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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잠10: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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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569) 2015.3.9 |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
(잠언 10장 1-10절)
자녀를 키울 때 훈계는 꼭 필요합니다. 사랑하면 훈계해야 합니다. 훈계를 겁내지 마십시오. 훈계가 없으면 근심거리만 늘어납니다. 더 나아가 징계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십니다(히 12:6).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한다고 했습니다(잠 13:24). 문제는 자녀의 나이와 성향과 특징에 따라 잘 훈계하고 징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짜증과 분노와 분풀이 감정을 가지고 훈계하거나 징계하면 안 됩니다. 너무 소리쳐도 안 됩니다. 소리치면 감정이 통제의 선을 넘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큰소리보다 침묵이 더욱 큰 징계가 되기도 합니다. 냉철하고 지혜로운 훈계와 징계가 필요합니다. 학교공부가 자질이 아닌 자녀에게 성적을 기준으로 훈계하면 안 됩니다. 비교하며 훈계해도 안 됩니다. 자녀를 비교하는 것은 사과와 배를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맞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지혜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교회나 사회에서도 리더는 적재적소에서 사람을 쓰는 지혜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옛날 문화는 개성을 인정하지 않고 리더의 뜻대로 무작정 움직이는 충성과 순종만 강요되는 문화였습니다. 물론 충성과 순종은 무엇보다 훌륭한 덕목이고 소중한 가치고 복의 지름길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잘 순종하고 잘 충성하게 만드는 리더의 지혜가 더해진다면 더욱 복된 역사가 나타납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를 판사나 의사로 만들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 태도가 자녀의 미래와 행복을 망가뜨립니다. 부모는 자녀의 재능과 특성을 잘 파악해서 길러야 합니다. 그런 지혜와 리더십이 없이 무조건 돈과 선생과 학원을 동원해 키우려고 하면 인성과 재능과 특성이 희생될 때가 많습니다. 자녀는 자기 자녀이면서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부모는 자기 자녀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녀로 잘 키워야 합니다.
<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 >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이 말씀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지혜로운 아들 얘기를 하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지혜로운 성도에 관한 도전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어떤 자일까요?
1. 공의를 행하는 자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이 구절을 보면 솔로몬은 불의한 재물과 공의를 반대 개념으로 표현합니다. 왜 사람이 불의하게 재물을 취합니까?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의를 원하면 욕심을 버리고 재물을 잘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나눌 줄 모르면서 공의를 외치는 것은 허무한 외침입니다.
솔로몬은 불의한 재물은 무익하지만 기쁘게 재물을 나눠주며 공의를 행하면 죽음에서 건짐 받는다고 합니다. 즉 건강과 치유를 원하면 건강 세미나나 치유 집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보다 공의를 행하고 잘 나누는 것이 더 낫다는 뜻입니다. 공의를 행하고 잘 나누면 대개 물질적인 은혜도 따릅니다. 바르고 정직하게 살면 부자가 되지 못한다는 속설을 믿지 마십시오. 바르게 살고 나누며 살아도 부자가 되는 길이 있다고 믿고 나가면 하나님이 창조적인 지혜를 주시든지, 아니면 좋은 인맥을 주셔서 그 믿음을 헛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욕심이 없는 의인은 하나님이 주리지 않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지만 욕심이 많은 악인은 하나님이 외면하심으로 결국 궁핍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욕심을 가지고 나눌 줄도 모르면서 “성공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성공 욕심을 버리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성공의 꿈은 꾸되 성공 욕심은 버리십시오. 욕심은 편법과 비정상과 속임수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욕심을 따른 성공을 추구하지 말고 사명을 따른 성공을 추구해야 합니다. 즉 많이 나누고 하나님의 뜻을 멋지게 이루려고 성공을 추구하십시오. 욕심은 허무한 기도와 허무한 인생을 낳습니다. 그런 잘못된 욕심을 버려야 공의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따라 정당하게 성공과 성취를 추구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2. 부지런한 자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요새 부자 되는 비결에 관한 여러 가지 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자 되는 원리를 간단하게 말합니다. 성경은 잘 믿을 때나 열심히 기도할 때 부자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부자 된다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사고를 가질 때 부자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손이 부지런한 사람이 부자가 된다고 합니다.
