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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 악마의 유혹에서 건지소서.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460 추천 수 0 2015.04.25 23: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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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13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5.3.17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유혹, 악마의 유혹에서 건지소서.
마6:13

요한복음 6:56에 예수님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이 성찬예식을 할 때, 주의 살과 피는 주님의 임재를 의미한다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이 구절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좀 더 넓게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보면 이 말씀은 성찬예식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선 다른 성경에도 나오는 이 구절을 찾아봅시다. 고전11:23-25에 나오는 것이 가장 오래된 성찬말씀입니다. 그리고 막14:22-25, 마26:26-29, 눅22:15-20절에 나옵니다. 이들을 비교해 보면 조금씩 다른 거 같지만 같습니다. 이렇게 세 복음서에 모두 성찬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일찍부터 주의 성찬이 ‘주님의 공동체들’이 모일 때 공통된 요소였으며 의식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특히 복음서들은  이 성만찬이 주님과 그의 제자들이 했던 마지막 만찬에서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만찬 혹은 성찬예식은 주님의 공동체가 함께 나누는 공동식사의 한 부분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신분이 높든 낮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관계없이 모두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야 이런 장면이 대단하지 않겠으나 양반상놈의 사회 서열이 존재하던 이조시대에 만약 이랬더라면 그냥 식사자리가 아니라 엄청난 사회적인 변혁의 장면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당시 주님의 공동체에게 있어서 성찬예식은 그런 반사회적인 현상이었을 것이고, 사회변혁의 징후였을 겁니다. 그러니까 차이, 차별, 차등과 같은 것들은 이 공동식사에선 무의미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반사회적인 현상인 공동식사 즉 성찬예식이 삐거덕 거리기 시작합니다. 고전11:25에 보면, 떡을 나누고-공동으로 식사를 하고-잔을 나누는 순서로 진행되던 예식이 ‘공동식사’를 빼버리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겁니다. 21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한가한 사람은 와서 오래 기다리고, 먹고 사느라 바쁜 이들은 늦게 오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의 의도는 아마도 가난하여 늦게 올 수 밖에 없는 이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세월은 바울의 그런 진심보다는 형식만을 남기고 알맹이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바울 이후 한 세대도 되기 전에 본시 평등을 이루어가는 사회변혁의 요소였던 성찬예식이 그만 제도 속에 형식만 남게 된 겁니다. 이때는 이미 주의 공동체들이 예수의 정신을 따라 사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공동체를 조직하고, 직제를 만들고, 제도를 꾸며 형식을 지키는 게 신앙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성찬예식을 예로 들면,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은 떡을 나누고-공동으로 식사를 하고-잔을 나누어 마심으로 평등한 세상과 대등한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예식이라는 형식만 남고 ‘성찬’의 본래 취지는 사라져서 사람들은 도로 불평등의 제도화에 빠진 것입니다.

주님의 공동체가 왜 이토록 제도화를 서둘렀는가 하면, 패망 이후 이스라엘을 재건하려는 바리새파가 이스라엘 방방곡곡에 율법과 회당을 통한 재건운동을 조직적이고 제도적으로 펼치는 사이에 주님의 공동체는 이스라엘 사회로부터 추방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회적인 상황에서 맞대응을 하고 살아남으려면 주님의 공동체도 조직을 꾸리고, 제도를 만들고, 직제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불가피하게 직제, 제도, 조직을 만들었지만 이 또한 시간이 가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예수 알맹이는 쏙 빠지고 오붓하게 제도, 조직, 직제와 같은 형식, 껍데기만 남게 된 겁니다.

자, 이쯤에서 다시 요한복음 6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6장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가 나오죠.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 끝에 오늘 우리가 읽은 소위 ‘성만찬 예식사’같은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우리가 ‘성만찬 예식사’로 여기는 이 말씀은 사실 오병이어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야기가 거기서 나와 이어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에는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던 자리가 아니라 누군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똑 같이’먹고 마시던 자리로 쓰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오병이어의 기록이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는 오병이어와 다른 게 또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선 예외 없이 ‘물고기와 빵’이 제자들의 비상식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천한 신분의 아이’가 내 놓은 것입니다. 제공자와 그 제공품의 질이 다른 겁니다. 아이가 내 놓은 빵은 예식용으로 쓸 수 없는, ‘크리시 노스’즉 보리개떡 같이 보잘 것 없는 빵인데 반해 제자들이 내 놓은 빵은 ‘아르토스’, 그러니까 고급 빵으로 예식에 사용할 수 있는 빵이었던 것입니다. 뭐 요한복음에 나오는 아이의 빵이 안흥 찐빵 이라면,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는 제자들이 내 놓은 빵은 파리바케뜨에서 나오는 비싼 빵인 거죠.

