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10:38-42 |
---|---|
설교자 : | 구미정 교수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134850 |
마음 먹기
(누가복음 10:38-42)
2013년 4월 28일 주일예배
구미정 교수(숭실대학교 외래교수)
1. 마르다 vs 마리아
여자들끼리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는 마르다 과(科)냐?, 마리아 과냐?’ 저는 ‘마리아 과’입니다. 어려서 집안일을 해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부잣집 귀한 딸로 태어났나보다, 오해하실 지도 모르겠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동생으로, 그것도 툭하면 병치레를 하는 병약한 아이로 태어나서 그렇습니다.
언니는 저보다 겨우 두 살 많은데도, 딸만 둘인 집안의 ‘맏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집안일에 ‘강제동원’되어야 했습니다. 집안일에 소질이 있는지, 적성에 맞는지를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 땅의 맏이들은, 특히 모진 시절을 보내야할 경우의 맏딸들은,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 주인공 <몽실언니>같은 역할을 강요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청소며 빨래며 밥 짓는 거며 온갖 집안일은 물론, 심지어 공부에서까지 운 좋게 ‘열외’여서, 초등학교 4학년이 되도록 구구단도 못 외울 정도였지만, 언니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엄마가 돌아오실 때까지 집안 단속은 기본, 아픈 동생 들쳐 업고 어르는 일까지 도맡아야 했습니다.
언니가 밥 먹으라고 여기저기 부르러 다닐 때까지 노느라 정신없었던 저는 그저 먼저 태어나지 않은 것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고작 두 살 터울인데도, 저는 ‘아우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러한 ‘누림’이 ‘착한’ (것을 강요당해야 했던) 언니의 희생 덕분이라는 생각은 도무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언니는 의당 그런 줄로, 그래야 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언니’니까요! 이게 또 동생들의 한계입니다.
아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도 그랬을지 모릅니다. 언니 마르다가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에 저 혼자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풍경이 저에게는 전혀 낯설지가 않습니다. 아마 저희 집에 오셨더라도 똑같은 장면이 연출되었을 테니까요. 둘 사이에 나이 차이가 어느 정도 나느냐는 본문의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위계’요 ‘서열’입니다. 분명히 마르다가 위고, 마리아가 아래입니다.
2. ‘좋은 몫’을 택했다?
본문의 상황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지요.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이라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눈여겨 살펴보면, 마르다가 굉장히 주도적인 인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집’으로 예수님을 모셔 들인 것도 마르다요,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혼자서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했던 것도 마르다입니다. 모든 것이 마르다의 결정이고 선택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화를 내고 있거든요.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누가복음 10:40) 아마 예수님이라면 자기 편을 들어줄 거라고 기대했을 겁니다. 발치에 앉아 있는 얄미운 동생한테 ‘가서 언니를 좀 거들어주라’고 하면 다 끝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뜻밖이거든요.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0:41-42) 표준새번역판에서는 이렇게 옮겨놓았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반전이지요. 마르다 입장에서는 완전히 날벼락입니다. 어쩌면 손에 들고 있던 밀가루 반죽 그릇을 떨어뜨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무릇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든 기별은 ‘뜻밖의 소식’이거든요. 예상답안이 그대로 들려지면, 내가 하나님이지요. 초월자이시고 절대자이시며 무한 자유하신 하나님을 내가 ‘콘트롤’하는 셈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예수님이 마리아를 두둔하시고 마르다를 야단치신 줄 알았습니다. 여성도 자아실현을 할 수 있음을 격려하는 본문으로 이해했던 겁니다. 남녀 구분이 어디 있나, 여자도 남자가 하는 공부를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남자가 갖는 직업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는 식으로요.
이런 해석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낯선 것일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있을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쳐진 칸막이를 없앰으로써, 남녀 모두를 제자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마리아는 힘을 얻을 수 있지만, 마르다는 어쩌냐는 겁니다. 등장인물이 둘 다 여자라는 데 본문 이해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부하는 마리아’는 격려하고, ‘살림하는 마르다’는 야단쳤다고 하면, 여자들더러 다 살림을 작파하라는 뜻으로 오해될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성경해석이 이른바 페미니즘을 뒷받침해주는 방향으로 갈 수야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말씀은 어떠한 ‘이즘’(ism)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는 말씀의 뜻이 너무 오묘하고, 우리의 삶이 너무 복잡합니다.