부지런히 일하면 병균 저항력도 4배로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한 사람이 대개 건강하고 장수합니다. 사실 노는 것도 힘듭니다. 사람은 놀 때 체력이 더 많이 소모됩니다.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닮으려면 일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지런한 사람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게으른 손은 악마의 도구이고 부지런한 손은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게으른 삶은 악마의 일터이고 부지런한 삶은 하나님의 일터입니다. 물론 부지런히 살라는 말은 일만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 이 구절에서 ‘여름에’란 표현과 ‘추수 때에’란 말은 결국 같은 말입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는 보통 여름에 추수를 했습니다. 솔로몬은 일해야 할 때에 일하지 않거나 일을 미루는 게으른 삶은 부끄러운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일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할 때에 일하고 쉴 때에 쉴 줄 아는 삶을 기뻐하십니다.
3. 입을 잘 다스리는 자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이 구절에서 “의인의 머리에 복이 임한다.”는 표현은 의인에게 넘치게 복을 주신다는 뜻과 의인은 복된 생각을 한다는 이중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다.”는 표현도 악인에게는 악한 일이 넘치게 된다는 뜻과 악인은 악한 말을 많이 한다는 이중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머리로 생각도 잘하고 입술도 지혜롭게 잘 관리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 의인은 오래 기억되고 칭찬받지만 악인은 그 이름이 금방 소멸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은 삶에 큰 활력소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쓰면서 “너희를 기억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로마 감옥은 차가웠지만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좋은 기억이 바울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 것입니다.
반면에 나쁜 기억은 무의식 층에 자리 잡아 힘들 때마다 상처를 도지게 합니다. 그 상처가 어떻게 치유됩니까? 시간도 상처 치유에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깊은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잘 치유되지 않습니다. 그런 상처를 치유하려면 좋은 말을 많이 해서 좋은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입술이 인생의 흥망성패를 좌우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본문 8절과 10절에서는 두 번이나 솔로몬은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한다.”고 언급합니다.
사람의 재산 중 가장 소중한 재산은 칭찬하는 입술입니다. 칭찬하는 말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줍니다. 때로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놀라운 치유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런 말 한 마디 때문에 삶의 보람과 의미와 가치를 느끼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만물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언어능력을 주셨습니다. 그 능력을 잘 활용해서 칭찬을 많이 해주십시오. 다른 선한 일도 부지런히 잘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칭찬을 부지런히 잘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입술을 지혜롭게 잘 관리하는 자를 누구보다 기뻐하시고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4. 말씀을 잘 받는 자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계명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리라.” 지혜가 무엇입니까? 계명을 잘 받는 것입니다. 계명을 잘 받는다는 것은 말씀을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입보다 귀가 앞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말씀에 귀가 열리면 축복의 문이 열리지만 입이 미련하게 열리면 멸망의 문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어디든지 가장 사랑 받는 자는 말도 잘 듣고 말씀도 잘 듣습니다. 이기심과 자존심과 자기보호 본능을 극복하고 말씀을 잘 들으면 반드시 복된 삶이 펼쳐집니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 내 말 들어보세요.”라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말씀하소서! 제가 듣겠습니다.”라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 때도 앞자리에 앉으면 말씀에 더 집중할 수 있어서 은혜도 더 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말을 잘 듣는 것은 가장 호감을 주는 요소입니다.
자녀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30년 앞서 철이 들게 됩니다. 그처럼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철든 지혜로운 성도가 됩니다. 사람의 짧은 지식으로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말씀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판단은 마치 총으로 태양을 쏘려는 것과 같고 솜으로 용광로의 불을 끄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은 많은 지식을 쌓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때 가장 바른 길에 대한 안목도 열립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바른 길로 행하면 평안이 주어지지만 말씀을 잘 듣지 않고 굽은 길로 행하면 수치스럽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굽은 길로 행하면 눈빛이 맑지 않게 되고 결국 근심을 끼치고 미련한 말을 하다가 멸망합니다(10절). 반면에 말씀을 잘 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길로 가면 결국 축복 받습니다.
