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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예수 숯불에 생선 굽다

요한복음 한완상 형제............... 조회 수 675 추천 수 0 2015.04.23 22:5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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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21:10-14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134144 

부활 예수 숯불에 생선 굽다(요한복음 21:10-14)

2013년 3월 31일 부활주일 예배
한완상 형제(새길교회 신학위원,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예수 부활 사건은 기독교의 몸이요, 마음이요, 혼이며 그 본질입니다. 부활 없으면 기독교, 교회 그리고 크리스천의 정체성은 무너지고 맙니다. 모든 세상 종교들과의 본질적 다름이 바로 예수 부활 신앙이요, 부활에 대한 공동체적 경험과 고백이 교회의 뿌리일 뿐 아니라 그 가지요 열매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상과 종교와 심오한 소통을 위해서도 예수따르미들은 자기가 누군지, 어떤 신앙과 신학을 가져야 하는지 먼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정체성이 확실해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아름다운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 신앙은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결정적 모멘틈(momentum)이라 하겠습니다. 예수 운동이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겟세마네 고뇌에 이르게 되면서 그 동력이 더 뜨거워지다가 골고다의 처절한 십자가의 자기비움으로 더 힘차게 나아가게 됩니다. 이 고뇌와 고난과 죽음의 과정에서 예수 운동은 세상 문명과 제국의 운동과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운동으로 강렬하게 역사 속에서 육화 되어 나아갑니다. 그것은 힘과 폭력에 의한 새 질서 세우기가 아니라, 스스로 비우고 낮추고 패배하고 죽기까지 우아하게 나아가며 새 질서를 세워가는 사랑의 운동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왕국 곧 Kingdom 세우기가 아니라 사랑지배 곧 Love-dom 세우기였습니다. 부활은 바로 이 사랑의 자기폭발이었습니다.

 

   그런데 1700년의 교회사를 보면 갈릴리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 부활 사건 앞에서 그 동력을 상실해 온 듯합니다. 부활 신앙은 때로 사랑을 통한 평화와 공의의 실현을 개인화 시키고 사사화(私事化) 시키고 추상화 시켜온 듯합니다. 부활신앙은 “나 죽어서 바로 천당으로 가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어 왔습니다. 예수의 사랑지배는 역사적 실천이며 공동체적 과제이며, 세속의 폭력적 권세(문명이나 제국)에 대한 본질적 대안입니다. 그 대안의 동력이 교리화 된 부활신앙으로 상실된 듯합니다. 갈릴리 예수님은 사랑지배 또는 사랑나라가 저 구름위에 존재하는 초월적 실재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빠(Abba) 하나님의 사랑이 땅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노력하라고 당부 하셨지요. 죽어서 내 존재가 실체 없는 영으로 하늘로 천당으로 수직 상승하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아빠의 사랑 뜻이, 평화 뜻이, 공의의 뜻이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듯, 우리의 역사 현실에 내려 올 수 있도록, 부활한 주님과 함께 헌신하는 것이 바로 부활 신앙의 요청입니다.

 

   부활 신앙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은 골고다 십자가의 그 아픈 고난 없이 종교적 깨달음으로 복음의 역동적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일종의 “영지주의적 신앙”입니다. 십자가 고난없는 종교적 깨달음만으로 복음의 본질 곧 사랑지배의 기쁨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모든 복음서들이 고난얘기와 부활증언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이유를 우리들은 새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높임을 받게 되었으나, 결코 초월적 심판자로 군림하시지 않으시고, 갈릴리 예수보다 더 따뜻하고, 더 자상하고,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절망과 좌절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셨음을 증언하고 싶습니다. 말할 수 없는 십자가 고초를 겪으셨기에 부활의 예수님은 더 감동적인 치유의 카리스마로 절망한 제자들에게 더 따뜻하게 다가오셨습니다. 요즘 저 주변에 저 자신을 포함해 여러 이유로 맨붕에 깊이 빠진 분들이 너무 많은 듯해서, 저는 부활의 예수님의 그 멋지고 참된 사랑의 인간적 모습을 밝히 드러내고 싶습니다.

