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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암4: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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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구하라 목사 |
참고 : |
아모스4장1절-13절
찬송가 151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우리는 신앙생활 잘 한다고 하는 것을 내심 예배 잘 드리고, 헌금 떼어먹지 않고 후하게 드리고, 착한 일을 도모하며 사는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이런 몇 가지 종교행위들을 잘 지키면 죄 안 짓고 사는 것이라 생각하고 남을 도우면서 소자에게 물 한 모금 대접하면 칭찬받는 선한 삶이니 그 다음은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이것을 복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표현하려는 마음이 제게 없습니다. 그건 종교생활에 불과하니까요)
그래서 죄에 대해 지적하고 회개를 말하며 나의 존재의 악함을 깨달아야 한다고, 착한 일 하면서 나의 선을 쌓으려는 그 시도 자체가 하나님이 저주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오히려 복음을 경멸하면서 왜 그렇게 죄에 집착하느냐고 ‘너는 왜 그리 심각하게 예수를 믿느냐고’ 비웃어 버립니다. 바로 그 지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오직 이 불경건하고 악한 자를 구원하시겠다는 언약에 근거한 것이라는 내용은 무엇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무지의 소치입니다.
즉, 인간은(나는) 불경건에서 스스로 벗어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구원을 단지 과거의 것으로만 이해하여 구원 받았으면 기쁘고 해피하게 살아야지 왜 그렇게 죄만 붙잡고 슬퍼하면서 사느냐, 착한 일 하면서, 소자에게 물 한 모금 대접하면서 살면 되는 거 아니냐, 내가 기쁘게 살면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거라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성경을 단지 표피적으로만 알고 깊은 진리의 하늘적 의미는 모르는 무지함의 자연스런 표출입니다. 그런데도 부끄러워 할 줄 모릅니다)
내가 착한 일을 조금 한다고 하여 나의 부정과 불경건, 패역함과 불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인간의 죄가 그렇게 쉬운 것이라면 예수가 뭐하러 피를 철철 흘리며 십자가에 달려 절규를 하겠습니까? 구원이란 과거에 나의 신분이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접붙임 받은 그 신분의 구원 하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내가 여전히 악하고 추한 자임에도 예수가 그 구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은혜를 부으시며 십자가의 피를 흘리며 구원을 이루시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의 구원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몇 가지 착한 일과 규범(율법이라고 여기는)을 지키고는 선하게 살고 있다고 또한 의롭게 살고 있다고 착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 혹은 ‘의’라는 개념은 행위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 있지 않고 상태와 존재의 개념임을 모르는 매우 초보적인 무지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이 단지 몇 가지, 그것도 인간이 상정한 몇 가지 착한 일을 하면 의를 획득하고 착하게 되는 정도의 일을 대신 해결하기 위해서 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인간의 형태를 하시고 내려와 채찍에 맞으시고 침뱉음을 받으신단 말입니까?
이것이 인간이 가진 뿌리 깊은 죄성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착한 일을 해서 스스로의 가치와 자격으로 하나님께 당당하게 구원을 이루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인간이 왜 착한 일을 하려고 합니까?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의 존재 자체가 아담처럼 되고자 하는, 오로지 자기만 사랑하는 자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면 되는데,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데, 인간은 절대 하나님 앞에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기를 거부하고 자기가 착하게 되어 그 어여쁜 자기를 당당히 하나님 앞에 내놓고 복종과 자백이 없이 천국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동기가 바로 인간을 착한 일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본질이며 우리 신자들의 심령에도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죄라는 실체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임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만 붙들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언제 착하게 살아서 구원을 이루는데 일조하라고 했습니까? 성경에도 없는 내용을 인간이 ‘당연히 그래야지’ 이렇게 만들어서 지키고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암4:4-5을 다시 읽겠습니다.
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잘 보십시오. 북이스라엘에게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탁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아침마다 희생제사를 드리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고 수은제와 낙헌제를 열심히, 정성껏 최선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와 십일조와 희생제사를 범죄이며 죄를 더하는 것이라고 평가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건 너희가 기뻐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은 예배를 정성껏 드리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선한 것이고 예배를 드리면 의롭게 된다고 믿어 버립니다. 북이스라엘이 얼마나 예배를 열심히 정성껏 드렸는지 아침마다 희생제물을 잡아 양을 바쳤고 삼일마다 소득의 십일조를 빠짐없이 철저히 바쳤고 감사제의 한 종류인 수은제와 자원하여 드린 낙헌제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죄랍니다. 죄를 더한 것이랍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렇듯 우리가 생각하는 착한 일을 열심히 정성껏 하다고 하여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되고 내가 거룩하게 되고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최선으로 예배를 드려도 그것이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십일조와 헌금을 힘에 넘치게 하여도 죄를 더하는 것이 될 수 있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자원하여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이 죄로 평가하실 수 있습니다.
