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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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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91382100 |
2009년 10월 18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장 1절~16절
설교제목 : 낳음의 영성
<쉄 모임 이야기>
얼마전 쉄 모임에서 ‘영성과 여성성’을 주제로 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는데, 그 모임을 앞두고 제가 쓴 초대의 글이 있었습니다. 그 중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기독교 영성에 대한 논의 중에서 빠트릴 수 없는 핵심적 주제 중에 ‘여성성’이 있습니다. ‘여성성’은 남성성과 대칭되는 개념으로서 기독교 2천년 역사 동안 우리 기독교가 간과해왔던 분야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 기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남성성에 몰입해 있었습니다. 교회의 철학, 즉 기독교 신학도 남성성적이었고, 교회의 구조와 체제도 남성성적이었습니다. 권위주의적이었고, 권력지향적이었고, 공격적이었고, 군림형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영성의 본래 뜻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영성의 본래 의미는 반(反) 권위적인 것이며, 비(非) 권력형적이며, 방어적인 혹은 포용적인 것이며, 섬김형입니다. 종합적으로 말씀드려서 기독교 영성은 한마디로 여성성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여성적 존재이다.” “우주 생태계는 생명체들의 어머니이다.” “아버지를 닮아 있는 인류의 문명 틀은 어머니를 닮는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 글이 오늘 설교의 결론입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좀 더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이러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모스를 낳고, 아모스는 요시야를 낳고,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무렵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아우들을 낳았다.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뒤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그 모든 대 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으로 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빌론으로 잡혀 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이다.(마태 1:1~17)】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족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족보’라!! 우리 교우 여러분들은 족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족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신가요?
우리는 ‘족보’에 대해서 가부장적으로 생각해왔습니다. “나는 누구누구의 몇 대 손이야. 우리 집안은 언제 언제 영의정을 지내신 누구 누구의 후손이야. 우리는 상놈집안이 아니고,뼈대 있는 양반 가문이지!” 이게 우리네 한국인들의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이었고, 혈연적 공동체에 대한 자기 정체성이었습니다.
오늘 성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부장적 정서가 짙었던 마태, 그리고 민족주의자였던 마태, 고지식하기 이를 데 없었던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에 대한 기록, 즉 마태복음은 굳이 첫장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언급합니다. 마태의 말인즉 “예수님은 뼈대 있는 이스라엘 양반가문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태의 ‘예수족보기록’에는 마태도 몰랐던 어머어마한 영성적 메시지가 깃들어 있었는데, 그건 “진리에는 낳음의 차원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비록 마태는 가부장적이며 민족주의적이며, 고지식한 남성권력적 취향으로 그의 복음서 첫 장을 채웠습니다만, 그의 기록 속에는 그가 알지 못했던 엄청난 메시지가 깃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진리에는 낳음의 차원이 있도다.”
<여성성의 낳음 철학>
가락재에서 쉄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제 마음 속에서 정리된 ‘영성과 여성성’ 이야기에 대한 결론은 “여성성의 핵심은 곧 낳는 것이다”였습니다. 즉 “진리의 세계란 곧 낳는 것이다”, “하느님의 진리는 낳는 것이다” …… 그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하느님의 진리에 합당한 삶이란 곧 ‘낳는 삶’입니다. 정복하는 삶이나, 빼앗는 삶이나, 만드는 삶이나, 세우는 삶이 아닙니다. 오직 낳는 삶입니다.
이런 비교가 가능할 것입니다.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제국을 세웠던 징기스칸과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제자를 거느리고 있는(?) 예수님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징기스칸과 예수님의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인가요? 그건 징기스칸은 대제국을 ‘세웠지만’, 예수님은 대제국(?)을 ‘낳았습니다’. 그 차이입니다. 징기스칸은 남의 것들을 빼앗아서 내 뱃속을 채웠지만, 예수님은 나의 것들을 키워서 남들의 창고를 채워주었습니다. 징기스칸의 방식은 남의 것들을 빼앗아 내 것으로 삼는 남성폭력적인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방식은 내 것을 키워서 남을 위해 나누는 여성영성적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징기스칸의 제국은 불과 수백년 만에 무너져 버렸지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의 적용>
그러므로 우리는 낳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만드는 삶이나 세우는 삶이나 빼앗는 삶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남의 것들을 내 것으로 삼는 폭력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내 안에서 키워서 밖으로 내 놓는’ 낳는 삶을 지향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영성적인 삶이며, 우리가 잃어버렸던 ‘여성성적인 것’입니다.
아주 쉬운 예로서 결혼에 대해서 말해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훌륭한 남편감 혹은 좋은 아내감을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산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차원도 분명히 있습니다만, 그러나 더욱 더 중요한 차원은 결혼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계속해서 ‘낳아가는’ 삶의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훌륭한 남편’은 남편 스스로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또 그 남편감이 원래 그렇게 훌륭해서가 아니고, ‘훌륭한 남편’은 좋은 아내가 결혼생활을 통해서 ‘낳아가는 것’입니다. 좋은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아내는 훌륭한 남편이 결혼생활을 통해서 계속해서 낳아가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정리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낳음의 영성’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낳음의 영성’이라는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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