 

 

   예수 운동은 무상의 치유를 통해 그리고 열린 밥상 공동체 프로그램을 통해 깨어지고 짓눌리고 차별받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 사랑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로 벌떡 일어서게 하셨습니다. 곧 새로운 사랑 공동체를 펼쳐 보였습니다. 구원의 기쁨, 은총에 대한 감사가 넘쳐났지요. 그런데 이런 해방운동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면서 위선적, 폭력적 권세와 부딪히게 됩니다.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지요. 참으로 소탈하고 겸손한 평화의 ‘메시아’ 모습으로 입성하셨지요. 결코 위협적인 무장 행군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의 권력세력은 이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질시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시어 예수께서는 성전 숙정을 단행했지요. 하나님과 소통하는 경건한 성전이 경제적 탐욕과 권력의 부패마당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적 소굴 같이 추악해지고 썩어빠진 성전을 청소하시려했지요.

 

   이 사건으로 예수는 죽음의 골고다로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자기들의 권력만으로는 모자란다고 생각했는지 위선적 예루살렘 성전의 권력은 그들의 식민 종주국인 로마의 권력과 법을 간교하게 활용합니다. 로마 형법을 동원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되도록 온갖 궤휼과 조작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 폭력적인 처형이 바로 로마의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갈릴리 예수의 선택은 참으로 특이합니다. 그리고 ‘바보스럽게’ 감동적입니다. 그 특이함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원래적 가치라 하겠습니다. 절대적 폭력을 제도적으로 활용한 권세자들의 벌거벗은 힘 앞에서 예수님은 그 권력과 폭력과는 전혀 다른 대응을 짐짓 선택하셨지요. 권력자들 입장에서 보면 정말 멍청한 바보의 선택임이 틀림없었습니다. 그 선택은 복음서에 뚜렷이 여러 모양으로 증언되고 있습니다.

 

   첫째, 수제자 베드로가 칼을 뽑아 성전세력의 졸개를 내리쳤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용기를 칭찬하시기는커녕, 크게 나무라셨습니다. 칼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진리를 깨우치셨지요. 갈릴리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결단코 칼의 힘으로 이뤄질 수 없음을 단호하게 말씀하셨죠. 그러기에 중세 십자군 동원이 얼마나 예수님 뜻과 반대되는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증오와 폭력은 억울한 고통을 심화시키며 죽음을 향한 악순환만 미쳐 날뛰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오히려 그 칼에 의해 순하디 순한 어린양처럼 우아하게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허무한 끝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시작일 뿐입니다. 엄청난 감동의 새것이 시작하게 될 뿐입니다.

 

   둘째로,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요”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당신 부하들처럼 무력으로 싸워 쟁취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고 대응하셨지요. 폭력으로 싸워 세워놓은 왕국이 아님을 천명하셨지요.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증언하기위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진리는 자유케 하는 힘입니다. 나누고, 낮추고, 내려놓음으로써 모두가 보다 알차게 채워지는 존재(fuller being)로 나아가게 하는 자유의 힘입니다. 빌라도의 왕국은 무력과 폭력, 그리고 그것에 기초한 법률체제의 힘이지만, 갈릴리 예수의 왕국은 사랑지배임을 예수께서 설파하셨습니다. 그의 육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위기 상황에서 이같은 선택을 참으로 우아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셋째로, 정말 흥미롭고도 감동적인 선택의 효험이 예수사형 집행관의 고백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사형을 로마 황제의 권위로 직접 집행했던 로마군 장교가 예수의 처형과정을 엄격하게 집행하면서 소상하게 그의 죽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정말 깜짝 놀랄 ‘반체제적 발언’을 토해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황제를 신으로 숭상하는 이데올로기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지요. 황제는 ‘신’이요, ‘신중의 신’이요, ‘신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요, 또한 ‘메시야’였습니다. 오늘날 예수님께 부치는 기독교 신자들의 통상적 존칭들은 사실 예수 당시에는 로마 황제가 독점했습니다. 누가 감히 그 존칭을 도용할 수 있겠습니까. 도용하는 행위는 심각한 국가 반역죄가 될 수 있는 범죄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수따르미들은 갈릴리의 목수 아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감히 ‘불경스럽게’ 불렀습니다. 하기야 예수 따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예수 운동권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예수 사형을 집행했던 로마제국의 하급 관료가 예수님의 처형당하시는 순간, 순간의 그 모습을 직접 목도한 후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진실의 자기고백이라 하겠습니다.

