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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20: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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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만열 교수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132077 |
더 복된 삶
(사도행전 20:35)
2013년 3월 10일 주일예배
이만열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이번 주 제 페이스북에 <복의 중개자와 복의 근원>이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신사참배문제자료집을 내려고 하는데 꽤 경비가 드는 것이어서 이걸 김동호 목사께 상의했더니, 그는 자기 페이스북에 이 사실을 올려 1주일도 안돼 그 큰 금액을 모금해 주었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해서 쓴 것입니다.
이 모금 과정을 바라보면서 저는 김동호 목사님의 여러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가 ‘복의 중개자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복의 통로’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이쪽의 복을 저쪽으로 전해 같이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중계자는 그 중보의 역할을 통해 세상을 상생케 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김 목사님이 몇 달에 한번씩 페이스북을 통해 모금하여 필요한 곳에 공급한 것을 보면, 그는 인간의 선한 동기를 자극하여 인간의 메마른 땅을 풍요로 밭가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실제로 증명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번 일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는 말씀입니다. 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아브람은 복의 근원이 되었고 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람과 같이는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로 말미암아 내 이웃이 화목하게 되고 위로를 받게 되며 가난 속에서도 서로를 도울 수 있게 된다면 그 또한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서로의 필요를 헤아리고 공급을 평준하면서 상생의 사회를 이룩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 또한 복의 근원이 되는 길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의 중계자는 복의 근원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일찍부터 오복(五福)을 말해 왔습니다. 수(壽) 부(富) 귀(貴) 다남(多男) 건치(健齒) 등을 일컬었습니다. 오래 살고, 부자가 되고, 귀한 지위에 올라 영예롭게 되고, 자손이 많고, 건강한 치아를 갖는 것입니다. 건강한 치아가 5복에 든다고 한 것으로 보아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5복을 좀 점잖게 말하고 있습니다.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입니다. 오래 살고, 부자가 되고, 몸과 마음이 편안한 데다 유호덕, 고종명을 더하여 복의 영역을 넓히고 업그레이드시켰습니다. 유호덕은 덕(德)을 닦는다는 뜻입니다. 고종명은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오래 살고, 부하고, 편안하게 살지만, 남의 손가락질을 받고 사는 이도 있습니다. 이런 삶 대신 덕을 쌓아야 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유호덕입니다.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다는 고종명은 생의 최후를 장식하는 복입니다. 최후의 죽음 때문에, 그 전의 복된 삶마저도 값없는 인생으로 날려버리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의롭게 최후를 마치거나,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죽는다면, 그의 삶이 수, 부, 강녕, 유호덕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는 복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복을 누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고종명만 잘 하면 다른 복도 누린 것처럼 칭송할 수 있었습니다. 최후를 잘 장식함으로 역사에 남게 된 인물이 더러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도 복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번역할 때에 진리의 말씀을 복음이라 했습니다. 복음은 ‘복된 소리’라는 뜻입니다. 원래 이 말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었고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기쁜 소식’을 뜻하는 단어가 우리나라에서는 ‘복된 소리’즉 복음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번역과정에서 복을 좋아하는 한국문화의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먼저 구약 성도들의 신앙고백이라 할 시편에서 복을 묵상해 봅니다. 시편 제 1편이 바로 복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편이 말하는 복있는 사람은 정의로운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오만하지 않고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시편 112편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119편에서도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시편기자들의 고백에 따르면, 그들은 ‘이러 저러한 것’이 복이다, 혹은 ‘어떠 어떠한 것’이 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러 이렇게 하는 사람이 복있다’ 혹은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복을 정태적(靜態的,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 묘사하지 않고, 동태적(動態的, 움직이는 어떤 것)인 것과 관련시켜 규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이란 가만히 앉아서 받거나, 머리위에 그냥 쏟아지는 것이 아니고, 행동을 통해서 얻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실천적인 열매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동양적인 복과는 다릅니다. 어떤 이는 ‘성공은 대박이 아니라 누적입니다’라고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시편기자들은 복이라는 것이 가만히 누워서 얻는 대박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로 주어지는 실천의 누적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구약에도 장수와 부귀, 자녀와 평안을 중히 여기고 이를 복으로 간주하는 사상과 내용이 없지 않습니다. 자식 많은 것이 축복이라 했습니다. 성문에서 담판할 때에 자식이 많은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물질적인 복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구약의 복 사상은 한국의 전통적인 복사상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복 사상에는 철저히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이 있습니다. 선한 일에는 상을 주지만 악한 일에는 반드시 벌을 내린다는 원칙입니다. 