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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494 추천 수 0 2015.05.05 16: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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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21-28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장 21절-28절: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안식일 날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이 가버나움은 얼마 전에 부른 네 제자의 고향이기도 하다. 마침 회당에서 설교를 하셨는데 그 말씀을 듣고 가버나움 사람들이 큰 깨달음의 은혜를 받았다. 안식일마다 들은 율법사들이나 서기관들의 설교는 늘 성문적인 얘기, 율법적인 얘기, 혈통얘기, 족보얘기, 장로들의 유전 같은 얘기, 말하자면 들으나 마다한 얘기였는데 예수님의 설교는 하늘의 심오한 이치를 말씀하시는 고로 인격에 감화가 되어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깜짝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그 말씀이치에 틀림이 없다 그 말이다. 옳다 그 말이다. 빈틈이 없다 그 말이다. 옳은 이치의 말씀은 권세자의 말씀이다. 그걸 알아라.


설교를 들으면서 그것이 옳은 이치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평소 들었던 것과 다르다느니, 자기 성질에 안 맞는다느니 하면서 자기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체화 시키지 않으면 그러는 그의 말에는 권세가 없다. 감정과 흥분으로 되는 말인 고로 권세가 없다. 그러나 옳은 말씀은 이치인 고로 권세가 있다.


예수님의 교훈은 종교적 의식이나 순서나 절차가 없다. 회당에서 말씀을 하실 때 어떤 순서들이 있었느냐? 요:에 보면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에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이 때라’ 했는데 그 때에 기도가 있었느냐? 헌금순서가 있었느냐? 찬송순서가 있었느냐? 무슨 의식이 있었느냐? 아무 것도 없었다. 생수에 대해 몇 마디 하신 그게 설교의 다였다.


그리고 본문에도 안식일에 예수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서기관이 나와서 ‘아, 이제 예수님의 설교가 있겠습니다. 이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났지만 애굽으로 도망갔다가 나사렛 동네로 왔습니다’ 하는 소개가 있었을까? 아무 소개도 없다.


예배 설교 전에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잘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으기 위한 마음준비에 관한 거니까 찬송가를 힘 있게 불러야 자기 몸의 맥박도 빨리 뛰고 잠도 달아나고 한다. 모두가 찬송을 부르는데 자기는 찬송도 안 부르고 가만있으면 그만 잠이 스르르 온다. 자기 마음에 의해 신체의 모든 신진대사가 돌아간다. 마음이 중요하다.


어떤 병에 걸렸던 자꾸 약에 의지하는데 그건 하나의 방편이고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향해져 있나?’ 하는 그 마음이 중요하다. ‘나의 마음이 가볍게, 아니면 얕게, 아니면 전적으로, 아니면 집중적으로 하나님께로 향해져 있느냐’ 하는 게 마음이 증거를 한다.


그래서 웬만하면 자기 정신력으로도 이길 수도 있다. ‘아프다. 아프다’ 그러면 그냥 아파진다. 밥을 먹으면서 ‘에이, 맛없다’ 하면 그만 맛이 없어진다. 그런데 맛은 없지만 ‘그래도 맛이 있는데’ 하고 먹으면 그 마음에 의해서 혀에서 그렇게 느끼게 된다. 또 뭘 먹을 때 ‘달다’ 그러면서 자꾸 단 걸 느끼려고 하면서 먹으면 맵기도 하고 쓴 것 같기도 한데 가만 보면 단 맛도 들어있는 걸 느낄 수가 있다. 자기 마음 정신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예수님의 교훈은 종교적인 의식 순서나 절차가 없다. 다른 교회는 의례히 고정적인 예배순서가 20가지 이상 된다. 우리교회는 다른 순서는 없고 알아듣도록 하려면 설교만 2시간 이상 하게 된다.