 

   “진실로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마가복음 15:39)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 (누가복음 23:47)

 

   여기 의롭다는 뜻에는 무죄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로마 장교가 어떻게 감히 예수 같은 ‘반체제 인물’에게 로마 황제의 그 ‘존엄한’ 칭호를 사용할 수 있단 말입니까? 로마 중대장의 이 고백은 예수의 선택이 보여주는 그 놀라운 힘, 변혁의 힘을 웅변적으로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시다가 처형당했다면, 이 사형 집행관은 한낱 테러리스트를 제거한 쾌감을 오히려 뿌듯하게 만끽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의 선택, 바보같은 선택, 우아하게 죽는 선택이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그의 목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에, 부활은 십자가의 처절한 ‘패배’의 순간순간 속에서 이미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만의 하나 예수의 천사 군대가 내려와 무기로 싸워, 성전 권력세력과 로마 군병들을 쳐 부셔 이겼다면, 예수 부활은 아예 처음부터 터져 나올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저 힘차게 싸워 이긴 장군이나 세상 영웅의 하나로 남을 수는 있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그 철저한 자기비움이, 그 우아한 패배와 죽음 선택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를 옹호하고 일으켜 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부활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선택이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옹호(vindication)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다가오셨는지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의 소중한 메시지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전에 제자들에게 일렀듯이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곳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불러내셨기 때문이겠지요. 거기서 그들의 생업을 그만 접고 예수 운동에 참여하라고 소명하셨죠. 그런데 십자가 처형 후 총체적 맨붕 상태에 빠져있는 제자들을 주님께서 직접 그곳에 가시어 기다리고 계셨지요. 다시 말하면 예수 운동을 모두 포기한 나머지 절망과 좌절 속에서 원래 생업인 고기잡이 일로 되돌아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야 말로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사명임을 새롭게, 뜨겁게 깨우쳐 주시기 위해 이들이 그곳에 돌아올 것을 미리 아시고 그곳에 먼저 가시어 그들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슴 깊이 품었던 민족 광복의 꿈이 자기의 십자가 처형으로 산산이 깨어졌음을 깊이 이해하셨고, 그 깨어짐을 통해 엄청난 허탈감과 아픔을 그들이 겪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 중에는 출애굽의 해방이나 바빌론 포로에서의 해방을 바라고 예수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처형을 보며 그들의 꿈은 처참하게 박살났지요. 그들의 고뇌, 그 아픔, 그 절망을 주님은 역지사지, 역지감지(易地感之) 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갈릴리로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절망하여 갈릴리로 내려갈 때 제자들의 그 심정과 심경을 누구보다 부활 예수께서는 잘 아셨습니다(엠마오로 내려가는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난 부활 예수의 친절한 깨우침을 생각해 보세요).

 