< 인색함을 멀리하십시오 >
요새 월새기(월간 새벽기도)를 발행할 때 필요하면 이미지나 글자체를 꽤 많은 돈을 들여서 사야 합니다. 만약 글자체를 도용해서 책을 내면 글자체의 작은 차이까지 밝혀내는 로봇에 의해 걸려들어 큰 벌금을 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분노의 소리를 냅니다. “아니! 저렇게 인색한 회사가 있나? 글자체 하나 개발하고 저렇게 돈을 받아먹고 또한 글자체를 도용했다고 저작권을 따져서 사람들을 전과자로 만들고 큰 벌금을 물려?”
언뜻 들으면 회사는 불의하고 자기는 의로운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이 개발한 것을 공짜로 쓰려고 저작권 따지지 말고 인색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 오히려 불의하고 인색한 것입니다. 그처럼 대가를 치르기 싫어하는 인색한 사람이 공의를 외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선진국민이 되려면 공의와 인색함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미국에서는 노래 한 곡 다운받아 듣는데 1불 99센트(2200원)를 주어야 합니다. 유명한 목회자의 어떤 설교들은 한 편 다운받아 듣는데 4불 99센트(5500원)를 주어야 합니다. 그래도 미국인들은 “어떻게 그런 큰돈을 요구해? 인색한 사람들이네!”라고 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원하는 사람은 정당하게 대가를 치러서 구입합니다. 그래서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마다 창작에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아무리 ‘창조경제’를 강조해도 저작권을 보호해주지 않으면 창조경제는 되지 않습니다. 창조경제는 저작권만 철저히 보호해주면 저절로 됩니다. 물론 저작권을 인정해주고 보호해주려는 시민의식도 있어야 합니다. 공짜를 좋아하다가 이단에 걸리고 다단계에 걸리고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공짜를 좋아하면 언젠가 공짜가 가장 비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 불행이 없도록 공짜의식도 줄이고 인색한 사람이 불의하게 공의를 외칠 때 동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짜로 주면 고맙게 사용하되 대가를 요구하면 인색하다고 소리치지 마십시오. 그렇게 소리치면 오히려 자기 인색함만 드러납니다. 비용에 비해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면 그냥 안 사면 됩니다. 그렇게 안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다음은 경영자의 몫입니다. 그때 가격을 내려 더 많이 팔려고 할 수도 있고 원 가격을 고수해서 소수만 가질 특권을 누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돈을 중시하지 않는 장인들은 대개 가격을 안 내리지만 일반 경영자들은 더 많이 팔아서 더 이윤이 생긴다면 대개 가격을 내립니다. 얼마나 정당한 거래입니까?
재정적인 권리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정적인 책임을 지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대가를 치르기 싫어하는 인색한 마음에 영합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공짜의식을 가지고 부당한 요구를 하는 인색한 사람에게 혜택을 주면 신실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혜택이 잘못 쓰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불의한 행동을 보시면 축복의 비를 그치십니다. 그처럼 나눔의 손길을 베풀고도 잘못 나눠서 오히려 축복이 막힌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십일조 논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율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안 내도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십일조가 구약시대 율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바른 믿음을 가졌다면 사실상 이렇게 주장해야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시대 율법이기에 저는 지키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십일조만 냅니까? 더 많은 은혜를 받은 신약시대 성도로서 저는 십일조 대신 십이조를 하겠습니다.”
십일조를 목회자가 내라고 강요하는 것도 꼴사납지만 그것이 구약시대 율법이라면서 안 내겠다고 주장하는 것도 꼴사납습니다. 십일조는 구약 시대에 비전과 사역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랑과 책임의 표시로 설정된 계명입니다. 율법적인 십일조의 개념은 신약시대에 없어졌다고 해도 그 의미와 취지는 구약시대의 십일조 개념 이상으로 여전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또한 십일조 논제는 이단들이 기존 교인들을 미혹하려고 사용하는 여러 논제 중의 하나입니다. 이단들은 십일조가 구약시대 율법이라면서 자신들은 헌금에 초연한 것처럼 기존 교인들을 미혹해 끌어들입니다. 그 다음에 십일조 얘기는 안 해도 더 심한 작전과 작업으로 재산을 무섭게 털어갑니다. 즉 교주로부터 특별선택을 받는 얘기, 종말 얘기, 귀신 얘기 등으로 두려움과 공포감을 주어서 몸과 마음과 재산을 무섭게 말아먹는 것이 이단들의 전략입니다. 그러므로 이단들이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율법이라면서 미혹하는 논리에 빠지면 안 됩니다.