교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일반사회 윤리도덕성의 가르침처럼 들으면 안 된다. 땅의 사람들의 소원 목적은 ‘땅의 것으로 부자 되자’로 들어 있는데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셨으니 하늘의 소식을 전하신다. 예수님의 출처가 그렇고, 그 소원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또 구원 얻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늘나라에서 살 실력을 준비시켜 하늘나라로 데리고 올라가려 함이다. 인간창조의 목적이 그렇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을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해 보면 세상에서 땅에서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땅의 것으로 자꾸 축복 축복 하고 있다. 이건 천국복음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에는 예수님은 안 계신다. 남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그런 곳에 예수님은 안 계신다. 그런 데는 마귀가 있는 것이다.


사단 마귀는 헐뜯는다. 그리고 설교할 때 성경구절도 쓴다. 마귀 짓이 그렇다. 그리고 소원 목적은 세상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건 옛사람 부패성적이다.


우리교회에 다니다가 일반교회로 옮긴다면 내가 잘못 가르쳤거나 그 교인이 잘못 깨달은 것이다. 우리교인들은 어디로 이사를 가든지 먼 곳으로 가면 그곳에서 교회를 세워라.


이단자들이 악한 자들이 기성교회 옆에 또는 자기들끼리 모여서 기성교인들을 슬슬 잡아먹는다. 예수님의 교훈은 회당 안에 들어가셔서 참 사람, 천국의 사람으로 만드는 운동을 하신다. 예루살렘 운동과는 다르다. 그래서 자기가 어느 먼 곳으로 이사를 가면 거기서 교회를 세워라. 자기가 못 세우면 진리의 종을 파송해 달라고 해야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독극물 먹이는 곳에는 갈 수가 없다. 멀리서 진리가 있는 곳으로 왔으면 왔지 아무리 가깝더라도 거기에 들어가지 말라. 진리본질이 아니면 구원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즉, 우리를 1차적으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셨고, 2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인간창조의 목적인 하나님의 성품을 입고 가는 것이다. 밥 먹고 일하고 장사하는 것도 그 목적을 위해서다. 그런데 그 목적에 씀씀이가 별로 없고 자기 누림으로 들어가 있다면 이건 세상이다.


천국복음이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의 교훈으로, 이것은 차원 높은 하늘의 교훈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속 성품을 입는 이 교훈은 하늘의 교훈이요 성령님의 역사다. 마귀의 역사는 그런 것은 없다. 그리고 그런 소원 목적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다.


사람이 거듭나는 교훈, 땅의 사람이 천국의 사람으로 질적으로 거듭나는 교훈, 권세 있는 가르침이란 세권과 교권을 가진 자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하늘의 교훈, 진리이치 영인성장이라. 자기 마음속에 옳은 것으로 와서 박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는 것은 자이게 큰 소득으로 들어가는 신호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모두 다 큰 은혜를 받고 놀라고 있는데 어떤 자들이 큰소리를 치고 있느냐?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23절-24절): 귀신들린 자가 소리를 지르는데 무슨 소리를 지르느냐? 나사렛 예수라고 신앙간증을 잘한 것 같은데 그가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그러니까 귀신들린 이 사람도 안식일을 지키려고 회당에 들어온 것이다.


안식일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것을 주는 것을 받는 날이다. 그런데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면서 세상 것이나 받고 간다면 무슨 안식일을 지킨 것이냐? 이건 안식일을 헛 지킨 것이다. 시간 지키고 날짜 땜만 했지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인생의 소득은 없다.


지금으로 말하면 주일날은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하나님의 것을 받는 날이요,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날이다. 입는 것을 받는 거. 주일을 지켰다고 해도 이것을 받지 못했으면 잘못된 것이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큰 깨달음을 받고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같지 않다고 여기고 있는데 이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옳은 진리이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이건 나와 관계가 없다’ 하는 식의 사람이 많다. 그 사람은 성령의 눈을 가지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더러운 성질을 가진 귀신들린 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을 하고 자기와 관계치 않는 것이다.