   그 뿐이겠습니까? 절망하여 터버터벅 고향에 돌아온 그들은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어 다시 그물을 잡고 갈릴리 호수로 나아갔지요. 그런데 종일 그리고 밤새껏 열심히 애썼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들은 정신적 공황에 더하여 경제적 곤경에 맞부딪치게 되었지요.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말 총체적 위기에 빠지게 된 셈이지요. 춥고 배고프고 서럽고 분했을 것입니다. 정말 내일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지금 춥고 배고파도 내일이 있다는 소망이 있으면 지금의 아픔을 얼마간 견딜 수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사방으로 절망, 궁핍, 그리고 좌절의 벽에 갇혀있는 딱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였습니다. 이들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떤 이가 허튼 소리 하는 듯 했습니다. 무얼 좀 잡았소? 라고 묻고 덮어놓고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져 보라고 일렀습니다. 누군지 모르나 그 음성에서 제자들은 범접할 수 없는 그 어떤 힘을 느낀 듯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 하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에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작 하나 하나가 부활 예수의 본질과 진심을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먼저 제자들은 부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음에 주목합시다. 항상 함께 그들과 기거했던 갈릴리 예수 모습과 달랐기 때문이겠지요. 부활 예수의 모습은 그전 예수의 육체와는 무엇인가 달랐습니다. 그렇다고 그 다름이 환상이나 환영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환영, 환상 또는 유령같은 모습에는 그 어떤 따뜻함, 인간적인 배려 그리고 그 실체적 효험이 없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께서는 아파하는 이들에게 너무나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보살펴 주시는 인간적 터치(touch)를 보여주십니다. 그물을 어디에 던져 보라고 자상하게 일러주심이 그러합니다. 너무나 따뜻한 인간적 실체로 절망한 제자들에게 다가 오셨지요. 흥미롭게도 3년 전 (또는 1년 전)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호출하셨을 때는 그물 던지기를 그만 두고 자기를 따르라고 명령하셨는데, 지금은 친절하게도, 너무나 따뜻하게 그물을 어디에 던지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갈릴리 예수와 부활의 예수는 결코 다른 두 존재가 아닙니다. 부활 이후 주님께서는 더 다정하게 사랑의 실천자로 다가오셨습니다. 사랑지배가 보다 구체화되고 있는 감동의 순간이지요. 이점에 예수따르미들은 주목해야 합니다.

 

   둘째로 부활의 예수께서는 호숫가에 숯불을 피워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생선과 빵을 굽고 계셨습니다. 친히 밥상을 차려 놓고 계셨지요. 그전에 갈릴리에서 가졌던 밥상은 예수님께서 친히 차리신 것이 아니었지요. 초청인이 마련했겠지요. 최후만찬도 주님께서 직접 빵을 굽지는 않으셨지요. 그런데 부활 하신 주님께서는 친히 숯불을 피우시고, 친히 빵을 구우시고, 친히 생선을 구우셨습니다. 그리고 상을 직접 차리셨습니다. 진실로 참 목회가 무엇이며, 목자의 돌봄이 무엇인지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예수는 강론하거나 토론하거나 말로만 위로하거나 추상적 담론을 펼쳐내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서럽고, 분노했던 제자들에게 숯불을 친히 따뜻하게 피워 따뜻한 생선과 빵으로 따뜻한 상을 차려주셨습니다.

 

