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순전한 신앙 이야기<http://cafe.naver.com/ghkdqndlf> |
---|
교회를 통해 자기 유익을 구하려는 자들
교회 구원이 이루어짐 에는 자기 유익이 따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몸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교회의 모습을 사람 한몸된 관계로 설명했는데 우리가 우리 한몸에서 한 팔이 자기 유익만 구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더 말할 것도 없이 그 팔은 팔대로 다른 몸은 몸대로 이상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통해 자기 유익만 구하고 챙기려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공교회를 모르는 개교회주의자들>
현대 교회들의 현상을 보면 마치 자본주의 세상같은 느낌이 듭니다. 각 교회들의 빈부격차가 심하고 세상 대기업과 영세기업처럼 큰교회 작은교회 형편적인 차이가 너무 벌어져 있습니다. 작은 교회는 어떻게 해서라도 좀 큰 교회가 되려 애쓰고 큰 교회는 더 큰교회가 되려고 온갖 방법, 수단을 동원합니다. 그래서 개교회주의라는 비판을 많이 받아도 전혀 신경쓰지 않습니다. 이들의 관점과 목적은 모두가 자기네 교회가 커져서 자랑스럽게 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경쟁이 심합니다.
이들 교회들도 다 교파가 있고 총회와 노회로 소속되어 있지만 그들은 모두 함께 한 신앙안에서 공교회 관계를 모르는 것입니다. 때로는 함께 소속끼리 모여 행사도 하고 여러 사업도 하고 친목을 도모하며 선교나 구제사업도 하지만 이면을 보면 교회성장과 알림을 위한 전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진정한 공교회로서 한몸된 관계를 가지지 못합니다. 먼저 공교회로서 진리 중심으로 일치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나 같은 소속의 어려운 교회를 위해 평균적인 나눔이 되지 못합니다.
바울이 증거한 마게도냐 교회를 보면 그들은 사도들을 통해 전해 들은 예루살렘교회의 어려움을 함께하고자 한다했는데 보면 저들도 극한 환난과 핍박중에서도 매우 어려움에 처해있는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은혜의 성도를 섬기는 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원하여 자신을 먼저 주께 드리고 힘에 지나도록 구제연보를 보낸 것입니다. (고후 8:1-5) 그들은 그리스도의 한몸된 공교회임을 믿었고, 함께 하나님나라의 평균을 이루려 한 것입니다. 요즘같은 교회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관계입니다.
현대 교회들은 너무 개교회주의입니다. 자기들교회 건물확장이나 더 큰 예배당건물 신축을 위해서는 수십억에서 수백억 수천억씩 허비하면서 진정으로 주께서 원하시는 한몸된 교회관계로서 함께하는 것에는 인색하기에 그지없습니다.
이것이 다 주의 교회를 통해서 자기 유익만 구하는 개교회주의의 실상들입니다. 이것은 주의 교회이름으로 모여든 무리들이 자기들 좋은것에만 치중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된 모습으로는 관계가 없게 됨을 보여 줌으로 자신들의 모임이 진정한 교회가 되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대교회들은 마치 같은 부류의 업을 하는 장사나 기업처럼 무섭게 서로 경쟁하고 심지어 교인 빼앗기 쟁탈전까지 벌입니다. 교회가 아니라 교회사업하는 잘못된 지도자들이 자기들만 커지고 잘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업체들이 많은 고객 유치를 위해 수많은 이벤트를 하는 것과 별 다름 없는 것을 교회들이 합니다. 영리목적이 제일인 사업체들이야 당연사로 이해가나 교회들은 비영리 단체라면서도 자기들 유익만 구합니다. 각개 교회적으로 더 많은 고객같은 교인들과 그들을 통한 더 많은 재정비축입니다.
<자기유익을 구하는 목회자들>
세간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오늘날 대형교회 목회자들 가운데 은퇴를 했거나 은퇴의 시기에 거의 다다른 자들 가운데 몇 몇 유명한 목회자들이 돈문제로, 여자문제로 세상언론에 지목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들은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세상 언론이 교회를 폄하한다면서 반박하는 경우를 봅니다.
예수님 말씀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마 7:16-17) 결국 이들은 무엇을 위해 목회를 해왔는가가 그대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자기 유익을 구하는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고 돈, 재물에 욕심두고 성공하려하는 이런자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거짓된 자나 삯꾼들입니다.