귀신들린 자가 말한 것을 그대로 들으면 그는 예수님을 알지만 자기와 관계가 없이 예수 믿는 자다. 믿기는 믿는데 옳은 이치의 말씀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고 자기와 관계없이 듣고 있다면 이건 더러운 귀신들렸구나.


회당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이 사람이 귀신들린 것을 모른다. 그러니 더러운 귀신이 들려서 시끄럽게 하면 그 사람을 그냥 쫓아낼 뿐이다.


더러운 귀신이 들려놓으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생각이 아니고 더러운 생각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도 욕 잘하고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입이 더러운 사람이 있다. 오늘날 더러운 귀신들린 목사도 많다. 사실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과 인격적 수수관계가 없다.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들린 걸 알면서 그 사람에게 ‘야, 나와 친구하자’ 하겠느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친구 삼아놓으면 시도 때도 없다. 나쁜 짓하는 사람을 친구로 사겨놓으면 그들이 자기 집에 찾아오는 건 시도 때도 없다. 밤낮이 없다. 골치 아픈 것이다. 나에게 유익은 못주고 ‘도둑질하자. 노력도 없이 크게 뭐 하자’ 한다. 이건 더러운 생각이다. 사람을 망치게 하는 건 더러운 생각이다. ‘야. 누구 집에 가자. 화투판이 벌어졌다’ 하는 이건 더러운 생각이다.


‘누구 집에 가자’ 해서 갔더니 많은 사람이 모여서 예언 방언한다고 떠들고 있다면 더러운 곳에 간 것이다. 그런 곳은 지식이 옳지 못하고 사람의 혼을 빼는 곳이다. 정신과 마음과 그들과 같이 있으면 그게 나에게 옮는다. 인간 자기는 늘 거룩성으로 닦아나가야 한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과는 관계가 없지만 알고 보면 더러운 귀신이 들린 그 사람과는 관계가 있다.


그러면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의 영이냐, 아니면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의 더러운 성질과 같이 들어있는 거냐? 사람 속의 영은 따로 있다. 그 사람의 영이 귀신은 아니다.


점쟁이에게 점을 잘 치게 하는 귀신이 그 점쟁이의 영이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 속에 만든 영은 따로 있느냐? 따로 있다. 그런데 점을 치는 그 정신 사상 그 성격 성질은 더러운 거다. 그것이 하나님을 못 보게 하고 사람을 추하게 만든다.


점쟁이가 귀신이 더 크게 들려놓으면 사람들은 그 점쟁이를 용하다고 그러고, 무섭게 본다. 맨발로 작두를 타면 더 신령스럽게 본다. 그러면 왜 그렇게 보여지게 하는 것이냐? 그렇게 보여지게 해서 돈 많이 내놓으라는 것이다. 돈 안 내면 누가 그걸 타겠느냐? 그런 걸 하는 건 그 자기를 불러서 쓰라는 것이다. 그런 걸 하는 사람이 돈을 적게 받겠느냐?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갖도록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지식에까지 성장하고 장성토록 하고, 영능의 실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성이다. 그런데 이 귀신들린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롭고 능력 있는 그 말씀을 듣고는 예수님께서 자기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소리를 지르는 거다. 지금도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 자기를 고치려고 하지 않고 ‘목사가 내 말 한다’ 하는 자가 있다. 그 성격 그 성질이 속에 들어 있어서 자기 말 하는 것으로 들리면 귀신들린 짓이 나오게 된다. 든 대로 나온다.


예수님을 믿어도 내 속에 들어있는 거듭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이것은 다 더러운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사렛 예수님은 사람을 예수님 당신처럼 하나님처럼 온전케 하는 분이시다.


더러운 귀신이 ‘나사렛 예수여’ 한다. 사실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사람이 보기에는 작은 동네인데, 예수님이 거기서 자라면서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기에 알맞은 동네다. 사람들은 크게 여기지 않아도 사람을 거룩하게 교육시킬 수 있는 그 곳이다.