   그것도 너희들 이리 오너라, 와서 함께 먹자 하는 식의 초청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예수께서는 친히 자기 손으로 구운 생선과 빵을 손으로 집으시고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마치 멀리 멀리 험한 곳에 갔다 오는 남편을 위해, 먼 길에서 온갖 고생 다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식을 위해 정성 것 음식을 마련하는 아내와 엄마의 정성과 같다고 할까요. 저는 이것이 바로 진정한 예수님의 밥상 공동체라고 믿고 싶습니다. 부활의 예수의 이 자상한 배품이야 말로 참된 예수의 성만찬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성만찬은 한낱 종교적, 교리적 의식, 의례가 아닙니다. 절망, 좌절, 분노, 서러움 이모든 것을 사랑으로 극복해내는 사랑 나눔의 실천입니다. 부활의 예수께서 바로 이같은 성만찬을 맨붕에 빠진 제자들에게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부활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내 어린 양 떼를 먹이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여기 어린양은 상처 받기 쉬운 양을 말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많은 분들이 상처받아 맨붕에 빠져있습니다.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지나서 저는 맨붕에 빠졌습니다. 너무나 많은 분들의 절망을 역지사지, 역지감지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최근 몇 달 간 남북관계가 너무나 가슴 아프게도 아슬아슬하게 위기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서로 발악하듯 힘으로 대결하는 한반도 정세를 보며 마음이 상했고 아팠습니다. 기독교 장로 대통령의 재임기간 조국의 평화가 이토록 멀어진 것에 대해서 또한 가슴 아팠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 교회 안에 서로 우아하게 지려는 예수 공동체의 흐름이 거칠게 흩으러 지는 것을 보고 저의 마음이 또 아팠습니다. 맨붕이 3중으로 저를 급습하는 듯했습니다. 그럴수록 저는 갈릴리 예수님이 사무치게 그리웠습니다. 그럴수록 저는 부활하시어 절망의 땅 갈릴리에 먼저 가시어 그곳에서 숯불을 피어 놓으시고,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생선과 빵’을 친히 구우신 후 친히 그것을 당신의 손으로 직접 갖다 주시는 부활 예수님이 사무치게 그리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의 보살핌과 보듬어 주심만이 우리로 하여금 온갖 상처와 아픔에서 건져주심을 저는 믿습니다. 신학적 담론이나, 추상적 명상이나, 정교한 종교의식이 우리를 좌절과 절망에서 결코 해방시켜주는 힘이 아님을 저는 고백합니다. 오로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랑의 새 하늘과 새 땅, 평화와 공의의 새 예루살렘을 우리의 역사 현실에서 우뚝 세워 놓을 수 있는 힘임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모든 기도와 명상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갈릴리 하나님 나라 운동이 예수의 부활을 통해 그 사랑의 동력이 더욱 더 높아지고 더 넓혀진다는 진리를 저는 믿고 싶습니다. 증언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런 예수따르미로 계속 죽을 때까지 살아가고 싶습니다. 이런 결단에서는 육체의 죽음이 결코 끝장이 아니라 새 존재의 탄생과 새 세계의 창조로 이어진다는 것을 저는 믿고 그것을 기쁘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이렇게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과 아침을 함께 하시면서 부활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간곡하게 일러주신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려보고 싶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기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자기의 어린 양 떼를 돌보고 먹이라고 세 번이나 거듭 당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믿고 제자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어리고 약하고 힘없는 양들을 정성으로 보살피는 공동체적 사랑실천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지배 질서를 곧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를 힘 모아 따뜻하게 세우라는 당부입니다.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있는 어린 양을 위해 숯불을 피우라는 권면입니다. 그 위에 생선과 빵을 구우라는 명령입니다. 부활 예수 믿고 죽어 혼자 천당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맨붕 상황에서 추상적 담론을 펼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 아픔을 치유할 구상적이고 몸에 와 닿는 숯불을 피워 따뜻한 공동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숯불 위에 생선과 빵을 구워 친히 사랑의 손으로 그 먹거리를 아파하는 이들에게 하께 나누는 일이 소중합니다. 이것이 소중한 공동체 치유입니다. 그럴때 사랑 질서가 여기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끊임없이 태어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의 힘입니다. 저는 이 힘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그리스도 예수의 그 이름은 그저 한낱 이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바로 새 질서, 새 역사,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우리 속에서 아름답게 일구어 내는 감동적 새 창조의 힘임을 고백합니다. 이제 상처 받고 괴로워하며, 외로워하는 자매와 형제를 위해 우리 모두 따뜻한 숯불을 피웁시다. 그 위에 생선과 빵을 구웁시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멋있게 세우기 위해 말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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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4 아가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 아8:6-7  강승호 목사  2015-04-25 659
12033 창세기 그대는 상명에 우십니까 창37:33-35  김남준 목사  2015-04-24 437
12032 에배소서 보이지 않는 교회의 건축 엡2:22  김남준 목사  2015-04-24 626
12031 골로새서 교회의 일꾼되게 하심 골1:25  김남준 목사  2015-04-24 710
12030 골로새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1] 골1:24  김남준 목사  2015-04-24 718
12029 마태복음 가난한 마음을 위하여 마5:3  김남준 목사  2015-04-24 517
12028 로마서 상속자의 영광과 의무 롬8:17  김남준 목사  2015-04-24 526
12027 시편 광야길을 인도하신 하나님 시136:16  김남준 목사  2015-04-24 743
12026 갈라디아 성령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 갈5:25  김남준 목사  2015-04-24 751
12025 고린도전 나는 왜 ‘착한장터’를 만들었나 고전12:21-22  추응식 형제  2015-04-23 343
12024 시편 성경은 비밀의 열쇠인가 시33:8  윤여성 형제  2015-04-23 456
» 요한복음 부활 예수 숯불에 생선 굽다 요21:10-14  한완상 형제  2015-04-23 675
12022 마가복음 무익한 사랑 막10:39-40  김호경 교수  2015-04-23 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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