그뿐이 아닙니다. 이런 빵을 들고 다른 복음서에선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축사를 했다’고 하지만 요한복음에는 일언반구 아무런 표현도 없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에는 아이의 가난한 빵을 예수님이 직접 나눠주지만, 다른 복음서에선 제자들이 나눠줬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차별된 기록이 생기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이미 초대교회의 마태, 마가, 누가 공동체가 조직화, 제도화, 직제화가 되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직제에서의 어떤 역할들을 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은 왜 이런 내용들이 없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은 당시에 직제화, 제도화, 조직화 되어가고 있는 다른 공동체를 못 마땅하게 여겼던 겁니다. 그것은 요한공동체의 관점에서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정신은 쏙 빠지고 껍데기만 그럴싸하게 꾸민다고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판단하는 성찬예식은 예전이기에 앞서 예수님이 가난한 대중들과 함께 벌였던 사건이었습니다. 차별이 없고, 위계도 없는 나눔의 페스티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제도화 하자 그 형식만 남고 나눔은 사라지고 평등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주님이 직접 떡과 고기를 나눠주면서 거기 참여한 모두를 ‘나눔 축제의 주인공들’이 되게 한 반면, 그것이 예전으로 바뀌면서 예전을 집전하는 권력자에게 축제의 주체가 변질된 겁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축복을 나눴는데 예전이 되면서 ‘축복의 중계자’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의 변화는 고스란히 유대교 양식을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는 본래 유대교 회당에서 예수를 따르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주후 80년을 전후로 한 유대교의 폭력적인 제도화 과정에서 배척이 됩니다. 그들은 이 배척의 경험을 뼈에 새기고 있던 이들입니다. 그런 그들의 눈에 마가, 누가, 마태 공도체가 그런 짓을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변형되어가는 주님의 공동체에 저항하기 위해 세 복음서와는 다른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거죠. 그게 오병이어의 이야기입니다.

저항을 한다니까 무대 뽀로 대 드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시겠지만, 요한복음의 저항은 변질되어 가는 주님의 기억에 대한 바른 회상과 해석을 의미합니다. 형식만 굴러다니는 교회 안에 예수님의 그 말씀이 지닌 진의가 무엇인지를 추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의 이야기 다음에 ‘성찬예식사’같은 말씀이 등장하는 것은 요한공동에게 ‘성찬’이란 바로 보잘 것 없는 어린아이가 빵을 내어서 남녀노소 누구나 가리지 않고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축제라고 이해를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축복의 중개자가 필요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축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공동체는 이처럼 교회 안에서 예전으로 성만찬을 지키는 것을 주님의 가르침이라고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오병이어’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와 다른 점입니다.

요약하자면 요한공동체는 다른 주류교회들이 주의 가르침을 공공연히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가르침 속에 들어있는 취지 대신에 형식에 몰두하고 그것을 계승하는 게 주님을 따르는 일이라고 하면서 유대교 권력이 저지르고 있는 힘의 정치와 동일한 욕구로 교회를 채워가고 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겁니다. 조직, 제도, 직제 이런 것들을 결국 ‘정치적 힘’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늘 이런 유혹에 시달립니다. 다른 공동체가 이런 유혹에 빠져들어 가고 있을 무렵 요한공동체는 이런 유혹과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이 요한복음의 관점에서 주기도문의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구절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공동체가 이렇게 마가, 누가, 마태 공동체를 비난 하는데도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의 마지막 언어를 ‘시련’이라고 하지 않고 ‘유혹’이라고 씁니다. 우리 성경에는 ‘시험’이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이건 ‘유혹’이 맞습니다. 더군다나 마태는 유혹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말하자면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해 놓았습니다. 이랬다는 건 적어도 이 ‘유혹’을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던 그 악마의 페이라스모스 즉 ‘악마의 유혹’과 동일하게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에...’하는 기도는 바로 예수가 당했던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광야에서 예수님이 악마에게 받은 유혹은 뭡니까? 세상에 있는 돌멩이로 빵을 만들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돌멩이를 모두 빵으로 만든다면 누가 굶어 죽겠습니까? 이거야말로 ‘오병이어’가 아닙니까? 먹는 문제, 세상의 가장 큰 문제 하나를 해결할 수 있는 제안입니다. 이것만 해결할 수 있으면 만국을 통치하는 정치적인 권세와 권력도 저절로 생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악마의 유혹인 겁니다. 이런 걸 따라가면 예수님의 정신은 사라지고 그 형식만 지키게 된다는 겁니다. 주의 기도,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는 바로 이런 정신에서 나온 거라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앞에 말씀드린 요한공동체의 성찬 비판은 단지 비판이 아니라, 요한공동체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 중에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대목을 실제적인 상황에 적용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을 문장 그대로 외우지 않고 그들의 외적 상황에 그 기도문의 정신을 적용하여 변해가는 다른 공동체의 상황을 지적하고 그들 자신들은 그런 유혹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죠. 이거야 말로 진정으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실행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도 달랑 주문 외우듯이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로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재해석하고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힘으로 사람을 부리려는 달콤한 유혹을 늘 경계 거부해야 합니다. 그게 돈이던 권력이던 지식이던 외모 던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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