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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암6: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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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구하라 목사 |
| 참고 : |
아모스 6장:1절-14절
찬송가 481장(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
아모스 5장에서 시작된 애가는 오늘 본문인 6장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절에서 ‘화 있을진저’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호이’입니다. ‘호이’는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인해 탄식할 때 내뱉는 감탄사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애가를 부르며 탄식을 쏟아내는 이유는 그 시대를 이끌고 있는 사회 지도층의 타락과 그로 인해 이스라엘 사회 전체에 만연된 영적 교만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재물’은 그 시대와 사회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그래서 재물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 사회의 상류층이자 지도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4-6절)
아시다시피 아모스 선지자가 사역했던 시기는 여로보암2세 때로, 한 마디로 전례없던 ‘풍요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풍요의 시기였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생활이 풍족했던 것은 아닙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마찬가지로, 아모스 선지자 시대에도 똑같이 만연해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풍요로운 시대였지만, 그 풍요로움의 혜택이 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돌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층 간의 단절과 갈등을 심화시키는 기폭제로 작용했습니다. ‘나’만, ‘내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사고가 만연했고, 따라서 ‘요셉의 환난’ 즉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염려하지 않는 것이 그 사회를 이끄는 지도층의 모습이었습니다.
재물을 가진다는 것은 전혀 비난 받을 일이 아닙니다. 근면성실하게 일해서 돈을 벌고,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그리고 그것을 내 가족과 자녀를 위해, 그리고 불우한 이웃을 위해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재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재물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되면 그 재물을 소유한 사람의 삶 자체가 재물의 노예로 전락해버립니다. 재물을 모으기 위해 각종 탈법과 부정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사람들이 주변의 이웃과 조국, 나아가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미래를 염려하겠습니까? 필시 자신이 모은 재물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어느 날엔가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가진 이들에게는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거기에 따른 책임도 있는 법입니다. 부유층이 누리는 호화로운 생활 이면에는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있기 마련입니다. 선지자가 탄식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8절에서 이렇게 표출되어 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 여호와가 당신을 두고 맹세하셨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에 가득한 것을 원수에게 넘기리라 하셨느니라(8절)
이 구절에서 ‘궁궐’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르몬’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를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물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착각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들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결국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7절)
앞서 5장에서 아모스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이 멀지 않았음을 선포했습니다. 6장에서 선지자는 재물의 힘을 빌려 그것으로 자신의 요새를 삼고, 그 사회를 앞장서서 이끌던 지도층이라고 떠들던 자들이 그날에는 ‘앞장서서’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경고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서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12-13절)
아모스 선지자는 당시의 시대를 가리켜 ‘비상식적인 시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말들이 바위 위에서 달리거나 소가 거기서 밭을 가는 것이 상식일 수 없지만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시대를 향해 선지자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탐욕에 찌든 죄악은 인간의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키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상식을 상식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사람도 무시한 채 자기욕망만을 유일신으로 삼는 무한 이기주의의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우리가 사는 시대 역시 비상식이 상식처럼 통용되고 용인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3절에 ‘허무한 것’으로 번역된 단어 ‘로-다바르’와 ‘뿔들’로 번역된 단어 ‘카르나임’은 이스라엘이 군사력으로 승리를 거두었던 성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분명 자신의 힘을 기뻐하며 자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의 그러한 승리와 자만은 결국 ‘허무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선지자는 냉소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재물을 요새로 삼고 그것을 자신의 힘인 것처럼 자랑하는 인생은 결국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허무한 것’으로 끝나지 않겠습니까? 참된 구원은 눈에 보이는 요새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빠져나와 참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께서 가신 길을 겸손히 뒤따르는 것, 이것이 ‘비상식적인 시대’를 사는 바른 지혜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참으로 음란합니다. 성적으로 타락해서 음란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고, 손에 쥘 수 있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재물을 더 신뢰하기에 음란합니다. 주님, 재물이라는 절대권력 앞에서 늘 갈대처럼 흔들거리는 우리의 마음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오늘도 우리 귀에 선명하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그 음성을 따라 믿음의 길을 걷게 하여주옵소서. 그래서 언젠가 홀연히 닥치게 될 ‘여호와의 날’에 부끄럽지 않는 우리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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