조금은 변화됩니다. 더 나아가 요나처럼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하는
희생정신으로 나가면 반드시 변화의 역사는 나타나고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높이 들어 쓰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사역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 궁금해 합니다. 200페이지가 넘는 책을 1000원만 받고 매달 공급할 수 있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100페이지 조금 넘는 월간 큐티집들을 3-4천 원 받는 것과 비교하면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너무 싸니까 혹시 돈 많은
이단 단체가 홍보용으로 발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새 매일 저의 온새기(온라인 새벽기도) 말씀을 받는 사람 중에
목회자만 거의 4천명이 됩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이단 사상을 전했다면 그분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많이 돕고
선교도 열심히 하고 매월 6천 권이 넘는 월새기(월간 새벽기도)도 발행하니까 제가 알부자인 줄 오해합니다. 알부자는 아니지만 “죽으면 죽으리라!
잃으면 잃으리라!”고 하면서 편하게 사역하는 마음부자이기는 합니다. 월새기 사역을 처음 시작할 때 한 은밀한 후원자의 후원을 받고 시작했습니다.
그 후원금으로 “3호까지는 발행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에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집 월세 보증금을 빼면 10호까지는 발행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재정이 고갈되면 <월새기 문서선교 사역>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알고 발행을
끝내면 된다는 편한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월세 보증금을 빼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적이 있게 되었습니까?
책을 저렴하게 공급해서 문서선교의 순수성이 누군가에게 인정되었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런 이유도 조금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통해 비전과 은혜를 받은 누군가가 문서선교가 지탱되도록 은밀한 헌신의 손길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펼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면 대개 죽지 않고 “잃으면 잃으리라!”고 하면 대개 잃지 않습니다.
고난 중에 자기 신세타령이나 남 탓을 하는 것 대신에 감사하고 찬송하고 자기를 희생하려고 하면 언젠가 찬란한 꿈과 비전이 이뤄지고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길이 반드시 열릴 것입니다. 살면서 남 탓을 최대한 절제하고 항상 자기 성찰과 감사와 찬양과 희생으로 반전의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
앞에 멋지게 쓰임 받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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