잘 보세요. 제가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가진 뿌리 깊은 죄된 생각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내가 착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잘 살아내고 행복하게 살아내고 착하게 살아내면 그게 예수 믿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살아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만 의지하는 것, 시간이 갈수록 더욱 예수만 의지하고 예수에 의해서만 사는 인생이 되는 것은 점점 더 나를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을 수반합니다.
내가 착하게 살고 의롭고 선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바로 예수만 의지하게 되지 않고 나의 자아의 가치와 자격을 의지하게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만 의지하고 예수만 순종하게 되려면 ‘나’라는 자존심과 착함과 ‘나’라는 자격과 가치는 예수에게 빼앗기고 진리에 의해 차압당하면서 오직 내 안에 예수만이 생명이며 구원이며 소망이라는 진짜 고백이 격발되어 나와야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나의 착함에 의한 자심감이 생기고, 선행하는 내가 자랑스럽고, 죄 안 짓고 사는 내가 대견스럽다면 그건 자기가 격발되어 나오는 것이고 자아를 신뢰하는 것이지 예수만 의지하는 겸손과 무자격자됨을 인정하는 은혜 받은 자의 태도가 결코 아닙니다.
6-11절을 보면 계속해서 반복되는 어구가 있습니다.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이 방법도 쓰고 저 방법도 썼지만 그들은 절대 마음으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희생제물을 잡아 정성껏 제물을 바치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제와 자원제를 드려도 마음으로는 돌아오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정해 놓은 착한 일을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 착한 일을 근거로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네 이렇게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하나님 백성된 근거는 오늘도 오직 나의 죄인됨을 십자가로 덮고 들어오시는 그 은혜만을 믿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드린 그 예배와 제물과 헌금은 전부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이 없는 자기들의 안위와 자기들의 행복과 자기들의 만족을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그걸 죄라고 분명하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13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정도의, 그런 수준의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이 한정하고 인간이 제한한 정도의 신이 아닙니다. 그 분은 인간이 정해 놓은 범위에 한정되지도 않고 인간의 감각에 포착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예배라고 정해놓은 몇 가지 순서와 방식에 들어와 그걸 자기 기쁨으로 삼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드리는 몇 푼의 돈으로 그 분의 인정이나 능력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아무리 자원하여 감사로 드리는 어떠한 의식이라도 그것들로 일희일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결코 인간에게 포착되지도 인간의 상상력 안으로 들어오시지도 않는, 인간과 자연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을 함부로 내 안에 나의 생각과 방식으로 내 원하는 그림으로 가졌다고, 안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을 그들이 원하는 방식과 형태로 자기들의 부와 행복을 위해 조정하는 것을 예배이며 헌금이며 제사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죄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자기의 뜻을 그 선택한 백성들에게 알리시는 주권자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것이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정성을 드리는 기특함이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착함이나 가상함도 하나님께 도움이 될 수도 없고 방해가 될 수도 없고 그 분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내 생각으로 하나님께 착한 일을 하겠다고 죄를 짓지 마시고 하나님과 예수, 그 진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가 정한 몇 가지 자기 만족의 착한 일들을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있다고 자만하지도 마십시오. 오직 그 은혜에만 기대십시오. 오늘도 나의 죄된 본성을 회개하고 은혜의 십가가만 붙드시는 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은혜의 하나님, 복음은 분명 인간이 생각하는 어떠한 착한 행위도 죄라고 정의내리고 오직 예수만 기대는 절대 예수의존적인 삶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라고 가르치지만 교만한 인생들은 결단코 자기가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고 그 십자가 앞에 무릎 꿇기를 거부하며 자기 스스로 착해지고 선해지려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습니다. 아버지, 은혜의 복음을 깨닫도록 우리의 무지한 영을 깨우쳐 주옵소서. 오늘도 예수 앞으로 우리의 열심과 정성의 예배행위를 포기하고 참으로 우리의 심령이 예수께로 돌아가기를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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