십일조 논쟁으로 기존 교인들을 미혹한 후 약탈하는 이단들의 뻔한 전략이 왜 통할 때도 생깁니까? 일부 교회가 십일조를 너무 강조한 것이 빌미가 된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사실 십일조를 더 내면 더 축복받는다는 얘기도 엄밀하게 말하면 잘못된 기복주의입니다. 또한 대형교회에서 넘치는 십일조를 잘못 사용한다는 의심도 십일조 논쟁의 빌미가 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소형 교회에서 성도들이 십일조의 책임을 한 후 누가 보기에도 잘 쓰고 잘 선교하고 잘 나눈다면 어느 누가 십일조를 무조건 욕만 하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자에게 십일조 논쟁은 무의미합니다. 사랑하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결국 내라는 십일조 논쟁도 우습고 안 내겠다는 십일조 논쟁도 우스운 것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도 있습니다. 만약 십일조의 거부가 개인적 확신의 발로가 아닌 인색함의 발로라면 그 인색함은 깨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 인색함이 의로 포장되면 더 안 됩니다.
가끔 전화로 어떤 분이 말합니다. “월새기를 천 원에 한 권만 보내주면 안 됩니까?” 저희 팀원이 문서선교의 특성과 인력의 부족을 들어 정중하게 거절하면 대부분 수긍합니다. 그러나 간혹 책을 많이 팔아먹으려고 그러는 줄 알고 기분 나쁘게 전화를 끊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분은 월새기 매일의 말씀 끝에 <월새기 신청 로고>가 있는 것도 언짢게 생각합니다. 한 영혼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월새기를 보급하려는 희생 측면은 보이지 않고 책을 더 팔아먹기 위한 장사 측면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월새기를 많이 팔아먹어서 이윤이 조금이라도 남는다면 언짢은 기분이 이해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도 그렇게 언짢게 여길 일이 아닌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지금까지 8개월 동안 월새기 사역을 하면서 인건비까지 포함된 수입 지출 결과에 의하면 책 1권을 1000원에 팔 때마다 대략 1000원의 마이너스가 발생합니다. 무상으로 기증하는 곳도 꽤 많습니다. 그 마이너스 재정을 뜻 있는 분들의 후원으로 보충해 월새기 문서선교 사역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월새기는 팔수록 마이너스입니다. 그렇게 책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혜택을 드리는 대신 책이 좋다고 여긴다면 최소한 10권을 구입해서 주변에 나눠주는 책임 하나만은 이행해달라고 ‘최소한 10권 주문’이란 조건을 단 것입니다. 그 책임은 외면하고 “천 원에 1권만 보내 달라! 한 영혼이라도 더 생각하는 것이 의가 아닌가?”라고 하면서 따지고 들어오면 전화를 받는 월새기 팀원도 마음이 상해지고 난처해질 때가 많습니다. 자신은 의로운 주장을 한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들은 그 모습을 인색함의 표출로 볼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월새기 10권을 받으면서 더 많은 금액을 보냅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10권 금액을 보내면서 한 권만 보내달라고 하고 나머지는 다른 필요한 곳에 보내달라고 합니다. 그런 사랑을 받기에 상당히 많은 분량을 무상으로 교정기관과 병원 등으로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은혜의 소통입니까? 비전 공동체를 위해 기본적인 책임을 져야 할 때는 기쁘게 지십시오. 인색함을 깨뜨려야 축복의 문도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은 공의를 바탕으로 한 책임적인 삶과 마음에 넘치게 부어집니다.
살면서 좋은 사람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것은 차별과 편견이 아닙니다. 인색한 사람과 어울리면 하나님의 축복도 막힙니다. 반면에 은혜로운 사람과 어울리면 자기 마음도 넉넉해지면서 하나님의 축복도 넘치게 됩니다. 혹시 하나님이 베풀 능력을 주시면 베푸는 은혜도 잘 분별해서 인색하고 불의한 사람이 아닌 신실하고 의로운 사람들에게 베풀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사랑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길입니다. 그처럼 공의를 바탕으로 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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