에스겔 34장을 보면 목자들이 양을 잡아먹으며 그 털을 없애면서도 양 무리는 먹이지 않고 약한 자, 병든 자, 상한 자를 돌아보지 않고 고치지도 않고 잃어버린 양을 찾지도 않았다. 그래서 내 양은 흩어져 들짐승의 밥이 되고 노략거리가 되게한 목자들은 화가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겔 34:1-8)
예수님 당시 유대교권주의자들을 보면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높임받으려 했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들의 영광을 더 구했고 (요 5:44) 심지어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눅 20:47) 이들은 한결같이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사람들이 인정하는 외적인 조건을 갖추는데 열정을 두었고 신앙의 행위도 자기 유익을 위한 외식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는 지도자들은 주로 삯군된 자들이요 거짓된 자들이요 그리고 깨달음이 부족하고 아직 성숙하지 못하여 초년생 같은 과정에 있는 주의 종들 경우는 그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세배대의 아들들이였던 요한과 야고보 그들은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주의 나라의 영광이 임할 때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다른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게 분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자기 유익을 버리고 예수님처럼 교회 구원의 유익을 위해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의 종된 사도들이 구해야 할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모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0:20-28 참조)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삯군들은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며 교회 성장과 부흥을 위해 열성적으로 일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은 교회를 위해 불철주야 힘쓰고 있다고 인정을 받는 편입니다. 이런 자들은 어느 시기가 지나면 서서히 본색이 나타나는데 교회정서나 형편은 고려되지 않은채 점점 크고 좋은 사택이나 더 좋은 차량이나 돈에 대해 관심이 나타납니다.
교인들은 우리 목사님은 개척할 때 안 그랬는데 지금은 변했다며 말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는데 이들이 처음에 교회를 위하고 교인들을 위해 열심히 하며 모든 것을 바치는 것처럼 한 것은 다 자기 기대, 자기 유익의 목적을 이루고 달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구세 행위를 잘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금식하며 여러 신앙의 의식이나 행위를 모범적으로 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 칭찬받고 높임받고 상좌에 앉고 더 많은 탐욕을 채우기 위한 발상이였고 연극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열심과 헌신은 외식에 불과했고 속에 가득차 있는 탐욕과 방탕은 결국 본색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거짓된 자들에 대해서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양의 탈을 쓰고 오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열매로 그 나무를 알수 있다고 경계시켜 주신 것입니다. (마 7:15-20) 이들은 어느정도 교회의 형편이 나아지면 자기 유익을 구하는 모습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더욱 외형적인 대형교회로 세우려는 욕망속에 성공한 자로 자타에게 공인받으려하고 또한 교권까지 주도하려는 행태를 보입니다. 이들은 교인들이야 어렵든 말든 자기 기대만 성취하면 되고 돌아보고 도와야 할 작은 교회나 그런 교회 목회자들이 어렵더라도 말은 동역자라 할 뿐 실제 관심도 없습니다. 나만 크고 유명해지면 되니까 말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는 교인들>
대체적으로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기 유익을 구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그런말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실제로 남을 위해 기도도 하고 구제도 하고 선교도 하고 봉사도 하고 소외계층을 돌아보며 헌신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서 인정받고 높임받는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인정받게 된 것은 유대사회에서 인정하는 신앙의 의식이나 신앙생활들이 사람들에게 잘보여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인정받는 행위들이 외식이었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의 남을 위한 기도 생활, 구제활동, 의의행위등이 진정으로 남을 위함이 아니라 다 자기들의 유익을 위함이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그래서 높임받는 지도자가 되어 자기 영광을 얻으려는 것이었음이 예수님에 의해 밝혀진 것입니다.
이시대 많은 교인들도 결국 자기 위로와 축복과 인정받음을 목적하기에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이 됩니다.
기독교안에 있는 신앙상태를 각자 원하는 바대로의 구원을 분류해보면 예수를 통해 자기 개인구원을 구하는 자들이 있고 사회 공동체 구원을 구하는 자들이 있고 교회구원을 구하는 자들 이 세부류로 나누어 집니다.
보수적인 신앙이라고 하는 교회들에서 대체적으로 교인들은 자기 유익을 구하게 됩니다. 이런 신앙이 대게가 기복적이고 이적주의고 감정주의적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통해 만사형통하고자 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받고자 하고 자기 소원성취를 얻고자 하고 사업의 번성과 가족들의 건강과 안녕과 자식들의 잘됨을 위해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들은 열심히 기도도 하고 교회에서 요구하는 봉사나 헌금등에 매우 충실합니다. 그것이 다 그래야 기대하고 소원하는 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이루어진다고 가르침 받았기 때문에 언뜻보면 남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 충성된 교인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기 유익을 더 얻고 자기 기대가 커지고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됩니다.