부모가 자녀를 기를 때도 교훈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하는데 모두들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하면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뭐든지 잘하는 일등으로 만들까?’ 한다. 그러니 이건 예수님의 자람성과는 다르다. 교인들이 자녀를 교육하는 그 성격 성질이 세상성으로 그대로 들어 있어서 그렇다. 부모들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거룩하게 자랄 수 있는 고상한 교육의 열정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식으로 아무리 자식을 키워봐야 결국은 자고새가 남의 알을 품고 있다가 그 새끼가 자라면 다 도망가는 것과 같이 된다. 그게 뭐냐? 그것을 아는 새들은 거기 가서 알을 낳고 저는 저대로 돌아다닌다. 우리들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사람이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처럼 보이기 쉬운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거룩한 자와 인격적 관계가 없이 살 때 그렇게 보인다. 즉 거룩한 자와 인격적 관계가 없이 사는 사람은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처럼 보이기 쉽다.


하나님의 본질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깨달음을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게 정상인데 안 그러겠다는 사람은 뭐가 들린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의 거룩한 말씀을 모르는 서기관들 입장에서는 그게 그렇게 안 보이는 거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받으면 어떻게 되고, 안 받으면 어떻게 될까? 안 받는다면 그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다하고 선악과를 먹고 있는 사람이요, 그러면 저주받고 타락된 세상의 사람이니 불에 타고 썩어질 것으로 소원 목적하게 되고, 그렇게 살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더럽다는 것은 선악과를 먹고 나온 사망적인 성품을, 사망적인 생각을, 사망적인 마음을 하나님의 거룩한 생수의 말씀에 씻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이 타고 난 성격 성질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씻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허락으로 귀신이 들어가게 되니 이렇게 되면 더러운 소리가 나오게 된다.


평소에 서기관들이 성경 율법을 안 가르쳤겠느냐? 다 안다. 그런데 못 고쳤다. 성경 구절적으로는 잘 아는데 자기 속에 들어있는 그 성격 성질 마음이 안 고쳐지고 더러운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만나면 자기 속에서 들어있는 더러운 것이 나오게 된다. 더러운 생각, 더러운 마음, 더러운 행동이 나온다. 그렇게 되면 ‘저게 더러운 귀신이 들린 게 아닌가’ 하고 보여진다.


왜 자기를 남이 볼 때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처럼 보이게 할까? 모든 사람이 자기를 다른 사람 앞에 똑똑하고 잘난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는 마음이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도 내 속이 고쳐지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람들 눈에 귀신들린 자처럼 언행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진리의 교훈을 받을 때 귀신들린 그것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우리가 예수를 믿다보면 그런 경험을 많이 하는데,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말씀이 나한테 하는구나. 누가 고자질 했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느냐? 이렇게 되면 ‘누가 그랬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교인들 집집마다 훑는다. 그리고 의심이 가는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곧바로 물을 수는 없고 슬쩍 떠보려고 한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전화를 해도 안 받는다. 그래서 다른 사람 집에 전화를 해서 ‘아, 그 집사님 어디 갔느냐?’ 하니까 ‘지금 누구 집에 있다’고 하는데 그 집사님이 가 있다고 하는 집이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의 집이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속에 그 집에 모여서 자기 말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말씀이치를 가지고 세상만사를 보면 일반이치도 그냥 나온다. 예수 믿는 사람이 비진리의 지식을 듣고 배워서 그것을 자기의 기준지식으로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비뚤어져 있다. 신앙이라고 갖는 그 지식이 전부 비뚤어져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절대 정확한 하나님의 진리지식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기준지식이 비뚤어진 것인 줄을 모른다. 그 사람은 비뚤어진 그 지식에 의해서 자기의 성격도 성질도 마음도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비뚤어져 있으면서도 비뚤어진 줄을 모른다. 쉽게 말해서 산수의 공식을 모르면 그 사람은 다 틀리는 것과 같다. 공식적인 지식을 가져야 풀리는 거다.