때문에 구약의 복 사상에는 철저히 정의의 관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약에는, 마태복음 5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함으로 얻는 즐거움과 함께 복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복이 신약시대에 와서 하나님 나라와 관련, 승화되고 있습니다. 구약의 복이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은사를 의미했다면, 신약에서는 이를 승화시켜 구원의 완성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의로운 자가 누릴 행복이 복이라고 일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복을 언급하게 되면서 한국 기독교인들의 복 사상이 잘못되지 않았나, 잘못된 복 사상 때문에 우리 사회에 기독교적 가치관 확립에 실패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곤 합니다. 한국에는 그리스도인이 많고, 지도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비율이 훨씬 높습니다. 지난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정권에서도 그리스도인이 많이 등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회에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그 수치만큼 스며들지 못하고, 선한 영향력도 거의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놓고 늘 고민해 왔습니다. 이원론적 신앙행태 못지 않게 한국 교회의 잘못된 복사상도 한몫을 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릇된 복사상이 한국 교회는 물론 사회도 오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복을 생각하면서 땀흘리지 않는 소득이나, 공짜 사상을 연관하게 됩니다. 옛부터 땀흘리지 않은 소득을 선호했고 그것을 복이라고 했습니다. 공짜를 가장 큰복으로 치부했습니다. 이 점은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공짜는 복이 아닙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게으름을 조장하며 또 뇌물로도 가장 잘 활용하기 때문에 반윤리적이요 반사회적입니다. 공짜는 인간의 근로심을 좀먹고, 인간의 나태를 조장하는 독약입니다.
공짜사상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데살후, 3:10)는 성경말씀에도 반합니다. 이 말씀은 근로사상을 강조한 하나님의 명령이면서, 공짜사상을 배격하는 교회의 중요한 선언입니다. 땀흘려 얻은 소득이 복입니다. 게으름피우다가 얻은 요행을 은혜라는 말로 포장해서는 안됩니다. 입시철만 되면 새벽기도회가 번성하고 철야기도로 법석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가치관과는 다릅니다. 입시생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려면, 평소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중보기도와 함께 평소에 그 학생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교회가 복을 구하는 방식은 세속적인 방식과는 출발점부터 달라야 합니다.
한국 교회에 복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입니다. 당시 새마을운동을 통해 ‘잘 살아보세’를 외치고 있을 때, 그와 때를 같이하여 한국 기독교회 일각에서도 복 바람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요한 3서 2절에서 언급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에 근거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네 영혼이 잘되는 것은 예수 잘 믿는 것에 갖다 붙였고, ‘범사에 잘 된다’는 말씀은 물질적인 축복으로 바꾸었으며, ‘강건하기를 기원한다’란 말은 건강하게 되는 것으로 대치했습니다. 이렇게 예수 잘 믿으면, 물질적으로 돈을 잘 벌고, 건강하게 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 세 요소를 강조하면서, 삼박자 구원 혹은 삼박자 축복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데에는 공헌했다고 하지만, 성경의 복 사상을 ‘물질과 건강’으로 규정함으로 한국 교회를 오도하고 세속적인 길로 이끌었으며 교회마저 타락시켜 가고 있습니다. 성경의 복 사상을 한국의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는 한국에서 또 하나의 기복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기복종교는 사회 변혁적인 힘이 없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도 한국의 다른 기복종교처럼 사회를 개혁하는 힘을 거의 상실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에 그리스도인이 많고 나라를 이끄는 고위직에 올라갈수록 기독교인 비율이 높은데도, 기독교적 가치관이 제대로 수립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같이 왜곡된 복 사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머리털 깍인 삼손이 되어 버린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복을 말하면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복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강론하신 복은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11절에 보이고, 누가복음 6장 20-23절에도 보이며, 오늘 읽은 사도행전 20장 35절에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이 청결함, 화평케 함 그리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 이것들을 바로 복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가난함과 애통함, 온유함을 묵상하다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말라함과 긍휼함과 심령의 깨끗함에 이르게 됩니다. 평화를 만드는 것 위에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가 누리는 복에도 미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의를 행하면 귀하게 되고 명예를 얻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실제로 의를 위해 고난받은 많은 사람들이 지상에서 그 보상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의를 행하다가 핍박을 당하는 것, 바로 그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큰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복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 자체가 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 남겨진 아름다운 역사와 전통은 보상받지 않고 죽어간 많은 의로운 자들의 희생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름없이 죽음을 당했습니까. 우리가 오늘날 이만큼 인권과 민주화를 누리고 사는 것은 의를 위해 핍박을 당하며 이름 없이 죽어간, 거룩한 이들의 희생의 은덕 결과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자들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런 선진들을 보면서 무임승차하고 있지 않는지 늘 반성하고, 그 값을 역사에 치르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은 보상없이,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 복되다고 언명합니다. 그렇게 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이 여덟 개의 복을 순서를 따라 가면 복의 품격이 한 단계씩 높여갈 수 있다고 설명한 해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가난함이 없이는 애통함이 없고, 애통함이 없이는 온유함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소급해 가면 맨 뒤에 언급하고 있는, 의를 위해 핍박받는 것이 복이 있다는 그 복이 가장 꼭지에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게 됩니다. 