3. 섬김의 도(道)
그래서 이렇게도 한번 접근해 봅니다. 누가복음 전체의 핵심 키워드는 ‘힘’입니다. 힘을 가진 사람과 힘이 없는 사람 사이의 정의로운 관계맺음에 천착합니다.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 힘 있는 사람과 힘 없는 사람이 고루 복음의 수혜자로 등장합니다. 복음 앞에서는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주제의식을 놓고 보면, 본문에서 마르다만큼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없는 거지요. 마르다는 실질적으로 이 집의 가장이므로, 가장으로서의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합니다. 예수님을 자기 마음대로 모셔 들이고요, 접대하는 역할도 자기 혼자 담당합니다. 나누는 것도 ‘부족한’ 사람이 잘 하기 마련입니다.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은 칭찬을 혼자 독식하려는 교만이 내재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몸에 배서, 혹은 의무감으로 많은 일들에 헉헉대면서도, 도와달라고 말하는 법을 미처 익히지 못한 마르다의 모습이 사실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닐는지요? 손님이 불편해 하지 않도록, 또 마리아가 손님 앞에서 무안을 당하지 않도록, 조용히 마리아를 불러 살짝 요청했어도 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러지 못했습니다.
마르다는 일과 업적과 성과와 효율에 매달리는 인간의 전형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살면, 자기 자신을 돌볼 새가 없습니다. 요즘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책, 『피로사회』가 인문학의 대세인데요, 거기 보면 최근에 우울증 환자가 급증한 까닭은 우리 사회가 ‘성과사회’여서 ‘활동 과잉의 인간’을 요구하는데, 이런 인간상은 ‘자기 착취적 인간’으로,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탈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심심해야 창조적인 뭔가가 나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화와 예술은 ‘심심함의 발작’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자연 상태의 동물에게는 ‘스텝’이란 게 없습니다. 걷다가 깊은 심심함에 사로잡힌 인간이 심심함의 발작 때문에 시작한 게 춤추기라는 것 아닙니까? 지나치게 ‘멀티태스킹’하는 인간, 그리하여 도무지 심심할 새가 없는 인간의 자아는 늘 피로합니다. 피로하면 늘어지고, 늘어지면 짜증이 납니다. 그 상태에서는 마음의 근육이 단단해지기 어렵습니다. 자기 느낌을 정확히 파악하거나, 남의 속마음을 귀 기울여 듣는 능력이 현저히 저하됩니다.
마르다가 예수님한테 가서 고자질을 할 때, 목소리가 어땠겠습니까? 아마도 급격히 열을 받아서, 혹은 뚜껑이 열려서 큰소리로 성질을 부렸을 겁니다. 말하자면, 판을 깬 거지요. 잘 새겨들으면, 예수님을 야단치는 말이 아닙니까? 그 시간, 그 공간에서 자기가 왕인 겁니다. 말로는 ‘주님’이라고 불러도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손님’의 위치입니다. 우리 내면도 솔직히 들여다보면 똑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입으로만 부르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줄기차게 우기지 않습니까? 갑을관계가 뚜렷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라는 말씀은, 권력관계를 바로잡는 처방이라고 보면 안 되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이 대목에서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새 윤리, 곧 ‘섬김’을 마르다에게 가르쳐주고 계신다고요.
섬김이라는 단어의 세상적 용례는 낮은 사람/아랫사람이 높은 사람/윗사람을 섬기는 겁니다. 백성은 군주를 섬기고, 학생은 스승을 섬기고, 직원은 사장을 섬기고, 아내는 남편을 섬기라는 게 세상 질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뒤집습니다. 섬김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이랍니다. 인간이 고통스러운 구도의 길을 통해 신이 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섬김은 군주가 백성을 향해, 스승이 학생을 향해, 사장이 직원을 향해, 남편이 아내를 향해 하는 거랍니다. 자기가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 있음에도 그걸 행사하지 않고서, 아랫사람이 되어주는 것, 이미 윗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기’(being)를 넘어서서 소수자-되기, 그런 ‘되기’(becoming)라야 하나님 나라가 열린답니다.
4.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마르다는 이 말씀을 알아들은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다시 등장하는 마르다는 적어도 누가복음의 그녀가 아닙니다. 남매지간인 나사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찾아오시자, 먼저 맞이하러 나간 게 마르다입니다. 게다가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유명한 기독론적 공식을 발설한 것도 마르다입니다. ‘믿음의 반석’이라는 별칭을 얻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와 동급의 위치에 있는 건 마르다이지, 마리아가 아닙니다. 심지어 자기만 쏙 빼놓고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동생을 질투하던 마르다는 이제 온 데 간 데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아도, “선생님께서 와 계시는데, 너를 부르신다”며 마리아에게 가서 자발적으로 일러줍니다. 이런 배려가 어디서 왔을까요? 한때 그녀를 사로잡았던 질투심의 불이 어떻게 사그라들었을까요?