일반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도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많이 당하는데, 그럴 때 하나님을 기준을 두고 하나님의 본질을 두고 영의 눈으로 사람을 보지 못하고 영의 생각으로 생각지 못하는 사람은 자꾸 환경이나 그 사건 자체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해결이 안 된다. 이러면 자기 고통스럽고 원망되는 건 전부는 남에게 탓이 들어간다. 그러니 어떻게 풀리겠느냐? 안 풀린다.


만사를 영적으로가 아닌 일반적으로 보게 되면 모든 게 자기 눈에 비뚤어져 보이고 다 틀어져 보인다. 이건 자기의 보는 지식의 기준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이다. 더러운 귀신이 들어가면 더러운 소리가 나온다.


나사렛 예수여: 역사적으로 예수님께서 어디에 사셨다는 걸 잘 안다. 신앙이 없어도 하도 들어놓으면 역사적으로는 알게 된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여’ 라고 하는 것은 존경스러워서 부르는 게 아니라 무시하는 소리로 예수님을 부르는 거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고 높이 보는 배경이 없다고 즉, 사회적이거나 종교적인 지위와 영광이 없다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가 큰소리를 친다면 이는 더러운 귀신들린 자와 무엇이 다를까?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유대종교의 교권도 없고 로마 강대국의 세권도 없다. 그러나 마귀를 이겼고 죄를 사망을 이겼고 죽음을 이겼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 분을 세상이 또는 종교가 요구하는 잣대로 삼아 무시한다면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누구 보기에? 성령의 사람들이 보기에, 은혜의 사람들이 보기에, 사람을 바로 아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렇다.


예수 믿는 자가 예수자랑,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자랑하면 자기가 올라갈 텐데 그런데 세상적인 이해타산을 소원 목적적으로 말하고 있으면 귀신들린 게 아닌가? 왜? 점쟁이도 그런 소리를 하고, 안 믿는 사람도 그런 소리를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들과 똑같은 소리를 하니 그렇다.


예수 믿으면 사람이 바껴져야지. 망할 사람이 망하지 않을 사람으로, 땅의 사람이 하늘의 사람으로, 저질적인 사람이 고차원적인 사람으로 그렇게 돼야지, 예수 믿으면 사람이 그렇게 바꾸어지고 만들어져야지 믿는다고 하면서 일반적인 소원 목적을 그대로 갖고 있고 그대로 말하고 있으면 더러운 귀신이 들린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더러운 귀신이 들려서 교회 나와서 주일 지킨다고 하는 것이다.


더러운 귀신이 들린 사람의 입으로 통해서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한다. 그러면 ‘우리’가 누구냐? 저 혼자인데 ‘우리를’ 하는 걸 보니까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을 싸잡아서 ‘우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기관들과 율법사들도 이 귀신들린 자와 그 차원이 같구나.


사실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그 정신을 멸하러 오신 것이다. 고치러 왔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러 오셨다. 왜냐하면 그대로 있으면 신령천국에 못 들어가는 성질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천국에 들어갈 지식의 사람으로 천국의 성품의 사람으로 고치자. 예수님은 고쳐주러 왔다. 자기의 저질적 차원을 고차원의 사람으로, 꼬리 같은 사람을 머리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러 오신 것이다.


그런데 이 예수를 어떻게 여기느냐? 발가락의 때만도 못하게 여기느냐? 그래, 그렇게 살아봐라. 네가 얼마나 훌륭해지겠느냐?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가 행복하게 잘 살 것 같으냐? 사건 환경을 누가 갖다 주는 것이냐?