정의롭게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한 복이라는 해석이지요. 보상없이 의를 위해 핍박을 당하는 것이 복이라면, 여기서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간에 차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그리스천으로서 큰 자부심을 가집니다. 이런 말씀이 있음으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의 본체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의 실현을 위해 핍박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의는 평화를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복되다는 말씀 앞에 평화를 만드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8개의 복의 배열에 주목해야 합니다. 따라서 정의는 평화를 전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평화 없이 정의만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의를 위해 핍박받는 이 최후의 가장 위대한 복은, 평화를 만드는 것과 함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의 평화 즉 샬롬과 함께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태복음 5장의 복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이 복을 추상적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8복을 간절하게 기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매일의 생활에서 하루의 시작을 이 복을 간구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저 스스로 이 복을 구하고 이 복을 실천하기 위해 주님의 도우심에 의지합니다. 이 복으로 내 영성을 채워나갈 때 세속적인 유혹을 이겨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또한 이 8복이 한국교회 속에 보편화되어 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한국 교회를 생각하면서, 저는 이 8복 중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에 주목합니다. 교회든 신자든, 이 복을 받아야만 세속적인 욕망에서 자유로와질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유혹을 물리치고, 물질만능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한국 교회가 물량주의와 매머니즘(拜金主義), 세습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교회 지도자 선출을 금권선거로 오염시키면서 배금주의의 포로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시험과 유혹을 극복하는 영적 능력은 바로 가난함이 복이라는 청빈강조의 신앙에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청빈을 강조하는 이 복이 아니고서는 한국 교회의 이 탐욕적 현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를 위해 늘 기도합니다. 그 중 빼놓지 않는 것은 한국 교회가 가난을 실천하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갈릴리의 그 버림받은 어촌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집한 간, 옷 두벌을 갖지 않으시고 그 무지랑이들처럼 살아가신 그 예수님을 본받도록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가장 가난한 자로 사신 그 분과 같은 그런 삶이 아니고서는, 한국 교회가 새로이 영성을 회복할 수 없고, 교회가 영적 지도력의 공급원이 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가 어쩔 수 없이 가난하게 사는 것을 두고 가난실천이라 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 여유 있는 자가 가난하게 살려고 할 때, 그것이 가난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삶을 절제, 절약하면서 남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가난 실천이란 예수님이 가난하게 사심으로 모범을 보여주신 것처럼,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자가 가난하게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절제는 자원낭비와 병든 환경을 몰고 왔습니다. 지구상에 닥치고 있는 이상기온과 기상이변이 인간의 탐욕과 무절제의 결과라고 경고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에너지의 과다 사용은 환경을 오염시키고, 공해를 유발하는 주범이 되었습니다. 단위생산력을 높이려고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는 데서 땅은 병들어갑니다. 농작물의 밀식 재배와 가축들의 밀집 사육은 인간 식생활의 무절제와 탐욕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자원고갈과 환경오염을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치유하는 성경적 대안은 절약, 절제, 가난을 실천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무절제와 탐욕으로 인해 병든 피조세계를 회복하는 성경적 대안은 가난실천을 통한 절제, 절약 밖에 없습니다. 개발 속도를 늦추고, 자손들을 위해서 가용자원을 유보해야 합니다.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는 정직과 신용, 근면과 절약을 바탕으로 한 개신교 윤리에서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개신교 초기의 이같은 윤리는 자본주의 윤리의 건전성을 담보했지만, 탐욕과 낭비로 귀결되는 신자유주의를 막지 못해 인류를 파멸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복을 언급하다보면 복음서에 제시하지 않은 복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 20장 35절의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그 복입니다. 이것도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언급한 8복과 함께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복입니다. 이것은 나눔의 복이요, 주는 복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이 복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가장 먼저 제시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이 복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하고 더 얻는 것을 복되다고 합니다. 거기에 대해 오늘 말씀은 소유하는 것이 복되다는 복의 정의를 달리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받는 것이 복이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더 복된 것은 주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 베풂을 당하는 것보다 베푸는 것이 더 복되다고 합니다. 우리는 받고 소유함으로써 복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만 <더 복된 삶>은 주고 나누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많은 소유가 복되다는 일상적인 복 관념을 뒤집어(顚倒)버립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남에게 주면서 가난을 실천하는 자가, 많이 가진 자보다 복되며, 많이 가지려고 탐욕을 부리는 자보다 훨씬 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난한 자가 오히려 부자보다 더 부자가 될 수 있는 기막힌 반전(反轉)이 여기서 가능하게 됩니다.