또한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신앙의 분류들도 많은데 주로 진보주의자들가운데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생활 목표를 자기만 잘먹고 잘살고자 하는 기복신앙을 배격하고 모두 함께 잘살고 함께 평화하고 소외계층이나 인권적으로 불리하고 약함에 처해 있는 자들과 더불어 자유와 평등을 가지는 것을 주장하는데 얼핏보면 그럴듯하여 주로 지식층이나 흔히 자각하는 사회에서 의식이 괜찮은 편인 사람들이 주로 원하는 바로 공감하는 신앙들입니다. 이들이 복지사회, 정의사회를 신앙을 통해 추구함으로 이들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닌 듯 보이고 좀 이성적이고 이상적일 뿐이지 결국 자기유익을 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자기 유익을 함께 공감시키어 공동체간 원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자기 위로와 보상과 자기 삶의 가치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본래 자기 유익을 구하게 되어 있다>
에베소서 2:1-3절에 보면 죄와 허물로 죽은 인생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산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욕심에 의해 살아 갑니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야망이고 꿈이고 자기 기대입니다.
범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사탄의 지배속에 살아가는 모든 인생의 상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신이 떠나매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고 했고 계획하고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한 본성의 존재가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창 6:3, 5)
예수님은 당시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거스르던 유대 무리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요 8:44) 이렇게 된 인생들은 각자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되었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그런 자신을 도울 큰 능력을 찾는데 이것이 바로 종교이고 신앙인 것입니다. 세상 모든 자연종교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도 왜 그런가 하면 이교화 된 기독교의 전락인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나 교인들이나 대부분이 교회를 통해 신앙을 통해 자기 유익을 구하고 있는 것은 육체의 소욕들이 그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교회라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말하지만 자기 유익을 구하는 그 상태를 볼때는 전혀 그리스도의 교회모습이 안됩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구원이 없거나 구원을 받았을 지라도 구원을 살아가는 자들이 못되는 경우가 됩니다.
사도바울은 교회구원에 대해 증거하기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증거했습니다.(갈 5:24) 그리스도안에서 자기 유익을 구하고 자기를 위해 살던 죄된 옛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셨기에, 고전 6:19-20)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고 사도바울은 증거했습니다.(롬 14:7-9)
그러니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런 구원으로 세워진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이름만 교회지 그들이 구하고 세워가고 있는 것은 서로 크고자 하는 욕심 상태의 모습으로 가칭 교회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증거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했습니다. (고전 10:24,33)
누가 이렇게 살수 있습니까? 세상사회에 보면 가끔씩 남을 위해 살고 자기 것을 몽땅 기부했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이들은 다 나름대로 자기 보람이나 자기 마음에 삶의 기대가 있는 것이고 어쨌든 남의 구원을 위해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5절을 보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주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바울은 증거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구원의 삶이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형벌을 살아가는 인생은 다 자기 욕심을 따라 자기 유익을 구하는 존재요 끝없이 만족하지 못하고 욕구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엡 2:1-3)
누가 여기서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언약대로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유익을 구치 말고 주님과 그 분의 교회를 위해 삶을, 생명을 드리며 살아가는 주의 종이 있고 복음의 사역자가 있는 것이며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모습으로 자신을 드리며 모든 것을 드리며 때로는 순교적인 상태까지 이르는 성도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어머니 리브가와 짜고 아버지를 속이고 하나님의 이름까지 이용해 장자의 명분을 얻으려 했던 간교한 이름의 야곱은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호칭을 가지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를 미리 택하시고 언약의 백성이요 그들의 조상으로 구별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그 나라에 합당한 믿음의 조상으로 온전케 양육해 주심에 있었습니다. (창 48:15) 그러니까 주의 나라와 그 나라로 이땅에 실현된 주의 교회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자는 주께서 주의 종으로 택하시고 그렇게 양육되어 그렇게 성령의 능력안에 잡힌 바 되어 쓰여지는 자만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교회를 통해 자기 유익을 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빌 4:13)
다시 정리해보면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지는 언약교회만이 자기 유익을 구치 않고 그 나라를 구하게 되는 것이며 주께서 세우신 복음의 사역자만이 자기 유익을 구치 않고 교회 구원과 그 유익을 위해 기쁨으로 섬기게 되는 것이며 주를 위해 복음을 위해 자기 전토와 및 가족까지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자들만이 하나님 한분으로도 기뻐하며 구원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혹 글을 퍼오실 때는 경로 (url)까지 함께 퍼와서 올려 주세요 |
자료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 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