예수님은 사람을 고치는 분이신데, 귀신을 떠나게 하는 분이신데 이 분을 안 믿고 누굴 믿을 것이냐? 이 분의 교훈을 안 받고 어떤 교훈을 받을 것이냐? 안 믿는 사람들의 높은 관직? 무슨 기술? 주님이 허락하면 다 뱅뱅 돌고 만다.


그런 사람을 따라다니고 그런 사람을 소원 목적하고 그러면 자기가 행복해질 것 같으냐? 변질되는 것을 목적하고 사는 사람은 얼마 안 가서 모든 것이 다 변질된다. 그러면 또 다른 변질될 것을 찾는다. 그래서 가정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사람이 바로 안 된 것이다. 안 고쳐진 것이다.


어떤 사건 환경이 오더라도 그것을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해야지 미련한 자기가 그 사건 환경을 어떻게 처리하고 갈 것이냐? 자기 죽고 남 죽이는 사람이 될 뿐이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뭐 하러 오셨는지? 자기가 부모공경을 하니까 이웃사람들이 자기를 올리느냐, 몹쓸 자식이라고 하느냐? 말하자면 자기 부모님이 고생하는 것을 안타까이 말을 하면 그 말을 듣는 이웃사람이 그 자식을 어떻게 생각할까? ‘심성이 아름답구나’ 한다. 이러면 자기가 올라간다. 신앙을 갖는 것도 이치적으로 성경을 깨닫고 이치가 있는 말씀을 들어라. 그래야 네가 차원 높은 이치의 사람이 된다. 안 그러면 세상이라고 하는 짐승의 발에 밟힌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이 15년 이상 진행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고 진리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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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0 시편 죄 사함의 기쁨을 얻는 길 시51:1-9  이한규 목사  2015-05-11 634
12099 누가복음 부활의 증인이 되십시오 눅24:44-53  이한규 목사  2015-05-11 822
12098 레위기 효의 무게 레19:1-3  강종수 목사  2015-05-10 431
12097 마가복음 제자에게 필요한 3대 마음 막14:43-52  이한규 목사  2015-05-10 661
12096 시편 감사를 체질화시키십시오 시50:22-23  이한규 목사  2015-05-10 677
12095 시편 실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길 시50:16-23  이한규 목사  2015-05-10 520
12094 시편 감사를 원하시는 하나님 시50:1-15  이한규 목사  2015-05-10 659
12093 누가복음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 눅19:41-48  이한규 목사  2015-05-10 830
12092 요한일서 사랑의 선포와 증언 요일5:1-6  강승호 목사  2015-05-09 372
12091 로마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간 인격 롬11:36  김부겸 목사  2015-05-08 479
12090 전도서 세한(歲寒)의 때 전3:1-8  김부겸 목사  2015-05-08 463
12089 요한복음 아벨의 승리, <예수> 요1:29  김부겸 목사  2015-05-08 335
12088 요한복음 당신은 메시아입니다 요15:14-15  김부겸 목사  2015-05-08 231
12087 고린도전 하나님을 섬기는 바보 고전1:18-21  김부겸 목사  2015-05-08 597
12086 요한계시 끝은 없다 계22:13  김부겸 목사  2015-05-08 900
12085 창세기 농심(農心)의 영성 창2:8-14  김부겸 목사  2015-05-08 275
12084 신명기 성인(聖人)의 길, 소인(小人)의 길 신11:26-28  김부겸 목사  2015-05-08 401
12083 에배소서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라 엡6:1-3  한태완 목사  2015-05-08 1385
12082 요한일서 사랑을 전하는 것 [1] 요일4:7-21  강승호 목사  2015-05-06 610
12081 시편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쉬자 시68:19  한태완 목사  2015-05-06 1393
12080 여호수아 마음을 함께 나누자 수22:1-9  최장환 목사  2015-05-06 547
12079 예레미야 마음을 비우기 렘29:1-14  최장환 목사  2015-05-06 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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