세상은 많이 가진 자가 있음으로 풍요롭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베푸는 자가 있음으로 넉넉하게 됩니다. 경제 성장이 공동체의 행복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나눔과 베풂이 행복의 지름길임을 가르칩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강하다는 미국의 뉴욕 월가를 시발로 하여 세계로 번져나가고 있는 1:99의 투쟁은 탐욕스런 자본과 가난한 자를 짓밟은 시장만능주의가 빚어낸 결과입니다. 이를 극복하는 가장 원초적인 출발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이 멍들어가는 공동체를 생명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초대교회가 실천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은 그 나눔의 생활화입니다. 이것이 <더 복된 삶>의 길입니다.
모든 것은 나누면 작아집니다. 저급한 가치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고급가치는 나눌수록 불어납니다. 예술과 문화와 학문과 사상은 나눌수록 커지고 불어납니다. 사랑과 희망, 위로와 평화도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지는 것입니다. 저급한 가치로 보이는 물적 가치도 사랑으로 나누면 5병2어의 기적을 불러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나눌수록, 줄수록 더 커지는 기적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자의 정의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이 가진 사람을 부자라 이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많이 베풀 수 있는 자, 많이 주는 자가 부자입니다. 세상에는 많이 가졌지만 남에게 베풀지 못해 가난하게 된 자들이 많습니다. 가진 것은 많을지 몰라도 나누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가난한 자입니다. 그와 반대로 많이 가지지는 못했지만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함으로 부자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가난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부자입니다. 우리가 많이 갖지는 못했을지라도, 베풀 수 있는 신앙인이 될 때, 또 베풀려고 노력하는 신앙인이 될 때, 부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많이 베풀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공급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끊임없이 실천하려고 할 때, 온 우주를 소유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더 잘 줄 수 있도록, 더 잘 베풀 수 있도록 늘 공급해 주십니다. 이 기적 같은 약속에 대한 응답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까. 이 약속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더 복된 삶>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이 복받는 자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복받을 수 있도록,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복의 중계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브람처럼 다른 사람들이 나로 인해서 복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내 주변이 복받게 되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제가 동역하고 있는 희년선교회 식구들은 어느 곳에 가든 우리로 인하여 주변이 복을 받도록 해 달라고 늘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웃집에 가서도, 가게에 들러서도, 음식점에 들러서도, “하나님, 당신의 자녀인 내가 이곳을 출입함으로 이곳이 복받게 해 주십시요”라고 늘 기도하십시다.
오늘 읽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은 약한 자를 돕는 일에 앞장서라는 말로 연결됩니다. 구체적인 실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예루살렘 공동체는 주는 것과 나눔을 통해 공산주의자들도 부러워하는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에 보이는 안디옥 교회는 자신들이 흉년들어 어려운 가운데 있었지만 유대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연보하여 그들을 도왔습니다. 나눔을 통해 나보다 더 힘없는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사례는, 구제란 남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렵더라도 도와야 한다는 전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정의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의와 사랑은 주는 것과 나누는 것을 통해서 완성되어집니다. 예수님은 최후에 자기자신마저 주는 희생을 통해서 십자가의 사랑과 정의를 완성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의와 사랑이 동시에 완성된 것이지요. 십자가는 정의와 사랑의 완성이요 결정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복은 가만히 앉아서 얻어지는 대박이 아니라 이렇게 실천과 행동을 통해 얻는 누적된 열매입니다. 우리 모두는 복된 삶을 이미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복된 삶>은 받기보다 주는 것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더 복된 삶>을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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