이 대목에서 저는 마음이라는 요망한 것의 실체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요? 마르다도 처음부터 작심하고 화를 낼 마음은 없었습니다. 귀한 손님을 모셔놓고, 무엇을 대접할까 궁리하며 바쁘게 부엌을 들락거릴 때만 해도, 그녀의 마음은 천국이었을 겁니다. 그토록 흠모하던 예수님이 지금 우리 집 거실에 앉아 계시다니, 일분일초가 꿈결 같았겠지요. 그분의 행동 하나하나, 그분의 음성 하나하나, 어느 것도 허투루 와 닿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잘 하려는 마음이 꼭 평상심을 흩트립니다. 마음이 온통 잘 대접해야지, 그래서 대접 잘 받았다고 칭찬 들어야지, 거기에 쏠려 있으니, 늘 하던 음식인데도 이상스레 간이 안 맞습니다. 그런데다가 마리아는 자기를 거들 생각조차 안 하고 있는 겁니다. 속이 상하다 못해 부글부글 끓지요. 천국이었던 마음이 지옥이 되는 건 눈 깜짝할 사이입니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지금 이 집에 예수님 혼자만 들어오신 게 아니라 제자들까지 우루루 몰려왔다고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제자 구성이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중구난방이지요. 무슨 뚜렷한 기준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직업 편차도 다양하고, 출신 성분도 다양하고, 계층도 가지각색이며, 이념도 보수와 진보로 갈려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마음이 불편해질 때는 대체로 예수님 때문이 아닌 것 같아요. 예수라는 이름으로 엮인 공동체 구성원 때문이지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한 그룹으로 모아놨어요. 의견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다 다른데, 어떻게 이해가 됩니까? 어떻게 사랑이 되고, 섬김이 나옵니까?
5. 마음 먹기
정제되지 않은 거친 말이 튀어 나오는 건 순간이지요. 형식은 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지만, 내용은 예수님을 비난하는 겁니다. 본문의 마르다처럼요.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부르신 것은 그만큼 애정을 가지고 말씀하신다는 표시일 겁니다. 번역본에 따라 ‘많은 일’, ‘여러 가지 일’, ‘준비하는 일’ 등으로 번역된 부분이 헬라어 원문에서는 ‘봉사’(diakonia)로 나온다네요. 봉사도 애정을 가지고 정성껏 해야 열매가 달지요, 아무도 안 하니까 그냥 내가 하고 만다, 속을 끓이면서 하는 봉사는 그 열매 역시 쓴 법입니다.
마르다가 그걸 깨닫지 않았나 싶어요. 봉사도 손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동해서 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 말이지요. 당위나 허영이나 사치로 하는 봉사는 꼭 탈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제 마음을 살피면서, 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자연스럽게 능동적으로 하는 일만이 선한 결실을 맺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관계맺음에서든지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는 거지요. 일이 탄력을 받으려면, 인간관계가 진실하려면, 온전히 한 마음으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지요. 모두가 한 마음으로 똘똘 뭉친 공동체만큼 무서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바울 목회의 키워드도 그것 아니었습니까? 교회 공동체가 아무개 파로 갈라져 있어서 쓰겠나, 누구는 바울파, 누구는 아폴로파, 누구는 베드로파, 이런 게 얼마나 무익햐냐는 거지요. 이렇게 갈라져 있다는 것 자체가 그 공동체 구성원들이 아직 ‘육의 사람’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라고, 바울은 강변합니다. 십자가의 도 앞에서는 아무도 세상적인 것을 내세울 수 없다고 말이지요.
우리말이 여러 모로 신통한데,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먹는다는 것은 소화시킨다는 뜻이지요. 소화시켜서 내 뼈와 살로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 거나 먹으면 안 되지요. 잘못 먹으면 꼭 탈이 나기 마련입니다. 마음도 잘못 먹으면 큰 일 납니다. 잘못 먹은 마음은 ‘술 취한 코끼리’에 비유할 수 있답니다. 한번 날뛰면 집을 허물 수도 있고, 사람을 짓밟아 죽일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란 게 본래 간사스럽다, 그러니 마음에 속거나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이야말로 ‘살림의 지혜’가 아닐는지요? 이렇게 견고하게 마음의 중심을 잡는 일은 술 취한 코끼리를 길들이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가복음의 마르다는 그 숙제를 받은 셈입니다. 요한복음의 마르다는 어느새 숙제를 다 푼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교우님들은 어떠십니까? 우리 함께 즐거이 숙제를 풀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내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더 이상 내가 주인 행세하지 않겠습니다.
내 마음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내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나조차 내 마음을 몰라 갈팡질팡할 때마다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십시오.
깨어 있기에 힘쓰겠습니다.
혼란스러울 때는 먼저 주님께 여쭙겠습니다.
원하는 답을 주시지 않더라도, 깨달아질 때까지 잠잠히 기다리겠습니다.
고요한 물처럼, 깨끗한 거울처럼,
그렇게 우리 마음을 닦으며 살아보겠습니다.
부디 우리를 어여삐 보아 주십시오.
자비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